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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캔론의 A Theory of Freedom of Expression의 요약번역입니다. 이 글은 The Difficulty of Tolerance에도 실려 있으나 이 요약번역본은 Philosophy & Public Affairs, Vol. 1., No. 2 (Winter, 1972), pp.204-226.의 쪽수를 기준으로 하였습니다.

 

보통 "표현의 자유의 근거가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정치철학적인 논증이 발달하지 않은 한국사회에서는 특히 이것을 단지 아주 일차원적인 "이익 저울달기"의 문제로 환원하는 논변만이 주류를 이룹니다. 다시 말해 '장기적인 이익'이 높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논변 들 중 일부는 상당히 핵심적이고 중요하지만, 그 체계적이고 정합적인 구조를 거두절미하고 '이익'이라는 용어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오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도한다 함은, 사실상 '장기적인 이익'을 '공동체 전체의 이익'으로 바꿔 생각하게 되고, '공동체 전체의 이익'은 다수의 장기적인 이익으로 다시 바꿔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결국에는 주먹구구 공리주의 판단으로 붕괴되고, 최악의 경우에는 그냥 '공감과 반감의 원리'로 붕괴된다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표현의 자유에 대해 토론하는 구성원들의 의식 수준은 이렇게 됩니다.

"이 구체적인 표현을 인정해서 얻는 공동체의 이익과 이 구체적인 표현을 불허해서 얻는 공동체의 이익 중 어느 것이 큰가? 내 마음은 어느 쪽으로 기우는가? 이 쪽인가 저 쪽이나?"

 

애초에 표현의 자유의 경계나 근거 자체가 이런 단순한 이익 형량에 의존하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이 질문에서 표현 자유 친화적이 쪽으로 답을 낼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논변 내에서는 순환 논증이 됩니다.

 

스캔론은 여기서, 계약론자로서 솜씨를 과감히 발휘하면서, 이런 오도하는 이익 형량의 언어에 휘둘리지 않는 표현의 자유 이론을 제시합니다.

 

그는 먼저, 위와 같은 공감과 반감의 원리에 가깝거나 주먹구구 공리주의로 붕괴될 위험이 있는 이익 형량 논의 태도를 비판합니다.

 

그 다음, 표현(expression)과 다른 행위(other acts)라는 행위 범주 자체를 구별함으로써 표현의 자유 이론을 정립하려는 시도를 비판합니다. (미연방대법원의 일부 판례가 이런 구분에 기초하고 있는데 사실 엉터립니다.)

 

그 다음으로 그는 표현의 자유가 정당성을 가지고서 제한될 수 있는 여섯가지 경우를 제시합니다.

 

1. 직접적인 물리적 결과를 낳을 때 : 내 목소리가 유리창을 깨거나 주의를 집중하지 못하게 할 때

2.  한 사람이 즉각적인 신체적 해악을 입을 상황에 다른 사람을 의도적으로 처하게 할 때 이루어지는 의사소통  

3. 표현 행위가 해악을 가하는 다른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스스로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형성케 하는 원인이 되거나, 그를 공적인 조롱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 있다. 이것의 분명한 사례는 명예훼손과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에 대한 침해가 있다.

4. 홈즈 대법관이 말한,  공황(panic)을 야기하는 극장 안에서 거짓되게 불이야를 외치는 사람 

5. 공범 사이의 의사소통

6. 부엌에서 쉽게 제조할 수 있는 신경화학 가스 제조법. 과 같이 다른 사람들에게 행위의 좋은 이유를 제공하는 표현이 아니라, 이미 결심한 행위에 관하여 그들의 해로운 행위에 다른 방식으로 도움을 주는 표현이면서 인신의 안전의 일반적인 수준을 극적으로 감소키게 되는 표현

 

그는 이러한 여섯가지 경우는  평등하고 자율적이며 합리적인 시민들이 인정할 국가 권력 제한의 원칙과 양립가능하다고 합니다. . 여기서스캔론이 호소하는 자율성은 약한 자율성으로, 무엇을 믿을지, 행위의 경쟁하는 이유의 비중을 어찌 판단할지 결정하는 주권적 존재로 스스로를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런 시민들이 국가의 표현 제한 권위에 가할 제약으로 '밀의 원칙'을 제시합니다.

표현 행위가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해악이라도 표현 자유 제한의 정당화의 일부가 될 수 없는 해악은 다음과 같다. (1) 거짓된 신념을 갖게 하였다. (2) 행위 수행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결과를 산출하였다는 의미에서 표현과 행위자 행위 사이의 연결관계가 있을 때.

 

이를 뒷받침하는 계약론적 논증을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그 원리의 첫번째 부분을 위한 논변은 다음과 같다. 잘못된 신념을 갖지 않게 보호할 국가 권한을 받아들이려면, 국가가 특정 견해를 옳다고 결정하고 일단 그리 결정하면 설사 시민이 그와 다른 견해를 듣길 원한다고 하더라도 틀렸다고 정한 견해를 듣는 것을 막아야 함에 동의하여야 한다. (218)

국가가 그러한 판단을 할 수 있게끔 위임하여, 스스로도, 무엇이 거짓인지에 관한 국가 판단에 구속된다면, 자율적 주체로 남아 있는 것과 모순된다. 이 경우 그는, 오직 공허한 의미에서만 자율적이다. 국가가 선별한 견해와 증거의 기초 위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국가가 독립적 판단을 내릴 근거를 박탈할 권한을 가지도록 동의한 것이다.

밀 원리의 두번째 원칙을 찬성하는 논변도 이와 유사하다. 여기서 논증되어야 하는 것은 일정한 행위가 불법인 것으로 선언되면, 그 행위를 하라는 선동도 불법화하는 것이 그 행위를 막기 위해 필요한 경우에는 그럴 수 있다는 논제다. 이 경우, 그러한 동의는 자율적 시민이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동의는 그 법이 복종되어야 하는가에 관한 독립적인 판단의 토대를 박탈시킬 권한을 국가에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논변은 모두, 일정한 신념을 합당한 것으로 옹호하기 위해서는, 그의 신념의 토대가 명백히 왜곡되거나 의심스러운 것이 아닌 것으로 옹호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219)"

 

그는 이것은 사상의 자유시장에 의해 진리가 출현한다는 경험적 주장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하며, 인민과 정부의 본성에 비추어 볼 때, 문제되는 권한을 정부가 갖게 하는 것은, 참된 견해가 퍼지게 하는 매우 어리석은 전략이 될 것이라는 더 설득력 있는 경험적 주장에도 의존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율성과 관련하여 국가가 시민의 결정 토대가 되는 정보 박탈은, 신뢰하는 친구의 판단을 믿으며 이따금씩 그런 신뢰를 점검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일시적이고 자발적이기 때문이다. 반면 국가가 판단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박탈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그러한 임시성이나 자발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일시적이고 자발적인 합의를, 자율성의 명백한 침해로부터 제외시키는 것은, 그러한 합의는 수탁자의 판단의 상대적 신뢰성에 대한 직접적인 평가와 위탁자의 판단의 상대적 신뢰성에 대한 직접적인 평가에 기초해 있다는 점이다. (

 

그리고 '불이야'를 외치는 것이 표현의 자유가 공익을 해하는 경우 광범위하게 제한될 수 있다는 논거로 손쉽게 사용하는 것을 제럴드 드워킨의 기준을 가져와 배척합니다. 극장에서 '불이야'를 외치는 것은 세 가지 특성을 갖습니다.

첫째, 매우 견강부회적인 의미에서만(in a very farfetched sense) 그러한 환경에서 거짓된 외침을 듣는 것으로부터 예방되는 사람이 어떤 질문에 관하여 그 자신의 마음을 결정하는 것이 막혔다고 할 수 있다. 둘째, 그 극장 사례에서 말하는 감소된 능력은 극단적으로 간단하고, 그리고 유관한 여건에서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셋째, 그 제한으로 방지되는 해악은 어떠한 의문이나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일시적으로 “착각에 빠진” 사람들에게조차도. 이 모든 사실들에 비추어 보면, 그 제한은 질문 받았다면 의문의 여지 없는 만장일치의 동의를 받을 사안이다."

 

그런데 이런 특성은 혼란과 혁명이 입박한 시기에 정치적 토론이 중지되는 사안 등 표현의 자유가 기본적으로 문제되는 상황에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스캔론은, 밀의 원칙의 절대성이 양보되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르나, 그런 경우를 개념하기는 어렵고, 파국에 가까운 상황에서 예외를 인정할 좋은 이유가 있다고 하여도, 그 때 그 제한 규칙을 강제하는 정부의 권위는 민주주의 정부의 권위와는 전혀다른 무엇이라고 합니다.

 

이 글과 함께, 로널드 드워킨의 <법과 권리>를 찬찬히 읽어보면 좋습니다.

 

여튼, 구체적인 표현 행위 하나를 두고, 저런 표현은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냐 저런 것까지 허용되어야 장기적으로 좋아 이런 말을 왈가왈부하는 것은 분석의 파도에 견딜 수 있는 논의 형태는 아니라는 것은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일전에, 어떤 보수적인 학부모들이 일간지에, 동성애를 다룬 드라마의 방영 중단을 촉구하면서 "그 드라마 보고 내 아들이 동성애자가 되면 책임질꺼냐"라는 논조로 광고를 낸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식자들 중 일부가, 저런 광고를 내는 것은 혐오 발언(hate speech)로 처벌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작동한 사고가 바로, 구체적이 특정한 표현의 구체적인 내용이 가져오는 해악과 그 이득을 저울질 해서 금지로 달려가는 방식의 사고입니다. 추상수준도 통제하지 않는 이러한 사고에 따르면 표현의 '자유'라고 말할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됩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에서는, 샌델의 '덕'이론은 사실상 자유 개념을 없앤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샌델처럼 종교가 가치있기 때문에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동성애가 가치 있기 때문에 동성애의 자유를 허용한다는 식으로 가게 되면, 결국 '자유'라는 것은 '사회가 덕이나 가치가 있다고 인정한다'라는 말과 동의어가 될 뿐이고, 다수의 반감에도 불구하고 지켜지는 개인의 특수한 지위와 권리라는 성격을 완전히 잃게 됩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샌델과 같은 식의 자유를 형해화하는 사고방식이 거의 기본설정(default)이 되어 있습니다. 다수의 시민들이 국가보안법을 정당성 있는 법이라고 생각하며, 집회나 시위의 자유가 교통 소통의 원활한 흐름이라는 공공 필요에 의해 압도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지지하는 신념 표현이나 그와 가족 유사성을 갖는 표현에 대해서는 목소리 높여 표현의 자유를 외치지만, 자신이 반대하는 신념 표현이나 경멸하는 표현에 대해서는 처벌과 금지를 주장합니다. 이것은 한국의 보수주의자들 뿐 아니라 진보주의자들도 걸린 역병이며, 그래서 한국 사회에는 자유주의자들은 일종의 정치적 망명자의 지위에 있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에서 샌델과 같은 사고방식은 샌델에 의해 주입된 것이 아니라 이미 이 사회의 시민의 지위를 왜소화시키는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만연해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체계와 원칙을 중심으로 반성적 평형을 달성하려는 생각 없이 곧바로 여러 직관을 일별해보고 결론으로 달려가는 방식으로 생각하면 마음의 저울이라는 껍데기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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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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