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초반 보고 난 이후, 최고의 만화로 손꼽는 데 한 번도 주저함이 없었던 만화 <기생수>를 처음 봤을 때, 이해가 잘 되지 않았던 장면이 딱 두 군데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여러 기생수가 합체한 기생생물의 몸에 오른쪽이가 흡수되었던 기간 동안의 경험을, 오른쪽이가 편안하고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고 회상하는 부분이다. 아니, 자아를 완전히 상실하고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비독립적 존재가 되었는데 기분이 좋았다고?

 

다른 하나는, 오른쪽이가 그간 수집한 정보와 지식을 갖고 혼자서 무언가를 해보려고 세상과의 연을 끊는 부분이었다. 이럴수가! 세상에 재밌는 게 얼마나 많은데 무얼 혼자서 한다고 연을 끊는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은 이 두 장면을 나름의 방식으로 상당한 정도로 이해한다.

 

이 두 가지 모두 세계와 자아의 경계를 '의식'의 전면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과 관련된다.

 

우리는 삶을 의미 있게 살아가는 데 자아를 늘 인식하고 있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잘못 생각한다.

 

이러저러하게 사는 나, 이러저러하게 훌륭한 나, 이러저러한 결점을 자각하고 고치는 나, 이러저러한 것을 주의하는 나, 이러저러한 의무를 수행하는 나, 이러저러한 성취를 이룬 나 등등.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삶의 가장 풍부하고 심도 있는 경험들은 이러한 자아를 의식의 전면에서 물러나게 한 순간 찾아온다.

 

다섯 가지 예를 들어보고자 한다.

 

첫째는 스포츠다.

탁구를 예로 들어보자. 탁구는 대체로 88년도의 스포츠라고 할 수 있다. 현정화, 유남규, 김택수 시대의 스포츠다. 이 스포츠가 지금처럼 쪼그라든 것은 참으로 유감이다. 탁구공은 매우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 탁구공의 궤도를 의식적으로 계산해서는 탁구공을 제대로 맞출 수가 없다. 상대방의 움직임의 대강을 예측하고 감이 가는대로 허리와 팔을 휘둘러야 한다. 그리고 탁구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멀리서 드라이브 랠리를 펼치는 것인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치는 입장에서도 희한할 정도다. 이렇게 드라이브 랠리를 펼치다 보면, 내가 지금 어떻게 생겼는지는 물론 탁구를 치는 사람이라는 생각마저 잊게 된다. 즉 지금하고 있는 활동의 흐름에 완전히 젖어드는 것이다. 팔을 휘두르는 감각, 탁구가 탁 하고 부딪히는 감각, 궤도, 상대의 움직임, 흐르는 땀, 바닥에 닿는 운동화의 감촉 ...

제주도 같은 데 단체로 놀러가면, 서로 편을 갈라 페인트 총으로 전투를 하는 놀이가 있다. 이 놀이도 하다보면, 어떻게든 잘 숨어서 상대편을 한 명이라도 더 맞추려는 생각에 완전히 젖어들어서 지금 시험이 2주 뒤인지, 앞으로 뭘 먹고 살아야 하는지 이런 생각 따위는 하지 않게 된다.

 

둘째는 섹스다.

로버트 노직은 그의 에세이에서 가장 멋진 섹스 경험은 두 사람의 자아의 경계가 무너지고, 상대의 반응에 내가 곧 반응하고, 나의 반응에 상대가 곧 반응하는 그러한 경지라고 하였다. 섹스를 하면서 다른 생각을 하게 되면 그 경험의 질은 곧 낮아진다.

 

셋째는 책 읽기와 글 쓰기다.

자신의 수준에 맞는 흥미로운 책을 읽는 경험이 아마도 오른쪽이가 합체된 기생생물에 흡수된 상태에서 느꼈던 바와 가장 유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자가 집약해서 예술적으로 배치한 이야기들이 나의 머리 속에 착착 감기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만들어내고, 와, 이런 걸 이렇게 표현하고, 이런 걸 이렇게 논증을 전개하고, 와,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내고 하는 감탄을 하게 되는 것이다. 정말로 책에 몰두해 있는 동안에는,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소수겠지, 요즘 사람들은 책을 참 안읽어, 이런 좋은 책을 읽어서 뭐하나 이런 생각들은 하지 않게 된다.

글씌 역시 마찬가지다. 글을 쓴다는 작업이 최고도의 질로 수행될 때, 그것은 탁구를 치는 경험과 비슷하게 된다. 내 손이 키보드에 타닥타닥 닿는 느낌, 글이 쓰여 나가면서 머릿 속에 다소 불분명했던 표현이나 논리들이 명료하게 되는 느낌, 이전에 수집했던 자료들이 짜임새 있게 구조화되는 느낌, 배열한 단어들이 어우러져 하나의 멋진 의미를 구성해내는 느낌, 이 모든 것들을 몰입해서 하게 되는 것이다.

 

넷째는 능숙하게 된 육체적인 노동이다. 물건을 옮기거나, 공간적인 정리를 하거나, 요리를 하거나 하는 등으로 몸을 쓰는 작업을 할 때, 다른 데 마음이 가 있게 되는 경우에 그 작업은 지루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작업은 일련의 계획과 실행, 계획의 수정, 수정 실행 등으로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러한 흐름을 명료하게 염두에 두고 착착 일이 진행되는 것을 몸으로 느끼게 되면, 자신이 우주에서 어떤 존재인지 하는 생각 같은 것은 안드로메다 너머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다섯째는 동적이거나 정적인 감각을 즐기는 것이다. 동적인 감각을 즐기는 대표적인 경우가 롤러코스터를 타거나, 아주 재미있는 영화를 보는 것이다. 논산 훈련소서 훈련 받는 기간 명절이 끼어 있으면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여준다. 그런데 영화관에서 나오게 되면 훈련병들은 충격에 휩싸인다. 자신이 훈련병이었다는 것을 어두운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동안 까먹은 것이다! 그만큼 재미있는 영화는 자신을 잊게 만드는 것이다. 정적인 감각을 즐기는 것은 보통 자연이 선사하는 감각을 수용하는 것과 관련된다. 경상남도 통영에 가서 여러 섬 중 하나를 가면 산책길을 걸으면서 바다를 실컷 구경할 수 있다. 푸른 나무의 내음이 물씬 풍기는 산책길을 걸으면서 발에 닿는 흙의 감촉과 냄새를 느끼고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의 파장을 보고, 먼 곳의 바다부터 가까운 곳의 바다까지 철썩철썩 푸른 소리를 가득 출렁이는 것을 보면 와 좋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 와 좋다는 생각이란 내가 아주 좁은 곳에 갇힌 존재가 아니라 널리 탁 트인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그런 느낌에서 오는 것이다.

 

물론 오른쪽이의 첫번째 자아 무인식 경험은 두 번째 자아 무인식 경험보다는 못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는 주도감과 통제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어떤 정보처리를 수동적으로 당하는 것보다는, 주도적으로 정보처리를 하는 경험이 더 깊이 있다. 

 

그런데 이 정보와 감각이라는 것이 외부에서 계속 주어질 필요는 없다. 오른쪽이는 이미 갖고 있는 것을 가지고 탐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렇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정보와 감각의 기억을 가지고 온전히 작업하는 경우, 자신이 처리하는 정보가 곧 세계의 전부가 되고, 세계와 자아 사이의 경계는 사라진다. 물론 우리는 오른쪽이처럼 천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만한 내면의 광대함을 가지고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학 간취해야 할 점은 통제감과 주도감 속에서 깊이 있는 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일시적으로 외부와의 접속을 어느 정도 차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보처리를 능동적으로 능숙하게 하는 경험은 그 처리하는 정보 대상에 세계를 제한할 것을 요한다. 이미 경험한 것들을 상기하고, 이미 갖고 있는 정보들을 이리저리 배열하고. 여기에 요구되는 것은 때때로는 산책할 때 가지고 가는 간단한 수첩일 수도 있고, 흰 종이와 필기구일 수도 있고, 글을 적을 수 있는 노트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계쏙해서 외부에서 쏟아지는 정보를 끊임없이 입수하기 위해 접속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 때 우리가 몰두하게 되는 대상은 언제나 일종의 퍼즐로서 그 형태를 드러내게 되며, 우리는 그 퍼즐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궁구하며 풀게 되는 것이다. 이 때 우리에게 어느 누구도 그 퍼즐을 풀라고 명령하지 않으며, 그런 명령을 받는 자아나 그런 명령을 받는 처지에 있는 자아라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퍼즐 그 자체 속에 들어가 있는, 그런 경험인 것이다. <끝>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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