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국정원 선거 개입이니 하는 정쟁은 그만하고, 민생을 신경쓰라!"

 

이런 프레임을 충동질하는 언론들이 있다. 그리고 이런 논조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시민들이 있다. 위 문장은 사실 말이 안되는 문장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말이 된다, 의미가 통한다고 느낀다. 어찌하여 저 넌센스가 말이 되고 뜻이 담겨 있는 문장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

 

그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독특한 이론을 전제하고 있다.

(1) 민생이라는 것은 '내'가 겪는 고통들을 해결하는 것을 의미한다.

(2) 다른 동료 시민들도 '나'와 마찬가지의 고통을 겪으며,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그 고통을 분석하며, 따라서 나와 동일한 해결책을 지지한다.

(3) 그러므로 위정자들은 내가 지금 구체적으로 지목하는 고통들을 해결하는 계책을 도입하는 것이 민생이다.

(4) 그 외의 짓은 민생이 아니고, 쓸데없는 정치다. (이를테면 표현의 자유, 선거 중립성 운운)

 

이것은 다원적인 시민들의 협동과 토론, 타협과 다툼이 벌어지는 거대한 국가를 하나의 일원화된 가치에 의해 지배되는 서비스 기관으로 보는 시각이다. 서일원화된 가치에 의해 지배되는 서비스 기관은 이미 평가의 기준이 있다.

 

예를 들어, 편의점은 내가 원하는 물품들이 유통기한에 맞춰 잘 놓여 있고, 돈을 주고 그 물품을 살 수 있으면 된다. 그 편의점에 다른 소비자가 무엇을 사건 상관없다.

 

그러나 국가에 대하여는 '일원화된 가치'도 성립하지 않고, 그에 따라 '잘 정의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서비스 기관'을 평가하는 기준도 적용되지 않는다.

 

시민들은 서로 다른 고통을 겪으며, 그 고통을 이해하는 방식도 다르며, 그에 대해 내놓는 해결책도 다르다. 그러므로 국가의 정치에서는 '다른 시민들의 욕구, 소망, 규범'이 지평 안에 당연히 들어오며, 충돌하고 의견이 갈리는 것을 해결해야 한다. 무엇이 '민생'인가의 문제는 사전에 주어져 있지 않다. 무엇이 민생인가의 문제가 사전에 주어져 있다고 느끼는 것은 위에서 든 (1)-(4)를 전제하는 것이다. 즉, 근시에 의한 착각이다. 근시는 자기 앞의 사물만을 본다. 마찬가지로 근시적 정치행위자는 자신의 문제만을 바라본다. 거기에 다른 시민들의 문제와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설사 존재한다고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고 할지라도, 다른 정치행위자의 문제 역시 자신과 '동일한' '동질적인 것'이라고 그대로 투사해서 덮어버린다. 자신이 느끼는 문제가 전체 문제가 되며, 따라서 민생은 사전적으로 주어진 것처럼 착각된다.

 

현 정부는 '시간제 일자리'가 좋은 이자리라며 이 일자리 수십만개를 새로 창출하는 것을 '민생을 해결'하는 국정 목표로 삼았다. 이것은 주어져 있는 것을 효율적으로 서비스하는 것인가, 아니면 무엇이 민생인가를 규정한 것인가. 당연히 후자다. 만일 현재의 야당이 집권하였다면, 이 정책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정책은 사전에 '민생'으로 정의된 것이 아니다.

비정규직 문제의 고통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정치가 규정한 것이다. 이 규정 과정이 정당하게 이루어져야만 '민생'은 비로소 정당하게 드러난다. 이 과정이 생략되거나 왜곡되면 민생의 규정 자체가 생략되거나 왜곡된다. 거기에는 오로지 우연히 국가가 하는 행동이 나의 이익에 우발적으로 부합하는 사적 이익 추구자들만이 모래알처럼 존재할 뿐이다. 서로 아무런 논의도 하지 않고 서로의 이익이 갈등할 때 조화롭게 해결하는 방법도 모른다. 정당성과 정의라는 규범도 고려되지 않는다.

 

전 정부 시절, "사학 재단의 사외이사 도입"을 가지고 정쟁을 한다면서 정치인들을 타박하고, 개혁 피로감을 느낀다면 '민생'을 해결하자는 논조가 있었다. 그들의 민생에는 '해마다 제어없이 높아져가는 등록금'이든가, 부당하게 해고당한 교직원이라든가, 아니면 학생의 인권이나, 질 좋은 교육은 포함되지 않는 것이다.

 

민생과 정치의 대립 프레임은 '민생'이라는 말은 서비스 제공자로서의 국가와 국민을 곧바로 연결시키고, 동료 시민이라는 동등한 행위자들을 시야에서 사라지게 만듦으로써 근시적 정치적 행위자를 부추긴다. 그들은 지금 정쟁의 주요 쟁점이 '내'가 지금 구체적으로 겪고 있는 나의 해석에 따른 고통에 직접 관련된 거이 아니면 '민생'이 아니라고 규정한다. 이런 사람들이 수없이 많으니, '정쟁을 하고 민생을 따지지 않는다'는 호소는 그사람들에게 절실히 닿는다. 그러나 그들은 민주주의의 시민으로 그 호소력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다른 시민들과 토론할 필요성을 아예 부정하는 '독재자'로서 자신의 고충을 처리받고 싶어하는 것이다.

 

시야를 넓히면 '민생'은 정치에 의해 규정됨이 분명히 보인다. 그리고 그 정치를 일그러뜨리는 입헌 민주주의의 파괴자들은 민생 자체를 보이지 않고 왜곡시키며 파괴하고 사적 이익에 복무하게 하는 자들이다. 입헌 민주주의의 침해 문제는 따라서 민생 문제 해결의 생존 조건이다. 입헌 민주주의가 없는 곳, 왜곡되는 곳에는 어떤 민생도 존재하지 않는다. 독재자들과 그들이 시행하는 정책이 우연히 이익에 들어맞게 된 시민들의 말잔치가 있을 뿌이다.

 

이런 프레임을 조장하는 자들에게 말하자. 너희들은 동료시민의 의사와 욕구와 이익이 너와 동질적이라고 가정하는 '근시의 환상'에 빠져 있다고. 너희에게는 서비스 기관에 대한 불만만 있을 뿐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이 없다고.

2013. 7. 3.

이한.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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