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제적 자유주의의 의미와 함의

 

경제적 자유주의란, '경제적 자유에 간섭하지 않고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 국가의 과제다'라는 중심 신조를 바탕으로 법과 정책을 평가하는 이념을 일컫는 용어다.

 

그러나 이 용어는 학적인 용어가 아니며, 스칼라쉽을 갖추지 못한 이들이 편의상 쓰는 용어일 뿐이다.  

 

이 이념은 엄청나게 오도하는(misleading) 사고를 양면으로 낳는다.

 

한면으로는 자유가 분할한 영역을 가지며 적용될 있는 개념인 듯한 오해를 낳는다. 즉 자유는 경제적 영역에 적용되는 것이 있고, 정치적 영역에 적용되는 것이 있고, 문화적 영역에 적용되는 것이 있으며, 이들은 이질적인 것이어서 각각 따로 논해야 한다는 오해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는 다른 이익을 위해서 언제든 제한될 수 있는 것이라는 결론이 불가피하다는 오해를 낳는다. 왜냐하면 경제적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 그리 설득력이 없음은 몇 가지 사례를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고(예를 들어 환경오염의 규제), 결국 '자유란 다른 가치와 비교해서 금지하거나 제한하는 그냥 그렇고 그런 가치'라는 오해를 낳기 때문이다. 이는 자유가 가치들을 형량하는 토대인 '규범'이라는 점을 완전히 놓치게 만든다.  

 

따라서 경제적 자유주의가 왜 자유주의라고 할 수 없는지를 살펴보고, 그에 맞는 용어를 찾아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2. 역사적 연원과 절대적 고착

 

한국에서는 힘 있는 경제주체들의 최대한의 행위가능성을 주장하는 신조가 자유주의의 대표 주자인 것처럼 대중적 인상이 형성되어 있다. 그래서 서점에서 '자유주의'를 검색하면 서적의 목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중교양서들은 거개가 그런 신조를 표방하는 것들이다.

 

그들이 '자유주의'라는 말을 함부로 남용하는 데는 그 역사적 근원이 있다. 자유주주의는, 절대왕정의 자의에 반대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이념으로 처음 발전되었다. 그 시기에 시민 계급의 삶을 가장 두드러지게 지배했던 권력은 왕에게 좌우되는 국가 권력이었다. 그러한 시대에 시민의 재산은 왕의 자의에 의해 박탈당하고, 시민의 인신은 왕의 자의에 의해 구속되었다. 따라서 그 시대의 최우선 과제는 왕으로 상징화되는 국가 권력의 자의성을 통제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권력은 인간 사회의 보편적인 현상이고, 특정 시대의 특정 정치질서의 최고 권력자에게 붙박이로 붙어 있는 것은 아니다. 자유주의가 처음 자신이 발전시켰던 이념의 단초를 진정으로 타당한 규범으로 발전시키려면, 그것은 '모든 권력의 자의'에 대한 반대로 나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자유는 1인칭 관점에서 그 많고 적음을 따지는 가치가 아니라, 2인칭 이상의 복수의 관점에서 서로의 결정권을 부당하게 탈취당하지 않을 관계를 표현하는 규범이기 때문이다.  

 

경제 영역에서 기업이나 소유권자와 같은 주체의 측면에서 자유의 최대화를 외치는 이들은 이러한 발전을 포기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들은 문제되는 부당한 간섭의 발현 경로를 오로지 '법에 의한 명시적인 금지'로만 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듀이는 이러한 포기와 고착이 이후 인류의 사회 발전에 크나큰 장애가 되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만일 초기 자유주의자들이 자유에 대한 자신들의 특수한 해석을 역사적 상대성의 적용을 받는 것으로 제안했다면 자유주의를 모든 시대, 모든 사회적 환경에 적용되는 교조로 고착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보다 명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실제적인 자유가 어느 시기에나 현존하는 사회 조건과 상관관계에 있음을 이해했을 것이다. (···) 그랬다면 그들은 경제 관계가 인간관계의 양식을 결정하는 지배적 조정력이 되었으므로 자신들이 주장한 개인의 자유의 필연성이 절대 다수의 개인을 위해서 경제력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이 순전한 형식적·법적 자유과 생각과 행동의 실질적 자유를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난 한 세기의 역사는 그들의 예언을 빗나간 역사가 되었다. (...) 무엇보다 그들은 모든 형태의 자유의 확대와 특정한 경제적 자유의 확대를 동일시했기 때문에 생산과 분배에 대한 사적 통제를 수용한다는 것이 문화재와 산업에 대한 대중의 실질적 자유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예견하지 못했다. 소수가 권력을 소유하는 시대가 19세기 초에 자유주의자들이 상상했던 모든 사람들을 위한 자유의 시대를 대체 했다. (...) 문제는 자유에 대한 자신들의 해석이 어떠한 역사적 위치에 있는지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들이 선언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중대한 장애물이 될 사회 체제의 공고화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John Dewey, Liberalism and Social Action, 김진희 옮김, 자유주의와 사회적 실천, 책세상, 2011, 51-52면.)

 

한 이념이 보편적 문제의식을 버릴 때, 그것은 특정한 사회계급의 이데올로기로 고착되고 만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듀이가 말하는 '자유'는 실상 '자유'가 아니며, 듀이는 무언가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고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듀이, 롤즈, 드워킨과 같은 자유주의자들은 실상은 자유의 적이며, '실질적 자유'라는 이름으로 '진정한 자유'를 파괴하려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고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들의 이의가 틀렸다는 점은 간단하게 증명할 수 있다.

 

3. 특정 경제주체의 관점에서 행위가능성의 극대화가 말하는 자유의 귀결

 

우리는 법적 자유를 '행위 경로의 선택지에 법적 장애가 없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점에는 특정 경제주체의 행위가능성 최대화를 주장하는 이들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자유는 소극적 자유관을 나타내며, 자유를 제약하는 주체를 '국가'로 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래 논의의 핵심은, 이러한 기초 위에서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이 주창하는 법적 자유의 관철이, 법적 자유의 부당한 제약으로 이어짐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오천만명이 사는 사회에서 그 사회의 토지를 1만명이 소유하고 있다고 하여보자. 그리고 이 소유권은 그 사회의 법적 질서에 의해 무제한적이고 배타적인 것으로 인정된다고 하여보자. 그 토지 위에서 살아가고 경제활동을 하기 위하여 모든 사람은 토지 소유권자와 계약을 맺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소유권 침해로, 즉 소극적 방해배제청구권 실행의 결과로 그 토지에서 법적으로 추방된다.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는 혼인, 취미생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그러나 이 사회에서 토지 소유자들은 자신의 토지를 사용하려는 나머지 4천999만명에게 혼인, 취미생활, 종교를 이러저러하게 해야 한다는 내용을 포함한 계약을 체결할 법적 자유가 있다. 그래서 나머지 사회구성원들의 그런 자유들은 모두 토지 소유자들 자의의 매개항이 결부된 수준으로 수축되게 된다.

 

즉 이 사회의 법질서는 다음과 같은 조문이 명시적으로 존재하는 것과 법적 자유의 외연(extension)이 같다. 

 

[질서1]

"모든 구성원은 그 구성원이 그 위에서 생활을 영위하는 토지 소유자의 자의가 허락하는 한 혼인, 취미 생활, 종교 생활, 표현 (...) 등의 자유를 갖는다."(A)

 

나머지 구성원들의 자유를 정의하는 법규정에 그러한 매개항이 명시적으로 표현된 경우와 마찬가지 결과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토지 소유자들에게 그러한 계약을 유효하게 체결할 자유를 무제한적으로 부여한 법질서의 직접적인 결과다. 

 

즉 [질서2]

"모든 구성원은 혼인, 취미 생활, 종교 생활, 표현 (...) 등의 자유를 갖는다."(A')

"모든 토지 소유자는 자신의 토지를 활용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계약을 체결할 시, 그 계약 내용을 스스로 결정할 무제한의 자유를 갖는다."(B)

 

즉 A = A' + B다.

 

왜냐하면 법적으로 열려 있는 행위 경로를 낱낱이 따지면, [질서1]에서 열려 있는 경로와 [질서2]에서 열려 있는 경로는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법적 자유의 외연은 다음과 같은 법적 자유의 외연보다 축소되어 있다.

 

"모든 구성원은 토지 소유자의 자의와 무관하게, 양립가능한 동등한 혼인, 취미 생활, 종교 생활, 표현 (..) 등의 자유를 갖는다." [질서3]

 

즉 [질서1]과 [질서2]는 [질서3]에 비해 나머지 구성원들의 자유가 축소되어 있다. 토지 소유자들의 자의의 매개항이 [질서1], [질서2]에는 결부되어 있고, [질서 3]에는 결부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자의의 매개항이 결부된 법적 자유는, 자의의 매개항이 없는 법적 자유보다 축소된 자유다.

 

"모든 국민은 자신의 주민등록번호 바로 뒷자리의 사람의 자의가 허용하는 한, 표현의 자유를 갖는다."는 "모든 국민은 표현의 자유를 갖는다"보다 축소된 법적 자유다.

 

한편, 이 가상 사례에서 토지 소유자들의 자유는 나머지 구성원들의 자의를 매개항으로 기술되지 않는다. 반면에 나머지 구성원들의 자유는 토지 소유자들의 자의를 매개항으로 기술된다. 일방적으로 한 집단이 나머지 집단의 자유 몫까지 추가로 행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토지 소유자들은 자기 몫이 아닌 통제력까지 행사함으로써 나머지 구성원들을 지배(domination)하고 있으며, 토지 비소유자들은 자기 몫의 자유가 박탈당한 채, 지배당하고 있다. 지배와 피지배 관계는 더 이상 규범적으로 정당화되는 관계가 아니다. 어떤 구성원들도 나머지 구성원들에게 지배를 인정해달라고 규범적으로 유효한 주장을 할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의 주장은 특권의 주장이며, 공론장에서 인정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규범적 논증이 아니다.

 

그런데 경제적 자유를 주장한다고 겉으로 외치는 이들은 토지와 같은 생산수단의 소유자들이 계약 내용을 정할 자유를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나머지 구성원들의 법적 자유의 축소다. 즉, 그들은 자유의 적이다. 논증끝.

 

4. 루소의 논증 : 노예 상태와의 비교

 

루소의 유명한 <사회계약론>은 다음과 같은 확인으로 시작한다.

"인간은 본래 자유인으로 태어났다. 그런데 그는 어디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다. 어떤 사람은 자기를 다른 사람들의 지배자로 믿기도 하는데, 실은 이 사람은 더 심한 노예가 되어있다. 어떻게 이런 뒤바뀜이 생겨났는지 나는 모른다. 그렇다면 이것을 정당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이 물음에는 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Jean-Jacques Rousseau, Du Contrat social. 이환 옮김, 사회계약론,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1999년, 5면)

 

이것이 부당한 이유는, 자유인은 양립가능한 동등한 자유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자신의 자유를 결코 제한하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의 지배에 예속되기 위하여 자신의 자유를 처분하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니며, 노예로 세뇌받은 사람이다.

 

"그리티우스는 말하기를, 만약 한 개인이 자기의 자유를 양도하여 어떤 주인의 노예가 될 수 있다면 한 국민 전체도 자기들의 자유를 양도하여 국왕의 신하가 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고 했다. (···)그러나 한 국민의 경우 무슨 대가로 팔리는 것일까? (...) 사람이 자신을 공짜로 내어 준다는 것은 도대체가 비합리적이고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 행위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양식에서 벗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당하고 가치 없는 것이다. 한 국민 전체에 대해 같은 말은 한다면 이것은 그 국민 전체를 온통 광인이라고 가정하는 것과 같다. 미친 행동은 권리가 되지 않는다."(위의 책, 11면)

 

그런데 사회적으로 희소한 생산수단의 소유권을 배탁적인 절대적 권리로 인정하는 경우 앞서 보았듯이 지배와 예속을 낳게 된다. 즉 누군가는 불평등하게 더 큰 몫의 통제력을 가지고 누군가는 자유인으로서 당연한 한 몫조차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소유권이라는 권리질서는 평등한 자유인들에 의해 승인될 때에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그리고 소유권과 같은 재산에 대한 권리는, 그것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구성원들의 관계를 훼손하지 않고 오히려 발전시킬 수 있는 한에서만 정당하게 승인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를 훼손하지 않으려면, 사람들의 기본적 필요와 기본적 권리를 재산에 대한 법질서가 훼손하지 않아야 한다.

 

"선취권은 강자의 권리보다 더 현실적인 것이지만, 이것은 재산권이 설정된 후에만 참된 권리가 된다. 본래 사람은 누구나 필요로 하는 모든 것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그러나 그를 어떤 재물의 소유주로 만들어 주는 적극적인 행위는 그 밖의 것으로부터 그를 제외시킨다. 일단 자기 몫이 정해지면 그는 그것으로 만족해야 하고 공동체에 대해 그 이상의 권리를 갖지 못한다. 이것은 바로, 자연의 상태에서는 그토록 허약했던 선취자의 권리를 시민 신분을 가진 모든 사람이 존중하는 이유다."(위의 책, 28면)

 

그래서 "대체로, 어떤 토지에 대해 선취권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필요로 한다. 첫째로, 그 토지에는 그 때까지 아무도 거주한 적이 없을 것, 둘째로, 생존에 필요한 만큼의 토지만을 점유할 것, 셋째로, 공허한 형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노동과 경작에 의해서 소유하게 되는 것 – 이것이야말로 법률상의 명분이 없는 경우에도 타인으로부터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유일한 징표이다.

(...) 토지의 취득이 어떤 형식을 취하든, 자기 자신의 토지에 대한 개개인의 권리는 항상 골동체가 전 토지에 대해 갖는 권리에 종속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사회적 유대의 견고성을 기할 수 없고, 또 주권의 행사에 있어 그 실효를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위의 책, 29-30면)

 

다시 말해 재산과 같이 외부적 대상에 대한 법적 권리는, 오로지 개개인들의 평등한 자유를 유지, 복구, 강화하는 방향으로만 설정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개개인들은 스스로가 자유로운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로서의 지위를 대가 없이 내다버렸다는 이상한 추정을 받게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제적 자유주의라고 스스로를 칭하는 이들은 거꾸로 추론한다. 그들은 외부적 대상에 대한 법적 권리를 '자유권'이라고 먼저 독단적으로 이름붙인다. 그리고 나서 그 권리를 제한하는 모든 것은 자유에 대한 공격을 낙인찍는다. 그 결과 그들은 평등하게 자유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복구하고 강화하기 위한 조치를 허용불가능한 영역으로 축출시킨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독단적인 선언에 의해 보장된 재산권의 범위 때문에 생긴 굴종적인 지배-예속 관계를 자유의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논증 없는 독단, 자유의 가치(재산)와 자유 그 자체를 혼동에서 비롯한 이렇게 거꾸로 된 추론은 구성원들의 자유를 파악하는 올바른 방법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경제적 자유주의자라는 용어를 써서 자유의 영역을 분할하려는 이들은 자유주의라는 이름을 쓸 자격이 없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탈취적 지배권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적합한 용어는 '탈취적 지배주창자들' 또는 '절대적 소유권리론자들'이라는 이름이다.

 

5. 반대 측면의 함의

 

이제, 경제적 자유주의가 자유주의가 아니라는 점이 증명되었으므로, 자유주의를 그러한 자들이 주장하는 신조의 집합체와 등치시키는 반대 논의 역시 존립의 근거가 사라진다.

 

이 반대 논의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자유는 자유 이외의 이익을 위해 언제든 제한될 수 있다는 논의다. 이 논의는 그러나, 사회의 일부 구성원이 원하는 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다른 구성원들의 자유를 탈취하게 되는 위험으로 연결된다. 예를 들어 경제성장을 위해 여가의 자유를 제한하자는 주장은, 일부 구성원들이 지금보다 추가적인 경제적 이득을 누리기 위해서, 다른 이의 자유를 탈취하는 것이다. 즉, 다른 사람의 자유를 축소시킴으로써 경제적 이득을 더 얻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사람을 납치해서 노예로 써도 된다는 논리다.

 

우리가 전면적 노예제건, 부분적 노예제건, 노예주가 1명이건, 노예주가 여러 명이건, 근본적으로 평등하고 자유로운 관계에 서는 시민의 지위를 부인하지 않는다면, 자유는 오직 자유 자체를 이유로 해서만 제한될 수 있다. 즉, 자유는 자유의 전 체계 강화를 위해서만 제한될 수 있다는 Rawls의 정식은 모든 입헌 민주주의 사회에서 필수적인 정식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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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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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음음음
    2016.01.08 19:2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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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적자유 없이 정치적자유가 없다라는 신념을 가진 자유주의 정신은 부정될수 없습니다.
    블로거 분이 이런 글을 자유롭게 올릴수 있는 이유도.
    경제적 자유덕분입니다.
    인간의 행위 99%가 경제 행위이기때문입니다.

    한번 간단한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가 월급을 받는 행위는 경제적 행위입니다.
    왜그런고 하니 이를 통해 생존을 위해 소비를하고
    나머지는 미래를위해 저축하고
    나머지는 또다른 부가적인 즐거움을 얻기위해 소비합니다

    만약 정부가 월급의 90%를 징수해갔다고 칩시다.
    우리는 10%의 월급만 가지게됩니다.
    우리는 이걸가지고 할수 있는건 최소 생존에 필요한것만 충족시킬수 있을겁니다.
    지금처럼 인터넷비용을 따로 낸다는것은 상상도 할수 없습니다.
    개인 뿐만 아니라 기업역시 이윤추구를 할 동기가 없어서 서버비용은 고사하고 문닫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정치적 자유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100%를 징수해가면 우리의 자유는 정부에의해 좌지우지 됩니다.
    정부가 무엇입니까? 정치 관료들입니다.
    우리의 자유를 정치인, 관료들에게 맡겨야하는 처지 입니다.
    모든 권력을 국가가 소유하게됩니다.

    국가 복지혜택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선택할수 없습니다.
    국가가 해라면 해야하고 수준이 떨어져도 요구할수가 없습니다.

    애초에 기업만 경제적 행위를 금지 시키면
    당장 우리는 먹을것 살것 다른 행복을 추구할 재화들 인터넷 스마트폰 이메일
    아무것도 추구할수 없습니다.

    경제적행위가 금지될수록 우리의 정치적행위 반경은 그만큼 비례해서 축소됩니다.

    • 이한
      2016.01.09 05:36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글의 논지는 '경제적 자유 없이도 정치적 자유가 존립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경제적 자유 없이는 정치적 자유는 없습니다.

      이 점에서 댓글을 다신 분과 저는 아무런 견해 차이가 없습니다.

      논평을 하시려면 견해 차이가 있는 부분을 적시하셔야 합니다. 제가 본문에서 정의한 경제적 자유주의는 '계약내용을 결정할 무조건적 자유'를 우선적으로 주장하며, 그것에 대한 간섭은 모두 자유에 대한 침범이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이러한 경제적 자유주의는 정치적 자유의 공정한 가치를 부인하기도 합니다. 즉, 선거비용의 상한선을 두는 규제 역시 자유의 침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계약내용을 무조건적으로 허용하고, 정치적 의사소통의 통로를 재력에 따라 비례해서 구매하는 무조건적 재량이 모든 구성원의 자유의 전 체계를 강화한다는 점을 보여야 합니다.

      제가 본문에서 지적한 것은 '경제적 자유'는 '관계적'으로 정의되며, 1인의 경제적 자유의 확정은 다른 구성원들의 경제적 자유를 포함한 다른 자유의 범위를 동시 합일확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중 특정 당사자의 입장에서 행위의 허용 범위 최대화를 추구하는 것은, 보편적인 자유의 체계의 강화가 아니게 됩니다. 즉 특정 계급의 '지배의 권리'는 그런 의미에서 동등한 양립가능한 자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댓글 다신 내용은 견해 차이가 없는 내용을 쓰신 것에 불과합니다. 글에 대해 댓글을 다실 때는, 글의 내용을 파악하고 나서 댓글을 다셔야지, 개념 한 두개를 본 다음, 글의 내용을 임의로 상상하고 나서 논평하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생산적인 논의가 되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다루어야 합니다.
      "많은 기업이 여성 노동자에게 '혼인 퇴직제'를 실시하고, 여성이 취업할 때는 '혼인하면 퇴직하겠습니다'라는 조항이 포함된 근로계약서를 작성케 한다. 이 근로계약서를 국가는 유효한 것으로 법적으로 인정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계약의 양 당사자 모두 스스로의 의사에 의해 그 계약서에 서명하였으므로) 만일 유효한 것으로 인정한다면, 이는 자유의 전 체계를 강화하는가? 즉 기업주는 자신의 혼인에 관한 의사결정도 하고 여성 노동자의 혼인에 관한 의사결정도 하는 두 몫을 행사하게 되고, 여성 노동자는 한 몫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게 되는 법적 자유의 체계는 자유의 확대인가? 만일 이를 현재의 '남녀평등고용법'과 같이 제한한다면, 이 법은 자유를 침해하는 법인가?"

      다른 한편, 시장거래로 점유하게 된 재산을 이미 확정적으로 절대적인 소유권이 인정된 것이라 여기면, 국가의 어떠한 과세도 자유 침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시장거래로 점유하게 된 것 중 일부가 세금으로 걷힌다는 일상 경험의 시간적 선후 순서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무언가를 절대적으로 소유하고 나서 국가가 징수해간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조합에서 업무집행조합원은, 조합 사무를 처리하면서 어떤 재산을 물리적으로 점유하게 되더라도 협동체인 조합의 수익 분할 이전에 그 재산에 대한 소유를 권리로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가 시간적으로 먼저 현실적으로 점유하게 된 재산이라는 점은 그것에 대한 절대적 소유권을 주장할 근거가 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시장거래로 점유하게 된 재산에 대하여 협동체인 국가의 공정한 조세 이전에 그에 대한 소유를 권리로 주장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John Rawls, "The Basic Structure as Subject". 황경식·이인탁·이민수·이한구·이종일 옮김, 『공정으로서의 정의』, 서광사, 1988, 제8장 “주체로서의 기본 구조”에서 Rawls는 시장 거래로부터 귀결되는 분배는 그 자체가 공정한 조건의 결과가 아닐 뿐더러, 공정한 조건이 성립되어도 배경적 정의의 조건을 훼손할 수 있는 것이어서 그 결과에 대하여 절대적 권리를 먼저 부여하는 것은 정의의 원칙상 허용될 수 없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즉 자발적인 시장 거래로부터 귀결되는 분배는 (비록 경쟁적 효율성의 모든 이상적 조건이 구비되어 있다 할지라도) 시장 체제의 구조뿐만 아니라 수입과 부의 선행된 분배가 공정하지 않는 한 일반적으로 불공정하다. 기존의 부는 적절히 획득되었어야 하며, 모든 사람은 소득을 얻고 원하는 기술을 배우는 동등의 일에서 공정한 기회를 가졌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배경적 정의의 필요조건들은 설사 누구도 불공정하게 행동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혹은 많은 개별적 교환의 전체적 결과가 타인의 기회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 아무도 의식하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손상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막을 수 있고 또 경제 행위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일상적 거래에서 따르도록 실제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실행 가능한 규칙은 없다.”) 공정한 과세가 완료된 이후에야 그 재산을 활용하는 여러 행위 경로가 자유권의 보호범위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세와 자유를 자동적으로 연동시키는 논리는, 20%의 세율을 가진 나라에서 10%의 세율을 가진 나라로 변모하면 그것이은 필연적으로 자유의 증대라는 단순한 논리에 이릅니다. 그러나 10%로 세율을 내림으로써, 많은 아동들이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에 그 아동들의 법적 자유는 수축되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동의 책임이 아닌 부모의 재력의 상이로 인해 수업료를 내지 못하게 된 아동은 학교에 출입을 법적으로 금지당하게 되고, 따라서 교육을 받음으로써 진행할 수 있는 많은 후속의 법적 행위 경로도 닫히기 때문입니다.

      과세가 자동적으로 자유 침해가 아니라고 한다면, 몇%의 과세가 자유 침해가 되는 것일까요? 이것은 과세율만 가지고는 알 수 없습니다. 물론 90%의 고세율이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사회에서는 자유가 침해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적시하신 이유도 그 가능성을 추단케 하는 근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적시하신 그 이유 때문인 것이지, 과세율 자체에 붙박이로 자유 침해성이 붙어 있기 때문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중간값의 소득자가 내는 소득세율은 20-30%, 평균적인 소득자가 내는 소득세율은 30-40% 정도이고, 소득 최고구간의 한계세율이 '90%'인 나라가 된다고 해서 자유가 침해된 국가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실제로 이는 20세기 유럽과 미국에서 실시되었던 소득세제이기도 합니다.

      결국, 자유에 관한 구체적인 사안에 관한 정교한 논의도, 특정한 입장에 있는 사람의 특정한 자유의 단면만 뽑아서 보거나, 점유하는 재산 자체를 자유와 동치시켜서 생각해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불가능은 자유에 오히려 실질적인 위협을 만들어냅니다. 우리의 실제 정치적 사안에서 문제되는 쟁점을 자유의 언어로 논의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유는 자유 이외의 이유로 함부로 제한당하고 타협당할 수 있는 무언가가 되고 맙니다.
  2. 음음음
    2016.01.08 19:35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시장과 비교를 해보면
    정치에서 우리는 1년에 한번 투표를 통해 우리 개인의 의사를 표명하지만
    시장에서
    우리는 매일 화폐를 통에 실시간으로 우리 개인의 의사를 표명합니다

    지금 당장 인터넷 언론들 광고금지 규제하나만 때린다하더라도
    대부분의 언론사가 문을 닫을겁니다

    경제행위를 금지당할때마다 정치행위도 같이 금지당한다는걸 잊어서는 안됩니다
    자유주의가 경제자유를 중요시하는 이유는 인간의 속성과 행복의 근본이 경제행위에 있기때문입니다.
    정치적행위를 하는이유조차도 그를 통해 이후에 경제적으로 어떤 만족과 행복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투표를해서 좀더 안전이 보장되고 경제가 더 좋아지고 세금도 감면시켜주면 내가 좋아하는것을 좀더 사서 소비할수 있고 등등 다양합니다.
    • 이한
      2016.01.09 05:37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말씀하신 내용은 제가 http://www.civiledu.org/625 에서 이미 정리한 바와 같습니다. 본문에서 지적하는 것은 경제적 자유라는 것은 자유의 전 체계에서 파악되어야 하는 것이지, 특정 행위자의 입장에서 본 재량의 극대화로 파악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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