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가 되고 나서 복잡한 사건을 처음 맡았을 때의 허둥지둥과 번잡함을 생각해본다.

 

복잡한 사건은, 쟁점이 많고, 검토해야 할 증거가 많고, 찾아야 할 논문과 판례가 많고, 변론준비서면이 길 수밖에 없는 사건이다.

 

처음에 했던 멍청이 같은 방식은, 서면을 처음부터 써나가면서 증거와 판례와 논문을 검토하는 방식이었다.

 

당연히 머리가 폭발했다. 머리가 폭발한다는 것은, 번잡한 생각들이 이리저리 둥둥 떠다녀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매끈한 감이 안잡히는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마음은 부산하고, 정신이 없는데, 일의 진행은 잘 되지 않는다.

 

처음 벌어진 일은 다음과 같다.

I라는 쟁점에 대해 쓰고 있다. 어? 여기에 관한 사실관계가 어떻게 되었지? 다시 증거를 찾아본다. 증거를 한 번 다 보긴 했다. 그러나 어디에 그것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증거서류들이 많기 때문에, 하나하나 다시 빠르게 훑어가며 찾는다. 아, 찾았다. 본문에 인용해서 써넣는다. 판례가 더 있지 않을까. 판례를 찾는다. 판례를 찾다보니 시간이 가고, 이미 '쓰는 모드'에서 '찾는 모드'로 머리가 바뀌어 있다. 거기다가, 그렇다고 판례를 찾는 즉시 그때그때 반영하기도  어렵다. 더 적합한 판례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한 머리 폭발 사태의 가장 주된 원인은, '서면을 쓰기'라는 것이 하나의 과업이라고 잘못 생각한 데 있다.  

 

사실 그것은 매우 복합적인 여러개의 과제였던 것이다.

 

머리가 번잡할 때는, 과제의 복합성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파악하고 나면, 하나의 동일한 종류의 노동으로 과제들을 분리할 수가 있다. 더 나아가 그 분리된 과제를 묶어줄 수 있는 지도(map)가 있어야 함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 할 일은 이 지도를 그리는 일이다.

 

위에서 예로 든 서면쓰기의 지도는 아래 링크를 참고하라.

http://civiledu.org/684

 

지도는 평소에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그리는 것이다.

 

산책을 하거나, 헬스를 하거나, 지하철에 있거나 할 때 골똘히 생각해본다. 이 일은 실제로는 어떤 세부 과제들로 이루어져 있는가를 먼저 파악한다. 그리고 그 과제들을 매끄럽고 간단하게 하는 방법들을 생각한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적을 수 있을 때 바로 바로 적는다. 적은 세부과제들의 순서를 생각해본다.

 

이런 식으로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영어로 된 책을 읽는 일을 생각해보자.

한 번에 복잡하게 한다면, 책을 읽으면서, 모르는 단어를 다 찾고, 정리도 하고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는 책 한권을 읽는 것이 매우 힘겹게 느껴진다. 엄청 시간을 투여했는데도 정신은 번잡하다.

 

그러지 말고, 다음과 같은 일련의 틀에 몸을 맡겨보자.

 

1차 읽기

(1) 이해를 중심으로 책을 의미 단위를 기준으로 자연스럽게 읽어나간다. 

(2) 스마트폰의 영어 사전을 켜두고, 모르는 단어나 문구가 나왔을 때에는, 그것이 반복적으로 나오는 단어이거나 이해에 결정적일 때에만 찾아본다. 단어를 찾는 일이 번거롭지 않게 하기 위해서 스마트폰의 다른 용도는 책을 읽는 동안에는 아예 쓰지 않는다. 찾아본 단어는 책 위에 표기한다.

(3) 그 외 모르는 단어는 샤프나 연필로 밑줄만 쳐둔다.

(4) 책을 읽을 때에는 중요 주장과 논거 중심으로 꺽쇠로 표시하고, 아주 중요한 부분은 옆에 별표도 쳐둔다.

 

2차 읽기

(1) 밑줄 쳐 놓은 모르는 단어를, 단순 노동 하기에 적합한 시간에 한 번에 다 찾는다. 데스크톱의 키보드 위에(모니터와 키보드 사이에) 책을 펼쳐두고, 컴퓨터에서 빠르게 단어를 찾고 찾은 것을 연필이나 샤프로 쓰는 방식이 가장 속도가 빠르다. 노트북이라면 키보드 아래에 (몸과 노트북 사이의 책상에) 두고 쓰면 된다. 중요한 것은 한, 두 번에 몰아서 찾는 것이다. 음악을 들으면서 해도 좋다.

(2) 이렇게 해서 모르는 단어를 모두 다 찾은 책을 다시 한 번 읽는다.

(3) 이렇게 다시 읽는데, 중요 부분을 1차 읽기 때 표기했던 것 중심으로 읽어나가되, 중요 부분이 더 있을 수 있으므로 그 근처 부분도 주의해서 읽는다.

(4) 1장 씩 읽고는 필기구로 쓰는 노트에 책의 중요한 부분의 핵심 내용을 정리한다. (책을 요약정리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 부분의 핵심 주장+근거를 그 논리적 구조에 따라 정리하는 것이다. 중요 부분이란, 자신이 지금 풀고자 하는 문제와 관계된 부분이다.)   

(5) 인용해야 할 부분은 ""로 표기해서 그대로 인용해서 번역한다.

(6) 노트에 정리한 내용은 서지사항과 함께 그때그때 타이핑한다.

 

이런 식으로 틀을 익혀 놓으면, 부산스럽게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책을 읽다가 말고, 시간이 좀 지나면 그나마 읽은 것도 기억이 안 나는 불행한 사태는 과거의 일이 된다.

 

평소에 자주 마주쳐야 하는 과제에 번잡함을 느낀다면, 그 번잡함을 계기로 삼을 만 하다. 틈틈이 요령을 생각해서 그 과제의 틀을 만들어볼 계기로.

 

이렇게 틀을 만든답시고 만들었는데 잘 안통하는 때가 있다. 그러면 시행착오를 하면서 보다 시행하기 쉬운 방식으로 틀을 수정하면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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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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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1.04 02:14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바로 이 '작업기억의 한계'와 '적절히 조건화된 지식' '과제 나누기'에 대한 논의를 찾고 싶은데, 괜찮은 일반론이 안 보이더군요. 일단 데이비드 알렌의 GTD행동경영을 기초로 삼고 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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