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롤즈의 원초적 입장에서, 왜 '상호 무사심성'(mutual disinterestedness)을 그 속성 중 하나로 삼는지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냥 그 단어만 보고 깜냥으로 와, 롤즈는 동료 시민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 냉혹한 개인주의를 이론에 짜넣었구나, 한다. 롤즈와 같은 천재가 그런 어처구니없는 오류를 범했을 리가 없다는 점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아무 생각 없이 롤즈를 비판하는 이들은 생각하지 않으면서 책을 읽는 이들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마이클 샌델이 있다. 마이클 샌델은 그의 저서 <정의의 한계>에서 롤즈가 상호 무사심한 원초적 입장의 합의 주체를 설정했다는 이유로, 롤즈의 이론이 고립된 원자주의적 개인주의를 한편으로 취했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롤즈가 차등 원칙을 도입했다는 이유로 자아에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속성 없는 자아를 취했다고 주장한다. 이것 역시 엉터리 주장이고,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에서 자세히 반박한 바 있다.)

 

이러한 이해가 왜 틀렸는지는 2분 정도만 생각이라는 걸 해보면 알 수 있다.

 

첫째, 상호 무사심하지 않고 상호 대칭적으로 관심이 있다고 가정하자. A와 B가 있는데, A는 B가 보유할 기초재에 대하여 50%만큼 관심이 있고, B는 A가 보유할 기초재에 대하여 50%만큼 관심이 있다. 자기자신이 보유할 기초재에 대해서는 100%만큼 관심이 있다. 상호무사심한 가정에서의 합의는 자기자신에 대한 100%의 관심만을 전제로 합의를 결정할 것이다. 상호 대칭적 관심 가정에서는 여기에 추가로 50%의 관심을 더할 것이다. 그러나 그 더해진 관심은 상호 대칭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 효과는 상쇄된다. A가 기초재를 보유하는 것에 대하여 50%의 B의 관심은, B가 기초재를 보유하는 것에 대한 50%의 A의 관심과 상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이론적으로 잉여(surplus)가 된다. 따라서 이는 이론에 포함시킬 필요가 없다.

 

둘째, 상호 무사심하지 않고, 상호 비대칭적으로 관심이 있다고 하자. A는 B가 보유할 기초재에 대하여 50%만큼 관심이 있고, B는 A가 보유할 기초재에 대하여 25%만큼 관심이 있다고 하자. 그러면 B는 자신이 가지는 관심100%에 더하여 A가 추가하는 관심 50%를 받게 되므로 150%의 비중을 갖게 된다 반면 A는 자신에게 갖는 관심100%에 더하여 B가 더해주는 관심25%를 추가하게 되므로 125%의 비중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원초적 입장에서의 합의는 A에 대하여 25%만큼 체계적으로 불이익하게 설정될 것이다. 예를 들어 A가 여성이라고 하자. 또한 여성이라는 정체성의 하나로 다른 사람을 돌보고 다른 사람의 복지에 대해 특별히 더 관심을 기울이는 존재라고 하자. 이러한 본성을 원초적 입장에 투여시켜서 스스로 덜 받는 관점을 설정했다고 하자. 그러면 그러한 이론적 틀의 결과 나오는 것은 여성의 권리와 기회가 체계적으로 불이익하게 짜여진 기본질서이다. 이러한 질서가 여성에게 합당하지 않은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결국, 상호 대칭적으로 관심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이론적으로 잉여이고, 상호 비대칭적으로 관심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관심을 타인에게 더 많이 기울인다고 가정된 당사자에게 체계적으로 근거없이 불리한 질서를 합의하게 되므로, 어느 쪽이든 타당하지 않다.

 

결국, 어떤 권리질서에 합의하는 당사자는 자기자신을 타인보다 못한 존재로 보아서도 안되고, 자기 자신을 타인보다 우월하여 특권을 챙길 수 있는 존재로 보아서도 못된다. 그리고 흔히 후자로 설정하는 것만이 문제되는 것 같지만, 전자로 설정하는 것도 문제된다.

 

이를테면 어떤 권리질서를 정함에 있어 특정한 성을 '유혹에 특별히 취약한 존재'라고 가정해보도록 하자. 그리하여 그 성(sex)은 유혹으로부토 보호되어야 할 특별한 처지에 있고, 그래서 성적 자기결정권을 온전히 자기 책임으로 행사할 수 없는 존재라고 가정하여보자. 그 결과, 그 성에 있어서나 다른 성에 있어서나 도저히 합당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질서를 낳는다.  

 

이슬람 율법은 여성이 강간을 당했을 때 그 책임을 여성에게 묻는다. 투석형에 처해지거나 사형된다. 남성은 어쩔 수 없기 유혹을 받은 존재로 책임이 감면된다.

 

남성을 '유혹에 특별히 취약한 존재'라 보고 동등한 책임을 지지 않는 존재로 상정했기 때문이다. 강간 범죄에서 피해자는 여성이다. 여성과 남성 모두 신체의 자유권을 지니며 타인의 신체 자유권을 침해하지 아니할 의무를 동등하게 진다. 또한 사인간의 사적인 침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방비하고 구제할 책임을 국가는 진다. 이러한 논의과정 어디에도 누군가는 열등한 존재라거나, 덜 책임을 지는 존재라거나, 덜 이성적인 존재로 상정되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노인은 젊은 사람에 비해 폭력에 더 취약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젊은 사람이 노인을 때리는 것은 폭행이 되고, 노인이 젊은 사람을 때리는 것은 폭행이 아닌 것은 아니다. 젊은 사람이 노인을 때리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할 때, 그것에 대하여 특별한 방지를 할 책임이 국가에 생성될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지는 그릇된 행위의 구성요건 자체를 비대칭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즉, 노인이 했을 때는 폭행이 되지 않는 일인데, 젊은 사람이 했을 때에만 폭행이 되는 그런 범죄구성요건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을 깨닫지 못할 때, 동일한 오류가 반대 방향에서도 나올 수 있다. 혼인빙자간음죄는 여성이 스스로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기에는 아둔하고 어리숙한 존재이며, 여성이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한 것은 항상 여성에게 피해를 구성한다는 전제에서 나온 범죄화 규정이다. 이것은 동등하지 않은 주체를 상정한다. 여성이 혼인을 빙자하여 간음하면 이것은 혼인빙자간음죄가 되지 않지만 남성이 혼인을 빙자하여 간음하면 혼인빙자간음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예방과 구제에서 고려되어야 하는 사항을 애초에 권리 설정에서 잘못 개입시킨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이러한 비동등한 주체를 가정하는 특수한 이데올로기를 관철시키는 것은 우리 헌법상 목적의 정당성이 없다고 판시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남성이 신체를 드러내는 것에 대하여는 그것을 남성의 의사로 인정하고 또한 허용하면서도, 여성에 대해서는 그렇지 아니한 규율을 하는 것도 부당하다. 여성이 신체를 드러내는 것 역시 여성 자신의 의사에 의한 것이고, 여성이 열등한 존재가 아닌 한, 그것을 특별히 그 성에게만 금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구성원들은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진다. 다만 유아나 여성, 노인과 같이 자기를 방어할 능력이 부족한 이들에게는 그 동등한 권리가 침해되지 않도록 하는 배려를 하여야 하는 국가의 의무가 생긴다. 이것은 동등한 권리를 존중하는 평등한 배려의 결과이지, 불평등한 배려의 결과가 아닌 것이다. 이와 혼동되는 것은, 권리 자체가 이미 불평등하게 설정되어 있다는 전제이다. 그래서 한 쪽에서는 성립되지 않는 침해가 다른 쪽에서는 성립된다는 논리다. 이러한 논리는 결국에는 어떠한 합당한 질서의 논의 전제로도 받아들일 수 없는, 규범질서 합의 당사자들 간의 비동등성을 상정하는 것이다. <끝>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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