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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롤즈가 1963년에 집필한 것으로, 대단히 흥미로운 질문 두 가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Q1) 헌법에서는 여러가지 자유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이 자유는 어떤 이유로 보장되고 있는 것이며, 이 자유를 제한하기 위해서는 어떤 이유들이 필요한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답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답1: 최대 행복, 즉 최대 효용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즉, 그런 헌법에서 보장한 자유들은 국민들의 효용의 합이 최대로 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이다. 따라서 당연히도, 그런 자유들이 언제 어떤 정도로 제한할 수 있는가 역시 그런 제한이 효용의 합을 최대로 만들어주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예를 들어 표현의 자유를 살펴보면, 어떤 특정 표현으로 인해 생기는 부작용과 불쾌감이, 좋은 작용과 쾌감을 능가하는 경우에 제한이 가능하다.

 

위의 답안은 최대 효용의 답안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헌법재판소는 명시적으로 이 답안을 분명히 따르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판단 부분에 가서는 이런 식으로 논증을 처리해버리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답안은 매우 허약합니다. 그것은 자유를 오직 효용의 합이라는 어떤 외부적 사태를 위한 수단으로서만 다루고 그 자유를 향유하는 개인들이 서로 구별되는 목적적 존재라는 점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자유를 보장하기에 튼튼한 토대가 되지 못합니다.

 

답2: 정의의 요청에 의해서다. 정의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시민들의 지위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지위에 있는 시민들이 합리적인 추론에 의해, 자발적으로(willingly) 그리고 알면서, 그 제도를 받아들이고 그렇게 함에 있어 평등한 위험을 감수하였다면, 그 제도는 공정하거나 적어도 불공정하지는 않다. 그런데 이러한 원칙에 따라 자유에 관한 제도를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오로지 (i) 모든 사람들이 최고차적인 이해관심을 달성할 수 있게 해주는 공통된 기반을 제공해주는 공공질서의 유지에 방해가 될 경우에만 (ii) 그리고 그 방해는 모두에게 수용가능한 증거 및 추론방식에 의해 그 존재가 확립될 경우에만, 그 때에만 구성원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여기서 공공 질서를 유지할 국가의 권한은 파생적인 것이 된다. 공공 질서 자체가 어떤 독자적인 존립 근거나 그 자체의 생명령을 가진 괴물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지위와 그들의 삶을 위한 것으로, 국가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이해관심을 추구하고 자신이 이해하는 바에 따른 책무를 완수하기 위해 필수적인 조건을 무사공평하게 뒷받침할 국가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보유해야만 하는 권한이다.)

 

이제 이러한 헌정적 자유의 근거를 실제 사안에 적용해 보자.

 

1) "이 종교 안믿으면 지옥 가는 것이 확실하니, 이 종교 믿게 국가가 강제하자"는 주장은 왜 헌정적 자유를 제한하는 근거가 되지 못하는가?

 

 "타인의 영혼을 구원할" 종교적 책무를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건 간에 이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시민들의 입장에서 모두가 수용하는 이해관심이 될 수 없으므로, 배교를 처벌하는 제도는 인정될 수 없다. (반면에 공리주의 입장에서는 그 종교를 국가가 강제하여 믿게 하는 것이 효용을 진작시켜주느냐 또는 감소시키느냐 하는 우연적인 계산의 결과에 기대어 자유를 보장하거나 박탈할 것이다)

 

아퀴나스를 보자. 그는 "생명을 유지시키는 돈을 사기치는 것보다 영혼의 생명인 신앙을 타락시키는 것이 훨씬 중대한 잘못이라는 근거에서, 이단(heretics)에 대한 사형을 받아들였다." "사기범과 다른 범죄자를 사형에 처하는 것이 정당화된다면, 이단은 더 한층 강력한 이유로 그와 같이 다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영혼의 생명인 신앙을 타락시켜서는 안된다는 이해관심은 그러한 신앙을 현재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이해관심일 뿐,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공통된 이해관심이라 할 수 없다.

 

2) 이번엔 루소의 주장을 살펴봅시다.

 

"종교인들은 종교를 믿지 않는 자들을 지옥에 갈 저주받을 자들이라고 생각하므로, 끊임없이 다른 이들의 종교적 자유를 박탈하고 침해하려고 들 것이다. 따라서 종교인들은 모두 처벌해야 한다."

 

"그러나 루소가 추측한, 독단적 신념의 결과는 경험으로 입증된 것이 아니었다. (are not borne out by experience) 선험적인 심리적 논변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건 간에, 관용은 정의 개념에 부합하기 위해서는(accord) 안전히 확립된 결과 이외의 어떤 것에 기초하여 포기되어서는 아니된다. "

 

3) 마지막으로, 법률가들에게 첨예한 관심사인 "형량"(balancing)에 관하여 롤즈의 이 논문이 주는 시사점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형량이라는 것은 아무런 관점도 설정하지 않은 채 단순히 판사의 마음 속에서 비중을 재는 저울에 양 쪽의 가치를 올려 놓고 끌리는 대로 판단하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마지막에 비중 가리기라는 직관적 판단이 작용한다 할지라도 그 전에 이미 판단이 이루어지는 맥락, 틀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시민들이 합리적인 추론에 의해, 자발적으로(willingly) 그리고 알면서, 그 제도를 받아들이고 그렇게 함에 있어 평등한 위험을 감수하였다면, 그 제도는 공정하거나 적어도 불공정하지는 않다"는 원칙은 여기에 일정한 시사를 줍니다. 대표적인 것이 표현의 자유와 인격권 사이의 형량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연예인의 사생활을 어디까지 보호하는 것이 허용되는가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관점도 설정하지 않은 채, 단순히 연예인은 공인이니까 연인관계를 다 떠벌려도 된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거나, 아니면 인격권이 최우선이니 무조건 다 막아야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반대되는 결론을 견지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설득력도 가지지 못합니다. 최근에 유럽인권재판소와 독일연방헌법재판소에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캐롤라인 공주 사건은 표현의 자유와 인격권 사이의 균형을 잡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롤즈의 공식을 사용하면 어느 정도 이 문제에 있어서 자의성을 돌파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분명히 평가의 분명한 '관점'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수 스타의 인격권 vs 다수 사람들의 알 권리 및 표현의 자유 이런 식으로 완전히 별개의 인물들이 혜택과 부담을 각각 감수하고 귀속시키는 판단 체계로는 자의적인 답 밖에는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두번째 질문을 살펴보겠습니다.

 

Q2) 헌정적 자유를 보장하는 사회는, 헌정적 자유 질서를 부인하는 종파나 정치적 파당을 관용해야 하는가?

 

롤즈는 이 질문을 두 개로 분리합니다.

먼저, 첫번재 작은 질문.

i) 불관용적인 종파는 그들이 관용되지 않을 때 불평할 명분이 있는가?

  롤즈의 답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다른 이들을 불관용하기로 마음 먹었다면 동일한 원칙이 그들에게도 적용되는 건 공정한 정의 원칙상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평할 아무런 근거도 가지지 못합니다.

 

ii)  관용적인 종파가 불관용적인 종파를 관용하지 않을 권리가 있느냐.

 i)의 질문에 대해 "없다"고 답하면 손쉽게 ii)의 질문에도 "있다"고 답하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주장하는 사회주의자들은 모조리 처벌되어야 하며 결코 관용되어서는 안된다고 말입니다. 또는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이 여당이 되면 기독교를 국교로 해서 이교를 처벌하는 법을 통과시키겠다고 할 경우 말입니다. 이 정도에 이르지 않더라도, 예를 들어 동성애를 처벌하는 법을 만들고자 하는 기독교인들 역시 불관용한 종파로서 그들의 종교를 불관용당하더라도 아무런 불평할 명분이 없는 자들입니다.

얼핏 보면 "있다"고 그냥 답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커다란 오류입니다.

 

  우선, 관용적인 종파, 즉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의 입장에서 헌정적 질서를 구성하고 운용하는 이들은, 결코 불관용적인 종파가 재가하거나 인정한 원칙에 따라 움직여서는 안됩니다. 즉, 불관용적인 종파가 불관용의 원칙을 설파해서 그들에게 불평할 명분이 없다고 해서, 그들의 재가(authorization)에 따라 그들을 대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음으로, 정의 개념을 자유로운 사회의 기초로 채택한다는 것은, 사회 전반에 걸쳐 정의를 최대한 확립할 것을 요청합니다. 이것은 헌정적 자유를 가지고 있는 평등한 시민권의 근본적인 위치가 자유 자체를 위험에 처하게 하지 않는 한 가능한 최대로 유지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즉, 자유로운 사회의 시민들은, 그렇게 할 명백한 필수성이 없는데도 정의감을 가지지 못하는 존재로 여겨져서는 안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불관용적인 종파에 속한 시민들은 자유로운 설득과 토론을 통해 그들의 불관용적이고 합당하지 못한 신념을 변경할 수 있는 존재로 여겨져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관용적인 종파가 진심으로 그리고 단순히 선험적인 심리학 법칙의 독단이나 위험에의 우려가 아니라, 과학적인 추론방법에 따른 이유를 가지고 그들 자신의 안전과 자유 제도의 안전이 위험에 처했다고 생각할 때에만 오직 그 때에만 불관용적인 집단을 관용하지 아니할 권리를 가지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헌법을 배우는 많은 학생들이 "방어적 민주주의" 개념을 익히면서 이 부분을 매우 허투루 생각합니다. 독일에서 발명된 이 개념은 독일에서는 매우 신중하고 제한적인 요건에서만 적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귤이 바다를 건너 탱자가 되듯이, 한국에서는 비자유주의적이고 반헌정적인 '국가보안법'을 정당화되는 논리로 기이하게 확장되어 사용됩니다.

 

하나의 개념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 개념이 내포하고 있는 질서를 결코 정당화해주지 않습니다.

불관용적인 종파가 명백하고 분명한 위험을 현실화시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철저히 제거해야 할 존재로만 바라볼 뿐,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이라는 근본적 지위를 함께 공유하고 있는 존재로 보지 않는 것은, 정의의 개념에 의해 지지될 수 없는, 억압 충동의 손쉬운 포장에 불과한 것입니다.

 

2012. 6. 30. 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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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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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손오공
    2012.07.01 23:07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질문] "시민들이 합리적인 추론에 의해, 자발적으로(willingly) 그리고 알면서, 그 제도를 받아들이고 그렇게 함에 있어 평등한 위험을 감수하였다면, 그 제도는 공정하거나 적어도 불공정하지는 않다"는 원칙, or "(i) 모든 사람들이 최고차적인 이해관심을 달성할 수 있게 해주는 공통된 기반을 제공해주는 공공질서의 유지에 방해가 될 경우에만 (ii) 그리고 그 방해는 모두에게 수용가능한 증거 및 추론방식에 의해 그 존재가 확립될 경우에만, 그 때에만 구성원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원칙을 "연예인의 사생활을 어디까지 보호하는 것이 허용되는가"의 문제에 적용하면 구체적으로 어떤 논증을 거쳐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될까요? 이 부분이 좀 어렵습니다.ㅜ
  2. 사과나무
    2012.07.16 09:24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시사적으로도 매우 유의미한 주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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