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의 세기는 지났다. 그렇다면 무엇을?

 

학교의 세기는 지났다. 그러나 학교는 건재하다. 얼핏 보기에 모순적인 이 현실의 문제점과 그 문제를 지속시키는 힘을 제대로 파악해야, 대안도 제대로 고민할 수 있다. ‘입시 위주의 교육이라서 큰일이야’라는 상투적인 한탄만으로 만족하는 태도로는 만족할 변화를 꾀할 동력을 얻지 못한다. 우리는 이 점을 지난 수십년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비판과 대안의 토대가 될 화두 세 가지를 제시하도록 하겠다.

 

1. 배움, 공부

 

최근 책을 통해서, 그리고 강의를 통해서, 공부란 ‘퀴즈풀이를 대비하는 일’이 아니라, ‘흥미로운 문제를 풀어가는 활동’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지금 아는 지식으로는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문제 해결에 다가갈 수 있는 장비를 갖추고 생각을 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바로 공부라고.

그런데 많은 교사들은 “좋은 이야기라 초청해서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데, 혼란을 느낄까봐 주저되요”라는 이야기를 한다.

 

무엇이 혼란인가? 그 교사들의 선의는 누구나 이해할 것이다. 공부의 구조와 요령을 알아도, 그것을 실천할 여지가 거의 없다면 그 현실은 고통스러울 것이다. 교육 제도 개혁의 가장 주된 목표는 이 현실을 바꾸는 것이다. 공부를 하는 것을 오히려 고통스럽게 만드는 장벽을 제거하고, 배움을 진작시키는 것.

이 목표를 염두에 두면 바뀌지 않으면 안될 것들이 분명히 눈에 들어오게 된다. 하나는 학년제와 일률적인 수업과목의 부과다. 이 제도는 모든 학생들이 흥미있어 하는 문제가 동일하고 배우는 속도가 같다는 이상한 전제 위에 서 있다. 그리고 학교가 정한 속도에 따라오지 못하는 이들은 그에 마땅한 등급으로 낙인찍히는 것이 당연하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그러나 공부의 본질적인 요소 중 하나는, 각자의 페이스에 맞춰서 단계별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지금 배우는 단계의 내용을 완전히 익힐 수 있도록 충분히 반복훈련 해야 한다. 학생들을 쪼아대는 겉모습 때문에 학교는 반복과 훈련의 장소라고 오해받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학교는 반복훈련을 시켜주지 않는다. 매시간 어김없이 기계처럼 진도를 나갈 뿐이다. 반복훈련을 충분히 하지 못하고 낙인 찍힌 학생들은 자존감을 잃어버린다. 자신이 진정으로 흥미있는 문제를 풀기 위해 필요한 바로 그 자존감을. 배움을 위한다면 학습과 교수의 개별화는 필수적인 요소다.

 

개별화가 이루어지려면, 교육활동은 경쟁적인 중간 평가와 단절되어야 한다. 지금 학교는, 상급 학교로 진학하는 요건으로 동년배끼리 경쟁하여 성취한 중간 평가의 성적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배움을 돕는다는 취지와 완전히 상치된다. 상급 학교는 나이에 상관없이 절대 평가로 측정된 어떤 성취 수준만 있으면 누구나 진학할 수 있어야 한다. 교육 제도는 배움을 왜곡시키는 사회의 다른 기능-그 사람이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 평가하는 기능-을 떠맡는 것을 그만둬야 한다. 중심은 배움이지, 그것을 왜곡시키는 다른 기능이 아니다.

 

2. 시민의 덕성

 

입헌 민주주의 사회의 교육제도는,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지위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부정의한 현실을 비판하며, 동료 시민들을 대등하게 존중하는 정치적 해결책을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줘야 한다. 그리고 이 능력의 핵심은 “무엇이 옳고 그른가”와 “무엇이 정확한 사실인가”의 문제에 관한 적절한 추론 방식을 활용하는 것이다. 그러지 못하면 자신과 동일한 도그마와 편견을 가진 사람들하고 뭉치는 일만 하게 된다.

 

현실은 어떤가. 그런 능력을 기를 기회는 턱없이 부족하다. 과학과 정치철학마저도 탈맥락화되어 암기하고 쏟아내어야 할 지식으로만 다루어지기 때문에 정작 추론의 방식, 사고하는 방법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 결과, 그런 소양을 갖추지 않고 정치적 주장을 한다 해도 부끄러운 일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새로운 교육 제도는, 이 능력이 모자랄 때, 자신에게 시민으로서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 그리고 원한다면 누구나 그런 능력을 습득할 수 있는 접근 통로를 마련하는 것을 분명한 목표로 삼아야 한다.

 

3. 평등

 

학교교육이 평등의 환상적인 통로로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환상이었다. 고등교육이 대중화되지 않았던 시대에는, 대학 졸업자와 나머지 사람들 사이의 소득 격차는 대학이 ‘생산성’을 높여준 결과라고 해석되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이들이 대학에 진학하자, 그러한 해석은 전형적인 구성의 오류, 즉 혼자만 할 때 통하는 전략인데 다 같이 할 때도 모두가 효과를 볼 수 있는 전략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이었음이 드러났다. 졸업장 자체가 선별 기능을 하지 못하자, 졸업장 사이의 서열, 그리고 그에 부가하여 소위 ‘스펙’이라고 부르는 목록을 얼마나 더 갖추느냐에 의해 불평등은 재생산되었다. 교육 제도로는 이 사회의 근본적인 불평등을 해결하지 못한다. 이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그 한정된 제도가 성취할 수 없는 목표를 억지로 끼워넣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교육 제도가 사회의 근본적인 불평등을 심화하는 일은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존 롤즈는 『정의론』에서, 사회의 여러 직위에 대하여 구성원들은 자유롭고 공정한 접근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인생의 이른 단계에 딱지를 매겨 이 접근 기회를 사실상 박탈하는 것은 부정의하다. 특히 그 이른 단계의 등급이 가정 환경에 의해 점점 더 크게 결정된다면 말이다. 또한 롤즈는 사회의 불평등은, 그 불평등 구조에서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 이득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배움의 기회를 고비용으로 만들어 놓고, 가난한 이들을 중도탈락과 빚의 함정에 빠트려 불안정한 직업을 전전하게 만드는 것은 그 불평등 구조를 전혀 정당화해주지 못한다.

 

정보통신기술이 발달한 이 시대에, 과연 배움의 기회가 물리적으로 한정된 강의를 제공하고 졸업장을 수여하는 기관이 부르는 값을 치를 수 있는가에 따라 좌우되어야 하는지를 먼저 물어야 한다. 그 구조를 그대로 두고 그 값을 공적으로 보조해주는 것만 고민해서는 안된다. 교육제도와 평가제도의 이 기이한 결합을 단절시키는 방안이, 훨씬 효과적으로 교육의 평등을 성취할 기회를 더 폭넓게 열어주기 때문이다.

 

이 세가지의 화두는 현실의 비판 뿐만 아니라 대안의 구상에도 중요하다. 새로운 교육공간이 학생들에게 비체계적으로 지식을 단지 두루 접하게 하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배움의 본질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추론의 방식이 아니라 교사의 생각을 학생들에게 투영시키는 데 집중한다면, 종교와 이념에 따라 교육공간이 발칸화(balknaiztion)되어 시민의 덕성이 해체되는 문제를 막을 수 없다. 지금의 교육 기회 구조를 떠받치는 제도의 모습을 그대로 두고 평등을 추구한다면, 그 노력은 정치 세력의 부침에 따라 쉽게 허사로 돌아갈지 모른다. <끝>

Posted by 시민교육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BLOG main image
대안민주주의와 사회윤리학 담론 형성을 위해 노력하는 '시민교육센터-배움의 연대망’ 홈페이지 입니다. 이곳에서는 열린 강의 형태의 시민교육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트위터 아이디: civiledulee, 이메일: civiledulee@gmail.com (이한) by 시민교육
전체 글 보기 (984)
공지사항 (20)
강의자료 (88)
학습자료 (334)
기고 (536)
  • 게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