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거짓말을 하지 마라”는 격률을 절대적으로 따라야 한다고 칸트가 말한 것에 시시콜콜하게 매달린다. 그러면서 상대방이 착각하게 만들더라도 거짓말을 명시적으로 하지 않았다면 도덕적으로 덜 문제가 된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한 가지 방식으로 "표현"된 규칙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것은 칸트 도덕철학의 '네 행동의 격률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하라"는 정수(essence)와는 본질적인 관련이 없다.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격률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면 지금 총으로 아이를 죽이려고 하는 흉악한 범죄자를 죽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악한이 무고한 사람을 공격할 때 최선을 다해 악한을 격퇴하라.”는 원칙과 외견상 충돌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흉악한 범죄자나 악한을 폭력으로 제지하는 행동을 도덕적 잘못으로 여기지 않는다. 더 정교한 원칙을 따른 것으로 이해한다. 이 경우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정당방위 상황은 예외로 한다.”는 새로운 원칙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정당방위 상황이 아니라면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이처럼 보다 정교한 원칙을 따르는 경우에도 보편적인 도덕 원칙을 지킨다고 말할 수 있다. 예외 없이 오로지 한 가지 사항만을 담도록 표현한 원칙만이 올바르다는 견해는 엉터리이다.

 

  사람들이 직면하는 상황을 좀 더 세분화해서 한 문장 안에 형용사와 조건절을 써서 함께 표현하느냐, 아니면 원칙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예외를 다른 문장으로 표현한 뒤 결합시키느냐는 단순히 표현 방식의 문제이다. 비극적인 상황이라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데,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따르는 것은 어리석다. 나치의 비밀경찰이 찾고 있는 유대인을 구하기 위해서 거짓말하는 것이 최선이라면, 거짓말을 해야 한다. 칸트를 진지하게 공부하는 현대 철학자라면 이런 문제에 머리를 싸매지 않을 것이다.

 

2012. 7. 28. 이한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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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도운영
    2012.07.28 23:3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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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트에게 있어 보편 준칙으로서의 형식을 갖는 정언명령은 물론 각각의 구체적인 현실적 상황에서 적용될 하위 규칙이나 조건들과 관련을 맺게 됩니다. 그러한 구체적이고 상세한 조목들, 즉 현실적인 맥락을 고려하여 다소의 조건들을 부가하게 되는 하위 규범들을 어떻게 확립할 것인지의 문제는 경험적인 차원의 연구를 통해 별도로 보충되어야 할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논의들은 도덕철학의 몫은 아닙니다. 도덕규칙의 세세한 강령이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강령을 근거 짓는 최종적인 원리를 탐구하는 것이 도덕철학의 이념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정언명령은 그것이 경험적 차원에서 도덕적 기능을 수행하는 국면에서 그 때 그 때 문제되는 상황에 적합한 형식으로 조금씩 변용될 수 있으며, 그러면서도 당해 사안과 관련되는, 결코 훼손되어서는 안 되는 윤리적 가치의 정당성을 표현하게 됩니다.

    따라서 샌델이 주장하듯이 칸트가 황당할 정도로 경직된 격률을 설정하는 바람에 자기모순에 빠진다는 식의 문제제기는 적어도 칸트를 읽어본 사람에게는 치졸한 억지 쓰기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하는데, 그가 철학과 교수라는 것을 고려하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2. 눈너머
    2012.07.30 17:2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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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샌들의 엉뚱하고 엉터리 고민 덕에 거짓말하지 말라는 '거짓말'에서 벗어나는 법에 대해 다시 한번 배우게 되었네요.
    샌들의 거짓말이 있기에 그것을 꿰뚫어보는 방법을 고민하고, 배우게 되네요.
    반면교사이긴 하겠지만 덕분에 거짓말 하지 말라, 싸우지 마라라고 늘상 이야기하게 되는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싸우지 마라. 약속을 지켜라, 거짓말하지 마라>를 참 많이 하는 입장에 처한 사람으로서 어떤 싸움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어떤 약속을 지켜야 하는지, 어떤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세심하게 펼쳐진 논의와 이야기가 많아졌음 합니다.

    오늘도 다시 한번 배웠네요.
  3. 1234
    2013.02.16 15:4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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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을 죽이지 마라. 그러나 정당방위상황은 예외로 한다.


    그렇다면 정당방위의 범위는? 자신을 지키는 것? 또는 자기 자식과 배우자까지 포함되는가? 또 그 위협의 정도는 어느 정도까지 정당방위의 범위에 들어가는가.....


    정당방위의 범위를 명확하게 언어적 표현으로 정의하는 것 자체가 힘듭니다. 그리고 과연 어느 누가 언어적 표현을 통해 정당방위의 범위를 설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는 겁니까. 일부 판사 몇명이? 국회의원들이? 그렇다면 그 의사결정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도덕적기준 설정에 참여할 권리가 없는 겁니까.


    물론 도덕적 절대론 자체가 죄다 틀렸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도덕적 절대론이 결코 완전무결한 이론인 것도 아니죠. 샌들은 간단한 사례를 통해 그런 점을 지적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 이한
      2013.02.16 21:5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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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하신 내용은, 간단한 규칙 형태로 표현된 도덕 명제가 구체적인 사안들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해석'을 필요로 한다는 너무나 당연한이야기로, 이 점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으며, 샌델의 비판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샌델은 칸트의 '거짓말하지 마라'는 규칙 내에서 암묵적 거짓말과 명시적 거짓말의 가치 차이가 다르다는 이야기를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많은 분량을 소모해서 하고 있을 뿐입니다. 댓글이 무엇을 비판하고 무엇을 주장하는지 자체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4. 2015.08.13 17:5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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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경찰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과 유대인을 살리는 것 둘 중에서 무엇이 우선하는 의무인지 칸트 윤리 안에서 어떻게 알아낼 수가 있나요? 고등학교 윤리와사상 교과서에서도 이러한 난점이 칸트 윤리의 한계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 2015.08.13 18:0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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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짓말을 하는 것=>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수정)
    • 이한
      2015.08.14 00:1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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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트 윤리를 칸트가 자신의 이론을 구체적 사안에 적용한 결론들의 총체라고 보자면 그것은 분명 그러한 한계를 갖습니다. 그러나 칸트 윤리를 칸트의 이론을 최선으로 읽고 구성하여 발전시킨 인간 존엄성의 윤리로 보자면, 그 문제는 간단하게 풀립니다.

      1. 인간은 동등한 존엄성을 갖는다.
      2. 따라서 인간은 평등하게 자유로운 존재다. 즉 서로 자유로운 자로서 평등한 관계를 맺는다. 어떠한 사람도 서로 평등하게 자유로운 이러한 지위를 구현하는 보편적 격률에 어긋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
      3. 평등하게 자유로운 존재들 사이의 관계를 일그러뜨리려는 자에 대해서는, 그 관계가 일그러지지 않았을 때에는 허용되지 아니하는 수단을 써서 대응함으로써 관계 훼손을 최대한 막는 것이 허용된다. 그것은 보편적 격률에 어긋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살인자에 대하여 정당방위를 하는 것은 허용된다.
      4. 무고한 자를 살해하려고 하는 자는 평등하게 자유로운 존재들 사이의 관계를 일그러뜨리는 자다.
      5. 따라서 무고한 자를 구하기 위해, 살해하려고 하는 자의 신체를 훼손하는 것은 정당화된다.
      6. 무고한 자를 해하려는 자가 원하는 정보를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은 신체를 훼손하는 것보다 오히려 약한 수단이다.
      7. 따라서 5가 정당화된다면 6도 정당화된다.
      8. 그런데 5를 인정하지 않으면 무고한 자를 살해하는 자는 그 이외의 자에 비해 특권적 지위에 서게 된다.
      9. 따라서 1과 2에 어긋나지 않으려면 5는 정당화될 수 밖에 없다.
      10. 따라서 6은 정당화된다.
      11. 따라서 비밀경찰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정당화된다.

      비단 이 문제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학문에서 발전이라는 것을 하려면, 옛 사상가가 말한 것을 주의깊게 읽고 그가 이야기했던 것이 어떻게 하면 정합적으로 최선으로 구성될 수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 카미노
      2015.08.14 18:29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꼼꼼히 읽게 됩니다. 질문있습니다.
      칸트윤리의 난점이 의무와 의무의 충돌이라고 알고있는데, 비밀경찰에게 거짓말하는 것은 정당화된다는 결론을 이끌어내셔서요. 왁자지껄님도 거짓말을 하지않는 것과 유태인을 살리는 것의 충돌이 한계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이한님의 논증은 칸트가 사형제를 옹호하고 살인에는 사형만이 응보적 처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에는 딱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만... 제 말씀이 이해되시는지요.


  5. 이한
    2015.08.14 22:3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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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에도 썼듯이 '거짓말 하지 마라'는 의무는 '어떠한 여건에서도 거짓말 하지 마라'로 일부러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의무는 인간 존엄성에 따라 사람들이 서로 대우하기 위하여 도출된 격률이 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격률은 언제나 잠정적인 형태로 규정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사안을 격률에 다 담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안의 최종 해결은 잠정적인 격률들에 의해 명해지는 잠정적 의무들이 일견(prima facie) 충돌하는 것처럼 보일 때, 그것들을 어떻게 정합성 있게 구체화하여, 인간 존엄을 지키는 확정적 의무를 도출하는가입니다. 이것은 구체적인 사안에서 어떤 의무를 우선할 때 오히려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가 왜곡되는지를 검사함으로써 알 수 있게 됩니다.

    거짓말 하지 마라. 무고한 자를 살해하는 일을 돕지 마라.
    라는 두 잠정적 격률은 유태인을 게슈타포가 찾는 구체적 사안에서는 거짓말을 하고 무고한 자를 구하라는 확정적 의무를 도출하게 됩니다.

    처벌은 긴급성과 필수성, 구제되는 목숨의 특정성의 측면에서 정당 방위와 성격이 다르므로, 사형제가 정의로운 처벌인지는 별도의 문제이며, 윗 댓글의 논증과는 무관합니다.

    사형제도에 대해서도 칸트는 자신의 이론을 잘못 적용하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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