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예의의 비일관성 문제와 품위 있는 간접적 의사소통, 특히 수필의 중요성
예의의 ‘비일관성’ 문제와 품위 있는 간접적 의사소통, 특히 수필의 중요성
데이비드 베너타의 『Practical Ethics』에서 개소리(bullshit)에 관한 장을 읽다가 흥미로운 지적을 접했다. 개소리를 하는 사람보다 그것이 개소리임을 지적하는 사람이 오히려 더 예의에 어긋난다고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베너타는 이것이 개소리에만 해당하는 현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대화 시간을 독점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그러나 그에게 "당신은 대화를 독점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종종 그보다 더 예의에 어긋난 사람으로 평가된다. 베너타는 이것을 ‘예의의 비일관성’(inconsistency of politeness)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비일관성 때문에 개소리와 예의 위반이 더 만연하게 된다고 시사한다.
생각해보면 베너타에 의해 ‘비일관성’으로 칭해진 것은 상당히 편재하는 현상이다. 예의 위반을 지적하는 행위가, 지적된 예의 위반보다 더 큰 예의 위반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러한 예는 매우 많다. 상당히 붐비는 지하철에서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사람을 보면 짜증이 난다. 사람이 많은 객차에서 다리를 꼬고 있으면 그 사람의 신발이 내 바지에 닿을 것 같고, 실제로 닿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다리는 그렇게 꼬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른 자리가 하나라도 있다면 그냥 다른 자리 앞으로 가서 선다. 대화를 독점하는 사람이 있는 모임도 마찬가지다. "당신은 대화를 독점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냥 바쁜 일이 있다고 하고 먼저 일어난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함부로 반말을 하는 나이 많은 사람이 있어도 마찬가지다. "왜 반말을 하십니까?"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 사람에 대해 좋지 않은 평가를 속으로 내리며 프로페셔널한 태도가 필요한 일을 되도록 도모하지 않을 것이며 사적으로도 상종하지 않을 것이다. 직접 지적하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런 말을 내뱉는 순간 상황이 급격하게 당혹스러워진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당혹스러움을 만들어낸 사람을 예의에 어긋난 사람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예의를 규칙 준수 체계로 이해하면 분명 비일관성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의를 사회적 갈등과 당혹감을 줄이는 장치, 즉 궁극적으로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오히려 매우 일관적이다. 예의의 목적이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라면, 예의 위반을 직접 지적하는 행위는 그 목적 자체를 방해할 수 있다. 그래서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과 일관된 방식으로만 피드백하는 것이 예의의 문법에는 맞다. 평화적 관계 유지는 지고의 가치는 아니지만 문명에서 상당히 중요한 가치이다. 따라서 평화를 깨지 않는 피드백 방식을 원칙적으로 찾으려고 하는 것은 예의의 원래 목적과 일관된다.
그런데 그 목적상 ‘비일관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지적된 문제점은 다른 형태로 남는다. 직접 교정 대신 조용히 거리두기라는 방식은 피드백으로서 매우 약한 것처럼 보인다. 지하철에서 다리를 꼬고 앉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그는 자신이 누구에게 불편을 주는지 모른다. 다리를 꼬는 사람은 편하게 앉아 있고, 불편한 사람은 자리를 옮긴다. 대화를 독점하는 사람은 즐겁게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은 먼저 집에 간다. 반말을 하는 사람은 계속 반말을 하고, 상대방은 반말을 그냥 듣는다. 이렇게 명시적인 피드백 면에서 보자면, 공개적 지적을 꺼리는 사회일수록 예의 위반이 그 예의 위반에 대한 지적 자체를 억제시키니 예의 위반이 더 만연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피드백 방식에 의한 제약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부과하는 예의 체계는 자멸적이거나, 그렇지는 않더라도 빠르게 붕괴하여 심각하게 약화될 것 같다. 그러나 꼭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 수수께끼이다. 독일에서 새치기를 한다면 당장 누군가의 힐난하는 소리를 들을 것이며 주위 사람들도 그 힐난에 동조할 것이 예상된다. 그래서 독일에서 새치기 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점은 잘 이해된다. 그러나 한국이나 일본, 대만과 같은 사회에서도 예의나 공공질서는 상당히 잘 유지되는 편이다. 즉 완전한 자멸은커녕 빠른 붕괴로 인한 심각한 약화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한국이나 일본처럼 공개적 지적을 꺼리는 사회에서 예의와 공공질서는 어떻게 유지되는 것일까?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간접적 피드백 장치가 존재하고 또 예의의 전수와 유지를 떠받치는 기둥의 중심은 오히려 이 간접적 피드백 장치에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타인의 행동을 평가한다. 뉴스에서도 가끔 평범한 사람의 무례한 행동이 공론화된다. 칼럼과 수필은 일상적 예절을 논한다. 방송과 드라마는 어떤 행동이 무례한지 주인공이 겪는 불편을 중심으로 보여준다. 일상대화에서도 무례한 사람을 겪은 이야기를 친구가 전해준다. 이러한 공간들은 직접적인 지적의 공간이 아니라 간접적인 학습의 공간이다. 예의 규범은 법률처럼 학교에서 체계적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다. 상당수는 이런 간접적 경로를 통해 습득된다.
이러한 간접 경로에 더해 예의 위반이 ‘나는 내가 예의규범을 위반하고 있으며 또한 그로 인해 주위 사람들에 의해 내려지는 부정적 평가를 기꺼이 감수한다’라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경우는 드물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에 대해 좋게 생각하며 또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좋게 생각하길 바란다. 그래서 타인이 자신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까지 굳이 예의규범을 위반하려고 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즉 아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건 익명의 다중 공간에서건 어떤 공유된 규범을 위반하였다는 근거로 상당히 합치된 부정적 평가를 받고 싶어 하지 않는 기본적인 동기가 사람들에게 있다. 이 기본적인 동기와 간접적 피드백에 의한 학습이 결합되면 상당한 정도의 기저 준수율을 만들어낼 수 있다.
간접적인 피드백은 평화적 관계를 유지한다는 예의의 목적과 일관되게 예의 위반을 지적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한다. 직접적으로 "당신은 잘못하고 있다"고 말하면 공격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간접적 피드백이 되는 이야기 속에서 "이런 행동은 생각보다 타인을 불편하게 만든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비교적 방어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그 규범을 접하게 된다. 고전적인 예절서들도 대체로 이런 방식으로 쓰였다. 특정인을 비난하는 대신 일반적인 행동 원칙을 설명했다. 드라마, 영화, 소설, 수필은 사람을 비난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얻는 작은 편익 뒤에 타인의 작은 불편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예의규범이 워낙 많기 때문에 그리고 가정의 여건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가정에서 모든 예의규범을 다 직접 배울 수는 없고 또 가정에서 명령조로 받는 교육이 가장 효과적인 것도 아니다. 예의의 많은 부분은 이런 간접적 피드백의 통로가 되는 문화물에 의해 전승되어 왔을 것이다. 직접적인 교정보다는 간접적인 성찰을 통하여, 공개적인 비난보다는 일반적인 서술을 통하여, 개인에 대한 공격보다는 사회적 학습을 통하여 말이다.
물론 예의의 역설은 여전히 남는다. 간접적 피드백은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닿지 못한다. 따라서 때로는 직접 지적하는 일도 필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만원 지하철이라 자리를 옮길 수도 없는데 앞에 다리를 꼬고 앉은 사람의 발이 내 바지에 닿는 경우 말이다. 이런 경우에는 명령을 하거나 시비를 거는 식이 아니라, 불편 자체를 직접 근거로 들어 정중하게 요청하는 형태로 말한다면, “발이 다리에 닿을 것 같으니 내려주시겠어요?”라는 식으로 말한다면, 상대방에게 중요한 학습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예의에 관한 의사소통이 두 통로를 취하고 그 각각이 적합한 경우가 있다는 점은 예의의 분야를 넘어서는 의사소통 자체에 대하여 보다 일반적인 통찰을 준다: 직접적 의사소통과 간접적 의사소통 모두 적합한 여건과 적합한 방식이 있다.
대학시절 직접적 장시간 토론을 했지만 조금도 납득시키지 못했던 동기가, 수십년이 지난 뒤에 내가 당시 납득시키고자 했떤 논지를 이미 수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경우가 있다. 스스로를 돌아보아도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 들었을 때는 납득하지 않던 논점을 몇 년 후 책이나 글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하고 나서야 그 의미를 제대로 깨닫게 되어 비로소 수용하게 된 경험이 있다.
직접적인 의사소통은 좋은 여건에서 좋은 방법으로 이루어질 경우에만 효과가 있다. 여건은, 신뢰가 충분히 쌓인 관계에서 또는 참여자들이 각자의 어떤 분야나 추론방식에 관한 권위나 자격을 인정하고 있는 경우이거나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임이 서로에게 공유될 수 있는 경우여야 한다. 방법은, 예의 바르고 담백한 방식으로 근거가 뒷받침되어 결론이 생산적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좋지 않은 여건에서 좋지 않은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직접적 의사소통은 각자의 방어 기제를 활성화시킨다. 논점 자체의 질보다 그것을 말하는 사람과의 관계, 그 순간의 감정적 맥락, 자존심의 문제가 판단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이런 비인식적 이유의 지배는 말하는 사람 측에서도 듣는 사람 측에서도 변화와 발전의 여지에 방해가 된다. 말하는 사람은 내가 상대방에게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무언가를 납득시켜야 한다는 조급함을 느낀다. 직접적 설득의 실패를 경험할 때마다 우리는 더 크게, 더 강하게, 더 집요하게 말하는 방향으로 반응하기 쉽다. 그런 반응은 그 자체로 역효과를 낳을 뿐만 아니라, 말하는 사람 본인도 성급하게 생각을 확정하고 그 생각의 생산적 변화와 발전의 여지를 막는 닻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듣는 사람은 자신의 견해나 삶의 방식이 공격 받았을 때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본능적 움직임이 두드러지게 된다. 그러므로 논의는 비생산적으로 되고, 보다 일반적인 규준을 객관적인 방식으로 탐구하려는 자세와 멀어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고의 변화와 관련해서 직접적 의사소통이 겨냥하는 시간의 지평은 짧은 경향이 있다.
간접적 의사소통은 이런 방해가 되는 요소로부터 상대적으로 멀어진다. 간접적으로 접하는 생각은 그런 잡음 없이 논점 자체로서 평가받을 기회를 얻기에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설득의 공간은 즉각적 압력으로 열리는 것이 아니라 숙고의 시간을 충분히 가진 여유로 열린다.
간접적 의사소통의 효과는 곧바로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품위 있는 간접적 의사소통에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는 경우가 많다. 품위 있는 간접적 의사소통에 마음을 쓴다는 것은, 기회가 되면 사람들에게 닿을 수 있는 좋은 생각이 세상에 존재하게 만드는 일이다. 특정인을 설득하려는 목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생각이 누구든 접근할 수 있는 자료로 존재하게 함으로써 누군가 스스로의 페이스로 그것에 감화받거나 사고가 촉진되거나 새로운 사고를 전개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즉각적인 피드백이 없어서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생각의 씨앗은 뿌려지는 순간이 아니라 자라는 속도로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간접적 의사소통이 모두 이런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간접적 의사소통에도 질의 차이가 있으며, 질 낮고 품위 없는 형태는 오히려 사유의 생태계를 황폐화시킨다. 이 점을 직시하지 않으면 간접적 의사소통의 가치에 대한 논의는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스핀은 사실을 전달하되 프레이밍을 조작하여 청자가 특정 결론에 도달하도록 유도한다. 어떤 사건의 한 측면만을 선택적으로 부각하고 나머지는 조용히 묻어버림으로써, 청자는 충분히 생각했다는 느낌을 가지면서도 실제로는 편향된 그림만을 보게 된다.
어떤 주장을 심어주기 위한 밈은 더 노골적이다. 복잡한 논점을 자유 연상식 사고에 의하면 그럴듯해 보이는 이미지나 문구로 압축하여 모든 논쟁에 대한 검토 지점을 지워버린다. 그럼에도 밈을 공유하는 사람은 논증을 한 것이 아니지만 논증을 한 것과 비슷한 심리적 만족을 얻는다.
당파적인 비난과 동조는 내용 대신 소속을 평가한다. 사람들은 화자의 소속을 파악하는 더듬이를 세우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게 되고, 주장의 내용을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평가하는 기준을 체계적으로 익힐 필요성 자체를 망각하게 된다.
개소리는 그 내용이 참인지 거짓인지에 관심이 없다. 오직 권위 있다는, 선하다는, 도덕적으로 타협 없다는, 똑똑하다는 등의, 원하는 인상을 만들어내는 데만 관심이 있다. 개소리는 참과 거짓을 가리는 과업 자체를 무력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며 하나의 개소리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아주 공을 들인 많은 반박이 필요하기 때문에, 개소리는 공박되지 않고 만연하는 경향이 있다.
스핀, 밈, 당파적 비난과 동조, 개소리는 모두 결론을 뒷받침하는 근거 없이 결론을 반복적으로 자주 접하게 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어떤 주장이 충분히 많이, 충분히 자주 등장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어떤 생각에 익숙해지는 것과 그 생각을 검토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인지적 과정이다. 그러나 반복 노출은 이 두 과정을 혼동하게 만든다. 자주 들었으니 생각해본 것처럼 느껴진다. 낯설지 않으니 검토가 끝난 것처럼 느껴진다. 감정적 수사를 덧붙여 결론을 반복하는 방식은 여기에 더해 비판적 거리를 감정적으로 봉쇄한다. 분노, 공포, 혐오, 자긍심 같은 강한 감정은 성찰을 억제한다. 결론에 강한 감정이 얹혀 반복되면, 그 결론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감정적으로 불편한 일이 되어버린다.
저질의 의사소통은 단기적으로 훨씬 강력하게 작동한다. 그러나 저질의 의사소통이 지배하는 환경에서 사람들의 판단력은 점점 더 취약해지고, 결국 그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모두가 손해를 입는다. 자신의 편을 위해 저질의 간접적 의사소통을 구사하는 사람들은 단기적으로 이기면서 장기적으로는 모두가 살아가야 할 사유의 공기를 오염시키고 있다는 것을 종종 인식하지 못한다.
이런 저질의 간접적 의사소통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일은 생각을 대체하는 것이다. 이것들은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수고를 덜어주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특정한 결론으로 이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성찰했다는 느낌, 판단했다는 느낌을 얻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성찰 없이 결론에 도달했다. 이것이 고품위의 간접적 의사소통과 저품위의 그것 사이의 핵심적인 차이이다. 전자는 사람을 더 잘 생각하게 만들고, 후자는 생각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면서 실제로는 덜 생각하게 만든다.
품위 있는 간접적 의사소통은 진리에 무관심한 이런 모든 형태들을 피하고자 한다. 진리에 관심 있는 청자를 상정하고, 논의의 장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객관적 증거를 제출하고, 자신이 구성해낸 최선의 논증을 제시한다. 품위 있는 의사소통은 타인을 자신의 의견과 일치시킬 수동자가 아니라 스스로의 인식 능력을 발휘하여 논증대화에 참여하는 능동자로 본다. 따라서 품위 있는 간접적 의사소통에 헌신하기로 하는 것은 그것은 타인의 인식 능력을 존중하겠다는 윤리적 선언이다. 근거를 제시하고, 반론을 숨기지 않으며, 감정적 수사보다 명확한 서술을 택하고, 반복보다 설명을 선택하는 것. 품위 있는 간접적 의사소통은 여러 형태를 취할 수 있지만 이런 일들을 해내기 위해서는 결국 글의 형태가 가장 적합하다. 글 이외의 매체는 글을 읽게 하기 위한 초청의 통로로서 유의미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글이 다른 매체에 비해 불리한 점이 있다. 그것은 다른 활동에 비해 흥미를 가지고서 빠져들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품위 있고 질 높은 간접적 의사소통은 청자의 자율적 사유를 존중하면서 그 자율적 사유 능력을 활용하여, 화자가 구성해낸 최선의 생각을 보다 많은 사람이 즐겁게 접할 수 있도록 기예를 발휘하는 활동이다. 그리고 이런 기예가 유감 없이 발휘될 수 있는 장르는 수필이다. 수필은 딱딱한 학술논문이나 교과서와 달리, 다른 사람의 사유를 큰 진입장벽 없이 접할 수 있게 해준다. 품위 있는 수필을 쓰고 읽는 것이, 사람들이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닿은 결과, 나는 앞으로 부지런히 수필을 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