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당한 관점이란 (1) 자유롭고 (2) 평등한 시민의 관점.

 

버스 정차시간 이야기에서 드러났던 그 관점을 좀 더 일반적으로 표현하면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의 관점입니다. 첫째로, 우리가 자유롭다 함은 우리 스스로 인생의 기획을 구성하고 재검토할 수 있는 주체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평등하다 함은 우리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특질들은 다 다르지만, 모든 이들의 이해관심, 쉽게 말하면 이익이 평등하게 고려되어야 하는 동등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첫째 요건, 자유롭다고 하는 점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봅시다.

 

샌델 같은 공동체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이 허공 속에서 자기 마음대로 선택하는 로빈슨크루소 같은 존재를 상정한다고 비난하죠. 공동체의 이야기와 맥락 속의 존재를 보지 못한다고 말이에요. 그런데 그건 잘못된 비난입니다. 우리는 공동체로부터 영향을 받고, 인도도 받고, 도움도 받지만, 그렇다고 공동체에 지배당해야 하는존재가 아닙니다.

 

인생을 살 때 친구의 조언을 얼마나 받아들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이 문제를 좀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어떤 사람 A가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이 A의 친구인 B가 무척 똑똑해요. 거기다 품행도 훌륭하고 인품도 훌륭하고, 아는 것도 많고, 하여튼 훌륭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A가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친구 B한테 상담을 하면 좋은 답을 줬어요. 그런데 A가 좀 멍청해서 B가 좋은 답을 줬는데도 자기 고집 피우다가 결국 후회할 짓을 한 적이 몇 번 있어요. 그래서 A가 결심합니다. “이제부터는 친구 말을 잘 들어야지.” 그리고 어려운 있을 때 친구한테 상담하고 그것을 무조건적으로 따릅니다. 이 상태에서도 A는 여전히 자유롭습니다. 그 친구가 신뢰할 만한 하다는 궁극적인 판단을 자기가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유롭다고 할 때, 모든 이슈에 대해서 자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생각해보고 결정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궁극적인 판단의 책임과 권한을 자기가 가지고 있으면 자유로운 것입니다. 위 사례에서 B가 안타깝게도 병에 걸렸어요. 그 병이 뇌에 생긴 병이라 B가 사리분별을 잘 못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A가 조언을 구하면 B가 아무렇게나 답을 한단 말이에요. AB의 판단을 더 이상 구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에, 어려움에 처한 B를 도와줄 뿐, 더 이상 B의 조언을 구하지는 않게 됩니다. A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A가 자유로운 처지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자유주의의 가장 위대한 성취 중 하나인 종교의 자유와 관련해서 생각해봅시다. 모든 종교인은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가 참이기 때문에 믿습니다. 그리고 그 종교의 권위자, 성직자가 하는 말을 거의 전부 따르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된 데에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난 가족 공동체, 지역 공동체의 맥락과 이야기가 영향을 많이 미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따른다고 하여도, 결국 자신이 종교를 믿는다함은 그 종교에 대한 자신의 판단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을 부인하는 사람은 국교를 설립하고 배교를 처벌하는 법을 찬성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그 종교를 국가가 국교로 지정하고, 그 종교를 믿지 않으면 불신죄로, 믿었다가 신앙을 버리면 배교죄로 처벌을 하는 것을 찬성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태에서 종교를 믿는다 함은 처벌을 무기로 위협하는 국가의 노예가 된 것이지 더 이상 자유로운 공화국 시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공동체주의자들은 이러한 자유주의의 중요한 교훈을 하나의 일반적 원칙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샌델은 종교를 믿는 것이 덕스럽기 때문에, 덕을 고양하는 국가는 당연히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다는 이상한 이유를 댑니다. 종교가 덕이라서 그 행사의 자유를 인정한다면, 무신론의 자유를 허용하는 이유를 결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사안별로 덕의 카드를 뽑아들어 논의를 단절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정치철학의 과제는 사안별로 덕의 이름을 붙여 현재 우리의 태도를 무비판적으로 옳은 것으로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숙고된 확신을 해명하는 원리들을 규명하여 그 원리들을 활용하여 보다 어렵고 논란이 많은 문제들을 판단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원리는, 무엇이 좋은 삶이냐에 대한 심층적인 문제에 관한 우리의 궁극적인 판단의 자율성을 국가가 강탈할 수 없다는 보다 일반적인 원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공동체주의자들은 공동체를 떠나서는 사람이 살 수 없다’, 공동체의 영향을 받고 도움을 받으며 산다는 사실 명제로부터 공동체가 좋은 삶에 관한 궁극적인 판단권을 찬탈해야 한다는 당위 명제로 비약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반도에서는 이런 찬탈이 아주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으며 불과 최근 십몇년간 제한적으로 판단권이 시민 개개인에게 부여되었을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판단권을 다시 국가나 다수에게 돌려줄 것이냐, 아니면 자유주의의 프로젝트를 계속 밀고 갈 것이냐 하는 지점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를 덕스럽기 때문에 공동체에 의해 허락된 삶의 영역이 아니라, ‘인간이 존엄을 가지고 자기 삶을 진정성 있게 살아나가기 위한 요건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샌델 이전에도 한국사회에서 자주 오해되고 있던 점이고,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둘째 요건, 동등함(equality)에 대하여 살펴봅시다.

 

자유로운 시민들은 모여 협동하며 삽니다. 협동하게 되면 혼자 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분업도 하고 교류도 하고. 당연히 혼자서는 도저히 생산할 수 없지만, 함께 협동하니까 나올 수 있었던, 공동의 노력으로 생긴 과실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조건에서 협동할 것이냐, 즉 누가 무슨 일을 맡을 것이며, 각자 분업해서 나온 공동의 과실은 어찌 나눌 것이냐 이 점에 대해 무슨 정해진 바가 있어야 하겠죠. 그런데 이 협동의 조건이, 도덕적으로 자의적인 점을 이유로 해서 사람들을 불평등하게 대우하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해 동등한 지위에서 합의되지 아니하였을 그러한 내용들은 공정한 협동의 조건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샌델이 적극적 평등실현조치를 옹호하는 드워킨의 논변을 비판하면서 그 근거로 든 통속적인 응분논리는 이런 공정성에 위배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도덕적으로 자의적인 어떤 특성들을 뽑아서 그 사람의 본질적 응분과 연결시키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람들을 결국 불평등하게 대우하는 셈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평등하게 대우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에 대해 혼란을 겪습니다. 재산권이 이미 현 제도 형태대로 있는 곳에서 시장 협상을 하게 해주는 것이 평등 대우라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논의를 해야 할 자리에 결론부터 가져다 놓는 것입니다.

왜 이것이 순환논리가 되는지, 스캔론이 <우리가 서로에게 지는 의무>라는 책에서, ‘합당성합리성의 구분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든 것을 약간 변형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어떤 마을인데 그 마을에는 조그만 강이 흐릅니다. 그리고 이 마을에는 강력한 지주가 있고, 자영농들과 소작농들이 있습니다. 대대로 이 지주 집안에서 강의 물길을 관리해오며 물을 누가 얼마나 쓸 수 있는지를 결정해왔습니다. 또 지주는 농기구 생산소도 소유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지주가 그렇게 악독한 사람은 아니고 급하게 몹시 필요한 사람에게는 물길을 끌어다 쓸 수 있게 또 허락도 하는 정도의 관대함은 갖춘 사람이지만, 성격이 불같아서 자신의 입장의 합법성을 문제삼으면 격노할 거란 말이에요.

 

당연히 이 지주는 자신의 논에 우선적으로 물을 끌어다 쓰고 남은 물을 나머지 농민들이 쓰게 했지요. 예전에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기후가 변해서 비가 덜내리게 되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런데도 지주는 예전에 하던 그대로 자기 논에 마음껏 물을 쓴단 말이에요. 당연히 자영농들의 논에는 필요한 물이 없어서 곡식들이 시름시름 앓습니다. 농민들이 고민하다가 지주를 찾아가기로 합니다. 이 때 농민들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1안은 토지 면적에 비례해서 물을 쓰도록 관리하자는 것이라고 해봅시다. 농민들이 지주에게 가서 그렇게 하자고 말하는 것은 합당하죠. 지주가 이것을 거부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힘이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자신이 물길을 우선적으로 끌어다 쓰던 관행을 정당화해줄 이유가 없거든요. 지주가 그런 주장을 거부할 수 있다고 인정해버리면, 우리는 단지 자영농의 아들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가을과 겨울에 주린 배를 움켜쥐어야 한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하니까요.

 

그렇지만 농민들은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아까 지주가 불같이 화를 내는 성격이라고 하였잖아요. ‘면적에 비례해서 동등하게 물길을 끌어다 쓰도록 하자고 하면 오히려 당신들 쓰던 물도 못쓰게 만들어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고는 농기구도 팔지 않을 것이 예상됩니다. 그래서 농민들은 원래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1안보다 훨씬 약한 요구인 물을 조금만 더 남겨 달라라는 요구만 하기로, 2안만 제시하기로 합니다. 이 조심스럽고 눈치를 보는 요구에 지주는 큰 혜택을 베풀어주는 마음으로 허락합니다. 그래서 1안을 제시했을 때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되는데 2안을 제시했을 때는 2안을 얻습니다. 그러니 2안을 제시하는 것이 농민들 입장에서 합리적이긴 하죠. 그러나 이게 합당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의로운 권리와 의무의 질서란 가장 여러 사람들이 자신의 합리적 이익을 가장 최대로 추구해가지고 나오는 조정점이다라는 생각은 정의의 질문에 대해서 잘못된 답인 것입니다. 첫째로, 그런 답은, 위의 사례에서 지주가 그렇게 많은 토지와 농기구 생산소를 소유하고, 또 물길을 우선적으로 관리하는 권한을 쥐게 된 것을 전제로 이야기를 진행하듯이, 불평등하게 분배된 재산권을 전제로 이야기를 진행하니 순환 논리입니다. 둘째로, 시장에서 희소한 재능이나 자원을 가져서 협상력이 강하다는 것은 그 사람이 합리적 협상에서 우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지, 그 사람이 따낼 수 있는 이익이 합당하다는 점은 보여주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평등한 시민들의 공정한 관점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권리와 의무의 질서만이 정의의 법칙에 근거한 질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등한 시민들이 출발점으로 삼는 상태는 모두가 평등한 권리, 소득, 부 등등을 갖는 평등 상태가 될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이탈해서 좀 더 불평등한 질서를 인정할 수도 있죠. 다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 불평등이 모두에게 이득이 되어야 합니다.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 함은, 그 불평등 구조에서 제일 아래에 있는 사람에게도 이득이 됨을 뜻합니다. 그래서 모든 불평등은 부정의하다는 추정을 일단 받지만, 그것이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불평등일 경우에는 납득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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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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