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샌델과 한국 시민의 공명

 

샌델이 한국사회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구가한 이유에 관하여 여러가지 사회학적 분석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용 자체에 의해 이유를 생각해보면, 샌델이 정치철학적 사안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이 한국 시민이 이미 생각하고 있던 방식과 공명하였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겠다. 즉, 샌델이 끈질기게 유포시키는 자유주의에 대한 오해와, 샌델식의 논의가 가지고 있는 위험은, 이미 한국사회에 공공연히 퍼져 있었던 것이다. 샌델은 그러한 오해와 논의에 학문적인 장식이라는 날개를 달아준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샌델의 논의에 대한 비판은, 샌델이라는 학자 개인의 이론에 대한 비판이라는 소소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만연한 오도된 사고에 대한 비판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2. 하나의 사례 - 종교의 자유

 

샌델은, 국가가 그 구성원의 평등한 존엄을 위해 종교나 윤리에서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자유주의 이론을 주요 타격 대상 중 하나로 삼고 있다. 그러한 중립은 공동체의 서사를 써나가는 존재라는 구성원들의 자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정치적 사안에 제시되는 논의들을 빈곤하고 협소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견지하는 포괄적인 윤리, 신앙은 공적 사안에 적극적으로 개입될 수 밖에 없으며 또 개입되어야 한다는 것이 샌델의 생각이다.

이러한 샌델의 생각을, ‘입헌 민주주의’에 대한 교양을 제대로 쌓은 일반 시민의 생각과 비교해보자. 이 시민에게 “왜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그 시민은 몇가지 이유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사람들은 각자, 인생의 가치와 의미에 관하여 가장 심원한 판단을 할 책임과 권한이 있다.(심층적 가치 형성과 판단의 책임의 귀속) 둘째, 종교적 구원이나 해방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개인이 자신의 확신을 통하여 획득하고 유지되는 신앙에 의해서만 가능하지, 등 뒤의 총이나 여하한 공적인 불이익에 의해 유도되는 외적 행위에 의해서 가능하지 아니하다.(선관을 진지하게 다루기) 셋째, 자유로운 신앙생활이, 평등한 지위를 갖춘 다른 사람들의 동등한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그것은 그 사람의 평등한 지위에서 나오는 고유한 자격이다.(자유롭고 평등한 지위 확인) 넷째, 폭력을 독점하고 있는 국가나 권력을 쥔 사인, 다수가 강제력을 통해 종교적 문제에 개입하게 되는 경우, 이것은 종교적 구원이나 신앙 자체의 본질을 왜곡시키게 되고, 사람들의 책임과 권한을 찬탈하게 되며, 힘있거나 다수인 사람들이 힘없거나 소수의 사람들을 억압하게 되는 불평등을 산출한다. (힘을 쥔 주체에 의한 규제와 결부된 특별한 위험의 지적).

이러한 이유들은 자유주의의 확고한 독트린의 일부이다. 그러나 샌델은 이러한 독트린들이 공동체와 그 구성원들을 분리시키고, 공공 사안에 대한 진정한 참여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보기 때문에 이러한 논거들을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논거들을 사용하지 않는 샌델의 이론에서, 종교의 자유는 어떻게 하여 인정되는가?

“자유로운 종교 행사를 각별히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은 다음의 생각을 깔고 있다. 즉 특정 사회에서 주로 실행된 대로, 종교적 믿음은 명예롭고 평가할 만한 존재 양식과 행동 양식을 제공한다는 생각을 밑바탕에 두고 있는 것이다. 그 양식들은 그 자체로 칭찬할 만하거나, 좋은 시민으로 만드는 기질을 독려한다.”

이 논증은 그것에 깔린 암묵적인 전제와 이념까지 포괄해서 보면, 샌델의 대표적인 논증형태를 구현하고 있으며, 그의 사상을 집약하고 있다. 이 논증에서 드러나는 특성을 살펴보자.

 

3. 샌델 논증의 특성

 

① 존재론적 문제를 선결 문제로 삼는다.

공공 사안의 문제를 결정하기 전에, 공동체가 더 근본적인 존재이냐 개인이 더 근본적인 존재이냐의 존재론적 우선성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만일 개인이 공동체 없이 존립할 수 없고 개인의 자아가 근본적으로 공동체의 서사에 의해 구성된다면, 공동체의 관점에서 사안을 해결하여야할 근거가 늘어나게 된다.

더 나아가 어떤 사안의 해결의 기초는, 그 사안에서 등장하는 ‘자아’가 어떤 ‘자아’라는 존재론적 문제에 달려 있다. 예를 들어, 샌델이 롤즈의 차등 원칙에서 주되게 문제삼는 것은, 차등원칙이 롤즈의 개인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는 ‘속성들을 뽑아버린 공허한 자아’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안 해결의 출발이 되는 화두는 ‘어떤 공동체를 써나갈 것인가’, ‘어떤 자아를 만들어나갈 것이냐’이고 그 답도,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제시된다. 정당화의 주제는 바로 ‘어떤 공동체’, ‘어떤 자아냐’이다.

 

② 논증의 핵심고리는 ‘덕의 진작’이냐 ‘덕의 퇴락’이냐다.

권리의 문제는, 도덕적 권리주장을 보유하는 존재들 사이에 오고가는 논증대화에 적합한 논증구조와 그에 맞는 형식의 논거들이 제시됨으로써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덕을 고양시키는 공동체가 될 것인가, 덕을 퇴락시키는 공동체가 될 것인가다.

위 논증에서, 샌델은 종교에 관한 포괄적인 선관이 불일치하는 사람들 사이에 제시될 법한 논거들, 만에 하나 덕이 없는 것으로 규정되어 소수 종교의 자유가 부인되었을 때 그 소수 신앙인이 제기할 수 자격이 있는 불평은 하나도 제시되지 않는다. 이 문제는 아래의 문제와 연결된다.

 

③ 권리 논증대화는 의도적으로 회피된다.

논증에서 ‘권리’, ‘자유’, ‘평등’과 같은 개념들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한 개념들은 결론을 근거지우는 기초적 이념들이 아니다. ‘자유’와 같은 용어는 공동체가 더 나은 서사를 쓰기 위해 결정한 바에 따라 허용되는 행위의 범위를 지칭하는 부차적인 용어일 뿐이다. 예를 들어 위 논증에서 종교의 자유는, 종교가 명예롭고 평가할 만한 존재 양식과 행동 양식이기 때문에 공동체의 참여적 결정에 의해 승인되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약칭하는 용어에 지나지 않는다.

 

④ 통약불가능성 그리고 판단의 부담 문제는 없거나 해결가능한 것으로 치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덕’에 의한 판단 방법은 분명치 아니한데, 이 약점은 두 가지 해결책을 동시에 제시함으로써 은폐된다.

가장 심원한 가치의 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 그리고 그에 따라 흔히 발생하는, 그 목적이 대립되는 주장과 행동들의 존재는, 포괄적인 논의와 참여를 통한 진정한 공동체의 구성을 통해 해소되어야 할 문제거리일 뿐이지, 인정하고 그 위에서 각자의 관할권을 구축할 필요성의 토대가 아니다. 예를 들어 위 논증에서는 종교적 믿음이 국가가 장려해야 하는 덕이라는 점을 간단하게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승인의 당연한 결과로 종교적 믿음이 없다는 것은 악덕, 최소한 덕을 가능한 한 고양시키지 못하는 생활 양식과 존재 양식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가 덕을 증진시키기 때문에 공동체에 의해 적극적으로 승인되어 그 자유가 인정된다는 주장의 물론해석상, 덕을 증진시키지 못하여 공동체에 의해 승인되지 못하는 무종교의 자유는 인정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게다가 이것은 어떤 덕이 인간으로서 꼭 필요한가에 대하여, 기독교가 압도적인 미국에서 일반적인 토론과 표결에 부쳤을 때 나올 결론에 가깝다.

그러나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들은 달리 생각한다. 특히 많은 적극적인 무신론자들은 종교가 악덕을 부추긴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신론자들이 생각하는 종교의 가장 큰 악덕은 가상의 존재를 숭배하는 거짓된 신념을 유지함으로써 지적 의무를 다하지 아니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생물학과 천문학의 중요한 진리들을 부인하게 만들며, 그 가상의 존재의 이름을 빌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도 않는 사람들의 행위를 비난하고 억압하며 죄의식을 심어준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비개방성, 불관용, 위계에 대한 무비판적 복종과 통계적 상관성이 있으며, 정직성, 자선, 규율 준수와 통계적 상관성이 있다고 관찰된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가 전반적으로 덕이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i) 상관성을 인과관계로 해석해야 하는 무리를 범해야 함은 물론, ii) 긍정적 부분과 부정적 부분에 점수를 매길 수 있을 정도로 그 덕들이 상호교환가능하고 대체가능하다는 전제를 깔아야만 가능하다. 샌델이 위 논증에서 이 문제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종교를 가져야 덕 있는 삶이라는 미국 일반 대중의 생각에 편하게 기대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판단의 부담의 문제로 이어진다. 인생의 의미와 기원, 배경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포괄적 교리에 관한 다툼은, 현대의 과학적 접근으로도 서로를 납득시킬 만큼 해결되지 못한 문제이다. 그런데 과학적 방법을 채택하지도 아니하는 전 시민이 참여하는 정치적 토론으로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고, 해결하여야 한다는 가정이 샌델의 위 논증에는 드러나 있다. 그렇다면 그 해결방식으로 샌델이 보여준 것은 무엇인가?

“-의 덕”이라는 이름을 발명해낸다. 또는 어떤 사태의 마땅한 본질을 규정한다. 그리고 그 덕을 고양시키는 것은 승인되어야 하고, 그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은 “타락”, “비하”이므로 불승인된다고 한다. 그의 저서와 논문에서 여기저기 산만하게 흩어져 있는 논증의 대부분은 자신이 주장하는 결론에다가 ‘--의 본질 위배’, ‘--덕의 타락’, ‘--덕의 고양’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매춘은 금지되어야 하는가? 그렇다. 그것은 인간 섹슈얼리티의 도덕적 가치를 타락시키는, 성관계의 비하다. 왜 비하인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돈으로 사서 마치 상품인양 그 본질을 타락시켰기 때문이다. 왜 성관계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에 해당하는가? 성관계의 비하이기 때문이다. 왜 비하인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

그러면 미덕과 본질은 정하는 방식이 중요하게 대두된다. 여기서 샌델은 현명하게도 두 방식을 동시에 제시한다.

(1) “그 OO의 목적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진 뒤, 자신의 머릿속에 직감적으로 떠오르는 기능과 특성을 본질로 규정한다.

(2) 다수의 공동체 구성원들이 그 목적으로 이해한다고 보는 것을 여러 유비 사례를 통해 파악한다.

샌델에게는 이 두 가지를 다 활용하는 것이 매우 유리한 입지를 가져다 준다. 만일 첫째 방식이 너무 독단적이고 자의적이라고 비판을 받으면, 자신은 둘째 방식으로 작업한다고 응수한다.(“우리는 이야기를 써나가는 존재다”!) 만일 둘째 방식이 공동체의 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믿는 바를 따르는 것 아니냐고 하면 자신은 무비판적으로 다수의 견해를 따르는 공동체주의자가 절대 아니라고 하면서 첫째 방식, 즉 덕과 본질을 분석하는 방식을 따른다고 응수한다.

이러한 명민한 회피를 통해, 샌델은 포괄적인 선관 문제에서, 공동체는 어떤 준거를 기준으로 ‘집단적 해결책’을 도출해야 한다는 생각을 결정적으로 공박받지 않은 채 유지할 수 있다. 그런데 타인의 도덕적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포괄적 선관들을 공동체의 특정 준거를 통해 제대로 평가하여 승인・불승인하는 것이 논의의 목적상 가능하다고 보더라도, 이것은 더 큰 문제를 만들어낸다.

 

⑤ 선관(conceptions of good)이나 그 선관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덕의 고양과 퇴락의 관점에서 부차적으로 다루어진다.

신앙을 가지거나 신앙을 부인하는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 신앙이 설파하는 신조가 참이냐 거짓이냐 하는 것이다. 만일 신실한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절대자에 대한 숭배가 부산물로 많은 덕 있는 행위를 산출한다고 하여 그 신앙을 견지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결국 샌델의 위 논증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견지하는 가장 심원한 신조들을 ‘공동체 전체의 관점에서 덕을 더 잘 담아낼 수 있느냐 없느냐’의 관점에서 도구적으로 평가하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그렇다면 진실인 신앙이라도 덕이 없다면 배척되고, 거짓인 신앙이라도 덕을 고양시킨다는 승인되는 것인데, 이것은 선관에 관하여 도치된 관점이다.

그런데 샌델은 이 도치된 관점이 오히려 ‘포괄적 선관’을 진지하게 다루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롤즈와 같은 정치적 자유주의는 ‘포괄적 선관’을 정치적 사안의 논의에서 배제함으로써 그것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결론이 나오는 이유는, ‘선관’을 그 선관 자체의 의미, 그리고 그 선관을 추구하고 유지하고 수정하는 사람들 본인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아니하고, ‘공동체적 자아’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3. 한국사회 시민들의 상식과의 공명

 

위와 같은 샌델 이론의 특성들은, 한국 시민들의 일반적 추론방식과 상당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물론 샌델과 같은 방식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당한 유사성이 발견된다.

 

① 존재론적 문제를 선결 문제로 삼는다.

한국 시민들은 많은 문제를 공동체 대 개인, 공익 대 사익의 대립으로 설정한다. 또한 개인은 공동체로부터 일정 정도 자유롭지만 또한 공동체구속적인 존재라는 격언을 되풀이하면서, 어떤 사안과 관련하여 공동체와 개인의 자아의 적절한 조정지점과 발현지점이 어디인지를 가늠해보는 작업을 한다. 어느 경우에는 공동체의 존재론적 우선성을 내세워 공동체의 이름으로 결론을 내리고, 어느 경우에는 개인의 존재론적 우선성을 내세워 개인 보호의 명목으로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공동체의 이름으로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더 잦고, 흔하다.

 

② 논증의 핵심고리를 ‘전반적인 선의 증진’으로 삼는다.

한국 시민들이 특별히 ‘덕’ 개념을 중심으로 한 사고를 하지는 않지만, 모종의 평면 위에 놓여서 서로 형량(balancing)되는 선(goods)이 공동체 내에서 전반적으로 증진되느냐 축소되느냐를 화두로 삼는 것은 사실이다. ‘전반적 선’은 여러 가치들의 종합 묶음(package)와 같이 생각되는데, 이 선들은 서로 상충하고 교환된다. 그래서 어떤

 

③ 권리 논증대화는 의도적으로 회피된다.

권리는 보통 원하는 것, 승인하는 것의 대상을 약칭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예를 들어 ‘음란표현물은 표현의 자유에 속하지 않는다’라고 할 때 이것은 ‘음란표현물을 불승인한다’는 것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지, 실제 표현의 자유 체계 내에서의 논증대화를 진행하는 것은 아니다.

 

④ 통약불가능성 그리고 판단의 부담 문제에 예리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많은 공공적 사안의 문제들이 문법적 명사로 포착되는 가치들의 충돌로 표현된다. 예를 들어 자유 대 평등, 자유 대 안전, 법적 안정성 대 구체적 타당성, 성장 대 분배, 형평 대 효율. 그리고 이렇게 설정해놓은 가치 간의 충돌 문제는, (i) 직관적으로 가늠한 후 자신의 심리적인 균형이 도달한 결론이 균형잡힌 판단이라고 역설하거나, (ii) 다수의 여론이나 다수결에 호소하는 식으로 해결한다.

 

⑤ 선관(conceptions of good)과 선관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정당화의 상대방이 아니라, 촉진과 제어・규율의 대상으로 다룬다.

선관은 선관을 추구하고 형성하고 수정하고 유지하는 사람들의 관점이 아니라, 그 선관을 추구하지 않는 국외자의 관점에서 평가된다. 그리고 그 관점에서는 특정한 선관이 전반적인 선(overall goods)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과 정도가 중시된다. 예를 들어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자신의 삶에 더 좋다는 심원한 결정이 합하여져 출산율이 낮아져 경제성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싱글세를 부과함으로써 그 결정을 바꾸는 것이 현명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권리를 침해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샌델과 공명하는 이러한 상식적인 추론의 방식들은 한국 사회의 공공 사안의 결정에 광범위하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왔다. 따라서 이러한 다섯가지 논제들을 비판하고, 이 논제들이 저지르는 오류를 범하지 아니하는 논증의 틀을 제시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작업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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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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