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번역] 에밀리 셔윈_합법성과 합리성
이 글은 셔윈이 샤피로 판본의 배제적 법실증주의가 '인식적 책임'을 도외시한 것으로서 이론적으로 결함이 있다는 점을 밝히는 글이다.
Sherwin은 Shapiro의 이론이 “법적 계획을 수용한 자는 그 계획에 따라야 할 도구적 합리성의 이유를 갖는다”는 전제를 받아들이며 출발하지만, 특정 규칙이 부당한 결과를 요구하는 경우에도 그 규칙을 따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403쪽). 셔윈은 “인식적 책임(epistemic responsibility)”이라는 개념을 통해, 규칙에의 복종이 도구적 합리성에 기반하여 정당화되더라도 그것이 항상 합리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비판한다(405쪽).
Sherwin은 '순오류감소원칙(Net Error Reduction Principle, NERP)'을 통해 도구적 합리성의 수용 조건을 보다 정교하게 제시한다. 순오류감소원칙 (NERP): “만약 어떤 행위자가 규칙 R을 정기적으로 따를 경우, 지침의 지도를 받지 않은 실천적 추론(unguided practical reasoning)을 정기적으로 수행하는 것보다 더 적은 오류를 범할 것으로 기대된다면, 도구적 합리성은 그 행위자에게 R을 적용 가능한 모든 경우에 따를 규칙으로 수용할 것을 요구한다.” (409쪽) 이 원칙은 규칙 R이 도구적으로 합리적이라면, 그것을 모든 경우에 따르겠다는 헌신을 형성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Sherwin은 이러한 헌신이 항상 실제 규칙 준수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며, 특히 규칙 적용 시점에서는 인식적 책임(epistemic responsibility)이 도구적 합리성보다 우선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규칙은 특정 사안에 부당한 결과를 초래하더라도, 전체적으로 오류를 덜 범하게 할 경우 수용될 수 있다. 그러나 그 규칙을 항상 따르는 것(준수)이 합리적인지는 별도의 문제다.
계획을 수용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해서, 특정한 사안에서 그 계획을 따르는 것도 자동적으로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즉, 규칙 수용의 합리성과 개별 사례에서의 규칙 준수의 합리성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한다. Shapiro는 도구적 합리성을 시간적으로 확장된 개념으로 이해하고, 계획을 수용한 이후의 행위자는 과거 자아의 헌신에 따라야 한다고 본다. 이에 따라 Shapiro는 다음과 같은 논증 구조를 제시한다: 어떤 행위가 합리적으로 실현 가능하려면, 그 행위는 이유(reason)에 근거해야 한다. 계획에 대한 헌신은 숙고의 이유를 소진시키고, 이행의 이유만을 남긴다. 따라서 헌신 이후에는 숙고의 이유들이 더 이상 행위의 이유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비준수는 숙고의 이유에 기반할 수 없으며, 비준수는 합리적으로 활용가능한 선택지가 아니다. (412쪽)
그러나 Sherwin은 이 논증에서 샤피로가 제시한 '“강력한 이유(compelling reasons)”가 있는 경우에는 계획에 대한 헌신이 해제될 수 있다'는 점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412–414쪽) 즉 강력한 이유의 기준과 구조가 명확하지 않으며, 이로 인해 그의 계획 이론은 내부적으로 긴장과 모순을 내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자세히 설명해보자. (i) 만약 "강력한 이유(compelling reason)"의 존재 여부를 행위자의 주관적 판단에 맡긴다면, 규칙은 외재적이고 안정적인 기준으로서 기능하지 못하게 된다. (ii) 규칙이 스스로 “강력한 이유가 있을 경우 예외로 한다”고 문언상 규정하고 있다면, 그 규칙은 오히려 예외를 유도하는 규칙이 되며, 그 자체로 행위자를 불안정한 숙고 상태로 되돌려 놓는다. 결국 Shapiro가 “계획에 대한 헌신이 이루어진 이후에는, 더 이상 그 헌신을 숙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고 본 점에 오류가 있다. 그러한 입장은 오로지 도구적 합리성을 중심으로 헌신과 규칙 준수를 설명한 것이다. 오류도 거기서 생긴다.
반면에 Sherwin은 믿음의 정당화라는 인식적 책임이 도구적 합리성보다 우선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Sherwin은 Thomas Kelly의 논지를 인용하여, 믿음은 유용성 때문이 아니라 증거에 근거해서 정당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419쪽). 행위자가 규칙 준수 여부를 판단할 때, 단순히 계획이 유용하다는 이유로 믿음을 형성해서는 안 되며, 그 믿음은 현재의 증거에 의해 정당화되어야 한다. 따라서 규칙 수용의 시점(Tc)과 규칙 적용의 시점(Ta)은 서로 다른 증거 배열을 수반하며, 규칙 수용은 정당화될 수 있어도, 규칙 적용은 별도의 정당화를 요구한다. 다시 말해 합리성 그 자체가 합리성은 계획 수용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재숙고를 허용하는 구조를 내포한다. 즉 헌신 이후 시점(Ta)에서도 숙고는 계속 유효한 행위 양식이 된다. 그러므로 Shapiro가 설정한 ‘숙고/이행 이분법’은 규범적으로 작동 불가능하다. 규범적 설명력과 적용력을 상실한다.
서비스적 권위로서의 법이건, 계획으로서의 법이건, 배제적 법실증주의는 도구적 합리성에 의한 수용과 헌신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법복종의무를 지우는 구도가, 인간의 규범적 책임의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생각한 점에서 큰 오류를 범하였다는 점을 잘 지적하는 논문이라고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