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1. 궁금
    2018.03.12 00:52 신고
    수정/삭제 댓글
    어떻게 이토록 광범위한 활동을하시는것인지 궁금합니다.

    시간관리비법이있으신가요?
    • 2018.03.13 01:37 신고
      수정/삭제
      그렇게 광범위한 활동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질문에 직접적인 답을 드릴 수는 없겠습니다.

      공부와 관련한 시간관리에 관해서는 <이것이 공부다>를 참조하시면 되겠습니다. 보충적으로, 시민교육센터의 [생활이야기]로 실린 글들을 참조하셔도 되겠습니다.
  2. 요사리안
    2018.02.24 05:56 신고
    수정/삭제 댓글
    평소에 변호사님 글을 잘 읽고 있는 학생입니다. 늘 훌륭한 글과 번역 감사드립니다.

    최근에 올해 읽을 책 목록을 정리하면서 변호사님이 작성하신 추천 리스트를 참고하다가 조언을 얻고싶은 부분이 있어서 글을 남깁니다.

    카네기 행복론을 소개하시면서, 성공이나 물질적 풍요는 지위재이기 때문에 이런 것을 약속하는 자기계발서는 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런 견해를 처음으로 접하였기 때문에 좋은 의미에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혹시 언급하신 지위재를 주제로 하거나, 관련 내용을 세부적으로 설명한 장이 포함된 좋은 논문이나 책이 있다면 추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2018.03.01 18:49 신고
      수정/삭제
      제가 번역한 로버트 프랭크의 <사치열병>을 보시기 바랍니다.
  3. 성우맨
    2018.01.11 23:11 신고
    수정/삭제 댓글
    법의제국 제10장 강의 (http://www.civiledu.org/200)의 <강의 보충 자료 - 원리의 문제 제14장 할당제는 불공정한가?> 한글파일 4쪽에서,

    "직업의 자유에 대한 전통적인 자유주의적 담론은 '직업의 자유 제한에 대한 3단계 이론'으로 발전되어 왔다. 단계이론이란 직업의 자유의 제한을 제한의 정도에 따라 낮은 단계부터 (1단계) 직업수행의 자유 제한, (2단계)
    주관적 사유에 의한 직업결정의 자유의 제한, (3단계) 객관적 사유에 의한 직업결정의 자유의 제한으로 구별한다."

    여기서 선생님께서 설명해주신 "직업의 자유에 대한 전통적인 자유주의적 담론"과 관련해서 더 공부할 수 있는 책이 있다면 혹시 여쭤볼 수 있을까요?
    • 2018.01.13 20:43 신고
      수정/삭제
      제가 거기서 언급한 것은 자유주의적 사고에 바탕을 둔 헌법적 논의입니다. 논문 검색 사이트에서 '직업의 자유' &'헌법'과 같은 키워드로 검색하시면 되겠습니다. 정치철학적 논의가 이 분야에 특별히 발달해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혹시 관련된 철학적 문헌을 찾으시면 공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성우맨
      2018.01.14 18:09 신고
      수정/삭제
      좋은 조언 감사합니다. 논문 검색을 해서 관련 논의를 찾게 되면 공유하도록 하겠습니다.
  4. 2018.01.03 23:20 신고
    수정/삭제 댓글
    정원이 초과된 구명정이 가라앉고 있는 상황에서 제비뽑기로 희생자 한 명을 정하기로 모두가 동의하고 제비뽑기를 하였는데 막상 걸린 사람이 나가지 않고 버틸 경우에 이 사람을 강제로 바다로 떠밀어서 살해하는 경우에는 위법성이 조각됐다고 할 수 있을까요?
  5. 대학원생
    2017.12.30 13:10 신고
    수정/삭제 댓글
    안녕하세요, 평소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많은 영감과 도움을 얻는 학생입니다. 선생님께서 '학습자료' 게시판에 올리신 [요약번역]과 [발췌번역]의 차이는 무엇인지요? 문득 궁금해 질문 남깁니다. 새해복 많이받으세요!
    • 2018.01.01 17:54 신고
      수정/삭제
      요약번역은 요약하는 과정에서 원문의 번형이 있습니다. 발췌번역은 원문의 변형이 없이 글의 일부만 따서 번역한 것입니다.
  6. 2017.11.01 22:28
    수정/삭제 댓글
    비밀댓글입니다
    • 2017.11.03 17:37 신고
      수정/삭제
      올리신 글은, 재산권이라는 제도를 자유 논증 이전에 먼저 확립하고 나서, 자유를 그에 맞춰서 개념화하는 논의입니다. 이는 우리가 왕권이라는 제도를 자유 논증 이전에 먼저 확립하고 나서 자유를 그에 맞춰서 개념화하게 되면, 왕권을 침해하는 것은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방식의 논의를 '도덕화된 자유 개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전제가 되는 절대적 재산권의 확립 논증이 독단(dogma)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 이후의 논증도 오류에 빠져 있게 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의 자유지상주의에 대한 반박 부분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댓글쓴이
      2017.11.14 01:20 신고
      수정/삭제
      그렇다는 말씀은 특정 원칙에 자유 개념을 맞춰 개념화한 '도덕화된 자유개념' 자체는 오류는 아니라는 말씀이신지 조금 헷갈립니다. 결국 그 특정 원칙이 독단이냐 아니냐로 타당성이 갈리는 것인가 여쭙고 싶습니다.
    • 2017.11.17 17:02 신고
      수정/삭제
      1. 도덕화된 자유 개념은, 논증의 결론부에 등장해야 하는 것이지, 자유 논증의 기초 단위가 될 수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2. 자유논증의 기초적인 단순 단위로서 도덕화된 자유 개념을 따르면서 특정 질서가 자유 침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순환논증의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2. 다음 글을 참조하십시오.

      "자유기반 정의론이 아니라, 자유에 대한 정의기반 정의(justice-based definition of freedom)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이는, 스스로 자기가 그렇게 말하는 자유주의자들이 몇몇 있다. 앞의 논증에 비추어 볼 때, 이 이론가들은 자유와 정의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해한다. 우선 자유가 어느 정도나 가치 있는 것이냐를 논하고 나서, 그 다음 그 가치 있는 것의 여러 가능한 분배의 정의를 논의하기 보다는, 그들은 대신에 자유를 언급하지 않고서 정의의 본성에 관하여 논한다. 그러고 나서 그들이 찬성하는 정의관에 의거하여 자유를 정의한다.
      G.A. Cohen은, 정의기반 자유 정의에의 암묵적인 의존을, 자유와 평등이 필연적으로 충돌하는 이상들인가라는 질문을 다루는 자유지상주의자들에 의해 활용된 논증에서, 발견했다.(주석 1- G. A. Cohen, Slef-Ownership, Freedom, and Equalit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5), 55-7. 또한 G. A. Cohen, ‘Illusion about Private Property and Freedom’, in J. Mepham and D. H. Ruben (eds), Issues in Marxist Philosophy, iv (Hassocks: Harvester, 1981); id., ‘Capitalism, Freedom and the Proletariat’, in Ryan (ed.), The Idea of Freedom’ C. C. Ryan, ‘Yours, Mine, and Ours: Property Rights and Individual Liberty’, in J. Paul (ed.), Reading Nozick (Oxford: Blackwell, 1982)를 보라.) 코헨의 구체적인 과녁은 노직이다. 그러나 동일한 결함이, 재분배반대론자 자유지상주의자들(anti-redistributionist libertarians) 몇몇의 저작들에서도 발견된다. (See e.g. L. von Mises, Human Action: A Treatise on Economics (New Havern: Yale University Press, 1949), 283; R. Barnett, ‘Pursuing Justice in a Free Society: Part One-Power vs. Liberty’, Criminal Justice Ethics (1985), 64; J. Gray, ‘Against Cohen on Proletarian Unfreedom’, Social Philosophy and Policy 6 (1988), 103-4. 도덕화된 자유 정의는 적어도 로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유명한 ‘자유liberty’와 ‘방종licence’의 구분(Two Treatise of Government, ii, s. 6)은 위 저자들에게 아마도 얼마간 영향을 끼쳤을지 모른다.) 노직에 따르면 (70) ‘자유는 [분배적] 정형patterns’을 흩뜨린다.(upset) 그 분배적 정형이란 이를테면 자원 평등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목적-국가 원리(no end-state pricniple)나 정의의 분배적 정형 원리(distributional patterned principle of justice)도 사람들의 삶에 계속적으로 간섭하지 않고서는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쭈석 3-R. Nozick, Anarchy, State and Utopia (Oxford: Blackwell, 1974), 160-1. 그런데 만일 이 주장이 여하한 논증적 무게(nay argumentative weight)를 가지려면-즉, 우리가 정형은 ‘일부 사람들에게는 어떤 특정적 자유들’을 제거하지만 그 정형들은 또한 ‘다른 사람들을 위한 다른 특정적 자유들’을 창조한다고 간단히 답변할 수 없으려면-, 노직은 다음과 같은 무언가를 말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만일 당신이 더 많은 자유를 전반적으로 허용한다면, 당신의 최고로 선호하는 정형이 흩뜨려질 것이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최고로 선호하는 정형을 유지하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덜 적은 전반적 자유를 허용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더 흥미롭고 논증적 무게가 있는 주장은 오로지 다음과 같은 경우에만 명백히 참일 것이다. (여기서 명백히 참이라는 것은, 전반적으로 ’더‘ 자유롭다거나 ’덜‘ 자유로운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를 더 나아가 탐구하지 않고서도 참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 주장의 정당화로서, 처음부터 논증의 결과를 편향시키도록 고안된 자유의 정의를 받아들이는 경우에만(if we accept as its justification a definition of freedom that is designed to bias the outcome of the argument from the start) 이 자유 정의에 따르면, 정형이 기여하는 소위 ’자유‘는 진짜로는 자유가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자유는 주체의 재산권(property rights)의 행사에 대한 제약의 부재이며, 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because freedom is nothing more or less than the absence of constraints on the exercising of one’s property rights.) 정형을 부과하는 것은 사람들이 수행할 권리를 갖고 있는 행위들을 막는 것을 포함한다. 통상 그들의 재산 중 일부를 과세하여 가져가는 것을 포함한다. 누군가로부터 가져와서는, 그 정형 강제자는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주기도 한다는 것이 참이다. 그러나 이 ‘다른 사람들others’는 그들의 비도덕적으로 획득된 세금 자원을 가지고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할 아무런 권리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과세된 사람의 자유는 감소되지만, 혜택을 얻는 사람들의 자유는 증가되지 않았다. 이 자유 정의 위에서는, 사람들의 권리를 존중하고 강제하는 최소국가 아래에서, 완전한 자유(complete freedom)이 있게 되리라는 점은 명백하다. 더군다나, 이 점을 알기 위해서 세계로 나가 자유를 측정할 아무런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완전한 자유가 있게 된다는 사실은, 정의 그 자체에 의해(by definition) 따라나온다. "(Ian Carter, A Measure of Freedom,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69면)
    • 2017.11.17 17:03 신고
      수정/삭제
      http://www.civiledu.org/1271
      위 글도 참조하십시오.
    • 2017.11.17 17:04 신고
      수정/삭제
      방명록만 활용하지 마시고, 게시된 글들과 제가 출간한 책들을 적극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자유지상주의의 도덕화된 자유 개념에 기초한 논증에 대해서는 <정의란 무엇인가는 틀렸다>에서 자세히 반박한 바 있습니다.
    • 글쓴이
      2018.02.04 06:10 신고
      수정/삭제
      그동안 왜인지 모르지만 댓글이 안달려서 댓글을 못달았는데 이제야 댓글 다는게 가능해져서 답니다. 좋은 답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주변 환경도 그렇고 현대 자유주의적 담론들을 접하거나,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 힘들었는데 변호사님의 글로 자주 해소하곤 합니다. 많은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7. ㅇ12
    2017.10.20 14:13 신고
    수정/삭제 댓글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소유권적 자유론을 갖고 있고, 맑스주의자들은 그들만의 자유론을 갖고 있습니다. 이들이 자유란 이런 것이다 라고 주장할 때 롤스를 지지하는 사람은 어떤 내용으로 "자유란 이런 것이다"라고 설명해야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롤스의 정의론에서 롤스적 자유관을 캐치하기 힘듭니다. 저들의 자유관을 반박할 만한 롤스적 자유관은 어떤 것입니까?
    • 2017.10.23 17:48 신고
      수정/삭제
      말씀하신 대로, 롤즈가 분명하게 자신의 자유관을 체계화한 바는 없습니다. 그러나 롤즈는 여기저기서 자신의 자유관의 핵심 주춧돌들을 남겨 놓았으며, <기본권 제한 심사의 법익형량>에서 저는 그런 주춧돌들에 입각하여 자세한 자유관을 해명한 바 있습니다.
  8. 2017.10.11 14:23 신고
    수정/삭제 댓글
    칸트를 읽다가 질문드립니다. <정초>에서 정언명령의 제2정식을 논증하는 부분이 계속 걸립니다. 왜 인간성을 목적 자체로 대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답이 있어야하는데, 대답을 하는 것 같다가도 갑자기 희한한 독단을 제시한다던가, 이상한 비약과 생략을 감행해서 결론을 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초의 제2정식을 다룬 논문들도 찾아봐서 읽고있는데 여기서도 만족스런 답을 얻기가 힘듭니다. 흔히 보이는 건, 비이성적 존재에 가치를 부여하는 이성적 존재의 능력이 그 자신의 절대적 가치를 보증한다는 설명인데 이것도 이상합니다. 이성적 존재의 가치판단 능력이 가치의 근원이긴 하나, 그렇다고 해서 그 능력자체가 가치가 있다는, 심지어는 절대적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건 비약같습니다. 아름다움의 최종 근거는 인간의 미 인식능력이지만 그렇다고해서 미 인식능력 자체가 무슨 절대적 아름다움을 가진건 아니잖습니까? 혹시 제가 칸트철학에 대해 잘 몰라서 남들은 다 알아먹는 설명을 저 혼자 못알아듣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그렇다면 정말 실례되겠지만, 칸트가 뭘 근거로 제2정식을 말하는지, 실마리가 될만한 것이 없을까요?
    • 2017.10.23 17:47 신고
      수정/삭제
      인간성을 목적 그 자체로 대하라는 것은 실천적 지평에서의 인간의 의무에 관한 것입니다. 관찰자의 지평에서는 딱히 인간 수준의 이성적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하여 인간에게 절대적인 가치가 할당될 이유가 없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아마 이 부분의 논증을 관찰자의 지평에서 읽으셨기 때문에 납득이 안 가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칸트는 인과법칙에 종속되는 경험세계와 스스로의 자유로운 의지로 법칙을 입법하는 자율적 실천세계를 구분하였기 때문에, 경험세계의 지평에서의 관점으로 자율적 실천세계의 논의를 평가하여서는 안 된다는 입장입니다.
      자율적 실천세계에서는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법칙을 입법하는 존재입니다. 도덕법칙을 수립하는 이러한 실천하는 존재의 관점에서, 돌멩이나 금이나 곡식은 인간의 계획과 의지에 부합하는 한에서 가치를 갖습니다. 즉 실천세계에서 실천의 주체인 인간은, 사물들이 가치를 갖는다는 판단을 하는 관점의 근원으로서의 독특한 지위를 가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위를 가진 이들이 오직 하나가 아니라 복수의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보편화가능한 법칙으로는 그러한 복수의 존재들의 독특한 지위를 인정하는 것만이 승인될 것입니다. 그러한 승인을 거부하는 것은, 결국 스스로가 자율적인 입법의 주체, 즉 자유롭게 의지하고 행위하는 존재라는 점, 그리고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계획을 세우고 대상들의 가치를 평가하고 그 가치를 향유하는 존재라는 점, 스스로가 실천하며 의무를 준수하는 존재라는 점을 부인하는 것이 되어, 애초에 논의를 시작한 실천세계의 출발점과 모순이 됩니다. 그래서 칸트는 제1정식과 제2정식은 궁극적인 정식의 다른 표현 방식이라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실천세계에서 복수의 실천자들의 자율적인 도덕법칙 입법자로서의 지위를 염두에 두게 되면, 보편화가능한 도덕법칙은 오직 인간성 자체를 목적으로 대우하는(즉, 자율적 입법자로서의 독특한 지위를 인정하는) 그러한 내용을 가진 법칙만을 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후대의 학자들은 이 부분의 논증에 개입하는 관찰되는 경험세계와 의무에 따라 행위하는 실천세계의 구분이 형이상학적으로 난해하고 충분히 해명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논의지평에 따라 인간은 철저히 자연법칙에 종속된 기계가 되었다가, 다시 오로지 자신의 자율적 의지에 따라 법칙을 입법하는 존재가 되었다가, 같은 현상을 이렇게 둘로 나눠서 보는 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들이 많습니다.

      즉 칸트의 실천철학은 자유의지의 논쟁이나 자아의 연속성 등과 필수불가결하게 결합되어 있는 몇 가지 선험적 전제와 결합되어 있다고 평가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의 학자들은, 이러한 난해한 선험적 논쟁에 뛰어들어 칸트가 전제로 삼은 것들을 모조리 남김없이 논증하는 길을 가는 대신, 칸트의 실천철학을 탈선험화하는 이론구성을 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롤즈가 그러한 탈선험화에 나선 대표적인 학자로서, 그는 이 전체세계에서 자율적인 인간이 차지하는 선험적 지위 대신에, 평화로운 공존과 공정한 협동의 과제를 가진 입헌 민주주의의 시민이 가진 평등하고 자유로운 지위를 논의함으로써 이 문제를 우회하려고 하였습니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 롤즈의 정의론이 그렇다면 오직 서구의 입헌민주주의의 전통을 가진 그러한 정치문화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공정한 협동과 평화로운 공존은 모든 인간 사회의 과업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입헌민주주의 사회에서 시작하는 롤즈의 작업이 갖는 난점들을 세부적으로 살피는 것을 피하고 싶다면, 스캔론이나 하버마스를 읽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스캔론은 '이유'(reasons)를 고려하여 행위하는 존재들이 이치에 닿게 이야기할 수 있는 행위의 지침들을 파악해나가는 그의 독특한 계약주의적 논증방법을 취합니다.

      질문자분의 의문에 특히 적실한 것은, 하버마스의 이론적 작업입니다. 하버마스는 규범이라는 것은 1인칭 관점에서나 아니면 '효용'과 같은 목적을 극대화하려는 모종의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입법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규범적 논증대화를 할 수 있는 복수의 논증참여자들이 무한히 지속되고 아무런 왜곡 없는 논증대화를 통해서 공동의 관심에 맞는 공동의 규율체계를 마련한 것이, 바로 규범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부인하게 되면, 우리는 모두가 보편적으로 준수 의무를 지고 있는 규범에 대해서 처음부터 의미 있게 말할 수 없는 '수행적 모순'에 부딪힌다는 것입니다. 특히 하버마스의 작업은 진리, 옳음, 진실성과 같이 의사소통의 가장 기본적인 목적이 뿌리박고 있는 의사소통요건을 밝혀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그 의사소통요건은 결국 그 자체가 주장의 자기확증적 원천(self-authentiating sources)가 되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의사소통주체의 지위의 상호 인정에 놓여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의사소통주체의 지위는, 그 자체 목적으로 대우되는 존엄을 가진 지위와 동형성을 가진다고 생각됩니다.
      즉, 선험적 전제를 도입함이 없이 두 세계를 칼 같이 구분하여 한 세계에서만 이렇다, 하는 식으로 논하는 대신, 우리가 의미 있게 진리, 옳음, 진실성을 도대체라도 이야기할 수 있으려면 결국 우리는 이야기하는 주체들의 평등하고 자유로운 의사소통적 지위를 인정하지 아니하고서는 한발짝도 나갈 수 없다는 형식화용론(formal pragmatics)의 해명이 제시되는 것입니다.

      스캔론의 <우리가 서로에게 지는 의무>,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 1>, 그리고 <사실성과 타당성>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스캔론의 책 중 <The Difficulty of Tolerance>는 제가 번역하여 내년에 출간될 예정이고, 또한 그의 <Being Realistic About Reasons>도 완역하여 현재 출판사를 찾고 있습니다.

      아울러 아래 글들도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존중과 평등의 기반
      http://www.civiledu.org/1248

      도덕이론에서 칸트적 구성주의
      http://www.civiledu.org/981

    • 철학과2학년
      2017.11.10 16:24 신고
      수정/삭제
      이제야 봤습니다. 친절한 설명 감사합니다! 하버마스는 학부 다니는동안 이름만 들어본 위인입니다...혹시 하버마스를 읽기 전에 꼭 알아둬야할 지식이나 이론이 있으면 알려주실수있나요?
    • 2017.11.20 18:32 신고
      수정/삭제
      http://www.civiledu.org/search/하버마스
      를 참조하십시오.
  9. 요즘사람
    2017.10.03 19:55 신고
    수정/삭제 댓글
    호모포비아들과 논쟁하다가 나온 생각입니다...게이의 항문성교로 인한 에이즈 확산이 진실이라면 이를 금지해야 하는가...? 그런데 통계에 의하면 이성간성접촉으로 인한 감염이 감염경로의 60%인데, 게이만 탄압하면 이 60%는 그대로 두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성 동성할 것없이 항문 성교를 금지해야 할까요? 가장 좋은건 국가가 나서서 위생적인 항문성교를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겠지만 이게 난망한 일인것 같아서요...정제되지 않은 질문이라 죄송합니다. 선생님의 고견이 궁금합니다.
  10. ㅇㅇ
    2017.09.30 02:02 신고
    수정/삭제 댓글
    누군가는 신체와 재산권을 필두로한 행동이야말로 자유의 근간이라고 합니다. 선생님은 자유의 개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BLOG main image
대안민주주의와 사회윤리학 담론 형성을 위해 노력하는 '시민교육센터-배움의 연대망’ 홈페이지 입니다. 이곳에서는 열린 강의 형태의 시민교육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트위터 아이디: civiledulee, 이메일: civiledulee@gmail.com (이한) by 시민교육
전체 글 보기 (950)
공지사항 (19)
강의자료 (89)
학습자료 (344)
기고 (489)
  • 게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