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론이나 구상, 추론 방식에 불운한 명명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1) 그 구상(Konzeption)에 대한 체계적인 해명과 이해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2) 실제로 타당한 이해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서 끊임없이 이탈시키는 (3) 자연스러운 연상으로 오도하게 만드는 이름이 달리는 것이다.

 

이것이 왜 심각한 문제인가?

 

정치철학이나 법학에 입문하는 사람은, 이론과 구상 이전에 개념을 접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타당한 규범학에서는 허용되지 않을 편견, 주먹구구 방식의 흙돌 위에 쌓아올려진 직관적인 추론 방식을 갖고 있다. 인간 본성에 내재해 있다고도 볼 수 있는 그러한 추론 방식은 간단하고, 보편적인 도덕 문법이 작동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훌륭하게 작동하지만, 첨예하게 논쟁이 이루어지거나 이해관계자들이 다투고 있는 상황에서는, 개념의 애매함과 흠결, 연상으로 인해 의식하지도 못하는 자의적인 결정을 산출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이익의 '형량'이다.

 

A의 이익과 B의 이익이 상충한다. 이 이익 갈등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타당한 해결책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이 정치철학과 (그리고 그보다 더 특수한 여건에서 제한적으로 이루어지는) 법학의 가장 큰 주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해결하는 논증활동을 "형량[Abwägung 衡量; balancing]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해결에 대한 지식을 체계적으로 배우기 이전에 모든 젊은이들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는 직관적인 추론 방식은 바로 "내 마음 속의 저울"이다. 바로 어떤 사안에 직면했을 때, 갈등의 축을 중심으로 한 쪽의 이익이 더 심각하고 무겁게 느껴지는가, 다른 쪽의 이익이 더 심각하고 무겁게 느껴지는가를 마음 속으로 느껴보고 심각하고 무겁다고 생각되는 쪽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다. 여기서는 논의의 단계, 관련되는 가치의 구조와 제약, 그리고 통제되어야 하는 추상수준, 보편화의 원칙은 모두 무시된다.

 

우선, 용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衡量은 刑量과는 다른 용어다. 刑量은 범죄자에게 유죄를 선언하면서 결정되는 범죄자가 처벌받아야할 형벌의 종류와 양을 의미한다. 刑은 '형벌'의 '형'을 量은 양을 의미한다. 이 종류와 양을 결정하는 활동을 양형이라고 한다. 형량은 영어로는 sentence, 독일어로는 Strafausmaß로 표현된다.

 

반면에, 衡量은 比較衡量의 줄임말로 이익의 중요성을 가늠해보는 추론활동을 가리킨다. '추론활동'은 그것을 생각해보는 사람의 머리속에서 진행되는 '정신적 과정'(mental process)과는 다른 것으로, 일정한 추론의 체계화된 방식을 일컫는다. 어떤 이익의 중요성을 어느 쪽이 무겁다는 느낌을 느껴보려고 애쓰는 사람은 정신적 과정을 겪고는 있지만 추론활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 衡量이라는 말이, 추론활동보다는, 느낌을 느껴보는 정신적 과정을 연상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衡量은 중국어로는 héngliáng으로, 비교하고 재고 측정하고 평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자로 衡은 저울, 즉 무게를 다는 기구를 의미하며, 量은 재고 짐작하고 그 양을 헤아리는 것을 말한다. 

 

이 단어 자체가 연상시키는 바는, (i)'저울'과 (ii)저울대의 양 쪽 어떤 무게를 가진 '실체'를 올려놓고 (iii) 저울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는가, 또는 저울의 눈금이 어느 쪽으로 가리키는가, 하는 일련의 물리적 작용이며, 그 물리적 작용으로 은유되는 정신적 과정이다.

 

영어로는 balancing 즉, '균형잡기'가 되는데 '균형을 잡는다, 밸런스를 맞춘다'는 것도 평균대 위에서 몸 양쪽의 무게중심을 적절히 조정하듯이 실체화된 무게를 가늠하여 결정하는 정신적 과정을 연상시킨다.

 

독일어에서 Abwägung 은 abwägen의 명사형태로, 이 동사는, '신중히 검토하고, 고려하고, 무게를 다는' 행위를 지칭한다. 이 동사는 wägen과 그 앞의 전철 ab으로 구성된 것인데, wägen은 무게를 달고, 곰곰히 생각하거나 숙고하는 것을 말한다. 전철 ab는 무엇에서 어떤 것을 분리하고 격리하고 차단하거나 옮기거나, 어떤 동작이 종결되고 완성될 정로도 충분히 남김없이 행해진다는 뉘앙스를 가미한다. 그래서 abwägen은 '관련된 모든 것들의 무게를 남김없이 가늠하는 정신적 과정'을 연상시킨다.

 

결국 '이익 충돌을 결정하는 추론 활동'은 어느 언어에서나 간략하게 집약되어 은유적으로 지칭되면서 위 (i), (ii), (iii)의 직관적 요소를 연상시키는 '정신적 과정'에 가까운 뜻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매우 불운한 일이다.

 

사람들은 그래서, 관련되어 제시된 사실적 논거와 규범적 논거들을 추상수준도, 단계도 따지지 않고 한꺼번에 몽땅 열거한 후에, 왼쪽과 오른쪽에 각각 늘어놓고는 그것을 다 읽어보고 드는 마음의 느낌이 기우는 바로 곧장 달려가게 된다. 그러고는 "나는 형량을 하였다"고 선언한다.

 

법익형량의 과정을 설시하는 판결문의 구조는 이런 직관적 편견을 강화한다. 판결문들은 형량의 기준점들을, 추상수준도 따지지 않고 열거해놓고는, 그 기준점들에 맞는 점들을 주욱 열거하고는, 그러므로 결론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이 때 보통은 읽는 사람에게 인상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서, 자신의 결론을 반대하는 논거들은 항목을 함께 묶어서 적은 수의 항목으로 열거하고, 자신의 결론을 찬성하는 논거들은 항목을 세분화시켜서 많은 수의 항목으로 열거한다. 그러므로 훨씬 많은 논거가 자신의 결론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꾸민다. 그리고 '형량'에 대한 직관적 개념 이해만을 가진 사람들은 그러한 꾸밈에 쉽게 넘어간다.

 

이러한 태도는 학계도 오염시켜, 학자들도 논문에서 예비적인 논의만 실컷 하다가 실질적인 결정에 있어서는, 법원이 판결문에서 그러듯이 애매하고 추상수준도 제각각인 형량의 기준점들 몇가지(서로 상충할 수도 있는 기준점들)를 제시하고는, 구체적인 결론은 구체적인 형량에 달려 있다 할 것이다, 라는 짐짓 겸손한 태도로 끝맺는다. 이것은 형량의 기준점1에 대해서는 a쪽이, 기준점2에 대해서는 b쪽이 부합하면, 전체 형량의 결과는 각각의 부합을 보고 나서 마음 속에 기우는 쪽으로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기준점의 항목을 묶거나 분리시켜 서로 조정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이것이 불운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형량의 필요성은 '이해관계자들이나 그것을 판정하는 제3자의 직관적 느낌이 서로 충돌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느낌의 무게를 가늠해보는 정신적 과정은 형량을 요청하는 상황을 징표하는 것이다. 즉, 이제 논의를 해야 할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느낌이 만장일치거나 의문의 여지가 없다면 추론활동을 할 필요성은 실천적으로 제기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무고한 사람을 살해하는 것을 비난하고 제재해야 한다는 명제는 누구에게나 의문의 여지 없는 것이고, 그런 한에서 지금 현재 형량을 실천적으로 요청하지 않는다. (물론 그 명제의 더 심층적인 근거를 다른 사안에서의 명제와 정합적으로 연결짓는 일반적이고 심층적인 원리로 구성해내는 활동은 언제나 요청되기는 하지만)

 

극장 간판을 그려야 할 필요성이 있는 상황은 극장 간판을 그리는 것과 같지 않다.

하루의 매출을 마감하면서 한 눈으로 가늠할 수 없는 돈을 세어야 할 필요성이 있는 상황은 돈을 세는 것과 같지 않다.

마찬가지로 형량을 할 필요성이 있는 상황은 형량을 하는 것과 같지 않다. 

 

출발점이 되는 상황을 그 활동의 내용으로 동치하는 것은, 결국 우연히 판단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의 근거지워지지 않은 느낌으로 그 사안을 결정하겠다는 소리이다.

 

그런데 이러한 착각을 법실무 훈련의 과정에서는 교정시켜 주지 않는다. 변호사들은 판례가 애매하게 제시한 형량의 기준점들을 충족시키는 징표들을 끌어대고 충족시키지 못하는 기준점들을 사소화(trivialize)하는 전략을 쓰기 바쁘다. 그러므로 이의의 제기자나 그러한 이의로 인해 판단을 해달라고 온 사건의 판단자 어느 쪽도, 자신들이 입문한 시절 그릇 가져왔던 '형량'에 대한 직관적이고 오류에 찬 자유연상식 개념의 부작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개념의 음운요소가 연상시키는 바는, 그 음운요소가 합성되어 특수한 지식체계의 맥락에서 의미하는 바와는 전혀 다르다. 빅뱅이론은 이미 고정된 공간 안에서 까맣게 집약되어 몰려 있던 물질들이 산소와 결합하여 폭발하면서 터져나와서 커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한 직관적 개념 이해는 물리학 교육을 받으면 자연스럽고 철저하게 교정된다. 그런데 왜 법학교육을 받으면 같은 성과가 나오지 않는가?

 

개념의 음운요소가 자연스럽게 연상시키는 바를 가지고 정신적 과정을 정당화 체계로 오해하는 것은, <거울나라의 앨리스>에서 붉은 여왕이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넌센스나 마찬가지다.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 <거울 나라의 앨리스>, 이소연 옮김, 팽귄클래식 코리아, 2013, 175-177쪽.

“뺄셈을 못하는군. 나누기는 할 수 있느냐? 칼로 빵을 나눠봐. 그럼 그 답은 뭐지?”

“제 생각엔 ……”

앨리스가 시작하려는 순간, 붉은 여왕이 대신 대답했다.

“당연히 버터빵이지. 그럼 다른 뺄셈을 해봐라. 개에서 뼈를 빼봐. 뭐가 남지?”

앨리스는 생각에 잠겼다.

“뼈를 빼면 당연히 뼈는 안 남을 거고요. ……개도 안 남겠죠. 나를 물려고 달려들 테니까요. …… 그러면 나도 안 남을 거예요.”

“그래서 아무것도 안 남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거냐?”

붉은 여왕이 말했다.

“제 생각엔 그게 답인 것 같아요.”

“변함없이 또 틀렸구나. 개 정신은 남지.”

붉은 여왕이 말했다.

“하지만 전 잘 모르겠 …….”

“아니, 왜 몰라? 자, 봐봐. 개가 정신 줄을 놓겠지, 그렇지 않겠어?”

“그럴 것도 같네요.”

앨리스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러니까 개가 가버려도, 개 정신은 남는 거야!”

여왕이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앨리스가 최대한 엄숙한 목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개랑 개 정신이 각각 다른 길을 가겠죠.”

 

추상수준이 다른 것을 같은 수준인 것처럼 다루고, 그에 따라 서로 포섭하거나 물리는 관계에 있는 것을 대립하는 것으로 다루며, 비중을 부여한다는 자기 마음의 심상이 떠올랐다가 가라앉으면 그것이 바로 정당화의 끝으로 생각하는 수많은 법률가들의 정신상태가 위 붉은 여왕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렇다면 형량이란 무엇인가?

형량이란, (i) 진지하게 여겨야 하는 이익의 갈등 상황에서 (ii) 이익의 추상수준을 통제하고 조정하여 비교판단할 수 있는 같은 차원에서 (iii) 보편화가능한 원칙으로 각 입장을 정식화한 후 (iv) 그 입장들이 원용하고 있는 가치의 구조와 제약에 부합하게 (v) 순서대로 논의의 단계를 밟아 제기되는 쟁점의 관문을 거쳐 (vi)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의 관점에서 합당하게 거부할 수 없는 원칙인지 아닌지를 살펴보는 추론 활동이다.

 

간단히 말하면, 형량은 사안에서 제기되는 이익을 심사가능한 보편적 원칙으로 정식화한 후, 그것이 타당한 가치의 제약과 구조에 부합하는지를, 자유롭고 평등한 관점에서 따져보는 활동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상충하는 '느낌'을 임의적인 관점에서 자의적으로 끌어들일 여지는 최소화된다. 논의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지점이 어딘지도 명시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예를 한 가지 들어보자. 성범죄자에게 치료라는 이름으로 화학적 거세를 강제하는 것은 합헌인가?

규범학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입문 이전, 또는 입문 단계의 젊은이가 이 판단을 하기 위해 거치는 정신적 과정을 묘사하자면 다음과 같다.

(i) 성범죄가 심각하다는 점, 성범죄로 입는 피해자의 고통, 그리고 성범죄자를 육체적으로 무력화함으로써 잠재적으로 예방될 범죄의 양을 대충 가늠한다.(또는 열거한다.)

(ii) 성범죄를 저지른 (비난받아 마땅한 인간이) 화학적 거세를 당함으로서 생기는 불편과 불이익을 연상한다.

(iii) (i)이 무겁고 심각하다.

(iv) 합헌이다.

(v) 합헌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는 (i)을 진지하게 느끼지 않는 사람이므로 더러운 범죄자를 옹호하는 냉혈한이다.

(vi) 이것은 논증이며 합리적인 법학 활동이다. '형량'이라는 단어가 연상시키는 바가 그렇다.

 

물론 입문 단계에 정신능력이 머무르는 재판관은 이렇게 노골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판결문을 뜯어보면 이런 식인지 아닌지는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정신적 과정에서는, 원래 꼭 거쳐야 하는 관문들을 열쇠로 열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건너뛰거나 부수고 없앤다.

 

하나의 쟁점만을 들자면 다음과 같다.

(1) 처벌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그 능력에도 불구하고 범죄로 나아가 피해자를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았다는 점을 이유로, 국가가 그 범죄자의 구체적인 동의를 구하지 아니하고, 그 행위를 비난하며 제재를 강제하는 것이다.

(2) 신체의 완전성을 훼손하는 것은 형벌의 종류로 허용되지 않는다.

(3) 따라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능력이 객관적 여건이나, 자신이 보유한 신체 때문에 없거나 극히 약한 정도로 감소한 사람은 처벌받지 않는다. 이를테면 어떤 이가 자신의 자녀를 인질로 잡고 절도하지 않으면 인질을 죽이겠다고 하고 다른 대안이 없을 때 절도한 사람, 정신분열증에 걸려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을 공격한다고 착각하고 상해를 입힌 사람, 뇌에 종양이 생겨 충동억제 기능이 현저히 떨어져 자신의 양녀에게 성적 접근을 한 사람 등이 그 예다.

(4) 치료는 환자의 신체가 보다 더 나은 능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신체 완전성을 훼손시키는 의료행위다. 따라서 신체 완전성을 침해당하는 주체는 '동의'를 해야 하며, 동의를 하지 못할 상황이면 객관적으로 '추정적인 동의'라도 있을 상황이어야 한다.(교통사고를 당해 의식불명) 반면에 암에 걸린 사람이 암수술을 받지 않겠다고 했을 때 수술대에 강제로 눕혀서 수술을 강행할 수는 없다.

(5) 치료를 강제할 수 있는 유일한 예외는 치료에 대한 의사결정능력이 완전히 훼손된 정신병에 걸린 환자다.

(6) 치료 동의능력도 없는 정신병자는 형사처벌을 받지 않는다. (책임의 조각)

(7) 성범죄자는 처벌능력이 있으며, 규범적으로 비난받고, 형사처벌을 받는다. 

(8) 그러므로 그의 신체는 온전하고 범죄를 저지를 능력이 성욕이 있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평가된다.

(9) 그러므로 성범죄자는 치료의 동의 요건을 무시하고 치료를 강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10) 만약 명제 (9)를 부인하면 성범죄자의 처벌적격을 부인하여야 한다.

(11) 화학적 거세는, 인위적으로 성능력을 무력화시키는 약물을 외부에서 주입시키는 것으로, 신체의 완전성을 훼손한다.

(12) 화학적 거세의 그 목적은 신체의 능력을 더 낫게 통상적인 수준으로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능력을 단기적으로 더 열악하게 훼손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며(즉 물리적 거세와 같은 효과를 가져오는 신체 무력화), 장기적으로도 신체의 완전성이 훼손되는 부작용을 낳는다.

[우울증을 낳으며, 골다공증을 유발해 가벼운 사고에도 뼈가 부러지게 만들며, 혈당·혈압 상승, 간기능 이상, 고열, 두통과 같은 직접적인 고통을 유발한다.]

(13) 따라서 화학적 거세는 치료가 아니라 신체의 완전성을 훼손하는 처벌이다. 성욕은 범죄의 원인이 아니다. 성욕은 모든 건강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일이며, 삶을 살아가게 하는 통상적인 원동력 중 하나다. 

(14) 신체의 완전성을 훼손하는 처벌은 현행 헌법 하의 규범체계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지능이 높은 사기범에게 지능을 몇십퍼센트 낮추는 약물을 투여하지 않으며, 손재주가 대단한 절도범에게 손을 굼뜨게 만드는 약물을 투여하지 않는다. 지능이 높고, 손재주가 좋다는 것은 범죄의 아무런 원인도, 비난이 되어야 할 대상도 아니며, 그러한 지능과 손재주가 있건 없건 상관없이 다른 시민들을 동등한 주체로 다루지 않았다는 바로 그 점에서 그 범죄행위가 비난되는 것이다.

 

명제 (9)와 명제(14)는 어떻게든 논의되고 넘어가야 하는 '관문'을 이루며, 이것은 처벌, 자유, 비난, 행위능력, 치료, 동의와 관련된 가치와, 그 가치를 정식화한 원칙이 가하는 제약이다. 이 가치들의 구조를 그냥 무시할 수 없다. 이 관문은 그냥 부수거나 건너뛰어 무시할 수 없다. 관련된 가치의 구조에 자신의 결론이 더 부합한다는 점, 즉, 자신의 결론이 그 예화인, 일반화된 원칙이 오히려 그 가치의 구조에 정합적으로 들어맞는다는 점을 보이는 더 심층적인 논증으로만, 닫힌 문을 열고 나아갈 수 있다. (이 사안에서 그와 같은 논증이 제시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지만, 논의의 목적상 이점까지만 지적해두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는 피해갈 수 없다. 그러나 '형량'이라는 단어가 자유연상시키는 바가 형량의 내용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은 그런 논의를 피해가면서도, 피해갔다는 점을 의식조차 하지 않는다.

<끝>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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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아
    2014.01.01 22:44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명료합니다. 멋집니다.
    • 이한
      2014.01.02 14:38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명쾌하게 이해해주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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