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차별 곡선을 이리저리 그리고 접점이 되는 지점을 지적하는 것은 규범적 논증이 될 수 있는가?

 

1.

롤즈는 <Restatement: Justice as Fairness> 40.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유들의 형량 결과(balance of reason) 그 자체가 판단에 의존한다. 판단은 숙지된 추론에 의해 인도되는 것이긴 하지만. 물론 우리는 우리가 이유들을 어떻게 형량하는지를 묘사하기 위하여 무차별곡선을 그릴 수는 있다. (주석52- <정의론> §7:33의 사례를 보라) 그러나 무차별 곡선은 단지 표현 방식(representation)에 불과하다. 그것은 더 심층적인 이유에서 그것이 묘사하는 형량의 결과를 근거지우지 못한다. (it does not ground the balance it depicts in further reasons) 그것은 이미 내려진 것으로 가정되는 판단의 결과를 그릴(표현할) 뿐이다."

 

2.

형량되어야 할 이유(특히 가치로 표현된 이유)를 무차별 곡선을 좌표평면에 그리는 것은, 두 가지 가치가 동일 평면, 동일 차원의 가치이며, 마치 음식과 의복처럼 각각 독립된 만족을 주는, 지시되거나 떠올릴 수 있는 공통된 유형의 실체가 있는 대상으로 다루는 것이다. 이렇게 다룰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규범적 결론이다. 그러나 그 규범적 결론은 전혀 보증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평등을 x축, 자유를 y축에 둘 때 x, 즉 추상적인 평등 가치가 증가한다고 할 때 우리는 정확히 무엇을 떠올리고 있는가? 스파게티는 맥락으로부터 벗어나 스파게티를 지정할 수 있다. 그러나 평등은 그러한가? 더군다나 자유와 평등이 교환된다고 할 때 우리는 또한 무엇을 떠올리고 있는가? 어떤 맥락에서 제한적으로 사태들을 '자유적 사태'와 '평등적 사태'로 임의로 지정한 것을 떠올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지정은 잘못되어 있을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고용주가 우월한 교섭력을 이용하여 결혼퇴직제를 계약서에 명시한다고 할 때, 계약의 자유와 결혼이라는 가치향유의 평등을 대립시키는 것은, 임의로 사태의 단면을 잘라 한 쪽에만 결부시킨 것이다. 결혼의 가치향유 평등이 아니라 결혼의 자유를 대립시키면 안되는가. 계약의 자유가 아니라 계약의 교섭력 평등이라는 측면을 뽑으면 안되는가. 좌표평면의 각 축에 구체적인 쟁점의 일부 측면을 각각 결부시키는 것은 고도로 자의적이다. 다른 한편으로 한 맥락의 심상에서 뽑아낸 각 축의 결부가 다른 맥락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리라고 생각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권력이 클수록 표현의 자유를 더 많이 갖는 체제가 있다. 이 경우 자유와 평등은 어떤 식으로 무차별곡선상의 맞교환관계를 갖는가? 또는 흑인과 백인이 불평등한 사회에서 흑백혼합 결혼을 막는 법은 이 무차별곡선상에서 어떻게 표현되는가?

 

자유와 평등이 음식이나 의복처럼 각각 독립적으로 지시될 수 있는 예화적 실체를 가진 개념이라면, "평등한 자유"라든가 "자유에 있어서의 평등"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은 음식의 의복이나, 의복에 있어서의 음식이 있다고 인정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용법이다.

 

3.

이러한 용법은 루이스 캐럴의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왕이 선명하게 보여줬던 '실체화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말들은 다 보낼 수가 없었다. 게임하는 데 두 마리는 필요하거든. 그리고 심부름꾼 둘도 보내지 못했어. 둘 다 시내에 나가 있으니 말이다. 길을 따라 살펴보면서, 혹시 둘 중 하나라도 보이는지 말해 주도록 해라."

"길에 아무도 아니 보여요."(I see nobody..)
앨리스가 말했다.
"나도 그런 눈만 있다면 좋겠는데."
왕이 약간 화를 내며 말했다.
"'아무도 아니'(nobody)를 볼 수 있으려면 말이다! 그렇게 멀리서도 보다니! 나로선 이런 빛에서 실제 사람들을 보는 게 전부야!"(루이스 캐럴(Lewis Carroll), <거울 나라의 앨리스>, 이소연 옮김, 팽귄클래식 코리아, 2013, 134쪽)

 

여기서 왕은 비철학자가 저지르기 쉬운 오류를 저질렀다. 문법적어로 주어 자리에 명사의 형태로 온다고 하여 그것이 실체를 가진 대상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문장의 표층적인 문법 구조가 그 문장이 표현하고 있는 명제의 논리적 구조를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나이브한 생각이다. 이 점은 논리적 명제로 'I see nobody'를 바꾸어 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See라는 동사는 보는 주체와 보여지는 객체를 전제하므로 관계술어이다. 따라서 x가 y를 본다는 명제는 xSy로 나타낼 수 있다. 그런데 x와 y는 사람일 수도 있고 동물일 수도 있고, y는 또한 사람도 동물도 아닌 사물일 수도 있다. 따라서 y가 사람이라는 것 또한 명제의 내용으로 포함되어야 한다.

 

I see nobody는, 앨리스를 a로 표기하면  ~(∃y)(aSy & Hy)로 표현될 수 있다. (즉, 앨리스가 무언가를 보고 동시에 그 무언가가 사람이라는 것은 참이 아니다.) 이 경우 앨리스가 나무를 보거나 길바닥을 보는 것은 이 명제의 참, 거짓에 영향을 미치지 아니하므로, 이 논리식은 앨리스가 말한 명제의 진리치와 완전히 동일하게 된다. 명제값으로서 이 논리식은 I see nobody에서 누락하는 바가 없다 그런데 이 논리식에는 지금 앨리스가 보고 있는 대상이 실재하는 사람이라는 내용은 전혀 들어가있지 않다. 그렇지 않다면 부정기호 ~가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왕은 I see nobody에서 nobody라는 명사의 문법적 형태를 이유로, 앨리스가 발화한 문장의 명제내용을 Hy가 참이라는 것을 포함시키는 내용으로 아무 근거없이 변형시키고 있다. 다음 대화에서 방금 도착한 심부름꾼에게 건네는 말에서 왕의 오류는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길에서 누구를 만났느냐?"
왕이 심부름꾼에게 건초를 더 달라며 손을 내밀면서 물었다.
"아무도 아니(nobody) 만났습니다."
심부름꾼이 말했다.
"정녕 그렇구나. 이 아가씨도 '아무도 아니'를 봤다고 했거든. 그럼 분명 '아무도 아니'는 너보다 걸음이 훨씬 느리겠구나."
"전 최선을 다했습니다. 저보다 빨리 걸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아니일 것입니다."[nobody can walk faster than..]
심부름꾼이 부루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그럴 리가 없지. 아니면 그가 여기 먼저 왔을 테니까. 그럼 이제 숨을 좀 돌린 듯 하니, 시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보거라."  (위 책, 137-138쪽)

 

자유와 평등은 현실계에 존재하는 어떤 대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기준 개념이다. 또한 프레게를 따라, 이러한 개념은 함수라고 할 수 있다. 즉, "....한 경우에 자유롭다" 또는 "....한 경우에 평등하다"와 같이 불포화된 표현인 것이다. 불포화된 표현은 실체적으로 트레이드될 수 없다. 실체적으로 트레이드된다고 착각하는 것은, 오로지 그 함수를 적용하여 트레이드하는 자가 심상으로 떠올린 특정한 사태로 실체화해서 트레이드하는 심리적 트릭일 뿐이다.

 

4.

규범적 논증에서 무차별 곡선은 시각적인 설명 도구일 뿐이다. 그것은 '논증 도구'가 아니다. 왜냐하면 논증은 그것을 무차별 곡선이 그려지는 좌표평면을 설계할 때 이미 종료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은 이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5.

무차별 곡선 상에 가치들을 실체화하여 적용시키는 것은, 관계술어인 가치 개념들을 단칭술어로 바꾸어버린다.

Platon, Euthydemos. 김주일 옮김,에우튀데모스, 이제이북스, 2008. 83-39면에는 다음과 같은 역설이 소개된다.

 

에우튀데모스는 다음 명제를 확인한다.

파트로클레스의 아버지는 카이레데모스였다. , 카이레데모스는 아버지이다.

소크라테스의 아버지는 소프로니스코스였다. , 소프로니스코스는 아버지이다.

따라서 소프로니스코스와 카이레데모스는 아버지이다.

그런데 A와 다른 어떤 것이라면 A가 아니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가 돌과 다른 어떤 것이라면 돌이 아니다.)

그런데 소프로니코스는 카이레데모스와 다르다.

, 소프로니코스는 아버지와 다르다. (명제에 의해 카이레데모스아버지를 대입.)

소프로니코스는 아버지와 다른 어떤 것이므로, 아버지가 아니다. (명제의 적용)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아버지가 없다.

 

위 논증의 오류는 관계술어인 ‘--의 아버지이다, 고정된 실체를 지시하는 지시어로 바꾸어버림으로써 생겨났다. 아버지는 누군가 또는 어떤 동물의 아버지이다. 그러나 위 논증들은 모두 그 누군가를 빼버렸다. 역설은 거기서 나온다. 그리고 이런 역설을 발생시키는 무차별곡선상에서의 환원은 논증의 도구로 받아들일 수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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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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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도운영
    2013.11.04 16:29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이해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 성우맨
    2017.09.01 02:44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이 글의 <3.>에서, "I see nobody는, 앨리스를 a로 표기하면 ~(aSy & Hy)로 표현될 수 있다."에서 'I see nobody'는 연언 문장(aSy & Hy)을 부정하는 표현이 아니라 그 연언 문장을 만족하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므로 ~(∃y)(aSy & Hy)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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