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군가산점제와 주부가산점제의 부당성을 밝힌 "부정의 교정 제안에 대한 동시이행항병권 행사의 부당성"이라는 글http://www.civiledu.org/517의 후속글입니다. 아래 글을 읽기 위하여는 군가산점제가 그 자체로 부당하고 위헌이라는 취지의 위 글을 먼저 읽으셔야 이해가 됩니다.

 

1. 군역의 평등 부담이 '고통의 평등주의'가 아닌가 하는 의문에 대해

 

'고통의 평등주의'란, 그 자체로 소멸되어야 하고 소멸될 수 있는 고통이 단지 '너도 당해봐라'라는 이유에 의해서 소멸되지 못하고 오히려 확대되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일주일에 20시간씩 수당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야근을 하는 노동자들(A)이 야근수당을 제대로 달라고 소송을 하거나, 포괄임금제를 폐지하고 정확하게 수당을 계산하여 지급하는 단체협약을 체결하려고 파업을 할 때, 일주일에 40시간씩 무급으로 연장근로를 하는 별개의 노동자들(B)이 파업을 하는 노동자들을 비난하며, "우리는 40시간씩 무급으로 일하는데 배때지가 불렀네!"라며 정치적으로 전혀 연대하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이 경우 무급으로 야근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보아 어떠한 타당성도 없으며(심지어 공리주의에 의하여도 아무런 타당성이 없다), 그러한 무급노동의 고통은 그 자체로 소멸되어야 할 고통이다. 그러한 고통이 언제 어디서 먼저 감소되어나가건, 그러한 감소는 무조건적 지지를 보내야 하는 것이며, 고통 감소 권리주장과, 운동과 개혁의 행렬에 뒤따르면 되는 것이다.

 

반면에 '고통스러운 의무의 분담'은 이와는 다르다. 같은 회사의 노동자들이 공황 때문에 일이 줄어들어, 일부만 정리해고를 당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임금을 유지할 수 있는 선택지(a)가 있고, 예전에는 상시화된 연장근로나 교대제 근무를 하지 아니하여 수당이 많이 줄어들어 임금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아무도 해고되지 않는 선택지(b)가 있다. 이 경우 정리해고를 실시했으면 해고되는 목록에 포함되지 아니할 노동자들(A)이, 정리해고를 하면 목록에 포함될 노동자들(B)에 대하여, "너희는 고통의 평등주의를 추구하고 있다, 너희들도 당해봐라는 심보에서 그런 방안을 주창하느냐'고 따지면 이것은 어불성설이며 언어의 남용이다. 이 경우 고통은 '분담'되었으며 공황의 존재라는 객관적인 이유도 있다.

 

2. 군역의 평등화는 위 두 사례중 후자에 속한다. 군인으로서의 업무 수행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이유없는, 그 자체로 소멸될 수 있는 고통이 아니다. 군대는 군억지력이라는 공공재를 생산한다. 그 공공재를 포기하지 아니하고서는 군인으로서의 업무 수행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객관적인 이유가 존재한다. 다시 말해 사회적으로 그 고통을 어떻게 배분, 할당할 것인가의 문제만이 남는다. (시장에 의해 해결한다는 발상은 맨 마지막 항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또한 군역을 부담하는 집단과 전혀 부담하지 않던 집단이 존재하던 경우, 군역을 평등하게 부담하게 되면 당연히 고통의 '분담'이 이루어진다. 적정규모의 군병력의 보유는 (군입대자원의 수 * 군복무기간)이라는 공식에 의해 달성된다. 군입대자원의 수가 줄어들수록 군입대자의 군복무기간은 늘어나야 된다. 반면에 군입대자원의 수가 늘어나면 종래 불평등한 징병 타겟이 되던 집단의 군복무기간은 줄어들게 된다. (숙련도의 문제 때문에 완전히 비례해서 줄어들지는 않겠지만, 적정규모의 보유라는 측면에서 줄어드는 것은 확실하다. 숙련도의 문제는 군대 업무의 조정과 분업화에 의해 해결할 수 있다. 지금은 한 명의 군인이 지나치게 많은 일을 담당하고 있다. 즉 분업화가 비효율적으로 되거나 장비가 노후화되어 군생활을 하려면 알아야 할 것이 지나치게 많은 것이다. ) 그러므로 이것은 마치 정리해고를 당하지 않아도 되는 노동자들이 생기듯이, 군복무기간이 줄어드는 노동자들이 생기는 것이므로, '객관적인 이유가 있는 고통의 분담'인 것이다.

  고통의 평등주의는 앞서의 글에서 설명한 '부정의 교정의 동시이행항변'이 전형적이다. 동시이행항변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고통의 평등주의의 악순환을 끊어내는 것이다.

 

3. '군역의 평등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하여

  해결하려고 하는 부정의가 '국방의 의무 부담의 불평등'이기 때문에, 군역의 평등화는 그 불평등을 직접 해결하려는 것이다. 이것을 전혀 개선으로 보지 않는 것은 수행하지 아니하면 징역을 1년 6월 이상(종종 2년 이상) 살아야 하는 의무의 불평등한 부담이 전혀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서울 출생 국민들만이 군역을 지고, 그 이외 지역의 국민들은 군역을 지지 않는 상태에서, 누군가 군역이 평등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고통의 평등주의다, 군역의 평등으로 해결책이 될 수 없을 것 같다"고 답변한다면, 이것이 올바른 반응인가? 설사 서울 시민들이 수도 가까이 있으며, 전혀 다른 부정의의 수혜자(예를 들어 전력의 문제-즉, 싼 전력을 공급받기 위하여 지방에 지상 송전탑과 고압선을 세우는 방식: 관련 논의는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6052221025&code=960205 참조)인 경우가 많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부정의 교정의 동시이행 항변권을 주장하지 않고서는 그렇게 답할 수 없다. 설사 서울 출생 국민들이 좀 더 체격이 좋다고 하여도 마찬가지다. 군대의 업무는 앞서의 글에서 말하였듯이 체격 차이를 고려하여 그 업무의 분담을 꾀할 수 있고, 전투 이외의 업무에 분산되어 있던 자원이 전투에만 훈련, 집중하면 군복무기간이 당연히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통일 이후에 체격이 훨씬 작은 북한 주민과 남한 주민의 군역 부담 문제에서 당연히 발생할 문제이나, 아무도 체격 차이를 이유로 완전한 군역 면젤ㄹ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4. '군역 제도 자체의 부정의 논의를 막는다'는 주장에 대하여

  이러한 이의제기는 1) 군대는 공공재를 생산하지 않는 살인연습집단일 뿐이다라는 평화주의자의 주장이나, 2) 군대는 공공재를 생산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모병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을 전제하고 있다.

  1)의 주장에 대하여: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이 불법한 공격자로부터 자신의 인신을 방어하기 위하여 물리력을 쓰지 않겠다, 즉 정당방위를 전혀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하여야 일관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재산과, 생명과 신체가 침탈당하여도 경찰력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하여야 한다. 더나아가, 자신의 인신을 방어하기 위하여 물리력을 쓸 정당방위권이 없음과 아울러 다른 이들도 불법한 폭력자에게 정당방위를 할 권리가 전혀 없다는 주장을 펼치는 것이다. 평화주의 신념은 철저히 일관될 때에 존중할 만한 신념이고, 또한 자유주의 사회는 세속적 종교적 양심을 이유로 그러한 신념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관용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군대가 공공재가 아니라는 말은, 포괄적 교설이 아니라 정치적 주장이 오고가야 할 공화국의 공론장에서는 설 자리가 없다.

 2)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모병으로 해결할 수 있고, 징병제는 그 자체가 부정의하다는 주장에 대하여. 만일 모병이 정의로운 해결책이고 징병제는 부정의한 해결책이라면 위 4.항의 주장은 타당한 근거가 있다. 즉, 설사 의무 수행 고통 부담의 분담화의 취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군역의 범위를 확대하는 것은 부정의의 확대이고, 따라서 반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입장은 필자가 <콜버그의 호프집>을 쓸 당시에 취한 입장이다. 그리고, 평화시의 '군억지력'이라는 공공재 생산 활동에 관하여는 여전히 이 입장이 타당하다고 본다. (이 점은 파레토 최적논의를 통해서 <콜버그의 호프집>에서 엄밀하게 논의한 바 있고,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에서 부유한 김상병과 가난한 이상병의 논의를 통해서도 충실히 논의한 바 있으므로 생략토록 하겠다. 축약하자면 평시에는 공공재 생산업무의 할당은 시장을 통할 때 모두에게-가난한 계급에게도-이익이라는 것이다. 즉, 군복무기간이 6개월 줄어들고 그 6개월을 모병으로 채우면 부자 김상병 뿐만 아니라 선택지가 늘어나 가난한 이상병에게도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이 입장을 취한 이후에 입장을 수정한 것은, 일본의 원자력 사고가 터지고 나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에 관한 글을 읽을 계기가 되었을 때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는 결국 도저히 고칠 수 없어서 흙과 콘크리트 등으로 공구리를 쳐야 하는데, 이 공구리 치는 작업을 하기 위해 소련 정부는 80만명에 달하는 현역 군인과 긴급 소집한 해체 작업자들을 사고 현장으로 파견했는데, 이 인력으로는 피폭 제한 규정을 제대로 지킬 수가 없었다.(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체르노빌의 목소리 참조) 한마디로 전체 국민을 다 동원했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공화국의 비상시기에 설사 '돈'으로 소집한다고 하여도, 설사 군인이 모병으로 자원입대했다 할지라도 그들의 목숨에만 위험을 집중시키고 나머지는 돈을 대면서 후방에 편히 있는 것은 그렇게 모집된 인원의 목숨을 수단화하는 것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 168-170쪽에서 필자는 산악인 열명이 동굴에 몰려 있고, 곰을 상대해야 하는데 10명 전원이 덤비면 각자 크고 작은 상처를 입고 빠져나가는데, 돈으로 2명을 사서 그 두 사람의 죽을 확률을 극도로 높이면서 나머지 8사람은 무사히 빠져나가는 것은, 재력의 불평등을 목숨의 불평등으로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평시와 전시(공화국의 비상상황)에는 비대칭성이 생긴다. 원자력 사고가 났을 때, 원자력 관리 업무를 예전부터 월급받고 하던 사람이 피폭이 집중되어 죽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 전시에는 모든 동원가능한 전력이 방위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시에는 징병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평시에 전혀 훈련을 받지 않던 자원은 전시에 실효적을 병력으로 전환될 수 없다. 예비군 제도는 필수적이다. 즉, 전시에 방위에 참가할 조직이 미리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효과적인 예비군 제도의 유지와 양립가능한 선까지 징병 복무 기간이 최대한 줄어들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선으로 일단 9개월-12개월 정도를 제시하였다. 실제로 독일에서 이 정도 기간의 징병제를 운용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역의 평등화를 통하여 군복무기간을 9개월까지 최대한 줄이고, 예비군제도를 유지하며, 점진적으로 늘어나는 모병을 유지하는 재원은 군역을 수행하지 않거나 짧아진 의무복무기간만 수행한 사람들 중 소득에 누진적으로 특별세를 충당하는 방안을 '고통의 평등화'이며, 현 상태 유지보다 나쁜 옵션이라고 하려면 다음 명제들 중 어느 하나를 증명해야 한다.

 

(1) 군대는 공공재를 생산하지 않는다.

(2) 서울 시민만 국방의 의무를 부담하고 나머지 시민들은 부담하지 않는 상태의 핵심은 불평등이 아니다. (나머지 시민들로 확대하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3) 전시기간에까지 평시에 모병으로 모집된 인원들이 더 큰 위험을 부담하고 그들만 목숨을 내놓게 하고 나머지 공화국 시민은 방위 참여의 능력이 있어도 후방에서 민간인으로 지내는 것이 철저히 정의롭다.

(4) 평시에 아무런 예비군 조직을 유지하지 아니하여도 전시에 징병으로의 병력 전환이 실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덧붙임**

만약 평등의 원칙을 관철할 것이라면 9-12개월 국민개병제에서 왜 짧은 기간만 징병으로 하고 나머지 기간은 모병으로 하는가, 왜 현재처럼 2년 또는 예전처럼 3년 국민개병제는 안되는가 의문이 있을 수 있겠다.

 

먼저 하나의 질문을 던져보자. 왜 북한처럼 10년은 안되는가? 10년이라는 말을 들으면 일단 '어리석다'라는 형용사가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어리석기 이전에 부정의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평시의 억지력 생산과 전시의 효과적인 국가방위에 필요한 정도를 훨씬 넘어서는 만큼 자유 박탈을 하기 때문이다. 즉, 필요한 한도 이상의 자유 박탈은 그 자체가 부정의한 것이다. 이는 마치 보도블록을 가는 공사 작업을 시장을 통해 임금을 주고 노동자들이 수행할 수 있음에도 시가 이를 요역화하는 것이 부정의함과 마찬가지다.

 

(i) 필요한 적정 규모의 평시 군 병력, (ii) 필요한 적정 규모의 전시 (예비군을 포함한) 군 병력을 산정하여 이 규모를 넘어서는 인원 보유를 무한정 추구하는 것은 (설사 더 많은 병력이 언제나 더 나은 안보를 가져다 준다 하더라도) 정의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다. 공화국의 시민들은 안보만을 궁극 유일의 목적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며, 비상상황의 자유 존속을 개연적으로 아주 약간 더 확고히 하기 위하여 평시의 자유를 대거 박탈하는 조건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제, 모병이 조금이라도 있는 것이 오히려 정의의 원칙에 부합하는 이유를 살펴보자.

롤즈의 차등 원칙에 따르면 불평등의 생성이나 증가는, 그러한 추가적인 불평등이 그 불평등으로 창출된 위계상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평등한 상태보다) 이득이 될 때에 정당화된다고 하였다.

이 조건을 충족시키는가는 언제나, 부유한 김상병과 가난한 이상병을 상정하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심사할 수 있다. 실효적인 예비군의 전시 동원을 보장하는 기간까지는, 징병의 기간이 낮아지는 것이 가난한 이상병에게조차 언제나 이득이 된다. 이를테면 가난한 이상병이 이를테면 병장 계급이 되려고 할 때에 군대에 남아서 돈을 벌 것이냐, 아니면 나갈 것이냐의 선택지를 준다면 이상병의 처지는 더 나아진다. 상병 계급이 되려고 할 때 같은 질문을 던진다고 하여도 마찬가지다. 즉, 실효적 예비군의 전시 동원을 보장하는 기간까지는 의무적 징병기간이 계속 짧아지는 것이 모두에게 이득이다. 이러한 변화가 가능함에도 이 변화를 택하지 않는 것은 부정의하다. 

이것은 마치, 현재 건설노동직을 요역화해서 모두 의무로 2년간 건설노동에 종사하게 하고, 건설노동자들은 모두 실직자가 되게 만드는 안이 부정의한 것과 마찬가지다. (즉, 가장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을 포함해서 실질적 선택지를 늘리는 변화는 정의로운 변화이고, 실질적 선택지를 줄이면서 경제적 여건을 더 불리하게 만드는 변화는 부정의한 변화이다.)

 

이것은 간부 계급의 모병 모집을 생각해보아도 당연하다. 만일 평등 원리의 관철이, 일률적인 군 복무 기간의 획일화를 의미한다면 간부 계급 역시 모병이 아니라 모두 징병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사병과 간부 모두 같은 기간 의무복무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모두에게 더 불리한 변화이고, 군대의 전투능력과 전문적 기술능력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효과적 억지력 생산과 전시 동원이 실질적으로 약화되지 않는 상황에서 간부 계급을 지금처럼 모병으로 충당하고, 전투기 조종이나 탱크 조종 항공 관제 등 전문적인 기술을 간부 계급이 수행하게 하는 것이 타당한 제도이다. 아무도 간부 계급을 모병으로 뽑는 것이 자의적인 타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위 안(9개월 국민개병제와 그 뒤의 상병, 병장 기간은 모병으로 모집)이 적당한 자의적인 타협이 아니라, 차등의 원칙 그 자체의 철저한 적용에 의한 것이며, 이것을 오해하는 것은 평등 원리를 일률적 획일성의 원리로 오해한 것이다.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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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우맨
    2018.02.06 18:2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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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의,

    "4. '군역 제도 자체의 부정의 논의를 막는다'는 주장에 대하여

    이러한 이의제기는 1) 군대는 공공재를 생산하지 않는 살인연습집단일 뿐이다라는 평화주의자의 주장이나, 2) 군대는 공공재를 생산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모병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을 전제하고 있다.

    1)의 주장에 대하여: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이 불법한 공격자로부터 자신의 인신을 방어하기 위하여 물리력을 쓰지 않겠다, 즉 정당방위를 전혀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하여야 일관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재산과, 생명과 신체가 침탈당하여도 경찰력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하여야 한다. 더나아가, 자신의 인신을 방어하기 위하여 물리력을 쓸 정당방위권이 없음과 아울러 다른 이들도 불법한 폭력자에게 정당방위를 할 권리가 전혀 없다는 주장을 펼치는 것이다. 평화주의 신념은 철저히 일관될 때에 존중할 만한 신념이고, 또한 자유주의 사회는 세속적 종교적 양심을 이유로 그러한 신념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관용을 주어야 한다."

    여기에서, "평화주의 신념은 철저히 일관될 때에 존중할 만한 신념이고, 또한 자유주의 사회는 세속적 종교적 양심을 이유로 그러한 신념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관용을 주어야 한다."

    이 부분의 의미가 만약에 어떤 특정 종교를 믿는 사람이 양심적 병역 거부를 하려고 하는데 그가 과거에 어떤 범죄 피해를 입고 경찰에 신고한 적이 있거나 또는 직접 물리력을 행사한 전력이 있다고 했을 때 이에 대해 설득력 있게 소명(ex. 한 번의 실수였다, 그때는 신념을 갖기 전이었다)하지 못한다면, 그의 평화주의 신념은 일관성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특정 종교의 활동을 얼마나 오래 열심히 했느냐와 상관없이) 국가는 그의 병역거부 요구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볼 수 있을까요?
    • 2018.02.08 00:5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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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관성이 있을 때에는 관용의 의무가 발생한다는 것이 참이라고 해서, 일관성이 부족한 경우에 불관용의 의무가 발생한다는 결론이 도출되지는 않습니다. 사실상 대부분의 실제 평화주의 사상들은 일관성이 부족합니다. (즉 방위 전쟁과 같은 국민 전체의 방위권의 행사에서 폭력을 사용하는 것만을 거부할 뿐, 폭력을 사용한 자기 또는 타인의 정당방위권 행사나, 자기 또는 타인의 범죄피해에 대하여 폭력을 동반하는 국가경찰행정력의 요청은 거부하지 않는 것이 현실에서 실제로 볼 수 있는 평화주의 사상입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입법을 통하여 그러한 사상을 견지하는 사람들이 범죄의 낙인을 찍히는 대신에, 적절한 부담과 함께 사회에 최대한 통합되는 방향으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즉 일관성이 철저한 평화주의 사안은 관용의 의무 위반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반면에, 일관성이 부족한 평화주의자 사안은 현명하고 바람직한 입법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 성우맨
      2018.02.08 02:0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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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리한 지적이십니다.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
    • 2018.02.08 22:0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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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철저한 평화주의 신념'에 대해 국가가 "관용의 의무" 때문에 관용을 하게 되는 것과 '일관성이 부족한 평화주의'에 대해 국가가 "현명하고 바람직한 입법"을 통해 관용을 하게 되는 것 간에 실질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매우 열악한 여건의 상황에서는 철저한 평화주의의 병역 거부만이 용인이 되고 일관성이 부족한 평화주의의 병역 거부는 용인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 것인가요?


      2.

      정의론 56절 <양심적 거부에 대한 정의>에서,

      "만일 평화주의가 단지 관용될 뿐만 아니라 존경을 받게 된다면 그것은 정의의 원칙들에 어느 정도 잘 부합하며, 중요한 예외라고는 정당한 전쟁(여기에서는 어떤 상황에서 자체 방어를 위한 전쟁이 정당화된다고 가정할 때)에의 참여에 대한 그 태도에서 생겨난다고 설명되어야 한다. 공동 사회가 공인하는 정치적 원리는 평화주의자가 내세우는 학설과 어떤 유사성을 갖는다. 전쟁과 무력 사용에 대한 혐오에 있어서도 공통되며 도덕적 인격으로서 인간의 평등한 지위에 대한 신념에 있어서도 동일하다. 그리고 국가나, 특히 거대한 권력이 부정의하게 전쟁에 가담하려 하고 반대자를 누르기 위해 국가 기구를 운용하려는 경향성을 가질 경우, 평화주의자에 대한 존경심은 정부가 그 이름으로 범하려 하는 부정에 대해 시민들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목적에 도움이 된다. 비록 평화주의자의 견해가 완전히 타당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가 나타내고자 하는 경고와 항거는 여러 가지를 감안할 때 정의의 원칙들이 보다 더 안정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올바른 학설로부터의 자연스런 이탈로서의 평화주의는 아마 자신이 공언한 것에 따라 생활함에 있어 인간이 가진 약점도 보상할 수 있을 것이다." (John Rawls, A Theory of Justice. 황경식 옮김, <정의론>, 이학사, 2003, 483면.)

      여기서 롤즈가 말한 대로 "존중할만한 평화주의"가 "공동사회가 공인하는 정치적 원리"와의 유사성이 있어야 한다면, 다음과 같은 요건,

      1) 자유주의 사회의 평화와 평등의 원리와의 유사성.
      2) 신념 체계의 내적 정합성.
      3) 언행일치의 진정성 있는 믿음.

      위의 요건을 모두 갖추었을 때에 '자유주의 사회가 존중할만한 평화주의 신념'이라고 할 수 있고, 이러한 신념에 대해서는 자유주의 사회는 반드시 관용해야만 하는 것이고, 다만, 현대 자유주의 사회의 여건에 비추어 위의 요건들에서 어느 정도의 이탈까지는 관용의 범주 안에 넣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라고 이해를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그 관용의 대상이 될 수 있을 정도의 '이탈의 정도'는 사회통념으로 정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어떤 전쟁은 참여하고 어떤 전쟁은 참여하지 않겠다고 하는 '선택적 병역 거부'에 대해서는 (두 전쟁이 모두 방어를 위한 정당한 전쟁이라고 할 때) '종교적 신념에 의한 모든 전쟁에 대한 병역 거부'와는 달리 아마도 그 병역 거부를 국가는 용인하지 않을 것 같은데 그 이유를 '자유주의 정치 원리와의 유사성 요건'과 '일관성 요건'에서 너무 많이 이탈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3.

      국가의 평등 대우 원칙에 의한 권리의 보장 요구를 넘어서는 구성원의 요구들에 대하여 자유주의 국가가 '추가적인 관용'을 하여야 할 대상과 아닌 대상을 어떻게 구분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시험일을 안식일을 제외한 요일로 변경해달라는 요구, 물떼새알을 먹어야만 불행해지지 않는 소녀의 물떼새알 비용 요구, 종교 교리 때문에 꼭 성지순례를 해야한다는 사람의 경비 지원 요구에 대해서는 관용하지 않고 병역 거부에 대해서는 관용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 2018.02.10 23:2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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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입헌 민주주의 사회에서 현실적 함의는, 철저한 평화주의의 강제징병은 위헌인 반면에, 일관성이 부족한 강제징병은 합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에서의 평화주의는 일관성이 부족한 평화주의입니다. 따라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의 예외를 인정하지 아니하는 한국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틀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입법론으로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제도가 현명하고 바람직한 제도인지 의문이 있습니다. 기꺼이 감옥에 가려는 사람들은 무슨 종류든 부담을 피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군역의 부담에 상응하는 사회적 서비스의 부담을 지우고 그들을 사회에 통합시키는 것이 현명합니다.

      2.(1) 사회통념이라기보다는 논증에 의해 판단하여야 할 것입니다.
      (2) 논증으로 보여줄 수 있는 일관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침략전쟁과 방위전쟁 사이의 구분은 일관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조건적인 전쟁 거부만을 양심으로 인정하고 침략전쟁 거부는 양심으로 인정하지 아니하는 미연방대법원 판례는 부당한 것입니다.
      여기서 그 근본 목적은, 국가가 양심의 '일관성'이라는 질(quality)을 조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이야말로 양심의 자유에 대한 침해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국가는 중립적인 근거에 의해 해당 신조가 도출한 결론의 관철을 거부할 수 있는가가 쟁점입니다.

      3. (1) 관용이 의무인 대상과 그렇지 않은 대상을 먼저 구분합니다. 거론하신 모든 사안(병역거부가 일관성이 부족한 것이라고 가정할 때)에는 관용의 의무가 없습니다.
      (2) 관용으로 인한 결과와 불관용으로 인한 결과를 비교하여 판단합니다. 이러한 비교에서 '관용'이 갖는 성격이 드러납니다.
      (1) 물떼새알과 성지순례 비용 보조의 경우에는, 특정 선호와 신조를 갖고 있다는 이유로, 다른 동료시민은 갖지 못하는 특전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국가 중립성과 평등 의무에 위반됩니다.
      (2) 시험일을 자기 종교의 안식일을 제외한 요일로 변경해달라는 요구도, 다른 시민들의 기회구조에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예를 들어 아직 주6일제가 많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토요일에 국가시험들을 치르게 된다면, 많은 시민들은 특정 종교의 신조에 부응하기 위하여, 기회의 축소를 감수해야 합니다.
      또한 종교마다 안식일은 다르기 때문에, 한 종교의 안식일을 피해서 다른 종교의 안식일에 시험을 치를 경우에 이 또한 종교를 편드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다른 시민들의 기회에 영향을 미치지 아니할 때, 국가는 이를 참작하여 행위하면 좀 더 바람직할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헌법재판소에서는 일요일 국가시험 실시를 합헌이라고 보았습니다. 다만, 주5일제가 그 이후 정착되고 나서는, 많은 국가기관들이 국가시험을 토요일에도 실시하고 있습니다.
      (3) 일관성 없는 병역 거부에 대해서도 관용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다른 시민들의 권리와 안전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느냐의 판단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판단은 입법자의 판단 영역입니다. 즉, 과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인정할 때, 국가안전보장이 얼마나 훼손될 것인가의 평가 판단은 바람직하고 현명한 입법에 관한 입법자의 판단 영역입니다. 그래서 한국헌법재판소는 이것이 위헌이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다만 그 입법 판단의 영역에서, 저와 같은 사람들은, 적절한 사회 서비스의 부담을 명한다면, 실제로는 평화주의 신념에 의한 병역자원의 감소는 거의 미미할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모든 면에서는 평화롭게 협동하고자 하는 시민들을 범죄자로 만들어 배척하는 것이 현명하지 않다고 볼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거론하신 사례들에 애초부터의 차이는 없으며, 그것은 모두 두 단계의 질문에 의해 처리되게 됩니다.

      4. 철저한 평화주의 신념과 위 3에서 거론한 사안들은 다릅니다. 철저한 평화주의 신념은 일관성이 있는 아나키즘 사상이며, 이런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무임승차하거나 체리피킹하려는 의도로 자신의 부담을 회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불의를 당하더라도 이를 폭력으로 대항해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이런 신념을 가지고 산다면, 사람들이 억압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이념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운하게도 이들은 자신들은 개인적으로도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자 하는데도, 집단적인 대항폭력에 억지로 가담케 하는 징병제 사회에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종교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사회에서 태어나서, 자신은 종교를 이유로 국가적 규모의 침략자에 의해서건 사적인 미움에 의해서건 죽임을 당하더라도 종교를 원인으로 해서 일어난 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의 처지와 비슷합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전혀 비합당한 것이 아닙니다. 이득은 얻으면서 부담은 지지 않으려는 점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국가 중립성 이념과 관련해서 의미가 있습니다.

      특정 종교행위 보조는, 국가행위 정당화 근거의 중립성이라는 이념을 위배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경우에는 보조를 하지 않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국가가 국가시험 실시에 있어 특정 종교의 안식일을 피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기회구조를 실질적으로 축소한다면, 이 또한 국가행위 정당화 근거의 중립성을 위배하게 됩니다.

      반면에 일관된 평화주의의 경우에는, 비합당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실천을 할 권리를 아예 거부하기 위해서는 그 평화주의적 삶의 태도가 열등한 것이라는 신조를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국가행위의 근거의 중립성을 위배하게 되며, 따라서 이 위배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관용의 의무가 발생합니다.
    • 2018.02.14 03:1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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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세하게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

      '경찰행정력에 대해서는 거부하지 않으나 병역은 거부하는 신념'과 '방위전쟁에 대해 선택적으로 거부하는 신념'은 둘 모두 '철저한 평화주의의 신념'에 비추어 '일관적이지 않다'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나 전자는 후자와 달리 현명한 입법을 통해 관용을 할 수 있는 대상이 되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3.

      일관적이지 않은 평화주의 신념의 병역 거부에 대해 처벌하지 않는 입법 판단을 내릴 때, '병역 자원의 감소가 실제로는 미미할 것'이라는 근거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그 비일관적 평화주의 신념의
      병역거부자들의 수가 적기 때문에 그들이 병역을 담당하지 않더라도 줄어드는 병역 자원 감소가 미미하다.

      2) 그들을 처벌한다고 해도 어차피 그들은 거의 대부분이 기꺼이
      감옥에 갈 것이기 때문에, 처벌하는 경우와 비교해서 처벌하지
      않는 경우에 감소되는 병역 자원은 미미하다.

      그런데 만약에 한국에 이러한 신념의 병역거부자의 수가 수백만에 달하게 된다면, 1)의 근거는 달라지게 되겠지만 2)의 근거는 달라지지 않을 것 같은데, 이 경우에는 처벌의 필요성이 생길까요?
    • 2018.02.18 21:2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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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일관성보다는 비합당성이 핵심입니다. 일괄적 전쟁 거부 신념은, 병역 의무만큼이나 사회에는 기여하고 개인에게는 불이익이 되는 의무를 부과함으로써 비합당성을 줄일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선택적 전쟁거부 신념은 그러한 절차를 시행할 방도가 없습니다.

      2. 병역자원의 감소가 되지 않는다는 말은, 제도를 잘 설계하면 병역기간보다 더 긴 사회복무기간의 부담 때문에 실제로는 사람들이 이를 택할 유인이 별로 없을 것이라는 예상입니다. 이는 이미 대체복무제도를 실시하고 있는 외국 국가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2018.02.19 00:0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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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택적 전쟁 거부자들에게도 사회복무대체를 허용할 수 없을까요?
    • 2018.02.19 19:1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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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어전쟁에 대한 선택적 거부에 대해 대체복무제도를 마련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은 방어전쟁의 필요성과 군력에 의한 침략억지 자체를 부인하지 않으므로 평시에는 병역에 복무할 것입니다. 따라서 평시에는 대체복무제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방어전쟁이 실제로 개시된 이후의 전시 상태에서, 대체복무제도의 부담을 어떻게 만들어도 전쟁수행의 부담보다 낮을 수가 없습니다. 평시의 병역복무와는 달리 전시의 전쟁수행은 생명과 온전한 신체를 잃을 극도로 높은 위험을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시에는 가능하더라도 전시에는 모병제를 실시할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가 적용됩니다. 그래서 합당한 제도디자인이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 2018.02.25 02:0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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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병역 거부 신청에 대한 판정 절차에서, 신청자의 병역 거부 동기가 선택적 방어 전쟁 거부 신념일 경우에도 이를 받아들여서 (일괄적 전쟁 거부자들이 하는 것과 동일한) 사회복무대체를 할 수 있게 한다면, 그러한 선택적 전쟁 거부 신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평시에는 (일반적으로 군복무보다 부담이 크다고 느끼는) 사회 복무가 아니라 병역을
      할 것이고, 자신이 거부하는 방어 전쟁시에는 병역 거부 신청을 할 것이다. (선택적 전쟁 거부자들이 속임수를 쓰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주장하는 신념 그대로 선택을 한다고 해도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을 이유가 없다)

      반면에 일괄적 전쟁 거부 신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평시에도 부담이 큰 사회 복무를 선택할 것이기 때문에, 평시의 군복무에 뒤따르는 '전쟁이 발발하여 목숨이 위험해지는 상황에 처할 가능성'의 부담을 평시의 대체 복무에 어느 정도 부과할 수 있다. (평시의 군복무에 따르는 전쟁 가능성의 부담을 대체 복무에 지게 한다는 것은, 평시에 사회복무대체와 군복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을 때 일반 사람들이 대체로 군복무를 택하게 할 정도의 부담 있는 사회복무제도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이 느끼는 평시의 전쟁 가능성의 위험 부담을 고려한 제도 디자인이다) 반면에 평시에는 군복무를 할 수 있으면서 전시에는 사회복무대체를 할 수 있는 선택적 전쟁 거부자들에게는 이러한 확률적 위험 부담을 부과할 방도가 없다, 라고 이해했습니다.


      2. 국가가 관용의 의무에 의해 관용해야만 하는 무정부 평화주의자들이 사회복무대체제도 또한 군대와 연관되어 있으며 국가가 강제로 부과한 것이기 때문에 거부한다고 한다면 이에 대해서도 국가가 관용의 의무를 진다고 할 수 있을까요?
    • 2018.02.25 18:3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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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질문은, 궁극적으로 합당한 거부(reasonable rejection)의 이념에 의해 결정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의 신념을 갖고 있고, 그리하여 국가의 과세는 강도짓이라는 신조를 자신의 양심의 필수적인 구성부분으로 갖고 있다고 해봅시다. 이 경우 관용은 그 사람의 양심 실현, 즉 세금 미납에 대한 제재를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국가가 국세를 거두기 위해 강제집행을 하지 않는다는 것, 가산세도 걷지 않는다는 것, 탈세에 대한 처벌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조치는 결국, 자신에게 부담이 가는 것을 회피하는 신조를 가진 이들에게 특전(privilege)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럴 때에는 그러한 특전을 주는 것을 다른 구성원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 위반을 이유로 합당하게 거부할 수 있는가의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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