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 설정의 불가피성 논제

(덕 파악 방법의 문제점과 범주의 오류에 관한 중간 강의 내용은 생략)

 

... 그래서 이것과 연결되는 덕 이론의 또다른 핵심 문제점이 바로 두 번째 결함입니다. 그건 바로 공정한 관점 설정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미덕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누군가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 누군가는 도대체 어떻게 구성되는가? 이 점이 미덕 이론에서는 명확하지 않고, 또 실제로 뜯어보면 미덕 이론 내부에서는 관점을 설정하는 방법이 도출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건 큰 결함입니다. 설사 미덕이론을 취한다 하더라도 어떤 관점에서 미덕을 바라보느냐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거든요.

 

관점을 잘못 잡게 되면 엉터리 같은 결론에 이를 수가 있어요. 어떤 부대의 사단장이 시찰을 나왔어요. 그래서 그 시찰받는 대대는 그 전날부터 때 빼고 광내고 다 했겠죠. , 그런데 사단장이 와서 보니 열심히 광낸 것은 봐주지 않고, 야속하게도 이런 말씀을 하는 겁니다. “다른 부대에는 테니스장이 있던데. 장교들이랑 부사관들이 테니스도 종종 치고 얼마나 좋냐 우애도 다지고. 테니스장이 없네? 저기 저 언덕이 있는 곳에 테니스장이 딱 있으면 좋을 텐데.” 이렇게 지나가듯이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대대장이 그 다음날부터 모든 사병들의 저녁 휴식시간과 주말 휴식시간을 반납하고 테니스장을 만들 것을 명령했습니다. 사병들은 언덕을 삽으로 다 파내고 땅을 전부 발로 다져서 평평하게 한 다음에 구할 수 있는 모든 재료를 동원해서 손으로 네트도 만들고 기둥도 세우고 선도 그어서 테니스장을 완성했습니다! 사단장이 두 달 뒤에 다시 시찰을 나와보니 아주 훌륭한 테니스장이 생긴 것입니다. 이제 사단장의 관점에서 보면, 어떻습니까? 입술만 놀렸을 뿐인데 테니스장이 뿅하고 생겼어. 완전 공짜죠. 그렇지만 사병들의 관점에서 보면 그 모든 비용은 공짜가 아닌 거죠. 만일 사단장의 관점을 전체적 관점이라고 하면 엄청난 오류가 있게 됩니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오류에 깊이 빠져 있는 논의가 성장이냐 분배냐하는 논의에요. 한국 사회에서 이 질문을 화두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저는 이 질문 자체의 의미가 정말로 파악되느냐고 한 번 묻고 싶어요. 사람들이 자신이 던지는 그 질문을 정말 이해하는지가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그 질문은 관점이 설정되지 않고서는 아무런 가치 판단의 답변을 받아낼 수는 없거든요. 그런데 관점 설정에 대한 논의는 전혀 없이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하고 그런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질문에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한 답안을 취하는 사람은 전제된 관점을 아주 자의적으로 설정하고서는, 그렇게 설정한 이유를 설명할 필요성도 못느끼는 사람입니다.

 

왜 그럴까요? 한 개인이 갖는 몫은 결코 GDP가 아니거든요. 자기한테 돌아가는 몫이거든요. 또한 평등이 달성됨으로써 얻게 되는 이익도 지니계수 값이 아닙니다. 어떤 평등 분배 형태에서 자기한테 돌아오는 몫이죠. GDP나 지니계수 값은 각 개인들에게 어떻게 몫이 돌아가느냐 전체 그림을 한 측면에서 보여주는 통계 수치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에게는 전체 그림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그림을 결정할 자격도 없고요. 분배의 전체 그림이 종형 곡선을 그릴 것이냐, 일직선을 그릴 것이냐, 우상향 곡선을 그릴 것이냐를 누군가 '선호'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그려진 곡선의 위치에 들어가야 할 아무런 도덕적 이유가 없거든요.

  결국 결정해야 하는 것이 전체 그림이 아니라 개인에게 돌아가는 몫임을 직시한다면, 이 몫을 받는 한 개인을 누구로 잡을 것이냐. 이 문제가 중요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성장률이 아무리 100%, 그러니까 1년에 부가 두 배로 커진다고 해도, 소수 1%가 이 늘어난 몫 이상을 전부 다 가져가고 나머지는 오히려 몫이 줄어든다고 하면, 이 변화는 다수 99%에게는 처지가 더 나쁘게 변화한 의미 밖에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성장이냐 분배냐 하는 질문을 던지고 우리 나름대로 답을 한단 말이에요. 우리 나름대로 답을 할 때 자기 입장에서 답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어요. 다 국가 전체의 입장에서 말한다고 답을 해요. 국가 전체의 입장이 뭐냐. 누가 속 시원하게 얘기를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아무도 얘기를 안 하죠. 그리고 사실은 자신이 속한 계급의 입장에서 생각하면서, 말로는 국가 전체의 입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국가 전체의 입장이라고 단순히 이름을 붙이는 것만으로는, 그 입장이 실은 자신의 계급적 지위가 투사된 특정한 입장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지워지는 건 아닙니다. 부대를 책임지고 있는 사단장의 입장이 자신의 입장이 아니라 부대 전체의 입장이라고 우기는 것과 마찬가지죠. , 어떤 공동체의 지도자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 자체로는 공정한 관점이 아니라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예하 부대의 대대장의 관점도 공정한 관점이 아닙니다. 그리고 각 사병의 관점도 공정한 관점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사병 개인으로서는 전투 훈련을 빠지면 좋겠지만 그런 식으로 다 빠져서는 어떤 수용할 만한 결과도 나오지 않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이 사람들의 특수한 이해관계를 어떠한 방법으로든 조정하고 종합해서 하나의 합당한 관점을 만들어 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이러한 가능성을 부인하게 된다면 어떨까요? 예를 들어 모든 주장은 각자의 편견과 이데올로기에 따른 관점일 뿐이라고 체념하게 된다면요. 그럴 경우 우리는 어떤 주장도 비판할 수 없는 완전한 카오스 상태로 빠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살인자가 누군가를 살인했다가 발각되어 법정에 섰다고 합니다. 판사가 피고인은 유죄. 피고인을 무기징역에 처한다.”라고 판결내리니까 피고인이 주장합니다. “그 판결은 아무런 정당성이 없다! 왜냐하면 그건 판사 네 생각, 나를 판결하는 입장에 있는 판사 너의 관점에서 무기징역을 내린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의 관점에서는 내가 설사 죄를 저질렀어도 처벌을 받지 않고 이 법정을 걸어나가는 것이 좋다.” 이 때 판사가 자신의 관점이, 아무렇게나 생성될 수 있는 수많은 자의적 관점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그 피고인의 주장을 논박하지 않는다면, 기껏해야 할 수 있는 말은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그래. 당신이 무기징역에 처해져야 한다는 주장과 그냥 걸어나가야 한다는 주장 사이에는 아무런 논증가치의 차이가 없다. 둘 다 똑같다! 그러나 나는 힘이 있다. 여기 있는 법정 경위는 나의 명령을 듣는다. 넌 지금 힘이 없다. 그러니 넌 선택의 여지가 없어.” 이런 식의 논리는 깡패의 논리입니다. 앞서 살펴본 농촌의 게으름뱅이 조폭들의 말과 다를 바 없단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노골적인 사례에서는 그 논리의 이상함을 쉽게 눈치채면서도, 좀 덜 노골적인 사례에서는, 이런 논리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논리에 쉽게 휘둘린단 말이에요. 옳은 것은 다수의 관점일 뿐이다라는 논리 말입니다.

 

실제 우리가 “~이 옳다고 주장할 때에는 자신의 특수한 관점에서 우선 얘기부터 해놓고, 그다음에 힘으로 덮어씌우겠다는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이 점을 배웁니다. 옛날에 아이들이 하는 오징어라는 게임이 있었어요. 땅에 오징어 같은 것을 그려넣고 편을 나눠 게임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오징어 게임의 규칙이 자신이 속한 또래집단에 따라 좀 다를 때가 있어요. 그래서 게임을 하다가 이 경우 죽은 거냐, 안죽은 거냐논쟁이 일어난단 말이에요. 근데 거기에 대해서 자기 입장만 내세우게 되면 합의는 불가능하게 되죠. 그렇다고 골목대장이 힘으로 눌러 자기 입장만 내세우면 그건 합의가 아니죠. 그러니까 오징어 게임을 같이 하던 양쪽 모두의 이익을 어떤 기준에 의해서 평가하는 사고가 불가피해요. 이를테면 사소한 규칙 하나를 어겼다고 그때까지 진행해왔던 내용 모두를 뒤엎을 수는 없죠.

 

그런 종류의 관점을 자유주의에서는 합당한 관점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참여자들이 거부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은 그런 원칙을 도출할 수 있는 관점이죠. 예를 들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평생 교육기회도 같지 못하고 미숙련 노동자로 늙어죽는 길만 남아야 한다와 같은 관점은 전혀 합당한 원칙이 아닙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운이 좋아서 부잣집에 태어나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일 뿐입니다. 자신이 가난한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겠죠. 그리고 어떤 집에 태어나느냐는 누구의 책임도 아닌 도덕적의로 자의적인 사실일 뿐이죠!

 

그래서 그처럼 도덕적으로 자의적인 사항들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도덕적으로 관련 있는 사정들만을 고려하는 관점을 세워야 합니다. 그 관점을 중심으로 한 정의관을, 롤즈는 공정으로서의 정의라고 합니다. 그 관점을 좀 더 생생하게 묘사한 것이 바로 롤즈가 제시한 무지의 베일입니다. 내가 부자를 부모로 뒀건, 지능이 높은 사람이건, 내가 잘생긴 사람이건, 흑인이든 백인이든 내가 어떤 종교를 믿는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우리의 기본적인권리와 의무를 할당하는 기본적인 원칙에 대해서 합의한다고 했을 때, 합의될 그 원칙이 바로 정의로운 원칙이라는 겁니다. 그 원칙은 어떠한 것이 될 것이냐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는 거죠. 물론 계약론자 중에 구체적으로 바로 이런 무지의 베일을 도입하지 않는 계약론자도 있어요.

 

방금 제가 한 논의는 두 가지 단계로 이뤄져 있습니다. 1단계는 관점 설정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깨닫는 것입니다. 2단계는 그 관점을 공정한 토대 위에 세우는 것입니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예로 설명해보겠습니다.

 

바람직한 버스 정차시간은 어느 정도 길어야 할까요?”라는 질문이 제기되었다고 합시다. 그냥 보통 한국사람들이 하듯이 직관적으로 저울의 양편을 갈라 다음과 같은 이익들을 올려놓을 수 있겠죠. 버스 정차시간이 짧으면 교통 흐름이 원활해지고, 버스가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게 됩니다. 버스 정차시간이 길면 승객의 안전도가 높아지겠죠. 이제, “교통 흐름 원할 + 빠른 속도” vs “승객의 안전도를 가늠합니다. 누가 가늠합니까? 우리는 팔팔한 젊은이일 수도 있고 아니면 굼뜬 노인일 수도 있으며, 버스 밖에 있는 자가용을 모는 사람이나 택시에 타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겠죠. 또한 늘 바쁘기 때문에 버스가 빨리빨리 움직였으면 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대체로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 버스가 좀 느긋하게 가도 되는 사람일 수도 있을 겁니다. 이 관점들을 어떻게 종합해야 할까요? ‘적당히 균형을 맞춘다고 얼버무리면 안됩니다. 보통 너의 균형과 나의 균형이 다를 때가 대부분입니다. 논의는 시작부터 교착상태에 이르고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됩니다.

 

공리주의자는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다 합해서 최대화하는 쪽으로 가자고 하겠죠. 그러나 이렇게 보게 되면 팔팔한 젊은 사람들이 버스를 많이 타고 있을 때는, 노인의 안전은 그 숫자에 밀려 거의 고려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롤즈가 공리주의는 개인이 서로 구별되는 존재라는 점(distinctiveness of individual)’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비판했을 때 지적하고자 했던 바입니다. 우리는 사회의 협동하는 구성원 중 하나인 몸이 어느 정도 불편한 사람들이, 정류장에 잠시 섰다가 바로 출발하는 버스에 탔을 때 입을 심각한 상해의 무게를 진지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즉 자기 자신이 약간의 추가적인 속도를 위해 심각하게 다칠 위험을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한 보장을 해줘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단지 타인보다 재빠르다는 이유로 타인의 안전을 무시하게 된다면 그 다른 사람을 사회에 협동하는 온전한 구성원으로 대우하지 않는 거죠. 그건 그냥 우리가 다치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어떤 도구로서의 존재로 바라보는 셈이 됩니다.

 

결론적으로, 버스의 정차 시간은 그 버스에 현재 타고 있는 가장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내리기에 충분한 시간으로 설정되어야 합니다. 모든 정차 시간을 다 그 기준으로 할 수는 없겠지요. , 모든 정차 시간을 그렇게 넉넉하게 주는 지점으로부터 우리는 이탈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젊은 사람들만 타고 있는 버스이고, 이미 승객들이 다 내렸다면 형식적으로 문을 열고 계속 서 있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버스에 노인이나 장애인, 임신부가 실제로 타고 있고 그 사람들이 내리고자 벨을 눌렀다면, 정차시간은 넉넉하게 주어져야 하는 겁니다. 이것으로 정차시간에 관한 논의는 끝나게 됩니다.

 

이 결론에다 다시 현대생활의 바쁨, 현대생활에서의 속도의 중요성이라는 가치와 또 형량해보겠다. 그리고 나서 또 기름 값과 우리나라가 석유 한 방울 안나는 나라라는 점을 고려해서 다시 또 설정하겠다. 이런 식으로 계속 할 순 없어요. 한번 공정한 관점을 설정해서 답이 나왔으면 그 결론이 정당한 지점인 것입니다.

관점 설정을 하지 않고 단지 추상적 개념으로 언급된 이익들을, 정체를 알 수 없는 저울에 올려놓고 전체적 관점에서 무게를 재어본다고 하니까, 결론이 계속 일그러지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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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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