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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선생님께
    2017.09.15 11:5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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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 게임 셧다운제, 스쿨존내 청량음료 자판기 판매금지, 밤12시 이후 학원 과외 금지, 마약판매 금지, 엄정한 도시계획하의 재건축 허가 등은 자유주의 원칙에 어긋난 정책인가요?

    분명히 이들 정책은 건강한 가정과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정책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기업의 활동을 얽매고 비용을 강제하므로 자유경제 민주주의에 어긋난다는 주장을 들은적이 있습니다.

    어떤 경제 활동에 있어서 비용을 강제하는 모든 정책은 국가의 월권이고 자유주의 원칙에 어긋나나요?
    • 2017.09.23 21:0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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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임셧다운제, 스쿨존내 청량음료 자판기 판매금지, 밤12시 학원 과외 금지는 모두 미성년에게만 해당되는 규제입니다. 이것은 강한 후견주의(strong paternalism)의 사례로서, 강한 후견주의가 허용될 수 있는 요건을 충족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일반적으로 유아가 날카로운 모서리의 책상 근처로 뒤뚱뒤뚱 달려갈 때 우리는 그 유아의 행위의지에 반하여 그 유아를 그 모서리 근처로 가지 못하게 제약합니다. 반면에 유아가 뒤집기를 하는 경우에 유아를 강하게 억눌러서 뒤집기를 못하게 하지 않습니다. 전자의 경우는 강한 후견주의의 조건이 충족되었고, 후자의 경우에는 강한 후견주의의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어떤 포괄적 선관을 채택하건 상관 없이 선이 된다고 인정되는) 기본적 이익을 위해 유익한 경우이고 후자는 (전족과 같이 그 사회문화에 특유한 포괄적 신념을 관철시키는 수단으로서만 대우함으로써) 간섭을 받는 당사자의 기본적 이익에 오히려 반하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의사결정능력이 있는(competent) 성인(adult)의 경우에는 강한 후견주의 조건이란 애초에 성립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의사결정능력이 그에 못미치는 이들에 대해서는 그 능력의 정도에 상응하여 강한 후견주의 조건이 충족되는 경우에는 강한 후견주의를 실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불완전 준수론의 문제로서 '자율성'에 관한 철학적 분석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타당한 분석에 의해 이루어진 불완전 준수론 이론 전개에 의해 개진된 강한 후견주의 조건이 충족된다면, 일반적으로 온전한 의사결정능력이 없는 주체에 대한 강한 후견주의의 실시는 자유의 전제조건인 자율성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들을 존엄 있게 대우하는 것과 양립가능합니다.

      2. 마약판매금지의 마약의 범주에 무엇이 들어가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마리화나나 LSD의 경우에는 그 금지의 근거가 허약다고 저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일반적으로 마약 논의에서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메스암페타민이나 코카인, 엑스터시 등은 짧은 시간 내에 신체와 정신을 회복불가능하게 파괴하며 종전형적인 기능들을 훼손함으로써 자유의 행사의 전제조건이 되는 통상적인 신체적 정신적 조건을, '중독'이라는 특유한 메커니즘에 의해 자율성을 극히 축소시킨 상태에서, 야기하는 것으로, 자유의 전체계 강화 논증에 의해 금지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회불가능한 신체의 파괴 가능성과 중독이라는 메커니즘에 의한 자율성의 급격한 축소 이 두 조건이 만족되는 상황은 약한 후견주의의 조건이 만족된 것으로서, 자유의 전체계 강화 논증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3. 엄격한 도시계획하의 재건축 허가는, 사회적 연관성이 큰 재산권에 속하는 권리에 대한 사회적 조정과 할당의 문제입니다. 토지의 사용은 여러가지 외부효과(externality)를 발생시키는데, 긍정적 외부효과는 촉진하고 부정적 외부효과는 억제하는 방식의 토지 사용 규제는, 다른 사람들의 자유에 큰 영향을 미치는 토지재산권의 내용에 내재해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재산권을 매개로 한 사회구성원들의 자유 조정의 문제로서, 이 또한 자유의 전체계 강화 논증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이 세 사례는 결국에는 "자유를 이유로 해서만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자유주의 일반 원칙을 충족하면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건강한 가정과 공동체의 발전"이라는 뜻도 불분명한 개념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개념을 끌어들여 자유(liberty)를 규범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가치(just one value)로 보고, 공동체의 발전과 유지, 건강한 가정, 건강한 문화와 동 차원에서 나란히 놓여서 무게와 비중을 부여받는 것으로 생각하는 순간, 이미 자유롭고 평등한 구성원들의 협동체라는 질서정연한 사회의 이상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유 제한의 사례들은 항상 그 유형에 따라 분류되어야 하며, 분류된 유형에 따라 만족되어야 하는 조건을 살펴야 합니다. 그 조건이 만족될 때에는 자유를 이유로 한 자유 제약이라는 자유주의 일반 원칙을 충족한 것이요, 그 조건이 만족되지 않는다면, '미덕의 고양'이건 '공동체의 건강성'이건 어떠한 잡설을 집어넣는다 하더라도 정당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자유 제한의 유형의 분류하고 그에 따라 충족시켜야 하는 조건이 충족되었는지 보는 테스트를 자세히 알고 싶으시면 <기본권 제한 심사의 법익 형량>을 보시기 바랍니다.
  2. 김태우
    2017.09.13 22:3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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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샌델에 대한 비판 중 궁금해서 올립니다.

    샌델은 이 사례를 보면서, 행복과 자유의 문제 뿐만 아니라 덕의 문제가 개입되어 있다고 주장을 하는데, 이것을 잘못 읽으면, 마치 “하나의 정치철학에서 행복, 자유, 덕을 모두 같은 차원과 수준에서 고려하여야 한다”라고 받아들이기 쉬우나 그렇지 않다.

    라고 쓰셨고 후 문장에서

    위 두 이론을 ‘거부’하고 덕의 분석을 통해서 정치철학적 결론을 내고자 할 때에만 ‘탐욕’이라는 가치에 대한 검토가 중심에 들어오게 된다. 따라서 마치 이 사례를 살펴보면서, 행복의 문제도 있고 자유의 문제도 있고, 추가로 덕까지 검토해야 한다고 결론짓는 것은 틀린 일이다.

    쓰셨는데 상반 되는 것아닌가요.

    '샌들이 행복 자유 덕 3개를 검토해야한다고 주장한다'고 결론 지으셨으면서 두 이론을 '거부'한다고 쓰셨나요.



    칸트에대해 옹호하실때도

    칸트 윤리를 칸트가 자신의 이론을 구체적 사안에 적용한 결론들의 총체라고 보자면 그것은 분명 그러한 한계를 갖습니다. 그러나 칸트 윤리를 칸트의 이론을 최선으로 읽고 구성하여 발전시킨 인간 존엄성의 윤리로 보자면, 그 문제는 간단하게 풀립니다.
    -중략-
    3. 평등하게 자유로운 존재들 사이의 관계를 일그러뜨리려는 자에 대해서는, 그 관계가 일그러지지 않았을 때에는 허용되지 아니하는 수단을 써서 대응함으로써 관계 훼손을 최대한 막는 것이 허용된다. 그것은 보편적 격률에 어긋나지 않는다.

    라고 쓰셨는데 평등하고 자유로운 존재들 사이의 관계를 일그러뜨려는 것 중에는 살인뿐만 아니라 거짓말도 관계를 일그러뜨리는 것 아닌가요. 정보의 불평등이 평등한 관계가 될 수 없죠.


    수재민 반박하실때 국가가 수재에 의한 자유성 제한 상황을 가격제한정책으로 해소시킴으로서 동등하고 자유로운 관계를 재설정할 수 있다 쓰셨는데, 그것 자체가 평등을 기본으로 자유성을 임의적으로 조절 한 것 아닌가요. 유동성이 높은 물건은 공급자에게 높은 가격을 물리게 하고, 부동산은 가격제한 정책을 펼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반박 나올 수 있습니다. 안전가옥이 비싸지면, 콘테이너집 수송이나 건설업자들이 건물을 빨리 짓게 되는 유인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이 상황 자체가 인간사이의 평등한 관계를 위해 한쪽의 자유를 깎는 것으로 평등을 위해서는 자유도 희생할 수 있음을 암시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평등을 덕으로 여기는 상황으로 보여지네요.

    시민교육님이 생각하는 평등과 자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법에 있는 한정치산자나, 금치산자의 행위능력을 제한 하는 것은 평등한 것이고 자유로운 것인지.
    제가 알기로는 그들의 보호를 위해서 그렇다고 하군요.
    하지만 이를 긍정한다면 능력차이에따른 불평등 관계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지만, 각 사람마다 전부 능력이 다릅니다. 관계의 평등을 위해서는 능력의 평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이는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개인의 개성을 뭉개야 되는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니까요.

    샌델의 목적론적 사고 방식을 좋아하지 않지만
    개인에게서 사회 관계는 땔 수 없고, 사회가 도덕적이라고 배우는 것을 정의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정의와 도덕은 땔 수 없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는 자유 민주주의국가니깐 당연히 자유와 평등이 정의고, 어떤 동네는 신의 말씀이 정의인 것 처럼요.

    • 2017.09.14 19:1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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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책의 논리 흐름을 천천히 따라가셔서 읽어야지, 문자를 보고 다른 생각을 만들어내서 그것을 책의 내용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정치철학에서 '행복, 자유, 덕을 모두 같은 차원과 수준에서 고려한다'는 것은 행복, 자유, 덕을 마치 '자동차, 시계, 피자'와 같이 어떤 정해진 예산을 가지고 고를 대상처럼 다룬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다루는 것은 그 개념과 그개념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행복의 이론을 채택하면, 그로부터 자유와 미덕에 관한 결론이 도출됩니다. 자유는 행복을 최대화하는 한 허용되게 되고, 자비심과 같이 행복을 최대화하는 성향이 바람직한 덕으로 정해집니다.

      자유의 이론을 택하면,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가 허용하는 한 각자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며, 미덕 또한 그러한 관계를 존중, 유지하는 것이 핵심이 됩니다.

      그런데도 자유, 행복, 덕이 마치 자동차, 시계, 피자처럼 적정한 양의 선택 대상으로 본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롭고 평등한 입헌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들이 채택할 할 이론은 자유의 이론이라고 한 것이고, 위와 같은 설명과 아무런 모순이 없습니다.

      2. 거짓말이 절대적으로 관계를 일그러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서 쓴 것은 어떤 행위의 정당성은 그 행위를 모든 여건과 상황에서 떼어놓고 평가할 수 없으며, 그 여건을 포함해서 원리를 정식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무고한 어린아이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어린아이가 어디 있냐고 물을 때, 그 어린아이의 소재지를 가르쳐주는 것은 그 어린아이의 목숨을 잃게 함으로써 자유롭고 평등한 지위를 박탈시키는 것입니다. 무고한 어린아이를 죽이려고 하는 자는 이미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를 훼손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시도를 성공치 못하게 하는 다른 사람의 대응에 불평할 수 없습니다. 이는 정당방위가 허용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3. 자유의 두 개념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규범적인, 기술적인 자유(non-normative, descriptive freedom)도 있고, 규범적인 자유(normative liberty)도 있습니다. 무엇이 정당성 있는 규범적인 자유의 체계인가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관계를 유지, 강화하는가의 검사에 의해 판단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비규범적인 기술적 자유들 중 일부는 제한됩니다. 예를 들어 살인을 금지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안전하게 자기 생명을 보장받으면서 살아갈 자유를 보장하지만, 살인자가 살인하는 행동을 막습니다. 그렇지만 살인자가 살인하는 행동을 못하게 됨으로써 제한되는 자유(freedom)는, 자유의 전 체계(whole system of liberty)를 강화하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즉, 자유의 전체계 강화는 여러 기술적인 의미의 자유(freedom) 들 사이의 조정을 수반하게 됩니다. 그러한 조정을 수반하지 않는 규범질서는 없습니다. 그러한 조정은 평등한 자유 관계를 구성하기 위한 것으로 '평등'을 위해 '자유'를 깎는 것이 아닙니다. 평등과 자유는 피자와 햄버거처럼, 제약된 예산으로 구매할 대상이 되는 상충하는 가치가 아닙니다. 자유와 평등은 인간존엄성의 양 두면입니다.

      4.
      제가 생각하는 평등과 자유에 대해서는 <기본권 제한 심사의 법익 형량>을 구매하여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평등을 존중하면서 자유의 전체계(whole system of liberty)를 강화하는 여러 자유들(freedoms)의 존중은 한 두 문장으로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위 책의 논증을 빠짐없이 따라가보는 것은 이에 관한 탐구에 필수적입니다.

      5.
      말씀하신 것은 상대주의론으로 샌델의 객관주의적 완전주의론과는 어긋납니다.
      정의는 도덕의 한 분과이며, 책 어디에서도 도덕을 배제하여야 한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또한 질문하신 분은 목적론과 상대주의를 혼동하고, 자유주의와 도덕의 배제를 혼동하시고 계십니다.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 1인칭 관점에서는 목적론적 태도를 취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A는 신을 숭배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B는 쾌락을 즐기고 주위 사람들과 유대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목적론은 A와 B의 가치 중 무엇이 옳은가를 판정하여 그것을 A와 B 모두에게 관철시키려는 함의를 갖습니다. 정의론은 그러한 목적으로 갖는 것이 아니라, A와 B가 서로 추구하는 인생의 목적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평화롭게 공존하고 공정하게 협동할 수 있는가를 다루는 것입니다.
      질문하신 분께서는 혼자서 어떤 결론을 내시기 전에 기본 개념 자체를 올바르게 습득하시는 일이 필요합니다.

      6. 시민교육센터에서 궁금한 것을 질문하실 때는 배움을 청하는 태도를 가지시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아닌가요"
      "쓰나요"
      "될 수 없죠."
      와 같은 문장은 시비를 거는 태도이지 배움을 청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그러한 의도가 없었다면, 쓰시는 습관적인 문구에 주의를 기울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특히 책 내용을 거의 제대로 이해를 하지 않으시고 질문을 하실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7. 질문자님께서는 책을 읽으실 때 책의 내용을 따라가지 못하고 스스로의 생각에 사로잡혀서 드문드문 문자를 읽고 자신만의 결론을 투사해서 책을 잘못 읽는 경향이 있어 보입니다. <이것이 공부다>에는 책을 구조화해서 체계적으로 읽는 방법이 나와 있으니 참조하시면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3. 2017.09.11 09:5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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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감한 질문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일반 대중을 타겟으로 한, 인문학 전반을 다룬 베스트셀러들(예를 들자면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같은 것들)이 철학을 처음 접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된다고 보시나요? 식견이 얕아서 그런 책들이 초심자에게 독이되는지 약이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 2017.09.11 23:2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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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각의 책 내용을 봐야 독이 되는지 약이 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로 드신 책은 제가 읽어보았으므로 독이 된다고 제 판단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책을 개방된 마음으로(즉, 자신이 처음 읽어 감명 받은 책과 부합하는 책들만 찾아 읽지 않고 그리고 현재 자신이 갖고 있는 신념에 부응하는 책만 찾아 읽지 않고, 또한 입문서 수준에 머물지 않고 진지한 논의까지 계속 읽어나간다면) 계속 읽어나간다면 처음 독이 된 책을 읽었다 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러나 독이 되는 책들은 그 한권으로 세계를 꿰는 틀, 세상을 보는 눈을 준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보통 그 한권만 읽으면 끝난다는 생각을 부추깁니다.
    • 2017.09.19 18:4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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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드로/ 언급하신 그 책 시리즈의 철학을 다루고 있는 편에서는 '진리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철학, 과학, 예술, 종교를 분류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되는 '진리'에 대한 저자의 정의(definition)는 이성적인 이해가 어렵습니다.

      저자는 '진리'는 1)절대성 2)보편성 3)불변성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 세 가지 속성을 모두 신(god)을 예로 들어 정의 내립니다.

      1) 절대성에 대해서만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절대성’이라는 속성은 아무런 제약이나 조건이 붙지 아니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진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어도 반드시 제약이나 조건이 붙지 않아야만 하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우선 ‘신’을 진리라고 가정해보자. 진리로서의 신이 있는데 안타깝게도 이 신에는 조건이 붙는다. 낮에는 신인 것이 확실한데 밤이 되면 신의 구실을 못 한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신을 만난다면, 우리는 이 신을 진리라 부를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제한적인 신 대신에, 신의 능력이 발현되고 제한되는 조건과 제약으로서의 운행 원리를 근원적 진리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즉 특정한 조건이나 제약을 받지 않는 절대성이 진리의 속성이 되는 것은 타당하다.” (채사장,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현실 너머 편, 철학,과학,예술,종교,신비』, 한빛비즈, 2015, 22면.)

      그런데 신(god)을 보고 절대적이라고 할 때와 '운행 원리'를 가리켜 절대적이라고 할 때, 각각의 경우 '절대적'이라는 말의 뜻은 서로 다릅니다.

      신에 대하여 절대적이라고 할 때는 무엇을 하려는 의지를 가진 신이 그 의지를 100% 관철시킨다는 것이고, '운행 원리'에 대하여 절대적이라는 건 그 원리가 어디든지 적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에 대하여 절대적이라고 할 때 절대적이라는 말의 뜻은,

      1) 그 대상이 무엇을 하려는 의지를 가졌고

      2) 그 대상이 그 의지를 가지고 하려던 것은 100% 관철이 된다.

      라는 뜻인데, 운행 원리의 경우에는 위 1)번 요건부터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신한테 들이댄 것과 동일한 '절대성'이라는 속성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절대성'이라는 것이 신과 같은 스스로의 의지를 가진 주체의 '절대적인 능력'을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운행 원리'와 같은 원리의 '보편성'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알 수가 없게 됩니다.

      그 책은 '진리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분류 작업을 하고 있고, 저자는 그 '진리'가 절대성이라는 속성을 갖고 있다고 정의 내렸기 때문에 일단 이 절대성이라는 속성부터가 제대로 정의되지 않으면, 그 이후의 모든 분류가 의미 없어집니다.

      (이명숙, 곽강제, 『철학과 학문의 노하우』, 서광사, 2014, 188-191면.)에서는 "진리"라는 말이 맥락에 따라서 여러 가지 뜻을 가진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종교의 교리’를 진리라고 할 때, ‘도덕적 규범’을 진리라고 할 때, ‘예술 작품’에 대해 진리라고 할 때, 각각의 "진리"의 의미는 모두 다릅니다. 그래서 <철학과 학문의 노하우>의 저자는 '학문과 지식'이라는 구체적인 맥락을 한정해서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집니다.

      이렇게 맥락에 따라 뜻이 변한다는 것에 유의하지 않는다면, 한 사람은 '종교의 맥락'에서 “신(god)은 진리다.”라고 말한 것이고, 다른 사람은 '학문과 지식'의 맥락에서 “나의 이론이 진리다(=건전한(sound) 논증이다)”라고 말한 것인데도 둘다 '진리'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같이 묶어버리게 됩니다.

      ([조립물] 문제 해결의 기반: 언어를 주의깊게 다루기(http://www.civiledu.org/1014))에서는 언어를 주의 깊게 다루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 책을 읽고서 이 점을 크게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4. ㅇㅇ
    2017.08.29 16:44 신고
    수정/삭제 댓글
    변호사님의 http://www.civiledu.org/1052 글을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무정부적 자유지상주의(아나코 캐피탈리즘)자들에게도 타당한 논증이 될지 궁금합니다. 그들의 의견을 자주 접한바 그들은 법 체계 또한 사유재로써 재화와의 교환 즉 서비스로서 행사되어야 하므로, 법의 상대성을 주장하곤 합니다. 변호사님이 말씀하신 법문언의 내포와 외연에 의한 자의의 매개항 논증 또한 국가란 공공기관의 입법의 절대성이란 전제가 있어야 하는 것 이어서 무정부적 자유지상주의자들에게 혼인과 취로의 접합적 선택지가 기업주의 자의의 매개항에 의해 제한 받아서는 안된다는 반박을 '법률'이란 전제 없이도 할 수 있는지 매우 궁금합니다.
    • 2017.09.01 16:2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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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정부적 자유지상주의자들에게는 이와는 다른 논증이 필요할 것입니다.
      무정부적 자유지상주의자들 역시 자유관을 적극적으로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자유관은 합당한 자유관이 아니라고 외적으로 논파될 수도 있고, 그러한 자유관 하에서 그들이 내세우는 질서는 그 자유를 제대로 보장하지 않는다는, 내적 관점에서 논파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무정부적 자유지상주의 관점은 진지한 정치철학적 입장이 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 입장은 다른 법률 서비스 판매자들에게서 법률을 구매하는 개인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할 수 없고 결론적으로 내전을 예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5. 성우맨
    2017.08.13 00:38 신고
    수정/삭제 댓글
    "동연개념(equipollent concept)이라는 것은 동일한 외연을 가지나 내포는 다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등가 또는 등치개념이라고도 한다. '경주'와 '신라의 수도'는 외연은 일치하지만, 내포에 있어서 전자의 경우는 경주시청소재지, 경주시민들이 사는 곳, 보문관광단지가 있는 곳이지만, 후자는 금성, 신라왕실이 있던 곳, 신라사람들이 살던 곳이 된다.
    예를 들어 갑이 을을 총격으로 살해한 경우를 상정해 보자. 을의 사망의 원인과 갑의 총격은 동일한 외연을 가지나 내포는 다르다. 전자의 경우 을의 자연적 사망의 시기에 앞서 생명을 마감시킨 원인, 사망의 자연과학적인 원인 등이 내포라면, 후자의 경우는 갑이 을에게 가한 공격, 을의 가슴에 총알을 박히게 한 행위 등이 내포가 될 것이다. 또 다른 예로 갑과 을이 병에 대해 각각 총격과 치명적인 구타를 하였고, 두 가지 행위가 원인이 되어 병이 사망했다고 할 때, 갑의 총격과 을의 구타는 병의 사망의 원인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외연을 가지나, 그 속성은 총격과 구타로 차이가 난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김성룡, <법적논증의 기초>, 경북대학교출판부, 2006, 28-29면.)

    여기에서, 저자가 든 "또 다른 예"에서 '갑의 총격'이라는 개념과 '을의 구타'라는 개념은 "병의 사망의 원인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외연을 지닌다고 설명하였는데요. 그런데 [병의 사망의 원인]이라는 개념의 외연이 '갑의 총격'과 '을의 구타' 각각의 개념의 외연보다 더 넓은데 '갑의 총격'과 '을의 구타'의 외연이 모두 [병의 사망의 원인]으로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개념의 외연이라는 것이 그 명사를 적용시킬 수 있는 대상들의 범위라고 하면, 그 대상이 되는 것은 그 개념보다 외연이 더 작아야만 한다고 저는 이해를 하였는데요. '갑의 총격'과 '을의 구타'가 [병의 사망의 원인]이라는 개념보다 더 구체적일 텐데, 보다 덜 추상적인 개념이 더 추상적인 개념을 외연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제 생각에는 '갑의 총격'의 외연은 그 명사를 적용시킬 수 있는 더 구체적인 대상을 찾는 것은 마땅치 않으므로 그냥 '갑의 총격'이 되고, '을의 구타'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로 외연이 '을의 구타'가 되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 2017.08.14 17:4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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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습니다.

      저자가 논의를 전개하다가 사고가 꼬였거나, 정확하게 외연과 내포를 이해하고 있지 못하거나 둘 중 하나라고 봅니다.

      외연은 결국에는 그 개념이 지시하는 논리적 세계의 사태(state of affairs)들의 집합입니다.

      따라서 총격이 지시하는 세계의 사태와 구타가 지시하는 세계의 사태는 다릅니다.

      저자가 여기서 헷갈린 것은, 구타와 총격이 동등한 정도의 인과성을 갖고 동일한 개념으로 통칭되는 결과를 야기하였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외연의 동치와는 관계 없습니다.

      예를 들어, A는 로또로 30억을 벌었고, 또 그 30억을 주식에 투자하여 또 추가로 30억을 벌었을 때, '로또 당첨'과 '주식투자에 성공함'이 동일한 외연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30억 벌었음'이라는 동일한 단어로 통칭될 수 있는 결과를 야기한 서로 다른 사태인 것입니다.
    • 성우맨
      2017.08.15 14:2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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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포라고 하는 것은 개념의 의미, 즉 개념을 통해서 전달되는 인지적인 의미(cognitive meaning)를 말한다. 한 개념의 외연에 속하는 다양한 대상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특징 내지는 속성을 그 개념의 내포라고 한다.”(김성룡, <법적논증의 기초>, 경북대학교출판부, 2006, 27면.)

      여기에서 저자의 설명대로 “한 개념의 외연에 속하는 다양한 대상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특징 내지는 속성”을 그 개념의 내포라고 한다면, 개념 두 개가 서로 외연이 같다면 반드시 내포도 같아야만 하기 때문에 동연개념이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데, 위 설명이 내포의 정의로서 적절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제 생각에는 개념의 “외연에 속하는 다양한 대상”이 아니라, 그냥 그 개념(특정한 단어) 자체에 대해서 언중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뜻으로 내포를 정의해야 될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그래서 "진리한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경우에도 (1) "진리"라는 말이 적용될 수 있는 실례 즉 외연(外延, extension)을 확인하고 싶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2) "진리"라는 말의 외연에 속하는 것들이 반드시 지니고 있어야 하는 정의 특성(定義 特性, defining characteristics) 즉 내포(內包, intension)를 알고 싶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명숙, 곽강제, 『철학과 학문의 노하우』, 서광사, 2014, 191면.)

      위 책에서도, "말의 외연에 속하는 것들이 반드시 지니고 있어야 하는 정의 특성"으로 내포를 정의하고 있는데, 그 정의를 따른다면 동연 개념이 가능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 2017.08.15 19:1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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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한 설명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내포 개념을 '외연' 개념을 경유해서 설명한다는 점에서는 학습자에게는 오도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논리적 개념인 외연과 내포는 논리적 세계에 관한 것인데, 학습자들은 이걸 자꾸 실제 세계와 관련해서 이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드시'라는 말을 '실제로 꼭 성립하는'이라는 말로 잘못 새기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는 그 내포에 의해 '함축되는'(implied) 이라는 의미 정도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오도하는 점 없이 정의하자면,

      "외연은 그 개념에 속하는 것들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고, "내포는 그 집합의 성원이 되는 덕분에 소유하게 되는 –임이라는 속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철학적 논리학』 제3판 A. C. 그레일링 지음. 이윤일 옮김. 선학사, 46면)

      그리하여 "내포적으로 동치"인 것은 "동의적인 낱말이나 표현"이고, "외연적으로 동치"인 것은 "같은 지시체"를 갖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위 책, 47면)

      그래서 내포적으로 동치가 아니면서 외연적으로 동치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포적으로 동치이면서 외연적으로 동치가 아닐 수는 없습니다.

      물론 언중의 이해가 당연히 내포의 개념을 새기는 데 전제되겠지만, 언중의 이해라는 말만으로는 내포를 정의할 수 없습니다.

      '금성'과 '샛별'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금성'은 '태양계에서 두 번째로 위치한 행성'입니다.
      '샛별'은 '새벽 동쪽 하늘에 특정 위치에서 반짝이는 천체'입니다.
      이 경우 금성과 샛별은 외연이 같습니다. 왜냐하면 둘이 가리키는 지시체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포는 다릅니다. 즉 금성은 '태양계에서 두 번째로 위치한 행성임'이라는 속성을 갖는 모든 것인데 비해 샛별은 '새벽 동쪽 하늘에 특정 위치에서 반짝이는 천체임'이라는 속성을 갖는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A. C. Grayling의 설명으로 이해하시면 족하겠습니다.



    • 성우맨
      2017.08.15 20:5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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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A 집합: {x | x는 짝수}인 집합.

      B 집합: {x | x는 임의의 자연수 n에 대해 2n}인 집합.

      위의 A 집합과 B 집합은 정확히 똑같은 원소를 가진다는 점에서 외연이 같은 집합이지만,

      한편으로 A 집합의 각각의 원소들은 ‘짝수’라는 속성을 ‘모두’ 갖고 있고, B 집합의 각각의 원소들은 ‘임의의 자연수 n에 대해 2n’이라는 속성을 ‘모두’ 갖고 있다는 점에서, 내포의 정의를 “그 개념의 외연에 속하는 대상들의 ‘모든’ 속성”이라고 한 것인데, (그 내포를 모든 대상들이 공통적으로 다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저는 4라는 대상은 ‘짝수’라는 속성도 있고 ‘2n’이라는 속성도 있으니까 그 대상의 모든 속성이라함은 ‘짝수’와 ‘2n’을 다 뜻하는 것이고 그래서 내포의 정의를 “그 개념의 외연에 속하는 대상들의 모든 속성”이라고 하면 외연이 같으면 내포도 다 같을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잘못 이해를 했습니다.

      개념의 내포가 먼저 정해지고 그리고 그 내포를 갖고 있는 모든 대상들이 결정되는 것인데 선후관계를 엉뚱하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6. 1234
    2017.07.31 06:5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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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호사님은 징병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징병제란 인간 행동마저 제약하는 국가폭력으로 시급히 폐지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 2017.07.31 17:0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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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평시의 징병제에 대해서 비판적입니다. 그러나 전시의 모병제는, 구성원의 평등한 방위의무에 어긋난다고 봅니다. 즉, 이론상으로는 평시에는 모병제를, 전시에는 징병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상 구상은 실제에서는 어렵습니다. 즉, 전시에 징병 체제를 새로 설립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평시에도 징병제를 실시하되, 그것이 기본 숙련과 군사 편재를 가능케 하는 기간에 그치도록 할 의무가 국가에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기간이 9개월-1년 정도라고 봅니다.
      이에 관한 자세한 논증은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에서, 징병제를 '공화국 시민의 미덕'이라는 이유에서 옹호하는 샌델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개진한 바 있습니다. 해당 책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7. 성우맨
    2017.07.28 19:2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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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론 3절 강의(http://www.civiledu.org/335)에서 롤즈가 제시한 정의의 두 원칙이 잘 정식화되었다고 보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면서, ‘평등한 자유의 원칙’이 축차적으로 첫 번째 원칙이고, 그 다음에 ‘차등의 원칙’이 오는데, 이 축차성 자체도 특정한 측면에서는 무너진다고 말씀해주셨는데요. 여기에 대해서 혹시 더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 2017.07.31 17:10 신고
      수정/삭제
      평등한 자유의 원칙은 법적 자유(liberty)에 관한 원칙입니다.
      차등의 원칙은 자유의 가치(worth of liberty)에 관한 원칙입니다.
      통상은 법적 자유와 자유의 가치는 다릅니다. 예를 들어 중국어를 배울 법적 자유와 중국어를 배울 자유의 가치는 다릅니다. 전자는 모든 시민들에게 평등하게 부여되어 있는 반면에, 후자는 그 사람이 처해 있는 구체적인 여건과 부 같은 활용가능한 자원에 의존적입니다.
      그러나 일정한 경우에는 법적 자유가 자유의 가치 수준으로 수축됩니다.
      예를 들어 소득활동능력이 없는 장애인의 이동할 자유는, 실제로 그의 이동을 보조해줄 비장애인의 자의가 결부된 형태로 수축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어떤 행위경로로 진행하여도 스스로의 의사만으로 이동하는 경로가 열려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소득활동능력이 없으니 소득을 벌 수 없고, 따라서 비장애인에 비해 특별히 비용이 많이 드는 이동수단을 활용할 행위 경로로 진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우에 가능한 것은 타인의 도움을 청하는 것뿐인데, 그럼으로써 그 장애인의 이동의 자유는 타인이 도움을 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자의가 결부된 형태로 수축됩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자유의 가치를 보전해주는 것이 자유의 원칙 평면에서 논증될 수 있는 것입니다.
      관련하여 자세한 내용은 <기본권 제한 심사의 법익 형량>의 제3장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8. 롤스
    2017.07.13 06:4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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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호사님, 자유지상주의자들은 표현의 자유나 정치적 자유같은 기본 권리들은 존재하지 않으며, 계약과 '동의'여부에 따라 그것이 존재함을 인정하거나 그렇지 않을 수 있는, 즉 권리란 언제나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그들에 의하면, 어떤 개인의 사유재산권 안에서는 그 개인이 정의한 규범들이 우선이며, 기타 개인의 권리는 그 이하의 것이므로 동의받거나, 동의받지 않으면 떠나거나 순응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또한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어떤 법률 원칙을 근거로 권리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애초에 법이란 것 자체가 국가에 의해 독점적으로 만들어지고 지켜지는 것이어서, 그 법률에 '동의'하지 않은 사람의 입장에서 해당 법률을 원칙으로 논증하는 것은 전제부터 틀렸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반박 해야할지 궁금합니다.
    • 2017.07.14 18:5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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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개인의 소유권리와 절차적 권리에서 결론들을 도출합니다. 그러하 그 도출 과정이 틀렸기 때문에 그 결론이 틀린 것입니다.

      2. 동의하지 않은 사람에게 법률의 정당화 가능성을 부인하는 입장은 자유지상주의의 입장이 아니라 아나키스트의 입장입니다. 자유지상주의자도 야경국가의 공공적 법질서를 주장하는 한, 동의하지 않은 사람에게 법을 적용하는 것의 정당화 문제는 피할 수 없습니다. 노직의 <아나키, 유토피아, 그리고 국가>에서도 이 문제는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즉, 신체와 재산을 보호하는 일률적인 법규정을, 그에 동의하지 않는 무법자에 대하여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그러니 자유지상주의는 이에 관하여 동일한 처지에 있고, 사실상 더 나쁜 처지에 있습니다. 노직의 해명은 만족스러운 해명으로 평가되고 있지 않습니다.

      자유지상주의자라고 주장하지만 학적 기초를 갖추지 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을 자유지상주의의 내용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개인의 사유재산권의 내용은 독단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논증에 의해 도출되는 것이므로, 사유재산권을 절대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모든 논의를 진행하는 것은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예전에 자세히 논의한 바 있습니다.

      http://www.civiledu.org/961
      http://www.civiledu.org/1052

  9. 성우맨
    2017.06.20 21:27 신고
    수정/삭제 댓글
    정의론 7절 강의<http://www.civiledu.org/338>에서, 직관주의가 의무론이 될 수도 있다는 부분을 설명하시면서, 기차 기관사를 직업으로 가진 기면증 환자와 비밀유지의무에 관해 약속한 의사는 <약속을 지켜라>라는 조건부 의무와 <무고한 사람들의 인명을 위험에 빠뜨리게 해서는 안 된다>라는 조건부 의무 둘 중에 어느 것을 우선하여 따라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유용한 해결 방법은 없다고 하는 게 의무론을 택한 로스의 직관주의라고 설명해주셨는데요. 그렇다면 도덕구성주의로 이 문제를 풀게 되면 어떤 답이 나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10. 성우맨
    2017.05.28 14:29 신고
    수정/삭제 댓글
    (이한,『삶은 왜 의미 있는가 - 속물 사회를 살아가는 자유인의 나침반』, 미지북스, 2016, 81~83면)에서, 김동인의 소설 <광염소나타>의 주인공은 다른 사람을 죽이거나 방화를 저지르는 행위를 통해 영감을 얻어서 작곡을 하기 때문에 그 작곡행위는 무의미한 것이 된다고 말씀해주셨는데요. 이를 배경적 가치를 위배하는 행위와 그 행위를 통해서 한 그 이후의 행위들은 모두 무가치한 것이 된다, 라고 저는 이해를 했습니다. 그런데 가령 한 사람이 돈을 훔쳐서 대학 등록금을 마련해서 대학에 들어갔다면, 그 이후에 그가 대학에서 공부하고 졸업하고 취직하는 일들이 모두 돈을 훔치는 배경적 가치를 위배하는 행위 덕분에 한 것이기 때문에 모두 다 무의미한 일이 된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배경적 가치를 위배하는 행위와 관계가 있어서 무의미하게 되는 행위로 봐야 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 2017.06.03 17:02 신고
      수정/삭제
      http://www.civiledu.org/1220
      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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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민주주의와 사회윤리학 담론 형성을 위해 노력하는 '시민교육센터-배움의 연대망’ 홈페이지 입니다. 이곳에서는 열린 강의 형태의 시민교육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트위터 아이디: civiledulee, 이메일: civiledulee@gmail.com (이한)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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