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콘서트 코너 <어르신>에는 할아버지가 "~하면 뭐하겠노, 조오타고 소고기 사묵게찌~" 를 반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할아버지가 그 코너에서 가장 나이 많은 어른으로 나오는데, 한국사회에서 인생의 전형적인 경험을 하면서 나이를 먹어 깨달은 것이 이 대사에 녹아 있습니다.

 

"~하면 머하겠노(A), 소고기 사묵게찌(B)"의 유머에는 객관적인 구조가 있습니다. (A)부분에서는 항상 무엇인가를 성취, 통과, 쌓는 활동이 나옵니다. (대기업에 취직, 학위 취득, 돈을 많이 번다 등등) 수단이 되는 활동입니다. 반면에 후렴구로 반복되는 소고기를 먹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인 활동입니다.

 

따라서 이 개그에서 (A)부분에 그 자체가 목적인 활동을 넣으면 개그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엄청나게 감동적인 영화를 보면 머하겠노, 조오타고 소고기 사묵겠지"나 "친구하고 수다 재밌게 떨면 머하겠노, 조오타고 소고기 사묵게찌"는 개그요소가 없습니다.

 

편의상 (A)활동을 스톡(stock), (B)활동을 플로우(flow)라고 합니다. <어르신>에서 나오는 그 유행어는, 인생의 가장 본질적인 순간은 플로우 활동에서 나옴에도, 현재 한국사회에서 플로우는 늘 미뤄지고 빈약한 형태로만 나오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저는 이 스톡(stock)과 플로우(flow)의 대립 문제를 <이것이 공부다> 후기에서 설명하면서, 문제 해결로서의 공부는 그 둘 사이의 대립을 교묘하게 피해가는 한 방편이 된다고 적었습니다.

 

수준 높은 플로우 활동을 하려면, 그 자체에 대한 상당한 시간과 정력 투자가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살사를 즐기려면 6-8개월 정도는 살사를 꾸준히 즐겨야 하죠. 시험 합격하고 갑자기 살사 파티를 갈 수는 없습니다.

 

어르신도 매주 나와서 앞부분의 (A)활동을 끝없이 언급할 거리가 있다는 사실에서 보여주듯이, 세상은 넓고 스톡 목표 설정은 한계가 없습니다. 그래서 스톡 활동에 치중하게 되면, 플로우 활동은 늘 미뤄질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회의 삶에서 스톡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플로우를 어떤 스톡 이후에야 겨우 주어지는 보상으로만 설정할 때, 플로우 활동은 소고기 먹기와 같이 일회성으로 끝나는 소비적 활동으로 빈약하게 붕괴됩니다. <어르신>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인생의 풍부함이 스톡에 의해서만 파악될 경우, 한 사람의 인생은 그 사람이 성취한 것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어떤 미래에서 온 마법을 쓰는 사람이 그 사람이 결국 외부적으로 성취하게 될 성과들을 모조리 구현된 형태로 가져온다면, 그 사람의 남은 삶은 이미 다 산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생에서 성취의 목록 이외에 남겨진 부분이 보다 충만한 의미를 획득하려면, 플로우 활동 자체가 복합적이고 도전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즉, 사회구성원들은 복합적이고 도전적인 플로우 활동을 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성장'과는 다소 다른 사회의 '발전'에 관한 이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발전이란,

 

(1) 사람들의 삶을 보다 편리하고 쾌락적으로 만들어주는 생산적 변화와도 양립가능하면서도

(2) 그러한 변화에 실질적으로 기여하지 않는 경쟁적인 스톡 활동은 제도적으로 줄이고 (예를 들어 안정적인 직장의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어 본질상 소수만이 취득하게 되는 공무원 지위를 향한 거대한 경쟁 같은 것이나 학벌경쟁을 줄임)

(3) 플로우 활동에 우선적인 시간을 할애할 수 있는 선택지를 주는 (야근이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 되는)

(4) 플로우 활동의 물질적 구조가 사람들에게 친화적인 (비싼 비용을 들여야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계별로 누구나 올라탈 수 있는)

 

그러한 기회의 구조를 더 많이 제공하여 주는 사회가 그 이전의 사회보다 '더 발전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실질적 자기 결정의 확대", "복합적인 활동의 기회 확대", 그리고 "생산성"이라는 척도의 축들입니다. 

Posted by 시민교육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1. ㅁㅁㅁ
    2012.12.19 22:03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사회 구성원들이 "도전과 성취"라는 플로우활동을 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우리 사회가 부여해야 사회가 발전한다는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자율성을 부여하여야 한다는 점도 맞습니다. 그게 사회 개개인의 능력을 120프로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최선의 사회구조라고 생각됩니다.


    우리의 사회와는 너무 괴리감이 드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게다가 오늘 선출되는 우리의 새로운 대통령도 그렇게 기대가 되진 않습니다.


BLOG main image
대안민주주의와 사회윤리학 담론 형성을 위해 노력하는 '시민교육센터-배움의 연대망’ 홈페이지 입니다. 이곳에서는 열린 강의 형태의 시민교육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트위터 아이디: civiledulee, 이메일: civiledulee@gmail.com (이한) by 시민교육
전체 글 보기 (931)
공지사항 (20)
강의자료 (88)
학습자료 (335)
기고 (481)
  • 게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