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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번역] 찰스 테일러 "선의 다양성"

시민교육 2019. 2. 2. 22:17

아마르티야 센과 버나드 윌리엄스가 편집한, <공리주의와 이를 넘어서>에 실린 찰스 테일러의 논문입니다.


 

찰스테일러_선의다양성_UtilitariansimandBeyond_CharlesTaylor_diversityofgoods.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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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에서 찰스 테일러는 버나드 윌리엄스와 상당히 유사한 논지를 펼칩니다. 일원론적 목적론과 계약주의적 의무론을 공히 거부한다는 점에서 우선 유사합니다. 그리고 이를 거부하면서도 어떠한 명확한 이론을 제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론을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이 타당한 결론이라는 점을 역설하는 점에서도 유사합니다.

 

찰스 테일러의 논지는, 세상에는 공리나 권리의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더 높은 것과 더 낮은 것(고귀한 것과 천한 것)을 대조하는 언어가 있으며, 이 언어가 지시하는 우리의 윤리적 경험의 세계는, 공리주의나 계약주의가 다루는 것보다 훨씬 더 풍부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리주의와 계약주의는 공히 단일 요소의 이론으로서, 프로크루테스의 침대와 같은 것이며, 우리의 윤리적 사고를 실재와 다르게 빈약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찰스 테일러의 주장은 계약주의와 공리주의를 거부하는 가치와 관련된 논변으로서 상당히 정교한 형태를 보여주므로 일독의 가치가 있습니다.

 

버나드 윌리엄스와 테일러의 논지는 공히 공리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는 타당한 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 논문의 테일러의 논증 중 공리주의나 이와 유사한 목적론에 대한 것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좁은 결과주의만을 결과주의라고 보고, 자신들은 결과주의에서 벗어나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공히 오류를 범합니다.

찰스 테일러가 주장하는 것과 달리, 결과주의를 두꺼운 윤리적 개념을 포함한 대조의 언어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넓게 보게 될 때에도(심지어 인격적 통합성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넓게 보게 될 때에도) 결과주의는 여전히 의무론적 계약주의와 상이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유의 방식은 중요한 선들을 어떻게 최대한 조화롭게, 또는 적게 희생하면서 실현할 것인가의 단일 질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유에는 고려되는 선들이 호소하는 중요성, 선들의 범위(설사 그 범위가 넓다 하더라도) 이외에는 아무런 구조적 제약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결과주의가 확장될 수 있고, 이 확장된 결과주의조차도, 결과주의의 본지를 잃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주디스 자르비스 톰슨의 <Realm of Rights>의 Value를 다루는 장에서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찰스 테일러의 논지에 대한 주요 비판 포인트는, 그가 효용, 계약주의적 제약, 그리고 대조의 언어를 같은 평면에 놓고 그때그때 균형을 잡아야 할 대상들(선들)로 본다는 점에 있다고 할 수 있씁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정당한 윤리적 사유 내에서 상이한 구조적 위치를 부여받고 있으며, 이를 제대로 규명하지 않는다면, 고려해야 할 모든 것을 다 고려해야 한다고 해도, 그것은 타당한 결론을 내는 타당한 논의의 방식이 아닐 것입니다. 비유컨대 이는 헌법규범적 제약과 정책이 추구하는 이익을 나란히 놓고서 이를 모종의 종합을 통해 합헌성에 관한 결론을 내는 것과 비슷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