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 여기가 바로 중요한 지점입니다. 우리가 강제력을 행사하는 근거로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려면, 민주주의는 정당성을 가지는 그러한 민주주의여야만 하죠. 그런데 이렇게 정당성의 문제가 개입되게 되면, 우리는 민주주의를 다수결주의로 환원할 수 없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는 다수결주의가 아니다라고 추상적으로는 받아들이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고 있어요. 실제로 이야기 해보면 민주주의를 다수결주의와 사실상 같은 것으로 보고 또 그렇게 용어를 사용하고 있어요. 그래서 사법심사, 의회의 다수결로 통과시킨 법이 위헌이라고 헌법재판소가 무효로 폐기하는 것 그 자체는 본질적으로 반민주적이다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반민주적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고 이야기를 하죠. 그런데 이건 민주주의를 다소 인위적으로 정당성 개념과 분리시킨 설명이에요. 그래서 이런 인위적인 분리를 전제로 하는 용어 사용은 그리 적절하지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민주주의를 다수결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 왜 정당성 개념을 억지로 떼어내버린 사고방식인지 한 농촌 사회를 예로 들어서 생각해봅시다. 100명이 사는 농촌 사회가 있어요. 그런데 그 중 한 명이 게으름뱅이에요. 이 게으름뱅이가 어떻게 하다 보니까 무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산에 올라가서 좋은 진경을, 구음진경 같은 걸 어디서 구해가지고 그걸 열심히 연마해서 엄청난 무술가가 되버린 거에요. 그렇지만 농촌사회에서 무술이 밥먹여줍니까. 그래서 계속 가족들이 얘를 먹여 살렸어요. 그런데 이 놈팽이 무술가가 제자를 키우기 시작했어요. 막 바위도 격파하고 하니까 스승님 하면서 따르는 그 마을 사람들이 생긴 겁니다. 가르치기도 잘 가르쳐. 제자들이 무술을 배워서 일치월장하니까, 스승은 물론 제자도 이제 함부로 못건드리는 사람이 되었어요. 이 무술가들이 행패를 부려도 건드리지 못하는 겁니다. , 우리가 힘이 엄청 세구나. 그래서 이 패거리가 농사일하며 살아가는 농민들한테 가가지고 을 뜯는 거야. , 너 곡식 추수한 것 중에 30% 내놔라. 내놔. 안 내놓는다고 반항하면 막 때려가지고 얼굴을 묵사발로 만드는 거야. 그러다가 두목이, 얼굴 묵사발은 때리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너무 들쭉날쭉하니까, 곡식 모자란 양만큼 비례해서 긴 기간 동안 감금하기로 했어요. 몇 명이 본보기로 그렇게 당하니까 농민들이 아 저 사람들 말 들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분명히 사용된 어구는 들어야 하겠다’”. 영어로는 "ought to obey", "should obey" 입니다. 그런데 “~ 해야 한다라는 말이 쓰인다고 해서 모든 맥락에서 같은 뜻이 아니거든요. 여기서는 무슨 뜻입니까. 말 안들으면 맞는다는 말이지요. , 시키는 대로 안하면 큰 불이익을 받는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들의 말이 정당성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즉 저 놈팽이 무술가들이 우리한테 명령하는, “추수한 곡식의 30%를 내놓으라는 정책에 구체적으론 동의하지 않아도 공동체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응당 따라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제, 40명이 일은 안하고 공짜 곡식 먹고 시간이 많으니까 또 신입 회원 모집을 활발하게 했어요. 그래서 놈팽이 세력이 41, 42, 이렇게 늘어나다가 49, 50, 급기야 51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에선 원래부터 마을 회관에 모여서 하는 마을 회의에서 마을의 법을 만들고, 정책도 결정해요. 그리고 안지키면 처벌도 받아요. 이제 수가 많아진 놈팽이들이 마을회의에 우우 하고 몰려가서 놈팽이단의 구성원이 아닌 농민들은 추수한 곡식의 30%를 놈팽이 무술가들에게 바쳐야 한다고 법을 땅땅땅 통과시켰어요.

 

여기서 두 가지 경우의 차이를 생각해봅시다. 첫번째는 이 놈팽이들이 50명일 때 곡식 바치지 않으면 우리 힘으로 감금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상황은 놈팽이들의 수가 마침 우연히 51명이 되어 과반수라서, 그들이 동일한 내용의 명령에 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절차를 거친 상황입니다. 그리고 농민들이 그렇게 이름이 붙은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똑같이 감금당합니다. 이 두 상황 모두, 농민들은 저 놈들의 말을 들어야 하겠다라고 이야기하겠죠. 그런데 이 두 상황에서 “~해야겠다”, “ought to”의 의미에 무슨 변화가 있습니까? 놈팽이의 숫자가 50명에서 51명으로 변화할 때 무슨 마술과 같은 질적 변화가 생겨서 갑자기, 정당성이 없던 것이 정당성이 있는 것으로 바뀌었습니까? 아무런 변화가 없죠. 농민들의 입장에서는 똑같습니다. 놀고 먹는 놈들이 내린 저 무도한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감금되고 뚜들겨 맞는다는 똑같은 상황입니다. 아무런 마술도 일어나지 않는 거죠. 다수라는 숫자 그 자체는 아무런 정당성의 효력을 지니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실존적 상황으로 돌아와봅시다. 놈팽이 무술가들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민주주의는 단순히 선호(preference)의 집계일 수 없습니다. 부당한 선호는 아무리 모아봤자 부당한 본질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 판단 자체가 놈팽이 조폭의 판단인지 아닌지는 언제나 독립적으로 검토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민주 시민들은, 우리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들은 민주주의 사회 시민이라는 바로 그 이유만으로 정치철학적 논증 대화에 끼어들 것을 실존적으로 요청받고 있는 것이죠.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놈팽이 무술가, 조폭 게으름뱅이들 같이 행동하고 있을 뿐입니다. 국가는 정치 질서, 즉 우리의 근본적인 질서, 권리, 의무를 계속해서 할당하고, 유지하고, 변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필연적으로 강제력의 뒷받침을 받는 그 질서 속에서 행위하게 되고요. 그렇다면 그 질서가 정당화가능하려면, 그 질서에서 권리를 행사하고 살려고 하면, 그래서 그 권리에 반대되는 사람에게 일단 지켜라고 이야기하려면, 애초에 그 질서를 형성할 때 자신의 주장에 근거를 갖고 있어야 하고, 주의깊게 검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시민들이 그런 검토를 충분히 하고 있는가? 검토의 외양은 갖췄는지 모르겠어요. ‘저울이라는 외양을. 그 저울은 공리주의나 직관적인 덕 이론을 짬뽕해서 작동하는 게 보통입니다. 이게 보통이라는 걸 어떻게 아느냐?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공식을 엄청 간단하게 생각한다는 점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국민은 표현의 자유 같은 기본권이 있지만 공익을 위해서 그 권리는 제한되어야 한다.” 이게 아주 간단하게 표현되었지만 실제로는 권리의 구조를 추론을 통해 따져봐야 하거든요. 그런데 자유 대 공익이라는 이 공식을 실제로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자유는 그 구체적인 사람들이 자유를 누려서 생기는 즐거움이나 이익을 생각해 보고, 공익은 그 자유를 허용했을 때 생기는 피해로 묶을 수 있는 걸 떠올려보고, 자기 마음 속의 저울에 달아본 다음에 이쪽이 더 무겁게 느껴지는데, 그러면 자유를 제한합니다. 반면에 이쪽이 더 크잖아 그러면 공익을 포기합니다.

 

이렇게 간단하게, 한번의 자유연상으로 비중을 따지는 사고방식은 판결문으로 아무리 백페이지를 써대도 공적인 정당화와는 거리가 멉니다. 왜 자신이 선택한 쪽이 무게가 더 무겁냐에 대해서 더 일반적이거나 심층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논증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똑같은 진지함과 확신을 가지고 저울의 눈금이 반대방향을 가리키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지요. 결국 내가 좋으면 오케이하고 내가 싫으면 반대한다는 소리를 서로가 외치고 있는 상황에 다름 아니게 되는 것이에요.

 

한국에서 덕 이론이 소비되고 있는 모습을 볼까요. 현재의 질서 중에 바꾸고 싶은 게 있어요. 그런데 누군가 그 질서에서 보장되는 권리를 주장한단 말이에요. 고깝습니다. 그러니 저울의 한 편인 공익 쪽에다가 의 자리를 마련합니다. 그리고 그 덕의 자리에 여러가지 덕의 이름을 계속 추가합니다. 덕의 이름이 웅장하고, 위엄있고, 진지하고, 경건하게 붙여지면 이미 기울어진 자신의 마음 속 저울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합니다.

 

덕 이론의 활용 모습을 추상적으로 그리면 이런데, 실제로 막상 마주하면 엄청 그럴듯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국가가 국민이 타락하는 것을 좌시해서는 안 되고 덕성을 국가가 적극적으로 진작하는 것이 핵심이 되어야 된다.”는 말은 얼핏 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보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우리 모두 사회구성원의 덕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서로 덕 있게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뻔한 말(truism)과 그리 다르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뻔하게 읽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읽으면 마이클 샌델을 비롯한 현대의 공동체주의적 공화주의자들에 대한 모독입니다. 왜냐하면 그건 시민들이 서로 진지하게 주장하고 함께 이끌어가자는 자유주의자의 주장과 아무 차이가 없도록 읽는 것이거든요. 어떤 사람들은 제 책을 읽고는, ‘샌델을 잘못 읽었다. 샌델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고 주장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할까요? 샌델의 덕 이론이, ‘모든 좋은 것을 다 담고 있는 뻔한 소리라고 읽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이미 뻔하다고 생각하다는 내용을, 샌델의 책을 통해 읽어낸 것일 뿐이지요. 이 경우 그 사람은 독서’, 즉 책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자기 자신을 읽어내고 있을 뿐입니다. 샌델은 분명히 자유주의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자유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반정립으로서 덕 이론을 주장하는 거에요. 그렇다면 그 점을 충분히 감안해서 읽어야 되겠죠. 즉 실제로 결론을 달리 하는 부분이 어디인지 찾아내고, 그렇게 각자의 결론을 주장하게 되는 이론적 이유를 뜯어봐야 하는 것입니다.

 

A이론과 B이론이 있다고 합시다. 두 이론의 주창자가 서로 막 싸웁니다. 그런데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문제에 두 사람의 이론을 적용시켜봤더니, 모든 규범판단의 모든 사안에 있어서 동일한 답이 나왔다고 한다면? 실제의 차이, 실익이 없는 것이죠. 그렇지만 샌델은 실익이 있다고 주장을 하고 있고, 실제로 이 사람 책을 보면 실익이 있어요. 예를 들어 샌델은 국내 탄소배출권거래 제도에 대해서 환경에 대한 공동의 책임감이라는 덕을 약화시킨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있거든요. 또한 아미쉬 공동체가 전통적인 생활양식을 대물림할 수 있도록 그 공동체의 어린 구성원들, 그러니까 학생 나이의 아이들이 학교에 못 가게 부모들이 막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고 하고 있거든요. 학생들이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대법관의 견해를 마구 조롱하고 있거든요. 이러한 구체적인 견해들의 차이도 중요하지만, 샌델이 실제로 밝힌 견해의 차이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 샌델이 직접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나오는 결론이 자유주의와 분명히 다르게 될 때에도 그 차이는 실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샌델과 같은 국가완전주의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덕스러운 활동에 보낼 시간을 빼앗긴다는 이유로 게임이나 인터넷 미디어를 규제거나 금지하는 것이 원리상 허용되어 있습니다. 남는 문제는 괴수를 잡는 게임을 하고 인터넷에서 시시덕거리며 유머자료 돌려보는 것이 덕스러운 삶이냐 아니냐 뿐입니다. 이렇게 분명한 차이가 있는데도 없다고 억지로 읽어내면 안됩니다. 설사 주창자가 별다른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자신의 이론 구조와 다른 구체적인 견해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그 점을 강조하는 것은 그 이론을 구출하는 좋은 방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그 이론의 주창자조차도 자기 이론을 준수하고 있지 못하다는 근거일 뿐입니다.

 

이렇게 이론들이 경쟁할 때, 어느 이론이 옳은가를, “내가 지금 당면하고 있는 어떤 구체적 사안에서 내가 끌리는 결론을 이 이론이 지지해주는구나라는 식으로 살펴보고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공감과 반감의 원리를 극복해보려고 이론을 공부하는 건데, 다시 좁은 사안에서 직접적인 공감과 반감의 원리에 의해서 이론 자체의 타당성을 평가하려는 순환논리를 범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롤즈가 이야기한 반성적 평형을 추구해야 합니다. , 우리의 직관적 판단들의 목록을 만들고 그 목록을 지지해주는 이론은 어떤 것이든 챙겨놓으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우리는 우리의 가장 흔들림 없는 숙고된 판단들에 부합하면서 그 자체로 매력적인 원리들을 가장 정합성 있게 규명하고, 그 원리들을 다시 구체적인 사안에 비추어 조정하는 과정을 거치고, 우리가 더 나은 원리적 설명을 찾아낼 수 없을 때에는 그 원리들에 따라서 우리의 구체적인 판단들을 수정하기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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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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