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과제, 우리 시대의 정의란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의 지위"를 보장받는 것, 즉 부분적 노예로 복속되어 자의적 전횡에 휘둘리지 않는 동등한 독립적 지위를 확보하는 것. (비정규직, 학력제도에 관한 문제)

 

(전 강의 내용에서 계속)

 

이제 우리는 모든 권리와 의무의 질서는,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공정한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중요한 질문, “우리 시대의 과제는 무엇인가?”에 답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 답은 바로, 우리가 입헌민주주의 사회의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으로서 가져야 할 지위를 온전히 보장받는 것입니다. 그러한 지위를 보장받지 못했을 때, 우리는 부분적으로는 기계로, 부분적으로는 노예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의 기획을 구성하고 추구할 자유를 갖지 못하고 공동체의 처벌과 불이익의 위협 때문에 이러저러하게 살 때 우리는 부분적 기계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며, 다른 사람들이 정당화되지 않는 권력과 재산권을 무기로 협상한 대로 협동의 조건을 받아들여야 할 때 부분적 노예로 복속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와 평등의 문제는 우리의 독립성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독립적인 지위는 타인의 자의적 전행에 예속되지 않는 지위입니다. 이 시대, 우리의 삶을 자의적으로 휘두를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진 주요 주체로 두 가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국가입니다. 국가 구성원 다수가 A 종교를 믿지 마라 결정했기 때문에 나의 판단은 그것을 믿는 삶이 좋은 삶이라고 판단함에도 불구하고 처벌받지 않기 위해서 A 종교를 버려야 되는 상황은 타인의 자의적인 전행에 예속되는 전형적인 상황 중 하나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본입니다. 예를 들어 회사 내에서 상사나 사장에게 성희롱을 당했는데도 이의를 제기할 안전한 통로가 없고, 소송을 하려고 해도 불이익을 두려워해 증언을 서줄 사람이 없는 상황. 이런 여건에서는 성희롱을 당하느냐 당하지 않냐가 오로지 상나자 사장의 자의에 달려 있게 됩니다.

 

보통 국가는 자유를 침해할 수 있고, 자본은 평등을 침해할 수 있다고만 이해하지만 실상은, 이 둘 모두 자유와 평등의 원리를 어기는 것입니다. 다수는 자신이 무엇을 믿을지만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무엇을 믿을지까지 결정함으로써 평등의 원리를 위반합니다. 자본은 선택지 자체를 협소하게 좁힘으로써 자유의 원리를 위반합니다.

 

입헌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들은 평등한 자유와 권리, 권한을 갖는 것이 당연합니다. 특수한 제도가 그 자유와 권리, 권한을 불평등한 선으로 가져갈 때에는,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판결을 내릴 수 있는 것은 판사만 가능합니다. 아무나 판결을 내릴 수는 없어요. 그리고 이렇게 특수한 사람들에게만 그러한 권한을 부여한 이유는 그것이 가장 공정한 재판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법전문가를 길러내기 위한 교육, 판사들의 법해석을 견제할 수 있는 법률가 공동체의 존재 등 다양한 보조 장치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만일 그 권한이 어떤 방향으로 남용될 위험이 있다면 추가적인 견제 장치를 도입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권한의 불평등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사법시험을 잘치는 사람이 본질적으로 갖게 되는 응분도, 힘있고 없는 사람들이 협상해서 나온 타협물이 아닙니다. 그 권한은 임무의 분업에 기초해서 협동체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특별히 위임한 권력입니다. 즉 자유롭고 동등한 사람들이 그 이유를 볼 수 있는 불평등입니다.

 

모든 제도적 불평등은 이와 같은 정당화 이유를 가져야 합니다. 회사 제도나 회사 내의 위계 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제도가 생산성을 높여 모든 이들에게 이득이 되는 한도에서 그 제도가 창출한 불평등은 허용됩니다. 그런데 부하직원을 마음대로 성희롱하고도 처벌받지 않을 권한 같은 것은 협동 체계가 모두에게 이익이 되게 돌아가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특권적 지위를 인정하는 것은 자유로운 시민들의 동등한 지위, 독립성을 일그러뜨립니다. 그러한 특권은 어느 누구도 힘에 의해 강압되지 않고서는 합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의적인 전횡을 가능케 하는, 정당화되지 않은 권력을 없애는 것이 바로 시민의 지위 보장을 의미합니다.

 

성장, 행복, 미덕과 같은 논의는 이러한 지위 보장이 전제하고 논의할 일입니다. 아무리 한 국가의 경제가 크게 성장한다 하더라도 그 이득이 소수의 특권층에게 돌아간다면 그건 정치공동체가 목표로 할 방향이 아닙니다. 모두가 행복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 수단이 모두의 뇌를 세뇌시켜 밥만 먹어도 행복한 바보기계로 둔갑시키는 것이라면, 그 목표는 결코 추구되어서는 안됩니다. 미덕을 추구하는 것 역시 시민들의 자유와 평등을 부인하고 그들을 탁월성을 담는 그릇으로 다루어 다수나 엘리트의 논의에 따르도록 하는 것이라면 이미 필수 전제를 어긴 것입니다.

 

이제 구체적인 논의로 들어가보겠습니다. 우리 시대 가장 자의적인 전행에 노출되어 있는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장, 행복, 미덕, 공정과 같이 동일한 차원에 놓을 수 없는 범주를 상충한다고 놓고 자신의 마음 속의 저울로 이 문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적당히 처지를 좀 개선시켜주겠다는 수혜적인 태도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비정규직 중에서도 먼저 기간제 노동자의 문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간제 노동자가 왜 문제가 됩니까? 고용이 불안정하고, 승진도 잘 안 되는데다가, 임금도 적게 주고, 경력도 인정 안 해줍니다. 총체적 불평등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이러한 불평등은 어떻게 하여 정당화되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생각해봅니다. 그러면 성장이냐 분배냐는 도식으로 돌아가기 쉽습니다. 이 두 상충하는 목표의 균형을 잡는 것은 최대의 효용이라는 기준에 비추어 이루어지겠죠. 한마디로 이런 겁니다. 노동유연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성장이 잘 안 된다. 성장을 하려면 기간제 노동이 필요하다. 기간제 노동자들이 불평등으로 인해 겪는 고통은 전체적으로 더 늘어나는 행복에 의해 정당화된다.

 

우리는 이러한 논증이 얼버무리는 문제점을 앞서 밝힌 바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특정한 관점을 은폐시키고 있으면서 그 관점을 정당화하고 있지 않습니다. 전체 효용을 합산하는 관점을 도대체 왜 받아들여야 하는가? 왜 우리가 서로 구별되는 그 자체가 목적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효용을 담는 한낱 그릇으로 취급되어 숫자에 밀리면 거의 아무것도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다루어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유지상주의자는 균형잡기의 노력도 하지 않습니다. 자유지상주의자는 사장이 재산권이 있으니 그 재산권을 갖고 맺는 계약은 아무렇게나 해도 좋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거나 사기를 치지 않고 노동자와 기간제 고용계약을 맺으면 언제든 잘라도 좋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어떤 여성 노동자가 성희롱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합니다. 그러면 넌 해고. 이렇게 해도 된다는 겁니다. 성희롱에 대해 손해배상 하는 것은 별론으로 하고 말입니다. 노조를 만들려고 해? 너 해고. 이렇게 해도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방금 이야기했던 모든 권리들은 독립적인 시민의 지위에서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 소수가 재산권을 쥐고 권력을 남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지위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재산권이 있는 사람들이 유리한 협상 지위에서 이런 것들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재산권과 그런 계약을 법률로 보호해주는 국가는 많은 시민들을 일종의 부분적 노예 상태로 밀어넣는 셈이 됩니다. 이를테면 a라는 정당을 지지하지 않으면 고용계약은 종료된다는 계약도 가능하게 됩니다. 이것은 정치적 자유권을 무력화시키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 서울시의 공기를 구별로 한 두 명의 부자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합시다. 그럴 경우 서울시민들은 그들이 원하는 내용의 패키지가 다 들어 있는 계약을 모두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런데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한 재산권을 불평등하게 소유하고 있다면, 그것은 모든 이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 재산의 사적 소유는 그것이 모든 시민들의 독립적인 지위를 더 강화하거나 그 지위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소득과 같은 재화를 더 늘려주기 때문에 정당화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정당화 범위를 넘어서 시민을 노예화시킨다면 그 재산권은 더 이상 정당화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오늘날 부유한 사람이 되고 가난한 사람이 되느냐는 많은 부분 어떤 집에서 태어나고 어떤 재능을 갖고 태어났느냐와 살아가면서 우연히 겪게 되는 운에 좌우됩니다.

 

자본이 시민의 지위를 잠식하는 일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어떤 회사에서 노동생산성을 높여야 하니 담배도 피지 말아야 하고 혈중 니코틴 검사도 받아야 하고,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뭐 적는지도 감시하고 헛소리하면 퇴출시키겠다고 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이런 문제를 전혀 문제로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순환 논증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재산권을 재산권에 의해 정당화하는 논리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초에 불평등한 재산권 질서가 공적으로 세워지는 이유는, 그것이 모두의 독립성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고, 그러한 한도에서 정당화된다는 점을 망각하고 있씁니다.

 

이제 샌델의 미덕 이론에 의해 이 문제를 풀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에 대해 샌델이 직접 언급한 바는 없지만, 노예제에 대해 설명한 바를 통해 간접적으로 추론해보겠습니다. 샌델은 노예제의 타당성을 검토하려면 노예의 본성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누가 폭력이나 강제에 의하지 아니하고도 노예 노릇은 기꺼이 할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죠. 가끔 신문에 등장하는 현대판 노예로 비극적인 삶을 살다가 겨우 알려진 정신지체 장애자들 말입니다. 지능이 낮고, 아이큐 70정도 되고 고아에다가 시키는 말은 다 믿고 그래서 섬 같은데서 악덕 부부가 일을 평생 동안 부려먹고 밥은 개밥 같은 거 주고 그런데 물리적인 폭력은 당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노예 노릇이 마땅한 사람입니까? 그러니까 이게 본성 문제라고 해서는 안되는 겁니다. 본성 문제가 아니라 권리의 문제인 거죠. 이 사람들도 지능이 낮다 뿐이지 보호받아야 할 독립성과 권리가 있는 겁니다. 이것을 보호하지 않은 것이 문제지 본성을 운운할 문제가 아니란 겁니다.

 

샌델의 이런 질문 던지기를 기간제 노동에 적용하면 문제는 더 명백해집니다. “폭력과 강제를 쓰지 않고 기간제 노동자 노릇을 할 사람이 있는가? 누구인가?” 우리나라에 60%가 넘지 않습니까, 지금! 이들의 본성이 다 기간제 노동자란 말입니까. 노동자의 본성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매우 자의적인 토대에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노동자의 본성에 안정적인 고용을 바라는 욕구가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안정적인 고용에 대한 욕구를 들어 노동이란 일상생활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자아실현 수단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욕구가 본성을 규정하지는 않습니다. 사용자야 당연히 노동자의 본성은 기간제 노동이라고 말하겠죠. 봉건제를 극복한 자본주의의 자유로운 노동시장의 본질은, 사용자와 노동자 어느 쪽도 신분적으로 서로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데 있다고 말입니다. 이처럼 어떤 욕구에 초점을 맞추느냐, 누구의 입장에서 보느냐, 어떤 맥락에서 어떤 개념을 사용해서 말하느냐에 따라 본질을 달리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노동자의 본성과 본질을 단언한다고 해서, 이 문제를 둘러싼 정치적 토론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샌델의 이론에서 기간제 노동의 타당성을 따지는 두 번째의 후보로 공동체의 공유된 이해”(shared understanding)을 살펴보죠. 오늘날 한국 사회의 비정규직은 전체의 50%를 넘는다고 합니다. 간접고용, 특수고용직 노동자까지 포함하면요. 50%가 넘는 노동자들, 즉 공동체의 다수가 불안정 노동을 영위하며 살고 있으므로 노동의 본질은 불안정이다, 라는 추론이 샌델의 두 번째 방식에 의하면 성립할 수 있습니다. 물론 기간을 달리 잡아서 1997년 이전으로 돌아가면 그 반대의 결론이 나오겠죠. 이 또한 공동체 서사의 어느 부분을 끄집어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결국 노동의 본질이 무엇이냐, 노동자의 본성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고비사막을 건너면서 매일매일 열 번씩 던진다 해도 답을 구할 수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샌델이 중요시하는 통속적인 응분의 이념, 즉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 사람은 본질적으로 더 많은 몫을 차지할 자격이 있다는 신념은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 비정규직은 노동시장 경쟁에서 진 사람들이니까 진 사람들에게 마땅한 만큼만 받아야 하고, 난 이긴 사람이니까 내 것은 정당하다는 논리로 쉽게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민해야 하는 것은, 공정한 협동의 조건이 무엇인지, 우리가 사회에서 협동해서 생산할 때 그 협동 생산의 결과물들을 누가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 어떻게 정해야 공정한가의 문제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유주의의 논증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공정한 조건이란 무엇일까요? 출발점은 평등 분배겠죠? 그런데 불평등 분배로 옮겨갈 타당할 이유가 있다면? 있습니다. 바로 불평등 분배로 옮겨 감으로써 최하의 지위에 있는 사람의 상황이 오히려 더 나아지는 것입니다.

 

모델을 아주 단순화해서 생각해 봅시다. 건기와 우기가 있는 어떤 사회가 있습니다. 우기에는 나막신이 많이 팔리고 건기에는 짚신이 많이 팔립니다. 그런데 건기라고 해서 비가 계속 오는 것은 아니고, 우기라고 해서 내내 비가 오는 것도 아닙니다. 짚신 회사와 나막신 회사에 각각 50명이 상시 고용되어 있습니다. 이 이상을 상시 고용하면 회사에 부담이 됩니다. 팔리지 않는 물건을 계속 생산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다른 50명의 사람들은 건기에는 짚신 회사에 고용되고, 우기에는 나막신 회사에 고용됩니다. 이렇게 되면 노동력이 필요한 곳에 분배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생산성이 높아집니다. 우리가 평등 분배에서 불평등 분배로 가는 강력한 이유 중 하나가, 생산성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인센티브를 통해서요.

 

다른 예를 들어 봅시다. 의사들이 복잡한 수술을 하면 돈을 많이 받잖아요? 의사 자격을 따기 위해 투여한 노력이 그만큼의 보상을 가져야 할 응분을 본질적으로 보장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인센티브를 통해, 전문지식을 습득하고 육체적 · 정신적으로 부담이 되는 고도의 훈련을 받게끔 하고, 다른 사람들의 생명과 신체의 건강이 내 손에 달려 있다는 압박감과 스트레스가 큰 일을 하게끔 하는 유인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 그와 같은 불평등이 허용되는 것입니다.

 

만약 유인 구조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불평등은 근거가 없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지금 중간단계의 시험 성적과 교육 기회를 연결짓는 서열화된 학력제도입니다. 만약 a 대학이 명문 대학이어서 강의가 아주 좋다고 해봅시다. b 대학은 명문 대학이 아니어서 강의 질이 낮습니다. 시험을 쳐서 점수가 높은 사람은 a 대학으로, 낮은 사람은 b 대학으로 갑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이처럼 차별을 두고 있습니다. 원래 동등하게 들을 수 있는 강의에 대한 접근을 이렇게 차별하는 데에 점수가 낮은 사람도 수긍할 만한 이유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강의를 동영상으로 만들어서 모두가 같이 듣게 하면 되는데 굳이 배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a 대학의 학생들만 수준 높은 수업을 듣게 하고 이들에게 수업을 들었다는 보증서를 졸업장으로 발행해 주는 식으로 차별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누구나 더 좋은 강의를 들을 수 있는데 굳이 일부에게만 기회를 독점시키는 것은 생산성을 증가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차등의 정당화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학교가 학벌 딱지를 붙여서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고, 그에 따라 노동시장의 차별이 이루어지는 것도 공정한 협동의 조건으로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각 직업 분야에서 만약에 선별 기능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자격 분야별로 등급을 나누어 자격증 제도를 완비하고 직무 이력 제도를 실시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그 때 노동자가 구직하려는 시점에서 요구하면 됩니다. 그 전의 중간 단계 어느 시점에서 능력이 얼마나 있었냐 하는 점을 굳이 평가할 이유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서열화된 학벌이 이미 있는 곳에서 각 행위주체는 보다 높은 학벌을 따고 보다 높은 학벌을 갖춘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이 합리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제도는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도 국공립대 통합 이야기하면 하향평준화 아니야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 하향평준화라는 말에는 무언가 생산성이 저하된다는 암묵적인 전제가 깔려있어요. 그러면 어디서 도대체 생산성이 저하되는지를 밝혀야 되는데 이 하향평준화라는 수사를 하는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밝히지 못합니다. 그냥 경쟁은 차별과 연결되고 차별은 학력 서열화와 연결된다는 막연한 자유 연상을 할 뿐입니다. , 차별을 하면 성장을 하고 성장을 하면 떡고물이 떨어진다는 일종의 독단적 교리를 반복하고 있을 뿐입니다.

 

고가의 실험 장비 같은 것은 희소합니다. 이런 것은 강의처럼 다 뿌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보다 값싼 실험장비 등만을 활용해서 보여준 실력이 높은 사람을 선발해서 뽑는 수 밖에 없겠죠. 그러나 그런 경우가 아닌데 교육기회를 차별하고, 그 차별된 교육기회를 받았다는 것을 다시 노동시장에 평생 달고 다니게 하는 제도는 정당화 근거가 없단 말입니다.

 

제게 변호사 자격증이 있지만, 벤처 회사에 가서 프로그래머로 고용해 달라고 하면서, 변호사 자격증 따느라 고생했으니 임금을 더 달라고 요구한다면 어떨까요? 아무런 근거가 없죠. 왜냐하면 그 회사의 협동 조건에서, 적은 임금을 받는 사람들이 변호사 자격증을 가진 이에게 더 많은 임금을 주는 것에 대해서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생산성을 높이는 인센티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건기와 우기가 있는 짚신과 나막신 사회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업은 실업자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보다 그 사회의 생산성을 높입니다. 그렇다면 그 높아진 생산성으로 산출한 과실은 어떻게 분배되어야 하는가?

 

당연히 고용안정성에서의 불평등으로 인해 더 많은 부담을 진 사람이,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된 사람이 더 많이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동종 유사한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동일노동 · 동일임금은 정의의 관점에서 대단히 불완전한 제도입니다.

 

제가 입대 후 논산 훈련소에서 제가 훈련을 받았는데, 거기 구막사 화장실 물이 안 내려갔어요. 수세식 좌변기인데도 물이 안내려가. 그래서 손잡이를 내리면 전부 그게 다 올라오는 거에요. , 결국 그걸 깨끗하게 하려면 다 퍼내서 잘게 분해한 다음 수챗구멍으로 밀어 넣어야 되거든요. 잠시 상상만 해도, 정말 강한 비위와 인내심을 요하는 일이라는 걸 알 수 있죠. 그런데 1소대 2소대 3소대가 있는데, 첫주에 1소대 배식, 2소대 건물 및 마당 청소, 3소대 화장실 청소, 이렇게 배분했어요. 아 그런데, 3소대가 화장실 청소의 엑스퍼트야. 청소시간이 끝나면 그것들이 들어있는 좌변기들이 아주 깨끗해. 천국 같아. 중대장마저 깊은 인상을 받았어요. 그래서 중대장이 3소대가 무척 마음에 들어서 말했습니다. “3소대가 화장실 청소를 너무 잘해서, 훈련 9주 내내 3소대가 화장실 청소를 맡는다!”.

 

청소시간이 배식시간이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 그 비위 상하는 청소하고나서 곧바로 밥먹으러 가야 된다는 겁니다. 또 화장실 청소가 제일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맨날 밥을 제일 마지막에 먹습니다. 그러면 맛있는 반찬 하나도 안남고 시간도 없어서 허겁지겁 밥만 입에 넣다가 일어나야 되요. 짬통으로 가면서 밥 먹으면 서서 먹는다고 기간병들이 또 소리를 질러요. 이렇게 된 이유는 그들이 가장 힘든 일을 묵묵히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똑같이 훈련병 대우해주고 똑같이 배식했다고 말은 할 수 있겠죠.

 

비정규직들에게 기껏해야 고용된 기간 동안 형식적으로 동일노동 · 동일임금만을 이야기하는 우리의 태도가, 이 중대장의 태도보다 나을 게 뭐가 있습니까. “당신들은 원래 나막신 회사, 짚신 회사 왔다갔다 하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왔다갔다 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큰 부담을 지는 것이지만, 그냥 고용되어 있는 동안 임금만 똑같이 주겠다하는 것 아닙니까. 화장실 청소 소대니까 9주 내내 화장실 청소 하라는 것 아닙니까.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불평등이 있다면 이 불평등은 응분이나 본성이나 본질에 의해서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 불평등으로 인해 가장 많은 부담을 지고 열악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 오히려 평등 상태보다 이익이 될 때에 정당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정규직은 동일노동에 대하여 최소한 1.3배는 더 받아야 합니다. 다른 회사에서의 비정규직 경력 또한 똑같이 인정되는 전제에서 1.3배입니다. 또한 실업급여를 받는 기간도 2배로 길어야 하며, 무료로 공적인 직무훈련을 받는 기회가 내실있게 우선적으로 주어져야 합니다.

 

학교의 경우, 기간제 교사와 정규직 교사가 있습니다. 정규직 교사가 출산이나 개인 사정으로 휴가를 떠났을 때 기간제 교사가 서너 달 동안 그 자리를 채웁니다. 정규직 교사는 열두 달 내내 꼬박 급여를 받지만 비정규직 교사는 띄엄띄엄 일할 뿐만 아니라 일하지 않는 기간에는 수입도 없습니다. 또한 훨씬 먼 거리를 출퇴근해야 할 경우가 많습니다. 새로 일자리를 알아보는데 시간과 비용도 많이 듭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훨씬 더 많은 보상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이 최종목표라는 생각은 완전히 틀렸습니다. 그건 적당히 수혜적 입장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신이 비정규직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서 답을 내면서도 그 관점을 은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비정규직 교사에게 경력조차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그냥 매번 다른 학교가면 새로 제로 베이스에서 계약서를 작성하곤 하는 겁니다.

 

한편, 다른 종류의 비정규직, 생산성을 높이지 못하는 비정규직 제도는 없어져야 합니다. 대표적으로 대기업 내의 사내하청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사내하청 기업들은 생산성을 높이는 어떤 일도 하지 않습니다. 그 사내하청 기업의 기업주들은 단지 중간착취자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모든 지시 및 설비 제공은 원청인 대기업에서 합니다. 사내하청 기업에는 아무런 실질적인 기술과 자본이 없습니다. 중간 착취자가 늘어나면 놀고 있는 인력이 늘어나는 셈입니다. 지주와 소작인이 있는 사회하고 지주 마름 소작인이 있는 사회가 노동 생산성이 어느 쪽이 높겠습니까. 당연히 지주하고 소작인만 있는 사회가 높겠죠. 왜냐면 마름은 중간에 피 빨아먹는 일을 할 뿐 생산적인 노동을 하지 않으니까. 그만큼 비생산적인 인원이 늘어나는 거죠. 그러니까 간접고용은 실질적으로 고유의 기술 자본 가치가 없는 한, 단순히 인력을 대 주는 그러한 하청은 우리 사회에서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노동유연성은 (기간제 노동자에게 가장 큰 이익을 주는) 기간제 노동까지만 허용해줄 뿐, 간접고용을 정당화해주지 않습니다. 간접고용은 개별 기업의 이윤은 높여주지만, 전체 사회의 생산성은 떨어뜨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가장 열악한 처지에 있는 사내하청업체 노동자들에게 이득을 주기는커녕 더 열악한 지위를 줄 뿐이기 때문입니다.

 

계약형식상 도급인 사내하청 뿐만 아니라, 중간착취 기능만 하는 파견근로업체들도 모두 사라져야 합니다. 직업의 알선이 필요하다면 이 일은 이윤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국가가 세금을 재원으로 수행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노동이동을 해야 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사회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가장 큰 부담을 지고 있는 자들이므로, 이들에게 정보를 주는 일은 당연히 모두의 부담으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성 분석이 아니라 공정한 여건과 공정한 협동의 조건이 무엇인가를 따질 때 우리는 훨씬 풍부한 대안의 논의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정치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결코 안락의자 위에 앉은 철학자들의 탁상공론이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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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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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민주주의와 사회윤리학 담론 형성을 위해 노력하는 '시민교육센터-배움의 연대망’ 홈페이지 입니다. 이곳에서는 열린 강의 형태의 시민교육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트위터 아이디: civiledulee, 이메일: civiledulee@gmail.com (이한)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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