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진리, 알약의 난점

 

매트릭스는 거짓의 세계다. 거기서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거짓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거짓이다. 총체화된 허구다. 총체화된 허구의 세계 내의 자료들로는 그 허구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그래서 외부에서 제공되는 알약을 먹어야 한다.

 

알약은 두 가지 난점을 제기한다.

1) 알약을 먹어야 하는 판단의 근거는 제시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근거들은 총체화된 허구의 세계의 자료들에 불과하고, 따라서 거짓된 자료를 근거로, 진실된 것을 알게 해준다는 알약을 먹는다는 것은 말이 안되기 때문이다.

2) 일단 알약을 먹은 후의 세계가 진실된 세계이고, 알약을 먹기 전의 세계가 참인 세계라는 점은 어떻게 판단하는가? 예를 들어 그 알약이 비참한 환영을 보여주는 알약이고, 그 약효를 벗어나는 다른 알약을 먹어야만 평온한 진짜 세계로 돌아온다고 똑같이 타당하게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치명적이다. 이 치명적 문제는 유아적이고 독백적인 주체의 능력으로 이성을 환원하는 견해의 결함이다.

 

이성이란 어떤 유아적이고 독백적인 주체에 오롯이 내재한 능력이 아니다. 그러한 능력이 있다는 가정은 별 의미가 없는데, 그 주체는 자신이 그러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를 검토할 아무런 방안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그런 능력이 있다고 독단적으로 전제하거나, 아니면 총체적으로 잘못되었다고 회의하거나 둘 뿐이다.

 

2. 매트릭스 비유를 즐겨 사용하는 사람들의 특징

 

매트릭스 비유를 즐겨 사용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인식론적으로 특권화된 위치에 놓는다. 이러한 특권화된 위치에 놓인 유아적 존재는 그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플라톤의 동굴 비유는 사실 매트릭스의 고전적 판본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묶여서 그림자만 보고 있는데, 한 사람만이 동굴 밖을, 진짜 세계를 본다.

 

이러한 인식론적으로 특권화된 위치는 '비언어적으로 접근한' 진리를 가정한다. 그러나 그러한 말은 자기 집 창고에 요정이 있다는 주장과 다를바 없다. 다른 사람들에게 납득할 수 있는 근거, 언어를 매개로 하여 구성되고 전달되는 근거를 전혀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논증(Argumentation)은, 우리가 합리적으로 참에 관하여 이야기하기 위해 항상 전제될 수 밖에 없는 활동이다.

 

논증과정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진다.

(1) 발화자가 타당성주장을 함께 제기하며 무엇에 관하여 말한다.

(2) 청자는 그에 대하여 타당성 승인을 하기 전 "아니오"라고 말하며 비판을 하며 근거제시를 요구한다.

(3) 발화자는 근거를 제시한다.

(4) 청자는 그 근거의 적합성에 대하여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것이 적합하지 않은 이유에 대하여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등등

이러한 활동이 오로지 의사소통행위에 의한 동의, 즉 강압이나 기만 없는 동의로 귀결될 때, 어떤 주장은 타당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즉, 논증은 타당성 요구를 주제화하여 그것을 논증으로써 비판적으로 해결하는 행위실천이며, 언어를 쓰는 우리는 어떤 것이 타당하다라는 말을 논증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의미있게 할 수가 없다.  

 

논증 이외의 방식으로 진리에 접근하였다고 표방하는 사람들은,

(1) 자기자신이 생래적으로 동굴밖을 볼 수 있는 인식론적으로 특권적인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거나

(2) 자신은 모종의 알약을 먹었다고 하는 사람

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1)은 창고 안에 요정이 있다는 주장과 마찬가지이고

(2) 그 알약이, 오히려 미친놈이 되는 알약인지 알고 먹은 것인지, 알약을 먹기 전에는 알 수 없으므로, 알약을 먹었다는 주장만으로는 여전히 아무런 신뢰를 더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LSD를 하고 나서 자신의 친구가 사실은 커다란 개미 모양을 한 외계인이라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렇다면 친구는 실제로는 개미 외계인인가? LSD를 먹었으니까 그따위것을 보는 것이다.)

 

보통은 '알약'이 아니라 '비언어적인 체험'이 그 자리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 체험이 언어로 매개되어 부분적으로라도 불완전하게라도 알려지지 않으면, 그 체험은 지극히 사적인 것일 뿐이고, 이 세계가 썪었고 다른 이들은 모두 잘못보고 있다는 식의 담대한 어떤 공적 주장의 토대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매트릭스 비유를 쓰면서 자신은 무언가 진리를 알고 있다고 뻐기는 사람들은, 자신이 애초에 진리를 파악하게 된 경로를 전혀 정당화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뒤의 태도에도 문제가 생긴다. 즉, 논증을 피하고, 조작하고, 선동하고, 낙인찍고, 얼버무릴 생각만 하는 것이다.

 

이해지향적 행위는 상호 인격을 존중하는 두 당사자 사이에서 성립한다. 그런데 이미 자신은 인식론적으로 특권적인 지위에 선천적으로든 후천적으로든 올라와 있으므로, 조작과 선동, 인상비평 외에는 할 일이 없게 된다.

 

3. 어디서 잘못된 것인가.

 

이성은 유아적인 주체 속에 내재한 능력이 아니다. 합리성이라는 이성의 능력은 다름아니라 논증대화에서 현출되는 타당성 주제화와 비판적 해결의 능력, 즉 최소한 세계-행위자1-행위자2을 필요로 하는 삼항 관계에서 나오는 능력이다.

 

또한, 사회질서에 대한 비판은 그 내의 모든 체험과, 그 체험에 대한 언어적 전달, 언어적 논증대화를 다 부정하는 총체화된 비판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병존하고 있는 여러 대화들 중 어느 것은 은폐된 전략적 행위(체계적으로 왜곡된 의사소통이나 아니면 의식적인 기만에 해당하는 조작)이거나 노골적 전략적 행위(협박, 위협, 물리적 관철의 예정)인 반면에, 다른 것은 소통적 행위이며, 그러한 소통적 행위에서 타당성 승인이 되는 주장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합리적인 부분과 비합리적인 부분을 논증에 의해 가려내는 수밖에는 없다.

 

4. 논증대화 대 개념 샤워

 

어떤 이는 자신이 매트릭스를 깨닫게 된 것이, 비언어적 체험에 의하지 아니하였다고 강하게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자신은 순전히 언어적 체험에 의해 이 사회가 매트릭스임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적 체험을 했다는 것은, 언어적 설득의 통로가 열려 있다는 것이다. 언어적 설득의 통로를 통하여 더 낫고 못한 신념을 가려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세계는 더 이상 매트릭스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트릭스 비유를 즐겨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이 접한 언어적 체험을 비의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의적인 언어적 체험은 논증대화와는 형태가 다르다. 그러한 체험은 세상을 바라보는 틀과 관련된 개념들을 마구 퍼부어 밈(meme)처럼 정신에 정박시킨다.

 

이런 식으로 도통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미 받아들인 '패러다임'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진지한 논증대화가 불가능하다는 식으로 치부한다. 이러한 태도 때문에 세부적인 지점에서 질문이 나오면, 그렇게 질문이 발생하는 것 자체를 참지 못한다.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적의 패러다임에 속했다는 증거이며, 빨간약이 아니라 파란약을 먹고 잠이 들어 있다는 증거이다. 이런 단순한 아와 적을 가르는 방법으로 자신이 매트릭스에서 완전히 탈출하였다는 확신을 보존한다.

 

개념들은 중요하지만, 개념들의 함의는 검토되어야 한다. 만일 자신과 다른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들과 논의를 시작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동떨어진 신념들의 집합을 받아들이고 있다면, 그러한 신념들은 아마도 개념의 정의(definition)에 의해 결론을 선취하는 순환논리를 취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바비 피셔는 아마도 단기간의 절정의 실력으로 보았을 때는, 역사상 최고의 체스 선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바비 피셔는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이 결탁하여 세상의 모든 것을 타락시킨다는 음모론을 받아들였는데, 이러한 신념은 냉전 종식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바비 피셔는 이러한 세계관의 틀을 반복해서 테이프를 듣고, 책을 봄으로써 강화시켜왔다. 그가 보기에 세계는 매우 명료해보였으며, 이러한 명료한 사실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의 음모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자들이었다.

 

루소는 <에밀>에게 오성이 충분히 발달하기 전에 아동에게 개념을 먼저 가르치지 마라고 하였다. 그렇게 되면 아동은 그 개념의 렌즈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봄으로써, 오히려 오성이 박탈되기 때문이다. 생로병사가 추장이 행사하는 마법을 통해 일어난다는 전제 하에 조립된 개념들의 네트워크를 받아들인 부족민은, 그러한 개념들을 학습함으로써 오성이 발휘될 더 던단한 토대를 가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성이 일정 부분 박탈당하게 된다.

 

이 세상을 매트릭스라고 하며 논증이 아니라 아와 적을 나누고 타인을 눈치보게 만드는 데에만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동일한 가치지향에 정향된 개념의 샤워를 통해 얻은 확신(doxa)을 상이한 가치지향을 가진 이들의 논증대화를 통해 얻은 잠정적인 결론과 동일시한다.

 

 

5. 조지 레이코프류와 조너선 하이트류

 

"프레임 전쟁"-승인되는 타당성은 프레임에 따라 달라진다-이라든가, "바른 마음이란 하나가 아니다", "여러가지 도덕"-도덕은 권리에 관한 것 뿐만 아니라 상징과 질서, 권위에의 복종도 포함한다-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내용은, 그것이 사회학적이거나 인지심리학적 관찰의 영역에 머물때에는 타당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규범적인 영역으로 옮아가면 문제가 생긴다.

 

프레임을 어떻게 짜느냐에 따라 승인되는 타당성이 달라지므로, 객관적 타당성 자체가 없다거나, 여러가지 도덕이 있으므로 이러한 도덕적 다원성을 인정하여 그것을 사회질서화하자거나 하는 논의로 옮아가면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는 인식론적 특권을 갖춘 지위에 있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조작하고, 지긋이 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그런 그림에나 적합한 것이다.

 

전략적 기술의 필요성은 부인할 수 없고, 그것이 쓰이는 것은 현실이다. 그러나, 모든 시민들은 이성적으로 전개된 논증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하고, 접근할 기회가 더 많아야 한다. 그것이 선결문제이자 동시과제이다. 마치 아예 접근할 논증이란 없다거나, 아니면 논증에 접근케 하는 것이 오히려 역효과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레이코프류나 하이트류는, 매트릭스의 해악을 뿌리고 있는 것이다.

 

단지 그것뿐이라면 그들은 개념의 샤워에 맞대응하는 개념의 샤워를 주장하고 있는 셈이며, 매트릭스 대 매트릭스의 싸움에서 어느 쪽이 억견인지 가려내는 정밀하고 정치한 사유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6. 매트릭스 비유를 쓰지 않으면서 비판하기

 

우리는 매트릭스 비유에 의존하지 않고도 잘못된 신념들을 비판할 수 있다. 그 비판이 가능한 이유는, 비판을 '공적' 비판이 되게끔 가능하게 하는 상호승인의 의사소통적 전제가 성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가 그 의사소통적 전제를 부인하느냐를 따짐으로써 우리는 잠정적으로나마 타당한 견해의 후보들을 가려낼 수 있다.

 

반면에, 매트릭스 비유를 즐겨 쓰는 사람들은, 의사소통적 전제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된다. 즉 인식론적 특권을 가진 총독의 입장에서 사람들의 신념을 주물하려는 유혹에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게 되는 것이다.

 

세계는 매트릭스가 아니다. 단지 오성을 박탈시키기 쉬운 개념들에 의해 결론이 선취당하거나,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증거들을 쉽사리 믿거나, 아니면 자기 이익이나 성향 때문에 깊이 생각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견해들을 취사선택하는 인간의 약점이 자주 발현되는, 불완전한 곳일 뿐이다.

 

그러한 불완전성을 파악하는 과정은, 동굴 밖에 혼자만 나갔다가 들어오는 비의적 행위에 의해 이루어지는 비언어적 체험도 아니고, 동굴 속에서 혼자만이 맞을 수 있고 반론에 방탄막을 스스로 입고 있는 개념들의 샤워 형태의 일방적인 언어적 체험도 아니다.

 

그 과정은 결론이 잠정적으로 열려 있는 논증대화에 진지하게 참여하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의사소통주체의 계속되는 승인의 과정일 뿐이다.

<끝>

 

 

신고
Posted by 시민교육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1. 2015.03.10 20:42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잘 읽었습니다.
  2. 2015.03.15 22:18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메트릭스 비유를 들을때마다 짜증이 치밀어올랐는데, 이유를 잘 설명은 못하겠던데 많이 시원해졌습니다.


BLOG main image
대안민주주의와 사회윤리학 담론 형성을 위해 노력하는 '시민교육센터-배움의 연대망’ 홈페이지 입니다. 이곳에서는 열린 강의 형태의 시민교육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트위터 아이디: civiledulee, 이메일: civiledulee@gmail.com (이한) by 시민교육
전체 글 보기 (941)
공지사항 (20)
강의자료 (88)
학습자료 (311)
기고 (516)
  • 게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