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하나의 개념이 1인 모델에서 사용될 때와 2인 이상 모델에서 사용될 때 달라진다는 것을 간과한다. 이로부터 아주 많은 혼동이 발생한다.

 

개념을 하나의 함수로보자면, 변항이 되는 것들과 변항들을 관계지우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자유' 개념이다.

'자유'는 1인 모델, 윤리적인 모델로 볼 때, 자신의 실존적 여건에서 이성의 법칙에 따라 검토되어 적합한 바를 행하는 것이나, 그렇게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에픽테토스가 현자가 "왕보다 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하였을 때의 의미가 그러하다. 여기서 '자유'는 가치에 따른 삶, 그리고 가치가 아닌 것에는 휘둘리지 않는 삶이라는 철저히 윤리적인 의미만을 가진다. 자유인이란 가치에 따라 살고, 가치가 아닌 것에 휘둘리지 않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다.

 

예를 들어 1인 모델에서는, 남들보다 우위에 올라서려는 헛된 욕구가 없는 사람은, 그러한 욕구에 휘둘려서 자신의 삶을 잘 사는 데 도움이 되지도 않는 일을 하느라 노심초사 하며 쫓기고 괴로워하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1인 모델, 윤리적인 개념으로서 자유는,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을 변항으로 하고 가치 있는 것에 따를 수 있는 능력이자 가치 없는 것은 배척할 수 있는 능력으로 표현되는 함수이다.

 

이 1인 모델은 어떤 드러나지 않는 전제를 깔고 있다. 즉, 진정성과 독립성에 따라 스스로 사유하고 행위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가치인가 가치가 아닌가를 사유할 때, 그 자신의 이성적 검토와 판단 이외에는 다른 것에 의해서는 지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지배된다면, 자신이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이 실은 가치없는 것임에도 이를 전혀 알아챌 수 없기 때문에 1인 모델에서 윤리적 개념으로서의 자유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

 

이 전제는 2인 이상 모델로 넘어갈 때 명시화된다. 즉, 2인 이상의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에서 각자가 그러한 검토의 궁극적 결정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결정권을 찬탈하여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전제 명시화를 무시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이상한 주장이 발생한다. 즉, '우리'라는 집합명사를 쓰면서 이성적 검토를 거친 것을 따른다고 하게 되는 것이다.

 

(1) 종교적 기적은 과학적 사실에 어긋난다.

(2) 따라서 종교적 기적을 믿는 것은 이성에 의하여 지지되는 최선의 신념들에 어긋난다.

(3) 최선의 신념들에 어긋나게 행위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4) 따라서 종교적 기적을 믿지 않는 것이 자유 행사이다.

(5) 우리는 종교적 기적을 믿지 않음을 집합적으로 결정함으로써 자유 행사를 한다.

(6) 따라서 종교가 금지되더라도 자유는 전혀 제한되지 않는다.

 

반대 방향도 가능하다.

 

(1) 미덕을 실천하는 것은 가치에 근거하여 행위하는 것이다.

(2) 신실한 종교적 삶을 사는 것은 덕스러운 실천이다.

(3) 덕스러운 실천은 자유 행사이다.

(4) 따라서 우리가 덕스러운 생활양식을 공동결정하고 실천하는 것은 자유 행사이다.

(5) 따라서 종교를 믿고 예배하는 것을 집합적으로 결정함으로써 자유 행사를 한다.

(6) 그러므로 종교가 강제되더라도 자유는 전혀 제한되지 않는다.

 

이러한 주장의 연쇄에서는 '자신의 최선의 숙고에 근거하여 검토된 가치에 따르는 것'이 '타인의 최선의 숙고를 할 결정권을 찬탈하는 것'으로 은근슬쩍 전이가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자유 개념의 혼동에 대하여 이사야 벌린은 다음과 같이 경고한 바 있다.

"자유란 언제나 예외 없이 무언가 좋은 것이라든지 언제나 가능한 최선의 결과를 낳는다든지 언제나 나의 ‘가장 높은’ 자아를 증진해 주리라든지 언제나 나 자신의 ‘진정한’ 본성이 내리는 명령 또는 내 사회의 진정한 규율과 조화를 이루리라는 등등, 스토아주의에서부터 오늘날의 사회주의 신조에 이르기까지 자유에 관한 수많은 고전적 이론들이 근본적인 차이를 흐릿하게 만드는 비용을 지불하면서 주장해 온 바와 같이 자유에 대한 다른 방식의 정의들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Isaiah Berlin, Liberty (Incorporating Four Essays on Liberty),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박동천 옮김,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 아카넷, 2006, 44면.)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발견하는 최선의 숙고라는 활동은 오로지, 그 숙고에 투입되어 자신이 납득되는 근거 이외의 것에는 강제되지 않는다는 조건이 성립되어야 가능하다.

 

그렇다면, 그 조건을 자기 자신에게만 인정하고 타인에게는 인정하지 않는 것은, 타인에게는 최선의 숙고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타인은 '내'가 그 진정한 본성을 발견해주고 그렇게 내가 발견한 본성대로 강제되어야 하는 열등한 존재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인을 열등한 존재로 보는 전제에서 강제가 관철되는 경우 타인의 자유 행사는 침해되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의 '자유인' 개념은 또 다른 측면에서도 2인 모델로 그대로 확장되었을 때 문제를 발생시킨다.

 

에픽테토스는 본성적이지 않은 것, 외적 인상에 관한 것에 집착을 버림으로써, 헛된 욕구를 버림으로써 자유로워진다고 설파하였다.

 

"그러므로 만일 네가 본성적으로 노예적인 것들을 자유로운 것으로 생각하고, 또 다른 것에 속하는 것들을 너 자신의 것(idia)으로 생각한다면, 너는 장애에 부딪힐 것이고, 고통을 당할 것이고, 심란해지고, 신들과 인간들을 비난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라.
  그러나 만일 이와 반대로 네가 사실상 너의 것만을 너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속하는 것을 (실제로 그런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속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 누구도 어느 때고 너를 강요하지 않을 것이고, [10] 그 누구도 너를 방해하지 않을 것이고, 너는 그 누구도 비난하지 않을 것이고, 그 어떤 사람을 힐난하지도 않을 것이고 자의에 반해서 결코 어떤 한 가지 일이라도 행하지 않을 것이고, 그 누구도 너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고, 어떤 적도 없을 것임을 기억하라. 왜냐하면 너는 해가 되는 어떤 것에도 고통을 당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Epictetos, The Encheiridion of Epictetus and its three Christian adaptations, 김재홍의 『왕보다 자유로운 삶』 중 김재홍 옮김, "엥케리디온", 서광사, 2013, 30-31면)

 

이것을 이사야 벌린은 "내면의 성채"로의 후퇴라고 불렀다.

 

"나는 이성과 의지의 소유자다. 내 마음은 목적을 잉태하고 있으며 나는 그 목적을 추구하고 싶다. 그러나 만약 그것을 달성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받는다면 나는 더 이상 상황에 대해 주인이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자연의 법칙, 또는 우연한 일, 또는 사람들의 활동, 또는 인간적 제도도 말미암은 대개는 계획되지 않은 결과 때문에 나는 방해를 받을 수 있다. 그것들에 끼어 등이 터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나로서는 실현할 수 없음이 분명한 욕구에서 나 자신을 해방시켜야 한다. 내 왕국의 주인이 되고는 싶지만 국경선은 길고 불안정하다. 그러므로 취약한 부분을 줄이거나 없애기 위해 영토를 축소하는 것이다. 행복이나 힘, 지식 또는 어떤 특정 대상의 획득을 욕구하는 데서 시작하기는 한다. 그렇지만 그 획들이 내 맘대로 되지는 않는다. 패배를 낭비를 피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게 되고, 따라서 획득하기가 불확실한 것을 동경하지는 않기로 마음먹는다. 가질 수 없는 것은 원하지도 않기로 결단을 내린다. 내 재산을 파멸시키겠다고, 나를 감옥에 집어넣겠다고,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추방하거나 축이겠다고 폭군은 나를 위협한다. 그러나 만약 내가 재산에 전혀 집착하지 않고, 감옥에 있든 말든 개의치 않으며, 내 안에 있는 자연적인 감정들로 모두 죽여 버린다면, 내게 남은 것은 어느 것도 경험적인 공포나 욕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폭군도 자기 뜻에 맞도록 나를 굴복시킬 수 없다. 이 마치 어떤 내면의 성채로 – 내 이성, 영혼, “본체적” 자아로 – 작전상 후퇴하는 것과 같다. 외부 세계의 맹목적인 힘도 인간의 심술도 그 어떤 방법으로도 그 성채는 (368)건드리지 못한다. 나는 자아 속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오로지 거기에서만 안전하다. 마치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부상을 치료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치료가 너무 어렵거나 불확실하다면 다른 방법이 있다. 다리를 잘라서 부상을 제거할 수 있다. 다리가 있어야만 하는 모든 일들을 원치 않도록 나 자신을 훈련시키면, 다리가 없다는 사실조차 느낄 수 없게 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금욕주의자, 정적주의자, 스토아주의자, 불교의 현자 등, 다양한 종파 또는 종교의 유무를 막론하고, 모종의 의도적인 자아변혁 과정을 통해 세상을 버리고 사회 또는 여론의 멍에에서 벗어나 세상의 어떤 가치에도 더 이상 개의치 않고 세속적 가치의 칼날이 더 이상 침범할 수 없도록 홀로 독립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추구한 전통적인 자아해방이다. 모든 정치적 고립주의, 모든 경제적 자립주의, 모든 형태의 자율성 안에는 이러한 태도가 어느 정도 섞여 있다. 내가 가고 있는 길에 장애물이 있다면 그 길을 버림으로써 장애물을 제거한다. 바깥에서 오는 목소리를 들을 필요도 없고 외부의 힘이 영향을 미칠 수도 없는 나 자신의 방, 나 자신의 계획경제, 의도적으로 격리된 나 자신의 영토로 후퇴한다."(Isaiah Berlin, Liberty (Incorporating Four Essays on Liberty),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박동천 옮김, 『이사야 벌린의 자유론』, 아카넷, 2006, 367-368면.)

 

우리는 1인 모델에서 이것이 어떤 삶의 태도로 추구될법한 것임은 쉽게 인정할 수 있다. 명예나 부, 권세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는 사람은, 그러한 집착 때문에 자신이 가치 없다고 생각하는 일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자신이 경멸하는 사람에게 아첨하거나 굽신거리는 일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즉, "나는 이 사람에게 꼭 아첨해야 한다"는 묘한 심리적 명령이 제거된 것이다. 그러한 가치 없는 명령이 제거된 만큼, 나는 자유롭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2인모델에서는 이것은 터무니없는 결과를 가져온다.

 

권력자가 시민에게 명령한다.

"나에게 아첨하여 허가를 얻지 못하면 결혼을 하지 마라."

시민은 생각한다. "결혼이라는 것이 인생의 가치 추구에 꼭 필요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나는 결혼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나는 권력자에게 아첨하지 않을 수 있다."

이제, 권력자가 또 명령을 추가한다.

"나에게 아첨하여 허가를 얻지 못하면 칸트, 롤즈, 드워킨, 스캔론 책을 보지 마라."

시민은 그 학자들이 쓴 책에 대한 집착을 버린다.

권력자는 신이 나서 명령을 또 내린다.

"나에게 아첨하여 허가를 얻지 못하면, 산책을 금지한다."

이런 식으로 명령은 계속된다.

새로운 명령은 국가권력이 보유한 강제력으로 뒷받침되며, 그때마다 시민은 아첨과 결부된 그 활동에 대한 욕구를 거리낌없이 버린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시민의 지위는, 결혼도 마음대로 못하고, 일정한 신조를 담은 책도 보지 못하며, 자연의 풍경을 보며 거니는 것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1인모델의 자유 개념을 그대로 가져와 고집하는 이는, 그러한 명령에 적응하여 내면의 성채로 성공적으로 은둔하고 후퇴하기만 하면, 아무런 자유 침해가 없다고 주장하게끔 된다. 그러는 와중에 온갖 부당한 찬탈을 자행하는 권력자에 대하여는 아무런 저항도 없었다. 권력자의 감시가 미치지 않는 곳에서 은밀한 규칙 위반조차도 없다. 이것은 그야말로 권력자가 바랬던 것이다. 권력자가 선별하여 배제한 책들은 보지 못함으로써 그 시민은 자신의 신조를 숙고할 온전한 조건을 잃어버렸다. 자신이 이미 기억하고 있는 것 이외에 새로운 자료는 오로지 권력자가 허락한 자료 위에서만 가능하다. 그 경우 이성에 의거한 최선의 검토는 일그러진다. 그러나 내면의 성채로의 후퇴만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 자유는 침해된 바 없다는, 이 기묘한 '비좌절로서의 자유 개념'은 극악한 전체주의 사회에서도 모든 이가 자유로울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것은 '자유'라는 분명한 기준으로 전체주의 사회와 자유주의 사회를 전혀 구분하지 못하게 하고, 오로지 각 개개인의 심리적 내부 성채로의 후퇴라는 심리 현상만을 조사하여, 개별적으로 자유를 달성하였는가만 판별할 수 있을 뿐이다.

 

2인 이상 모델에서 자유는 그 2인 이상의 사람들 사이에 관철되는 강제적 질서에 의하여 성립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언급하지 않고서는 온전히 기술될 수 없다. 즉, 누가 자기 몫 이상의 결정권을 행사하고 누가 자기 몫만큼의 결정권도 행사하지 못하고 있는가를 기술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1인 모델에서는 이러한 관계사실은 문제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고실험에서 얻은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유'와 같은 규범적 개념은 1인 모델에서와 2인 모델에서 전혀 다른 뜻으로 쓰이며, 그 규범적 함의도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을 완전히 간과하는 것은 은근슬쩍 타인의 결정권, 궁극적 숙고의 권리를 찬탈하는 것이다. 그러한 찬탈은 개념의 게리맨더링으로 정당화되지 않는다.

 

같은 문제는 자유 개념 이외에도 일어난다.

 

"선호의 충족"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에 대해서는 연습문제로 남겨두기로 한다. <끝>


 

 

 

신고
Posted by 시민교육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1. 2015.05.07 22:52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종교에 대한 3) 에서 오타가 있습니다. "하지 않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가 맞는듯 한데.


BLOG main image
대안민주주의와 사회윤리학 담론 형성을 위해 노력하는 '시민교육센터-배움의 연대망’ 홈페이지 입니다. 이곳에서는 열린 강의 형태의 시민교육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트위터 아이디: civiledulee, 이메일: civiledulee@gmail.com (이한) by 시민교육
전체 글 보기 (942)
공지사항 (20)
강의자료 (88)
학습자료 (312)
기고 (516)
  • 게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