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 에피쿠로스 저, 오유석 옮김, 을유문화사, 1998

 

 “중요한 가르침” 13 “모든 고통스러운 것들의 제거가 쾌락 크기의 한계이다.” 15 “어떠한 쾌락도 그 자체로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쾌락들을 가져다주는 수단이, 쾌락보다는 고통을 가져다준다.” 16 “다른 사람들의 공격으로부터의 안전이, 고통을 제거하는 어떤 힘 또는 부에 의해서, 어느 정도까지 달성도리 수 있다고 하더라도, 가장 순수한 안전은 대중으로부터의 고요와 은거로부터 생겨난다.”

17 “자연이 요구하는 부유함은 제한되어 있으며 쉽게 얻을 수 있다. 반면 헛된 생각이 요구하는 부유함은 무한히 뻗어나간다.” 17 “결핍으로 인한 고통이 일단 제거되면, 육체적 쾌락은 더 이상 증가하지 않고 단지 형태만 바뀔 뿐이다.” 18 “인생의 한계를 배운 사람은 결핍으로 인한 고통을 제거하고, 삶 전체를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 쉬운 일임을 안다. 그래서 경쟁을 포함하는 행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20 “욕망들 중에서, 그것이 충족되지 않더라도 우리를 고통으로 이끌지 않는 욕망은 필연적이지 않다. 이런 욕망은, 욕구 대상을 얻기 어렵거나 그런 욕구가 고통을 야기할 때, 쉽게 몰아낼 수 있는 욕구들을 포함한다.” (이렇게 구분될 수는 없다. 쾌락 그 자체의 역설을 이끌어내는 욕망. 가치 없는 것과 결부된 활동을 강박적으로 하려는 욕망. 가치 없는 발화를 하는 이들의 견해에 맞추려고 하는 욕망. 그리고 어떤 경로를 취하더라도 장기적으로도 달성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 실패하면 과정 자체가 모두 무의미하게 되는 욕망. 지위욕구와 같이 다른 이의 굴종, 그리고 굴종적 이의 찬탄이라는 모순된 배경을 필요로 하는 욕망이야말로 비필연적인 욕망이다.) 23 “외부 환경으로부터 생기는 불안정의 요소를 잘 다스린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에게 가깝게 만들고,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은 적어도 자신에게 적대적이지 않도록 만든다. 하지만 그는 이런 일조차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섞이지 않으려고 하며, 몰아내는 것이 더 나은 모든 것들은 그의 인생으로부터 몰아낸다.” (통제불가능한 것과 통제가능한 것의 잘못된 이분법)

 

25 “내일의 주인이 아닌 당신이여, 당신의 행복을 연기하라. 우리들 각자는 미루다가 인생을 낭비하며, 여가를 누리지도 못하고 죽는다.” 25-26 “우리는 우리의 성격을-성격이 좋아서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받건 그렇지 않건 간에-우리에게 특별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약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호의를 가진다면, 우리는 그들의 성격도 높게 평가해야 한다.” (소통, 접촉과 애착) 27 “모든 우정은 그 자체로 바람직하다” (쾌락을 얻기 위해 우정에 탐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좋고, 그 사람과 우정을 나누다보니 쾌락이 부산물로 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그 자체로 철저하지 못하였다.) 27 “다른 일들의 경우에는, 그 일이 다 끝났을 때 비로소 힘겹게 열매가 얻어지지만, 모두 배우고 나서야 즐거움이 오는 것이 아니라 배움과 즐거움이 동시에 생기기 때문이다.” (공부가 플로와 스톡의 이분법을 돌파할 수 있는 중요한 활동이라는 지적을 이미 에피쿠로스가 했던 것이다.) 28 “나는 자연을 탐구하면서 솔직히 말하겠다. 즉 대중의 의견에 영합해서, 쏟아지는 군중의 갈채를 받기보다는, 설령 아무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말을 신탁처럼 하겠다.” (이 또한 에피쿠르스의 쾌락주의 진리 기준의 부정합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진리는 발화자에게나 청자에게 감각적 쾌락을 주느냐 아니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세계를 제대로 드러내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임을 스스로도 인정.) 29 “친구들의 도움이 우리를 돕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이 도와줄 것이다는 믿음이 우리를 돕는다.” (접촉과 소통에 의해 생긴 안전판의 감각이 삶에서 본질적인 가치임을 드러낸 부분.) 29 “항상 도움을 청하는 사람은 친구가 아니며, 도움을 우정과 결부시키지 않는 사람도 친구가 아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호의의 대가로 보상을 취하며, 후자는 미래의 희망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우정은 쾌락적 관점에서 최적의 타산적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정을 나누는 친구 관계에 적절한 무엇을 하는 것이다.) 30 “자연에 대한 탐구는 사람을 자랑하거나 허풍떨거나 교양을 과시하는 자로 만들지 않고, 자존심 있으며, 스스로 만족하고, 재산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장점을 자랑하는 자로 만든다.” (객관적으로 가치 있는 것-진리와 예술-에 몰입하고 탁월성을 키워나가면 외부의 즉자적인 기초 없는 평가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중심을 가질 수 있고, 이러한 진정한 자기존중감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제로섬적인 과시-굴종 관계를 벗어날 수 있게 된다.) 31 “당신은 나에게 말한다: ‘육체의 충동이 나를 사랑의 쾌락에 약하게 만든다.’ 만약 당신이 법이나 미풍양속을 깨뜨리지 않고, 이웃에 방해를 주지도 않으며, 당신의 몸을 해치거나 생필품을 낭비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원하는 대로 당신의 기호에 따라 행동하라. 하지만 이런 문제들 중에서 어느 하나와도 직면하지 않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랑의 쾌락이 사람을 이롭게 한 적은 없으며, 그것이 사람에게 해를 주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행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에피쿠르스의 소극적 쾌락주의는 인류의 가장 진한 경험인 열정적 사랑을 하지 못하는 인간형을 만들어낸다. 열정적 사랑에는 마음의 평정과 반대되는 무엇이 있는데, 그러한 마음의 불평정을 경험한다 하더라도 열정적 사랑을 경험하는 이들은 그 사랑을 버리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파인버그의 비판과도 상통한다.) 32 “우리는 철학을 하는 체하면 안되며, 실제로 철학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필요한 것은 건강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짜 건강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유비 역시 에피쿠르소의 인식론과 윤리학의 모순을 은폐한다. 건강의 경우에는 감각적 쾌락으로 그 직접적 보증이 에피쿠르스 인식론 내에서 이루어지나. 철학의 진리치는 쾌락주의에 의해서는 보증되지 않는다.) 33 “지금 만약 부모님들이 정당한 이유로 자식들에게 화가 났다면, 용서를 구하지 않고 부모님의 분노에 반항해서 싸우는 일은 분명 쓸모 없다. 하지만 부모님의 분노가 정당하지 않고 근거가 없다면, 부모님에게 호의를 베풀어서 그들의 분노를 다른 데로 돌리지 안혹, 오히려 부모님의 화를 돋우어서 비이성적인 분노의 불길에 기름을 쏟아붓는 일은 아주 우습다.” 33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칭찬은 저절로 따라나와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치유하는 데 애써야 한다.” 34 “자유로운 삶은 많은 재산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군중이나 실력자들 밑에서 노예 노릇을 하지 않고서는, 재산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유로운 삶은 모든 것들을 지속적인 풍요 속에서 소유한다. 그리고 자유롭게 살다가 우연히 재산을 얻으면, 이웃의 호의를 얻기 위해 재산을 나눠주기도 쉬울 것이다.” (스토아 학파와 실천적 지침에서는 동일함. 다만 스토아 학파는 재산의 많음이 자신의 선과 덕에 일고의 무게도 실어주지 않기 때문이고, 또한 그것을 얻기 위해 행하는 것이 악덕일 경우가 많기 때문인 반면, 에피쿠로스 학파에게는, 굴종하고 예속되는 것은 쾌락에 실제로 반하기 때문이다.) 34 “이웃이 알면 어쩌지?라고 걱정하게 하는 일을 너의 인생에서 하지 말라.” (이 또한 지나치게 적응적이다. 설사 동성애가 허용되지 않는 사회에 있다고 하덜도 그 정체성을 구현하는 성적 지향 행위를 하는 것이 좋은 삶을 위해 요청되는 것은 아니다.) 35 “자기 만족의 가장 큰 열매는 자유이다.” (어떤 것에 집착하게 되면 강박을 낳게 되고 강박은 다른 이의 미끼에 예속되게 만든다. 미끼에 예속된 삶은 다른 이의 평가와 외부 자극에 휘둘리는 삶이므로 고통과 근심을 낳고, 고요함에서 오는 실제적인 만족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따라서 진리를 탐구하고 은거하며 소란스러운 대중들의 의견에는 신경 쓰지 않고 자신과 소통할 수 있는 감탄할 만한 성품을 지닌 친구들과 교류하면서 내적 자유를 지키는 것이 큰 만족이다. 이러한 쾌락주의 논리는 상당히 일관성이 있고, 특히 외부 자극에 휘둘리는 삶의 실질적인 반쾌락주의적 특성을 지적해냈다는 점에서 통찰력이 있다.) 39 “성교는 인간에게 이득을 준 적이 없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운이 좋은 것이다.” (이 극단적인 위험회피주의는 보편적 삶의 모델이 되지 못한다. 사랑하는 연인 사이의 성교는 접촉의 최고봉이며 자아를 잃게 만들 정도로 결합하는 행위이다. 쾌락 그 자체를 위한 쌍방의 합의 하의 성교도 그와는 성격이 다르나 스릴감과 놀라움, 그리고 일시적인 결합에서 오는 공동 모험의 감각을 가져다준다. 에피쿠로스가 은거와 평정을 강조하면서 어떤 철학적 근거 없이 자기 자신의 위험회피 성향을 교묘하게 지침으로 끼워넣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45 “욕망들 중 어떤 것은 자연적이고 다른 것은 공허하며, 자연적인 욕망들 중 어떤 것은 필연적이고 다른 것은 단순히 자연적이며, 필연적인 욕망들 중 어떤 것은 행복을 위해 필요하며 어떤 것은 몸의 휴식을 위해 필요하며 다른 것은 삶 자체를 위해 필요하다. 이런 사실을 잘 관찰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하거나 피할 때 몸의 건강과 마음의 평안을 참고하도록 해준다. 왜냐하면 이것이 행복한 삶의 목적이므로 .... 우리는 항상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즉 고통과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서 행동한다. 그리고 일단 이것이 얻어지면 모든 마음의 폭풍우가 사라진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는 잃어버린 것을 찾아 헤매듯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며, 몸과 마음의 선을 이룰 수 있는 다른 길을 찾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쾌락의 부재로 인해 고통을 느낄 때에는 쾌락을 필요로 하지만,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면 더 이상 쾌락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를 못봐서 괴로워야만 꼭 영화를 볼 가치가 있는가. 영화를 못봐서 괴로울 정도는 아니더라도, 영화를 보면 대단히 만족스럽고 가상 세계로 들어갔다 나오고 인생의 진리에 대해 간접경험을 할 것이라고 예상하면서도 그 놀라움에 두근두근 한다면 영화를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괴로움으로 강박적으로 다가오는 욕구의 충족만이 쾌락의 전부라고 보는 것은 자의적인 경계설정이다.) 47 “가장 적은 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사치에 가장 큰 기쁨을 느낀다.” “모든 자연적인 것은 얻기 쉽다. 반면 공허한 것은 얻기 어렵다.” (그러나 때에 따라 자연적인 것 자체도 얻기 힘들 때가 있으며, 처지에 따라 공허한 것을 얻기 쉬울 수도 있다. 얻기 어려운 것과 얻기 쉬운 것으로 자연적인 것과 공허한 것을 구별할 수는 없다. 그리고 사치에 가장 큰 기쁨을 느끼기 위해 가장 적은 양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쾌락주의적으로 현명한 기호이기는 하지만, 우월한 기호라고 보기는 어렵다. 좀 더 자주 쾌락을 느낌으로써 더 격렬한 감격을 보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자주 보는 사람은 영화를 가끔 보는 사람보다는 영화관의 장엄함에서 오는 쾌락을 덜 느끼지만 그렇다고 전체적으로 영화와 관련해서 쾌락이 덜하다고 할 수는 없다.) 48 “이 모든 것의 시작이자 가장 큰 선은 사려깊음이다. 사려깊음은 심지어 철학보다도 소중하다. 왜냐하면 모든 다른 탁월함들은 사려 깊음에서 생겨나며, 사려 깊음은 우리에게 사려깊고 아름답고 정의롭게 살지 않고서 즐겁게 사는 것은 불가능하며, 반대로 즐겁게 살지 않고서 사려깊고 아름답고 정의롭게 사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경험저으로 조건적인 대체적인 진리일 뿐이다. 즐겁지 아니하면 정의롭고 아름답게 사는 것이 지속가능하지 앟. 그러나 때때로 인간 실존의 비극은 이 둘의 추구 경로를 떨어뜨려 놓으며, 그 때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은 위와 같은 인위적인 접합의 선언으로는 선택할 수 없다.)

 

에피쿠로스 학파에게서 배울 점 욕구의 만족보다 쾌락 그 자체가 중요하다. 또한 실제로는 욕구에 이끌려다니면서 반쾌락주의적인 삶을 살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또한 홀로 평정하게 있음으로써 발견하게 되는 삶의 중요한 경험들이 있다. 우리의 신체적 기준으로 보자면 쾌락의 만족에는 한계가 있다. (성적 쾌락과 먹는 쾌락을 생각해보라. 자제와 검약은 그런 쾌락의 전제가 된다. 또한 동시에 하는 것의 숫자도. 두 개의 영호를 동시에 보기. 엄청나게 감동적인 영화 두 개를 연달아 보기.) 그러나 일단 욕구를 자의적으로 들이기 시작하면 그 만족에는 한계가 없다. 이러한 욕구에는 특히 양립불가능한 지위에 관한 욕구가 있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문제 쾌락 내부에서의 모순과 충돌을 제외하면, 쾌락의 좋고 나쁨을 평가할 다른 기준이 없다. 아타락시아가 최고로 좋은 쾌락이라고 하는 것은 보증되지 않은 것. 헛된 욕망을 구별하는 기준이 고도로 위험회피적으로 잘못 설정되어 있다. 우정에 대한 그의 찬탄은 쾌락주의가 부정합적임을 보여준다. 은거의 사상, 검약의 사상과 결합된 통제불가능한 것과 통제가능한 것의 보증되지 않은 이분법 또한 문제다. 은거의 사상은 조정되지 않은 사회적 문제가 구조적으로 자유를 압박하는 상황에서 그 문제의 악화를 동반한다. 이 경우 자신이 연루될 일이 아니라고 단정한 사람은 그 메커니즘도 모른채 계속해서 자신의 평정을 추구하기 위해 욕구를 강제로 버려야만 하는 압박적 상황에 처한다. 이러한 사상은 시민의 덕목과 책임이 있는 민주주의 시대의 사상이 아니며, 정치질서가 절대자의 소통불가능한 권력에 의해 정해지는 시대의 사상인 것이다. 또한, 좋은 삶과 동일시되는 행복 = 만족/욕구라는 공식, 즉 욕구가 적으면 분자가 작아도 전체 값이 커지므로 행복한 삶이라는 이론은, 잘못된 욕구 이론을 그대로 전제한 것이다. 이것은 자연적 욕구와 비자연적 욕구를 나누는 기준이 얻기 쉽고 얻기 어렵고로 나누는 것의 얄팍함과도 관계가 있다. 욕구는 더 많은 행복을 얻기 위해 자의적으로 조정하여야 할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추구할 만한 객관적인 가치를 갖는 것에 비추어 조정해야 할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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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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