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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5.08 02:5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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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수균, <롤즈의 민주적 자유주의>, 천지, 2001, 9면에서는 롤즈가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은 민주주의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이론이 아니기 때문에 정치적 정당화의 근거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고 서술되어
    있는데요. 선생님께서는 롤즈의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 2017.06.28 18:2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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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수균 교수의 그 책의 해당 부분은 롤즈의 견해를 과도하게 단순화해서 소개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롤즈는 단순히 모든 구성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이론이냐, 아니냐하는 수용 태도에 근거해서 정치적 교설과 포괄적 교설을 구분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교설의 성질상, 그것이 (1) 합당한 것에 관한 정치적 개념과 관념 (2) 과학적 조사방법론을 따른 사실에 관한 것이냐 아니냐가 공적 이성에서 허용되는 논증들의 기준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롤즈의 공적 이성의 경계가 흐릿하고 협소하다는 지적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롤즈는 이를테면 태아가 헌법상 인간인가 아닌가의 문제에서 한 입장을 취하는 것을 공적 이성의 범위를 넘어서는 문제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쟁점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낙태에 대한 헌법적 권리의 문제를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롤즈가 설정한 공적 이성의 범위 밖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포괄적 교설과 정치적 교설을 구분하는 기준 또한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많은 비판가들은 롤즈의 이론 또한 포괄적 교설이 아닌가 하고 비판한 바가 있습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지만, 결국 특수한 신조에 기반한 가치론적 교설인가 아니면 규범과 기본적 가치에 관한 교설이냐에 따라 구분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공적 이성에서는 규범에 관한 교설과 공유됨이 논증되는 가치만을 근거로 삼아야 하는 것이며, 그 교설은 최선의 논증에 의해 정당화 부담을 견대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게 본다면 하머바스의 의사소통이론은 규범에 관한 교설이고 정당화 부담도 견뎌낼 수 있기 때문에, 하버마스의 이론에 뿌리를 둔 규범적 논증을 통해, 공적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것은 허용된다고 저는 봅니다. 이것은 롤즈의 이론에 뿌리를 둔 규범적 논증을 통해 공적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것이 허용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2. 달룟
    2017.05.07 11:1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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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란무엇인가는틀렸다"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에서, "어떤 행위의 텔로스를 이성적으로 판단하거나 논한다는 것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그 행위가 어떤 미덕에 영광과 포상을 안겨줄 것인가를 추론하거나 논의하는 것이다."와 같은 부분이 있는데, 비문처럼 여겨지고 이해도 잘 됩니다.

    "미덕에 영광과 포상을 안겨준다"는 것이 사람도 아닌 것에 영광과 포상을 준다는 것이 가능한지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의 포상인지가 궁금합니다.

    제가 이 부분을 비문처럼 생각하는 이유는, 영광과 포상의 대상이 '문제가되는 사회적 행위를 한 사람'으로 바뀔 때 더 이해가 잘 되기 때문입니다.
    • 2017.05.07 20:4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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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약어(shorthand)로 보시면 될 듯 합니다. 실제로는 사람에게 영광과 포상을 안겨주게 될 것입니다.
      목적론에서는 개개의 사람이 각자의 기획을 갖고 있는 구별되는 존재라는 점,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의사소통주체라는 점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목적론에서는 증진하려는 대상(효용이나 미덕)이 누군가에게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우연한 사실로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공리주의에서 효용계산을 할 때에도 어떤 사람 A의 효용이 50이고 B의 효용이 70이면 효용의 총합은 120이 되는데, 이 때 A와 B사이의 효용의 분배 형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효용계산에서 '효용을 경험하는 각 사람에게 동등한 비중을 준다'라는 말을 쓰는 대신 '효용에 가중치를 두지 않고 합산한다'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것입니다. 목적론은 언제나 모든 개인들을 굽어보는 일종의 관망자와 같은 존재를 상정하게 되며, 이 관망자가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이러한 특색을 드러내는 방편으로 그러한 축약어를 쓰는 것입니다.
  3. 샌델임
    2017.04.03 16:3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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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읽다가 두 가지 의문이 생겨서 질문드립니다. 첫째로, 롤즈는 공적 이성의 주제가 헌법적 본질과 기본적 정의의 문제들이라고 하는데, 이게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요즘 우리나라에 미세먼지가 아주 지독한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이러이러한 정책을 시행하여야 한다는 진지한 주장에는 공적 이성이 관여하지 않는 건가요? 만약 그렇다면 왜 그런가요? 둘째로, 저는 롤즈의 공적 이성에 대한 설명에서 공적 이성의 '개념'은 입법가와 공직자, 정치가들에게 해당된다고 보았고 공적 이성의 '이상'은 시민들에게까지 적용된다고 보았는데 이건 올바른 이해인가요?
    • 2017.04.04 22:0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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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공적 이성의 일차적 주제가 헌법적 본질과 기본적 정의의 문제들이라고 하였던 것이지, 공공정책의 나머지 문제들이 공적 이성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롤즈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정의의 원칙이 수립되고, 헌법적 본질(기본사항)이 규정되고, 그에 따른 입법의 틀이 마련되면, 나머지 공공사안의 문제는 그 틀 안에서 논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세먼지의 경우에도 당연히 논의의 전제로 공적 이성이 작용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미세먼지의 원인, 이동경로에 관한 주장들은 과학적 증거에 기반하여 이루어지고, 그에 대한 대책들도 과학적 증거에 기초하여 수립되어야 할 것입니다. 믿고 싶어하는 바를 우기는 식의 주장은 논의에 의해 기각되게 될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미세먼지의 문제가 일차적 주제로서 명확하게 해결될 될 수 없는 이유들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합당한 사람들조차도 의견이 불일치할 수 있는, 판단의 부담이 개입하는 사실과 가치의 판단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정이 동일하다면' 미세먼지가 줄어드는 것에는 동의하겠지만, 미세먼지의 감축이 다른 선(good)과 맞교환(trade-off) 관계에 있을 때, 어느 정도나 다른 선의 추구를 억제하느냐에 관해서는 명확한 답을, 정의의 원칙이나 헌법적 본질의 수립을 기초짓는 논증으로 얻어내기는 힘듭니다. 예를 들어 과연 사람들은 자동차 2부제를 받아들일 것인가. 기업 부문의 전기요금의 상승과 맞바꾸어 화력발전소의 추가건설의 포기를 받아들일 것인가. 더 나아가, 미세먼지 발생 주요원인국과의 공동정책 추진에 소요되는 재정을 부담할 것인가. 또는 주요원인국이 정책협의에 나서지 않게 하는 한 원인이 되는 무기설치에 관한 결정들을 철회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이 문제들은 결국 정의의 원칙과 헌법적 본질사항이 수립된 이후에, 그 사회의 사람들이 무엇을 위해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에 관한 계속적인 토론을 통해 결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컨대, 미세먼지와 같은 문제에는 공적 이성이 작동하여 명확하게 부당한 주장을 배척할 수 있는 부분과, 공적 이성을 모두 활용하더라도 여전히 불확정적으로 미결정된 부분이 남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러한 미결정성은 실제 그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시행착오와 계속된 의사소통과정을 통해서 절차적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잠정적이고 일응의 논거는 그 사회에서 잠정적으로 고정된 일반적 실천의 준거들에 의해 찾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미세먼지 분야가 아닌 다른 건강에 대하여 해를 미치는 오염원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비용을 기꺼이 감수하여 왔느냐에 관한 자료들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존 실천에 대한 해석은 언제나 비판될 수 있기 때문에 고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1980년대에는 환경을 보호하기 위하여 희생하고자 하는 경제성장율은 일반 사람들의 의식에서는 매우 낮았습니다. 즉, 이 맞교환(trade-off) 문제에 그 시기에 결착을 보게끔 하는 가치 판단 자체가 시대에 따라 비판적으로 변모해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롤즈가 다루는 정치적 정의의 이론은 이러한 불안정한 공공정책 문제에 대한 내용적인 해답을 주는 추론의 방법론은 담고 있지 아니합니다. 다만 그러한 종류의 문제를 논의함에 있어서 지켜야 하는 추론의 방법적 제약, 그리고 논의의 절차적 과정의 틀을 규정합니다.
      2. '개념'은 개념이 지칭하는 외연이나 내포를 일컫기 때문에, 개념이 일정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고 말하는 것은 부정확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공적 이성에 기반한 행위의 기준이 공직자들에게 적용된다고 할 것입니다. 즉 공적 이성은 공직자 권한을 활용하는 행위의 기준이 됩니다. 그러나 사인의 사적 행위에는 그러한 기준이 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사인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하고만 웹진을 만들어서 논설을 포스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직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나 좋아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에게만 문화적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공직자도 사인으로서 행위할 때는 이러한 제한을 받지 아니합니다. 예를 들어 공직자는 자신의 재산을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주지 않고 자신의 부모에게 자유롭게 선물을 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사인들도 공적 이성의 제약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인들의 행위가 공공 관련성을 가질 때입니다. 예를 들어 경향기업이 아닌 곳에서 종교에 기초하여 채용을 하는 것 등의 행위입니다.
      다른 하나는, 시민으로서 공적 논의에 참여할 때에는 일정한 담화윤리적 책임을 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주장이 단지 자신과 우연히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 이들을 염두에 둔 독백이 아니라, 현재 가치지향을 달리하는 사람들도 납득할 수 있는 형태의 논증을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낙태 논쟁에서 '우리가 믿는 종교의 경전에서 낙태는 금지한다고 하였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시민이 공적 논의에 참여할 때 공적 이성을 고려하지 못한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1) 공적 이성의 개념은 이론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며 (2) 공적 이성의 이상은 공직자와 시민 모두에게 적용되데, (3) 그 이상이 적용되는 형태를 보자면, 공직자는 공적 권한을 행사하기 때문에 공적 이성에 기초하지 아니한 행위는 무효가 되거나 절차적 이의를 받을 수 있는 반면에, 시민은 사적 행위에서는 그러한 행위 기준으로서의 제한은 받지 않고, 공공 관련성-즉 타인의 권리에 침해를 가져올 수도 있는- 행위에서는 공적 이성의 기준에 따라 제약을 받으며, 공적 논의에 참여할 때 그 주장에서 공적 이성을 준수하지 않았다는 동료시민의 비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4. 정규재닷컴
    2017.02.24 22:1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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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괜찮으시다면 시민교육센터에서 지지하는 자유주의의 흐름이나 역사, 전통을 대강 조망할 수 있는 책을 한권 추천해주실 수 있나요? 인터넷 서점에서 "자유주의"를 검색하면 거개가 복거일 정규재 류의 자유주의자들의 책만 나오는군요...
    • 2017.02.26 22:0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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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교육센터에서 주로 다루는 것은 현대 자유주의입니다. 그러므로 윌 킴리카의 <현대 정치철학의 이해>를 보시는 것이 적정할 것 같습니다. 아울러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와 <기본권 제한 심사의 법익 형량>을 함께 보셔도 좋습니다. 자유주의 사상사만 따로 다루는 국내서적은 보지 못했습니다. 자유주의의 기원은 로크와 칸트에 있으므로 이들의 저서를 보시면 될 것입니다. 시민교육센터의 학습자료 게시물에는 존 롤즈의 정치철학사 강의가 올려져 있으므로 이를 참조하셔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5. dd
    2017.02.23 18:5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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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호사께 가르침을 구합니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이나 경제적 자유를 위시하는 자유주의자들은 고용인-노동자 관계에서 고용인은 노동자에게 그만한 대가(돈)를 주고 합의한 관계이므로, 노동자의 해고같은 사항은 불합리한 선택지라 부를 수 없다고 합니다. 즉 해고 또한 노동자가 대가를 받고 선택한 감수 가능한 것이므로, 해고에 대한 선택지를 강요받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럴땐 어떻게 말해야할지 답답합니다

    또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이나 경제적 자유를 위시한 리버럴들은 행동할 수 있는 조건. 즉 어떠한 좋지 않은 환경에 처하더라도 누군가 그것을 직접적으로 막지만 않는다면, 그것은 자유로운 상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지향하는 목적을 추구하는 '행동'이 가능한 상태라면 그것은 어떠한 경우에서든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지향하는 목적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이 자유로움이라면, 누군가에게 폭력을 당하거나 죽기직전의 상태로 가더라도, 그것 또한 자유롭다고 할 수 있냐고 반문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즉 폭력을 당할 때 조차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려는 행동가능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므로, 그 상태도 자유로운 것이냐고 직관적 논증으로 반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변호사님은 어떠한 답을 주실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질문이 많아 죄송합니다.
    • 2017.02.23 19:2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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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civiledu.org/1052
      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dd
      2017.02.23 23:3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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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하 페이스북에 올리신 그 글이 제 페이스북 메세지에 대한 답변이었군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 dd
      2017.02.24 21:0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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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그러한데 제가 말한 질문이 바로 이한 변호사님이 링크를 걸어주신 글에 대한 반박 논리의 핵심이었습니다. 연애와 비유하여, 연애할 때 외모를 기준으로 상대를 선택하고 거부하는 것은 정당하므로, 노동자와 경영자간의 선택 여부 조건도 무엇이든 정당하므로, 결혼퇴직제를 시행하는 경영자는 연애에서 외모를 기준으로 하는 사람과 같이 정당한 기호 행위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 어떤 반문을 하면 좋을까 궁금합니다.
    • 이한
      2017.02.25 06:5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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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이점이 글에 나와 있습니다.전체 출력해서 찬찬히 보시기를 권합니다.
  6. 팩토리
    2017.02.04 19:1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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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번의 답변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또 질문을 올리게 되었네요... <정의론>을 발췌독하다가 "호혜성 원칙"을 설명하는 장을 발견했습니다. 거기서 롤즈가 최대 수혜자와 최소 수혜자 간의 가중 평균을 극대화하는 것은 최대 수혜자의 유리함을 더 높이 판단해서 그들을 이중으로 유리하게 한다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유리함을 더 높이 판단한다고 하기 이전에, 가중 평균을 계산할때 최대수혜자를 배제하는건 이상한 것 같습니다만... 그래서인지 롤즈가 설명하는 호혜성 원칙이 뭔지, 그게 차등 원칙에 어떻게 녹아있는지 명확히 이해되지 않습니다.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 2017.02.09 21:4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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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civiledu.org/1175
      아울러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7. 2017.01.25 19:0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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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정으로서의 정의:재서술"을 읽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책에서 롤즈는 공정한 사회 협력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두 가지의 도덕적 힘을 가지며, 그것은 정의감의 능력과 선과의 능력이라고 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왜 공정한 사회 협력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그런 능력을 갖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고 다음과 같은 잠정적인 답을 내렸습니다.
    "공정한 사회 협력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그 협력의 조건이 되는 정의의 원칙을 이해하고 그에 맞추어 행동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정의감의 능력을 가진다. 또한 그들이 자신의 삶에 있어서 좋은 것을 알고 추구하는 것은 사회 협력의 동기를 만들며 그것을 지속될 수 있도록 한다. 따라서 선관의 능력을 갖는다."
    여기서 제가 잘못 이해하고 있거나, 보충되어야 하거나, 더욱 적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주셨으면 합니다.
    • 2017.01.31 16:0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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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정적인 답의 앞부분은 맞지만 뒷부분은 다소 부정확한 것 같습니다.

      관련된 내용을 분명하게 이해하려면 롤즈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보는 것이 좋습니다. 강의 I '근본 개념들'의 제5절 '정치적 인간관' 부분이 기본입니다. 이에 더하여 같은 책의 '강의VIII 기본적 자유와 그 우선성' 중 3절 '인간관과 사회협력관', 부터 6절 '자유의 우선성, II: 두번째 도덕적 능력'까지를 찬찬히 읽어보실 것을 권합니다.

      관련되어 롤즈의 논의는 다음과 같은 두 노선으로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노선: 정의의 원칙이 수행하는 역할, 즉 '과제'에 기반한 재구성

      (1) 정의의 역할은 상이한 선관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통합되어 살 수 있는 공정한 사회 협동의 조건을 규율하는 것이다. (정의의 원칙의 과제)
      (2) 첫째로, 이러한 공정한 사회 협력이란, 다른 사람들이 수용한다는 조건 하에서 합의조건을 합당하게 받아들인다는, 상호성과 호혜성의 이념을 표명한다. (과제를 충족하려면 합당성이 필요함)
      (3) 둘째로, 공정한 사회 협력이라 할 수 있으려면 각자가 자신에게 가치 있는 것, 자신이 증진시키고자 하는 것을 왜곡되지 않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과제를 충족하려면 합리성이 필요함)
      (4) 이러한 정의의 역할에 수행해내야 한다는 정의의 원칙의 과제에 비추어볼 때, 우리는 원초적 계약의 당사자들이 염두에 두어야 하는, 질서정연한 사회의 시민들의 두 능력을 상정해야 한다. (즉 이러한 인간관을 상정하지 않으면, 애초에 정의의 원칙을 수립하려는 목적 자체가 무의미하게 된다. 즉 합당성과 합리성이라는, 과제를 충족하기 위한 전제가 인간관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구현된다.)
      (5) 첫째로 질서정연한 사회의 시민들은 정의의 원리에 의거하여 행위하기 위하여 이를 이해하고, 응용하고, 유효한 욕구에 의해 정상적으로 추동되는 능력(정의감의 능력)을 갖는다. 둘째로 가치 있는 인생이라고 느끼는 그와 같은 선의 관념을 형성하고, 수정하고, 추구하는 능력(선관의 능력)을 갖는다.
      (6) 귀류법적으로 이러한 능력을 결여한 인간관을 갖고서 정의의 원칙을 구성해보자. 이는 공정한 조건을 이해하고 준수할 의사가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협력의 조건을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는 노골적인 힘의 관철, 힘의 발현형식의 세부적인 패턴을 찾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공정한 협동의 조건을 찾아낸다는 과제를 충족하지 못한다. 둘째로 무엇이 자기 삶에 가치 있는가를 스스로 반성하고 수정할 능력이 없는 인간관을 가정해보자. 이는 스스로의 삶에서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 좋은 것들을 추구할 공정한 조건을 마련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로써 결과로서 도출된 원칙은 사람들이 비판적 검토를 통해서 좋다고 생각한 바를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연한 여건에 의해 고정된 패턴을 재생산하는 원칙이 된다. 그 패턴은 당사자들의 합리적 이익이나 선에 부합된다고 전혀 보증할 수 없게 된다. 사회적 협력이란 각 참여자의 자신의 관점에서 본 합리적 이익 또는 선 개념을 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화로운 공존과 통합 하에서 공정한 협동의 조건을 규명한다는 정의론의 과제를 빗겨나가게 된다.
      그렇다면 애초의 전제, 즉 정의감의 능력과 선관의 능력이 없는 인간관을 투입하여 정의의 원칙을 도출할 수 있다는 전제는 거짓이다.
      그렇다면 정의감의 능력과 선관의 능력은 정의의 원칙을 규명하는 추론에 필수적으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 노선: 자유롭고 평등한 의사소통주체들 사이의 유효한 규범적 타당성 승인을 위해 필수적인 전제.

      (1) 정의의 원칙은 사회의 기본 구조에 관하여 가장 근본적인 규범으로서, 평등하고 자유로운 의사소통 주체들이 합의할 원칙이다.
      (2) 따라서 동등하게 자유롭다는 의사소통 주체의 지위는, 그 원칙을 추론해내는 논증 과정에서 항상 유지되어야 한다.
      (3) 자유롭다는 지위는 세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 시민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해서 각자는 선관을 형성할 수 있는 도덕적 능력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한다. 만일 이 능력을 가지지 않는다면 예를 들어 이미 가지고 있던 신앙은 절대 버릴 수 없는 존재를 상정하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그 신앙을 합당하고 합리적인 근거에 따라 수정하고 변경할 능력이 없는 존재는, 그 신앙의 포로이자 노예이지, 자유로운 존재라고 할 수 없다. 그 사람은 단지 그 신앙을 담는 용기(container)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릇에 불과한 자는 규범적 타당성을 승인하는 논증대화에 참여할 신임을 얻을 수 없다. 그러한 그릇과도 같은 존재는 논거들의 타당성을 음미하여 주장된 규범을 승인할 자유를 갖고 있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이미 담고 있는 신조와 부합하는가만을 살펴보는 존재가 된다. 이러한 존재에게는, 어떤 신조를 변경시키는 것은 곧 존재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유로운 존재로 스스로를 이해하는 공적 정체성과 도덕적 정체성은 바로 그 신조의 타당성을 음미할 수 있기 위한 기반이 된다. 따라서 살아가면서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하는 신조의 타당성을 음미할 수 있는 기반을 없애버린 존재는 자유로운 존재라고 할 수 없다.
      둘째, 시민들은 스스로를 타당한 주장의 자기확증적 원천(self authenticationg sources of valid claims)이라고 간주한다. 즉 시민들은 자신들이 선관을 주장하기 위해 사회제도에 대해 주장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존재로 자신들을 생각한다. 이는 자신들이 이미 고정된 사회적 역할의 패턴을 수행하기 때문에 오직 그 때문에 발언권을 가지는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삶이 잘 진행되는 것이 중요한 존재로서 스스로를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확증적 원천이 되지 못하는 자가 바로 노예이다. 노예와 관련된 법률은 노예 스스로의 청구에 의해 입법된 것이 아니라 노예 소유자들을 포함한 노예 이외의 사람들의 일반 이익을 위해 입법된 것이다. 즉, 노예는 사회적으로 죽은 존재이다. 그리고 의사소통주체들이 평등하게 자유롭다는 것은, 특정한 집단이나 개인들만 자기확증적 원천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자기확증적 원천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특정한 신조를 믿고 있다거나, 특정 성별이나 특정 인종집단이나 특정 지역에 속한다는 이유로 더 많은 가치를 부여받는 것은, 이러한 의사소통주체의 지위와 모순된다.
      셋째로, 시민들은 그들이 자신들이 설정한 목적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로 간주된다. 그래서 시민들은 자기들의 제기하는 주장의 비중이 자신들의 욕구의 심리적 강도에 의해 주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주 값비싼 기호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그 값비싼 기호의 포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기호를 추구하기 위해 소요되는 비용이나, 그 기호의 바람직함에 비추어 기호를 변경시킬 수 있는 존재로 본다. 목적에 대한 책임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미 붙들려 포로가 되버린 욕구나 신조를 최대한으로 관철시키려는 기계적 발화만을 할 수 있을 뿐이며, 그리하여 논증대화는 불가능하게 된다.
      (4) 평등하게 자유로운 존재가 아닌 이들 사이에서 도출된 합의는, 순수한 규범으로서의 자격을 결여한 것이다. 그것은 어느 지점에서는 누가 다수이냐, 누가 힘이 더 세냐, 누가 더 조작을 잘 하느냐, 누가 더 전략을 잘 짰느냐, 누가 더 완고했는가, 누가 더 위협을 잘 했는가 등의 규범과 무관한 사실이 결정적으로 개입하여 도출된 결론이다. 이러한 결론을 정의의 원칙으로 채택한다는 것은, 애초에 정의의 원칙을 도출하려는 추론의 목적에 반한다.
      (5) 즉 부자유한 시민을 가정하는 것은, 정의의 원칙을 도출하는 논증대화에서 수행적 모순을 범하는 것이다. 즉, 자유롭고 평등한 이들 사이에 합의될 규범을 찾으면서, 동시에 그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부자유하고 불평등하다고 가정하는 셈이다. 따라서 시민들은 위에서 말한 의미에서 자유롭다고 가정되어야 하며, 이는 시민들이 정의감의 능력과 선관의 능력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8. 2017.01.17 17:58 신고
    수정/삭제 댓글
    강의 복구 완료하였습니다. 혹시 녹취 링크가 깨졌거나 잘 못 걸려 있는 경우 해당 게시물에 댓글로 알려 주시면 조치하겠습니다. 2005 노동판례 비평 강의 중 일부는 유실된 것으로 보이고, 이후 가능하면 복구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성우맨
      2017.01.17 12:20 신고
      수정/삭제
      감사합니다!

      C. L. Ten의 <밀의 자유론> 두번째 강의.(http://www.civiledu.org/70) 의
      <3장 Morality and Utility> 강의 녹취 링크와 <문단29에 대한 추가논의 (11/23일 수정됨) > 강의 녹취 링크가 잘못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 2017.01.17 17:45 신고
      수정/삭제
      감사합니다, 확인하고 수정하였습니다.
  9. 초짜
    2017.01.02 18:03 신고
    수정/삭제 댓글
    롤즈 정의론에 관한 해설서들을 읽다가 생각이 명확히 정리되지 않아서 질문드립니다. 롤즈는 왜, 사회 정의의 원칙을 다른 방법이 아닌 공정한 상황에서의 합의로 도출하려고 하는 건가요? 그런 합의의 결과가 정의롭다는 것은 어떻게 담보되는 건가요? 짬날 때마다 읽고 생각하고 있는데 속시원이 답이 내려지지 않습니다. 정의론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인것 같은데 대충 넘어갈수가 없어서 남깁니다^^;;
    • 2017.01.06 20:01 신고
      수정/삭제
      롤즈는 기본적으로 규범에 관한 근대적인 기준 위에서 작업하고 있습니다.

      규범에 관한 근대적인 기준은, 어떤 것이 정의롭다는 것을 '어떤 형이상학적인 질서에 부합하느냐', '어떤 형이상학적 실체에 대응하느냐'에 따라 판정하지 않는 기준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규범에 관한 전근대적인 기준은 어떤 것이 정의롭다는 것을 '자연의 질서'나 '신의 섭리'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질서와의 부합으로 판정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전근대적인 기준은 그 기초가 되는 형이상학적인 질서의 존재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런 규범적 당위성을 갖지 못합니다. 그 결과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는 규범적 이유 없이 행위하도록 강제하는 폭력으로 귀결됩니다.

      결국 롤즈가 정의 원칙을 공정한 상황에서의 합의로 도출하려고 하는 것은 정의에 대한 근대의 기획을 아주 철저하게 밀고 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목적론을 취하는 이론들은 처음에는 개인을 받아들인다 하여도 결국 고대의 관점을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전체 공리의 총합계의 극대화를 당위의 제1기초로 삼는 고전적 공리주의는, 결국 '정의'를, 쾌락과 고통을 담는 거대한 그릇이라는 형이상학적 존재의 입장에서 판정하는 셈이 됩니다. 도대체 그 형이상학적 존재에게 좋은 것이 우리의 행위를 규율하는 제1의 원칙이 왜 되어야 하는지 규범적 이유를 제시하는 연결고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대단히 비슷하게 보이지만, 전체 공리의 절대적 수치가 아니라 개개인이 누리는 공리의 평균을 따지는 평균공리주의는 근대적인 규범의 관점에 서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적 공리주의에 따르면 잠재적 존재의 인생이 고통보다 쾌락을 많이 담고 있다면 무조건 아이를 낳아야 하는 도덕적 의무가 있게 되는 반면에, 평균 공리주의에 따르면 그러한 재생산의 도덕적 의무는 없습니다.)

      목적론을 취하지 않게 되면, 우리는 어떤 규범을 타당한 것으로 수용하거나 어떤 규범에 이의를 제기하는 당사자의 합의라는 발상을 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정의는 규범 중 최상위의 규범입니다.

      그리고 (실정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도덕적인 의미에서 규범은 인간의 행위를 조정하는 당위의 집합체를 의미합니다.

      인간의 행위는 여러가지 상이한 원천에서 조정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의적이고 무작위적인 원천입니다.
      둘째는 자연의 질서나 신의 섭리, 또는 쾌락과 고통을 모조리 담아서 경험하는 동정적 관망자와 같은 거대한 형이상학적 존재와 같이, 모종의 상상된 형이상학적인 질서의 원천입니다.
      셋째는 힘의 분포라는 원천입니다. 즉 어떤 행위 조정의 시점에서 누가 결국 자신의 의사를 관철할 힘이 더 많은가에 기초하여 그러한 힘 분포 위에서 타협한 규칙을 행위의 조정 기준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즉 그것은 부조리하게 주어진 특정 시점의 실존의 여건으로 소급되는 원천입니다.
      넷째는 규범입니다. 규범이라 함은, 다른 사람들도 거부하지 아니할 행위의 일반규칙에 의하여 공정하게 협동하고 평화롭게 공존하려는 의도를 가진 이들이 합의하게 될 행위조정의 규칙입니다.

      우리가 규범을 탐구하는 이유는 앞의 세 가지 원천을 행위조정의 원천으로 삼고자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이미 분포된 힘의 발현에 상응하는 규칙에 의해서 행위를 조정하는 것도 아니고, 독단적으로 규정되거나 지배적으로 받아들여진 형이상학적 질서에 의해 행위를 조정하는 것도 아니고, 일부나 다수의 자의에 의해 행위를 조정하는 것도 아닌, 오로지 그것이 공정한 협력과 평화로운 공존 자체만을 목적으로 삼는 일반 원칙에 의해 행위를 조정하고자 하기 때문에 규범을 탐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규범 탐구의 기획(project)을 설정하고 나면, 첫째, 둘째, 셋째 원천을 그 기획에서는 체계적으로 배제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배제를 수행하는 방법이 바로 공정한 계약 상황에서의 합의라는 사고실험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공정한 상황으로 구성된 가상적 상황에서의 합의는, 우리가 현실을 살아가면서 하는 실제 합의보다 규범의 위계에서는 상위에 위치합니다. 왜냐하면 실제의 합의는 힘의 분포가 혼입된 배경 위에서 이루어진 반면에, 가상적 상황에서의 합의는 오로지 공정한 협동과 평화로운 공존을 목적으로 성립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작위성, 형이상학적 질서, 그리고 힘이라는 도덕적인 관점에서 자의적인 원천들을 모두 제대로 제거한 채로 공정한 계약 상황을 구성하고, 그 계약상황에서 합의될 원칙들을 찾게 된다면, 그 원칙들은 따라서 정의롭다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정의의 원칙이라는 것은, 결국 공정한 협동과 평화로운 공존 이외의 것은 행위 조정의 이유로 삼지 아니하는 주체들이 합의하게 되는 원칙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어떤 것이 각자의 자유롭고 평등한 주체의 지위에서 공정하게 합의될 것인지를 면밀하게 확인하면 되는 것이고, 그렇게 확인된 내용이 또다른 형이상학적 추론에서 판명된 어떤 모종의 실체나 규칙과 상응하는지 추가적으로 고민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롤즈는 이 점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논증한 적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롤즈와 하버마스를 같이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가지신 의문의 대부분은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 1, 2권과 <사실성과 타당성>, <진리와 정당화>에서 면밀하게 파헤쳐지고 있습니다.

      하버마스와 롤즈는 실체적인 정의의 원칙에 관하여 대립하는 의견을 낸 사상가가 아닙니다.

      롤즈는 실체적 정의의 원칙을 공정한 절차에 의해 실제로 구성해본 학자입니다.

      하버마스는 왜 '자유롭고 평등한 의사소통 주체들의 논증대화에 의해 합의된 결과가 타당한 규범인가'에 관하여 궁구한 학자입니다.

      롤즈의 정의의 원칙은, 자유롭고 평등한 주체들이 합의할 원칙입니다. 그런 면에서 그 원칙들은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갖춘 원칙입니다.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가졌다는 것은, 유아적인 독백자나 힘을 가지고서 다른 사람의 정신을 지배하거나 세뇌시킬 수 있는 권세자의 의사와 부합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영역에서 명제의 타당성을 알아보는 유일한 방법인, 자유롭고 평등한 의사소통주체들의 논증대화를 거쳐 살아남았다는 뜻입니다.

      그러한 논증대화에서 명시적으로 거부될 이유들-나는 너보다 불평등하게 힘이 더 세다, 권세가 더 많다, 더 부유하다, 내가 믿는 것이 독단적으로 진리이다-을 혼입하여 추론된 결론들은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위배한 것입니다.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위배한 규범주장은 수행적 모순을 범합니다. 규범주장의 상대방, 그 규범을 따를 사람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지위를 부인하면서 동시에 그러한 지위를 가진 상대방으로부터 승인되기를 바라며 주장하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정의에 관한 명제로서 규범적 타당성을 주장하려면, 공정한 상황에서의 합의라는 발상(idea)에 귀착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힘이 혼입된 배경 하에서 이루어지는 현실의 합의라든가, 아니면 논증대화를 거치면 살아남지 못할 형이상학적 질서라든가, 또는 그냥 그때그때의 무작위적인 다수의 의지 같은 것에 기초해서는, 공정한 협동과 평화로운 공존을 위한 규칙을 제대로 파악해낼 수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것입니다.

      정의의 원칙의 역할은 우연, 힘, 독단에 의하지 아니하고 사람들이 공정하게 협력하고 평화롭게 공존하려면 지켜야 할 행위조정을 일반적으로 해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을 하는 정의의 원칙을 제대로 파악하는 방법은, 평등하고 자유로운 의사소통주체들이 바로 유일하게 그러한 목적에서만 기초해서 논증대화를 거쳐 합의할 원칙이 무엇인가를 사고실험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10. 솟르
    2016.12.19 23:30 신고
    수정/삭제 댓글
    이곳에서 롤즈의 <정의론>을 틈틈이 공부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강의자료'에서 정의론의 각 절을 다룬 강의의 녹취 자료가 사라져있네요. 시간이 나신다면 재업로드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같이 있는 교안은 프린트해서 잘 보고 있습니다.
    • 2016.12.20 10:32 신고
      수정/삭제
      복구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존 롤즈의 정의론 관련 강의 복구를 마쳤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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