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규범적인 쟁점에 관하여 이야기하다 보면, "당신, 또는 당신의 가족 중 00가 그런 처지에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주장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자주 나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논점에 어긋난 것, 부적절한 것이라고 평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왜 그것이 논점에 어긋났는지는 설명이 없어 답답합니다.

 

답변:

 

1. 우선 그와 같은 질문이, '오히려 적절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유에 관하여 먼저 살펴봐야 것 같다.

 

일단 그 질문의 구조는 '역지사지'의 형식을 취한다. 역시사지는 황금률로도 표혆된다.

 

황금률은 "남들이 당신에게 해주었으면 하는 대로, 남들에게 해주라."의 정식으로 표현된다.

 

이 정식은 얼핏 보기에는 칸트의 공식, "사람들을 항상 목적으로 대우하여야지, 단지 수단만으로 대우해서는 안된다."와 "당신의 행위의 격률이 행위의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하라"에서 표현된 정신과 같은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즉, 칸트의 공식과 황금률은 같지 않다.

 

가장 큰 문제는 황금률이, "각자의 인생계획을 스스로 설정하고 추구할 권리"를 구현하는 형태로, 추상적인 범주를 적절히 포함시키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황금률은 추상 수준에 대하여, 권리의 범주에 관하여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곧바로 특정한 구체적인 대우를, 타인과의 상상적 공감을 통해서 적절한지 아닌지를 판별하라고 한다. 그리고 상상적 공감의 중심점은 '타인'이 아니라 '나'이다. 이로 인해, 자신의 신조, 가치관, 취향, 선호를 타인에게 부과하려는 인간의 일반적 경향에 아무런 방비책도 마련하지 못하게 된다.

 

다시 말해 "황금률은 잠정적으로 모두가 선호하는 것이 같다고 전제한다. 이 전제는 어딘가 의심스럽다. 당신이 등 마사지를 좋아한다고 가정해보자. 실제로, 당신은 그 누구보다 더 등 마사지를 즐긴다. 이때 황금률에서는 당신이 대접받기를 원하는 대로 타인을 대하라고 가르친다. 굳이 청하지 않더라도 당신은 누군가 당신에게 등 마사지를 해줬으면 바라기에, 황금률에 따라 당신은 누군가가 당신에게 부탁하지 않더라도 등 마사지를 해줘야 한다. 하지만 등 마사지를 싫어하거나 낯선 사람이 자신을 만지는 것을 꺼려하는 사람도 있다. 직관적으로 보면, 타인의 동의 없이 또는 억지로 등 마사지를 해주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이렇듯 직곤이 황금률과 충돌하는 경우를 보면서 우리는 황금률이 금이 아니라 어쩌면 황철광에 지나지 않는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Steven D. Hales, <This is Philosophy: An Introduction>. 김준수 옮김, <이것이 철학이다: 지금 시작하는 철학 강의>, 21세기 북스, 2013, 25면)

 

헤일스가 든 마사지의 예에서처럼, 만약 추상수준을 조절하지 않고, 그래서 공통된 상호 인정의 대상이 되는 활동의 범주를 발견하지 아니하고, 가장 구체적인 수준의 행위와 이익이 상호 부과나 요구의 대상이 된다고 한다면, 이것은 오히려 타인을 목적으로 존중하지 않는 것이 된다. X 종교가 진리이고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고 절대적으로 믿는 사람은, X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그 종교를 믿을 것을 법으로 강제함으로써 그 사람에게 "자신이 받고 싶은 대우"를 했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타인과 자신이 강압이나 사기에 의하지 아니하고 자발적으로 동의한 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권리를 서로에게 인정하라"는 격률은 이러한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격률의 내용에 이미 타인의 목적 설정과 추구권을 인정하는 부분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마사지를 받을 것이냐 그냥 티비를 볼 것이냐, 하드록을 들을 것이냐 클래식을 들을 것이냐의 문제는 바로 이 같은 권리 보장에 의해 각자에게 결정권을 줌으로써 해결된다.  

 

  이러한 추상범위의 포착은, 그러한 추상범주의 공통 인정을 하지 아니할 경우를 감수할 수 있느냐를, 공정한 방식으로 검토함으로써, 그 논거를 마련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성애자의 경우에 자신이 다수라는 ‘힘’의 요소를 배제하고도, “다른 이들의 규제에 의해 자신의 성적 지향과 어긋나는 성적 지향(sexual orientation)만을 강요받을 수 있다”는 원리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자신과 동성애자의 공통 범주가 되는 “성적 자율성” 원리에 동의하여야 한다.

 

이 것은 롤즈가 고전적 공리주의에 대하여 비판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고전적 공리주의는, 모든 사람들의 욕구를 융합한 "동정적 관망자"(sympathetic spectator)의 관점에서 그 융합된 욕구에서 최대 만족을 주는 것이 '옳다'고 규정한다. 그리하여 공리주의는 사람들이 서로 구별되는 존재라는 점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게 된다. 오늘 어떤 것을 하고(갖고), 내일 어떤 것을 할까(가질까)를 결정하는 개인 통합의 원리(A)와, 저 사람은 무엇을 하고(갖고) 이 사람은 무엇을 할까(가질까)를 결정하는 사회 통합의 원리(B)는 같지 않다. 왜냐하면 후자의 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용기 안에 담기는 대상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내 상충하는 요구와 삶에 대한 상이한 이해를 갖고 있는 구성원들 사이의 일정한 관계를 정당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레일링이 주목했듯이,황금률의 명령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가장 계몽되고 너그러운 도덕적 태도는 남이 자신과 매우 다를 수 있고, 따라서 내가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 것은 남의 필요와 관심과 욕망에 대해 생각하고 그에 따라 남에게 하는 행동을 어떻게 조정할지를 생각하는 자기 본위의 제한된 토대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효과적인 도덕적 행위자가 되려면 다름을 볼 줄 알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A.C. Grayling, <Thinking of Answers>. 앤서니 그레일링 저, 윤길순 역, <우리가 일상에서 부딪히는 철학적 질문들>, 블루엘리펀트, 2013, 271-272면)

 

우리에게는 우리와 다른 사고와 감수성과 목적과 계획을 가진 사람들의 입장을 완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은 주어져 있지 않다. 그렇다면 그러한 능력이 언제나 십분 발휘된다는 전제에서 사회를 운영하고 조직하고 통합해서는 아니된다. 오히려 우리의 그러한 공감 능력의 필연적 한계를 인정하고, 그러한 한계를 지니고 있더라도 부당한 관계를 설정하지 아니하는 원리들을 발견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원리들은, 공통된 권리의 범주, 각자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관할권의 범주를 원리의 내용으로 꼭 포함시키는, 바로 그러한 원리들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원리들에 의해 선언된 각자의 몫이 바로 인권이요, 기본권이다.

 

2. 다시 말해 그러한 질문은 우리를 보편적 관점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선호와 가치관을 그대로 가지고서 타인의 결정을 대신 내릴 수 있는 그러한 지위에 있으면 어떻게 하겠는가를 묻는 것이다.

 

이런 질문은 전형적으로 잘못 적용되기 쉬운 황금률의 위험에 빠지는 것이며, 따라서 적절한 추론 방식이 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암벽 등반을 하는 사람을 보고는 '나라면 암벽 등반을 하겠는가?

라고 생각해보니 '절대 하지 않겠다'는 답이 나온다고 해서 '암벽 등반을 금지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추론의 방식은, 자신에게 매몰된 관점을 그대로 가지고서 타인의 행위를 대신 결정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과는 전혀 다른 것이어야 한다.

 

오히려 타인의 나와는 '상이한' 가치를 추구하고 다른 여건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존중되어야 할 권리가 무엇인가를 먼저 묻고, 그 권리에서 무엇이 도출되는가를 물어야 한다.

 

이것은 통상 우리 사회에서 터부시되는 성적 지향이나 직업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리고 통상적인 세속적 성공을 벗어난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것이다.

 

우리는 국가기구를 이용하여, 또는 사회적 압력을 사용하여 그들의 선택에 간섭할 수 있는 그러한 지위에 서 있지 않은 것이다. 제대로 된 도덕률은 잘못된 질문을 통하여 간섭할 수 없는 권능을 간섭할 수 있는 권능으로 바꾸지 아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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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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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는 게 피곤한 사람
    2016.10.16 23:40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정말 중요한 지적입니다. "가장 계몽되고 너그러운 도덕적 태도는 남이 자신과 매우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거죠.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이 늘 바람직한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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