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는 책을 무척 감명깊게 읽고 있습니다

 옳음이 좋음에 선행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절실히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사례에 대해 명확한 답을 스스로 내리지 못해 이렇게 질문 드립니다

 책에서 사례로 든 '이웃집 여인의 방을 들킬 가능성 없고 비밀로 한다면 마음껏 훔쳐보라'는 도덕률을 우리가 채택할 수 없음은 분명히 이해가 됩니다. 우리는 그녀의 존엄을 침해할 수 없기 떄문이죠

 그런데 국정원이 인도네시아 특사단을 침투해 정보를 캐내려 한 행위에 대해서는 부당하다는 논리를  세울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행위를 정당하다고 생각은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옳음의 원칙을 (예외조항을 두거나)포기하는 수밖에 없나요 사실상 어느 정보기관이나 행하는 관례다. 그러므로 정당하다는 논리 말고 옳음의 관점에서 정당화할 방법은 없을까요. 잠입과 정보절도는 옳음에 반하기 때문에 무조건 부당하다고 보기에는 우리만 너무 순진한 원칙을 세우는 건 아닐까요? 인도네시아 특사단의 프라이버시 권리가 중요함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 특사단도 외국 방문시에는 주재국 정보기관들이 그렇게 할 것임을 인정하는 마당에 우리만 옳음을 추구해서 손해를 보는 것이 정당할까요?

제가 옳음의 원리에 동의한 것은 그것이 '공자님 말씀'이어서가 아니라 그래야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행복과 이익이 증대된다고 보았기 때문인데 이번 사례의 경우 옳음을 추구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의 행복과 이익을 감소시키는 것 같습니다. 국가와 국가의 대립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변:

 

1. 우선 지적할 것은, 고민의 근거가 된 전제 중 하나가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우리 특사단도 외국 방문시에는 주재국 정보기관들이 그렇게 할 것임(특수절도를 범할 것임)을 인정하는 마당에" 라는 전제 말입니다. 이 전제를, 우리 특사단이 외국 방문시에 특수절도를 당해도 이것은 전혀 외교 문제가 안된다고 국제적 원칙으로 천명했다는 뜻이라면, 즉 상호 외교관들의 숙소에 대한 특수절도가 호혜적 원칙으로 인정되었다는 뜻이라면, 이것은 사실과 어긋납니다. 한국 특사단이 인도네시아에 갔을 때 인도네시아 정부가 특수절도를 지시하고 마구 뒤벼가고 훔쳐가고 그러면, 한국은 아무런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건데 그게 사실은 아니죠.

 

그렇다면 이 전제를 그냥 '말로는 그렇게 천명하지 않지만 다들 그러고 있으니까, 인정하는 것이다'라는 뜻으로 새기면 어떨까요? 그건 "공지성" 원칙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잠재 규칙'은 될 수 있을지언정 정당화가능한 국제법적 원칙은 되지 못합니다. 잠재규칙은 되지만 정당화가능한 원칙은 되지 못하는 것으로는 만연한 '뇌물 관행'이 있습니다. 어떤 사회에서 검사에게 뇌물을 줘서 빠져나갈 수 있다면, 자신만 뇌물을 주지 않고 세게 처벌받는 것은 억울하겠죠. 그렇다고 해서 뇌물 관행이 정당화되는 원칙에 기반한 행위는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개혁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요.

 

예전에 쓴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어떤 원칙이나 주의, 지침이 '변태적'이라는 것의 특성 중 하나는 '공지성' 조건을 갖추지 못하고 권력이 있는 자의 예외적인 판단의 자의성을 허용한다는 점입니다. 흑인들에 대하여 번져 나가는 사적 린치를 막기 위해서 백인 소녀를 성폭행한 무고한 흑인 피고인에게 유죄를 내리는 배심원은 '공지성' 조건을 충족하는 형태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내린 유죄 평결의 이유로, "사적 린치를 막기 위해 무고한 사람에게 유죄를 내렸다"는 것을 제시하여 정당화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전쟁과 관련하여 적대하는 국가가 아닌 국가가 경제 협상을 하기 위하여 호텔에 묵었는데 그 호텔에 놓아둔 물건들을 마음대로 절도하는 행위를 한다고 국제사회에 공지하고, 그러한 도청과 절도의 원칙에 기반하여 어떤 국제 분쟁이나 협상을 '정당화'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결국 누군가 은밀히 '국익'을 판단하고, 은밀히 그 국익에 이로운 위법행위를 허용하고, 그것이 발각되었을 때 은밀히 그 위법을 은폐한다는 암묵적인 신념이 기반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전에 황우석 사태 당시 줄기세포가 설사 가짜라는 것이 밝혀진다 하여도 국익을 위해서 이를 은폐하여야 한다는 신념을 견지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공지되지 않은 행위 지침이 정당화되는 것은, 행위 주체(개인, 국가) 사이의 관계가 전쟁 상태나 유사 전쟁 상태에 있을 때입니다. 이 경우 서로에 대해 규범적 주장의 장은 이미 붕괴된 것이고, 따라서 특히 전쟁상태나 유사 전쟁상태를 개시한 측은, 상대방이 비공지적인 행위 지침을 활용하는 것에 대하여 불평할 근거가 없습니다.

 

[참조: 공지성(publicity)이란,
 "정의관이 그것의 요구사항을 따라야 하는 이들에게 공적으로 활용가능하며, 인정된다는 것"입니다
 즉, 그 사회의 원칙이 합당한 사람들에 의하여 받아들여지며, 일반적으로 공적으로 알려져 받아들여지며, 제도에 효과적으로 배태되어 있어야 공지성 조건을 충족시키는 질서정연한 사회가 됩니다.
공지성 조건은 계약론에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계약론은 정의의 원칙이 정치 공동체 구성원들을 그 자체가 목적인 인간으로 상호 존중하면서 합의될 수 있는 원칙이 되도록 합니다. 다시 말해, 그들 모두가 서로 규범적으로 유관한 이유에서 정당화할 수 있는 원칙에 따라 사회의 질서가 형성됨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공지성을 잃은 상태, 즉 "전면적 은폐"나 "부분적 은폐" 상태를 생각해봅시다.
그것은 이 사회의 권리와 의무를 할당하는 질서 중 상당 이유가 '겉으로 말하는 것과는 다른 원리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고, 기만적으로 형성됨을 의미합니다. 물론 그 기만의 이유에는 더 큰 목적 달성이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목적론적 사고는 부당한 것입니다. 사람은 목적을 담는 그릇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 다음으로 지적할 것은, 질문하신 분의 고민의 근거에는 또다른 전제, 적정수준의 사회(decent society) 사이의 관계에는 옳음의 법칙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현실주의적 국제관'이 암암리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국제관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일본이 힘이 셌을 때, 조선을 침공해서 식민지로 만든 것이 나쁘다고 비난하고 그들에게 현재에도 계속해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할 근거가 없게 됩니다.


롤즈는 자유주의적 사회 및 적정 수준의 사회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에 관하여 <만민법>을 썼습니다.

다시 말해, 그러한 관계를 규율하는 원칙 역시 정당화가능해야 하며, 이러한 <만민법>의 캐논(canon)에 적대국이 아닌 (전쟁상태나 유사 전쟁 상태에 있지 않은) 나라의 특사의 숙소를 경제적 이득을 위해 특수주거침입, 특수절도 하여도 되고 발각되어도 하나도 잘못한게 없다고 말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이지는 않습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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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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