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립물] 도움이 되지 않는 개념들 - 사법 적극주의, 사법 소극주의
0. 아무런 이론적 분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그 내포와 외연을 제대로 지정할 수도 없는 말을 함부로 쓰다 보면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된다.
사법 적극주의, 사법 소극주의가 바로 그러한 말이다.
1. 이것은 일단 내포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는다.
우리가 일상용어에서 적극적이다, 소극적이다라고 말할 때에는 '보통''평범''중도'가 전제가 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의 사교에 적극적인 사람이 있고, 소극적인 사람이 있으며, 그 중간인 사람이 있다. 그리고 특성 양 극단으로 갈수록 그러한 정도의 특성을 보유한 사람들이 줄어들기 때문에, 중간인 사람들이 제일 많다. 그래서 "적극적이시다"라고 말하면, 보통 사람(분포곡선에서 중앙 근처를 차지하고 있는 가장 많은 수의 사람들)보다 적극적인 것을 의미하고, "소극적이시네요"라고 말하면 보통 사람보다 소극적인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사법 적극주의와 사법 소극주의에는 그런 '보통'이나 '중간'의 개념이 성립할 수 없다. 이를테면 헌법 해석을 할 때, 공권력의 작위나 부작위가 위헌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위헌이다', '합헌이다'의 답이 성립한다. 중간의 개념은 없다. 그리고 위헌이라고 결론을 내렸으면, 그 결론은 타당한 헌법해석에서 도출된 결론이어야 한다. 만약 타당하지 않은 헌법해석에 의해 결론을 내렸으면 그러한 판결은 잘못된 판결이다. 위헌인 것을 합헌으로 선언하여도 잘못된 판결이며, 합헌인 것을 위헌으로 선언하여도 잘못된 판결이다.
이제, 통상 이해되는 내포의 요건처럼, 만약에 사법 적극주의가 법의 올바른 해석을 넘어서, 법에 없는 것을 법인것 처럼 선언하여 판사 자신의 정치적 선호를 충족시키는 일련의 행위 집합을 의미한다면, 사법 적극주의에 따른 판결은 무슨 주의도 아니고 그냥 틀린 판결이고, 잘못된 판결이며, 정당성이 없는 판결이다. 그러한 결론을 도출하는 무슨 주의가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이론"이지, 무슨 허용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는 사상조류가 될 수도 없다.
다른 한편, 만약 사법 소극주의가, 법의 올바른 해석에 따르면 위헌으로 판단되는 것을, 그 판단에 더하여 소극적이고 소심하며 짐짓 물러서는 제스쳐를 취한답시고, 합헌으로 판단한다면, 이것 역시 무슨 주의도 아니고 그냥 틀린 판결이고, 잘못된 판결이며, 정당성 없는 판결이다.
위헌인 것을 합헌으로 선언하는 위험과, 합헌인 것을 위헌으로 선언하는 위험 중 어느 위험을 더 무서운 것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제기되는 문제일 뿐, 참여자의 입장에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헌법 규범 참여자의 입장에서는, 가장 정교한 논증에 의거한 최선의 해석에 따르는 것만이 선택지이기 때문이다. 대충의, 무지막지한, 어설픈 도구를 쓰면서, 그런 무딘 도구가 가져올 위험이, 자신이 덜 중요하게 생각하는 위험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어느 경우에나 위험은 중대하다. 입법에 의해 기본권이 침해당한 국민은, 그 입법이 특히 다수의 정치적 견해와 부합할 때에는, 구제받을 방법이 없으므로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당한다. 합헌인 입법을 위헌으로 선언할 경우, 국민의 민주적 의사결정이 자의적인 근거에서 무효가 되었으므로, 이 또한 민주주의에 대한 심대한 침해다. 그러나 어느 쪽 위험이 '선호될 만하다'고 말할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이전에, 논증을 할 의무가 있는 자가 최선의 논증을 하지 않고 대충 논증을 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소극적으로 심사한다, 적극적으로 심사한다는 것 역시 제대로 된 내포를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언제나 정당한 심사만을 해야 하는 것이지, 게으르고 소홀하게 심사하거나, 헌법적으로 타당하지 않은 기준까지 들이밀어 억지로 문제삼는 심사를 하는 것은 무엇이나 불법이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적극과 소극이, 지성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내포를 가지려면, '중도'와 '보통'이 내포로 정의되어야 한다. 그러나 양단적인 판단을 요하는 헌법 해석에서는 '중도'와 '보통'을 개념할 수 없기 때문에 적극과 소극 역시 내포를 가질 수 없다. 만약, '중도'와 '보통'을 헌법적으로 타당한 결론을 도출하는 해석이론의 집합이라고 한다면, 소극주의와 적극주의는 발붙일 내포가 하나도 없다. 그것은 어느 것이나 시작부터 위헌인 주의다.
2. 외연 역시 제대로 정립되지 않는다.
사법 적극주의와 소극주의가 지성적인 개념이 되려면, 내포에 근거하여 외연을 정할 수 있거나, 또는 외연만으로 어떤 집합을 설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내포가 위와 같이 성립되지 않으므로, 무언가를 '사법 적극주의다', '사법 소극주의다'라고 언술하는 것은 '잘못된 판결이다', '잘못된 판결이다'라고 언술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판결은 합헌인 것을 위헌으로 선언했기 때문에 잘못될 수도 있고, 위헌인 것을 합헌으로 선언했기 때문에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면 그렇기 때문에 잘못되었다 말하면 그 뿐이지, 거기에 무슨 사상적 조류로 인정해야 할 -주의를 덧붙여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실, 이런 이유에서 이 두 개념은, 단순히 자신이 반대하는 판결을 폄하하는 용어로 쓰일 뿐, 객관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사법 적극주의'의 외연을 지적할 때에는, 자신이 비판하는 판결을 '법창조', '법발명'이라는 수사를 더해 비난하는 태도가 만연해 있다. 그러나 문제되는 것은 그 판결에서 인정된 구체적 권리가 헌법의 추상적 기본권에 포섭되는 권리인가 아닌가 하는 쟁점이지, 헌법에 그런 단어를 써놓았는지 아닌지가 아니다. 예를 들어 표현의 자유에 관한 한국 헌법에는 '인터넷 게시판에 익명으로 글을 쓸 권리' 같은 문구가 전혀 없다. 헌법재판소는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쓰는 것은 표현의 자유에 속하고, 익명이냐 실명이냐를 선택할 자유도 익명 표현의 자유로서 표현의 자유의 한 내용을 이룬다고 보았다. 이것은 포섭이다. 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법전에, 구체적인 사안에서 쓸 수 있는 모든 사항들이 직접 다 규정되어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법전에 쓰인 개념들은 오로지 해석을 통해서만 구체적 사안에 적용된다. 미국 적정절차 조항에 "1/3분기에 낙태를 할 여성의 권리"같은 것이 문자 그대로 쓰여 있지 않음은 어느 쪽이나 인정한다. 그러나 그 권리가 과연 적정절차 조항에 의해 보호되는 추상적 기본권에 포섭되느냐 하는 것이 쟁점이다. 어느 쪽 결론을 지지하는 법률가이건, 그들은 모두 법해석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그들의 해석 논증이 제대로 된 것이냐 하는 점이지, 법창조라고 이미지를 발라놓고 덮어놓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필요한 것은 법전에 다 망라되어 있을 것이라는 대중의 착각을 교묘하게 이용하기 때문에 이런 비난의 수사는 효과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학문적 기반도 갖추지 않은 것이다.
입법부나 행정부의 행위에 대하여 개입하는 횟수가 빈번하면 사법 적극주의, 드물면 사법 소극주의라고 부르는, 통계적 방법도 것도 엉터리다. 왜냐하면 헌법재판소가 동일한 기준으로 계속 판단하여도, 입법부나 행정부가 위헌인 행위를 계속 한다면, 당연히 위헌으로 판결되는 숫자가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수학 교사는 동일한 미적분 공식을 사용하여 문제를 제출한다. 학생들이 공부를 안해서 문제를 많이 틀리면 수학 교사는 적극적으로 엄격하게 공식을 적용해서 점수를 짜게 준 것이고, 학생들이 공부를 많이 해서 문제를 많이 맞추면 수학 교사가 점수를 후하게 준 것이 되는가? 교사가 미적분 공식을 맞게 기초하여 정답을 정했느냐 하는 점만 문제될 뿐이다.
또한 무엇이 옳은 판결인가를 먼저 정하지 않고서는 사법 적극주의와 소극주의를 이야기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타당한 헌법해석에 따라 마땅히 내려야 하는 판결을 내린 것에 대해서 적극주의라고 또는 소극주의라고는 아무도 의미있게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쟁점은 '적극주의'와 '소극주의'의 채택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마땅한 헌법해서인가에 놓여 있는 것이다. 후자의 쟁점이 전자의 인상비평을 결정짓지, 전자의 인상비평이 후자의 논증적 쟁점을 결정할 수는 없다.
사법 적극주의, 사법 소극주의와 같은 개념을 함부로 쓰는 법률가들은, 자신의 헌법해석을 논증할 때는 그런 개념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다. "사법 중도주의에 따르면 이렇게 결론 내려야 하지만, 나는 사법 적극주의가 타당하다고 보므로 이렇게 결론 내린다." "사법 중도주의에 따르면 이렇게 결론 내려야 하지만, 나는 사법 소극주의가 타당하다고 보므로 이렇게 결론 내린다." 이런 식의 사고는 등장하지조차 않는다. 그러면 자신은 그렇게 사고해놓고, 자신이 비판하는 결론을 낸 법률가는 위와 같은 두 문장 식으로 사고했다고 보는 귀속이론은 무엇으로 보증되는가? 자기 마음도 아니고 타인의 마음인데 말이다. 그리고 그 타인의 마음이 그렇게 문장으로 표출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그렇게 차별적으로 사고의 성질을 귀속시킬 근거는 전혀 없다.
제빵 노동자들의 노동시간 상한을 정한 법률을 무효로 한 로크너 판결Lochner이 잘못된 판결이라면 그것이 잘못된 이유는, 그것이 헌법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기 때문이지, 당시 미연방대법원 대법관들이 그 해석의 타당성과 독립적으로, 사법 적극주의의 사상신조를 채택했기 때문이 아니다. 또한, 인종분리 학교를 위헌으로 한 브라운Borwn 판결이 옳은 판결이라면 그것이 헌법에 대한 타당한 해석이기 때문이지, 당시 미연방대법원 대법관들이 소극적인 태도를 벗어던졌기 때문에 옳은 것이 아니다.
무엇이 타당한 헌법해석이냐를 결정하게 되면, 무엇이 잘못된 판결이냐를 분류할 수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타당한 헌법해석을 다르게 보면, 어떤 것이 소극적 태도가 되기도 하고 적극적 태도가 되기도 한다. 즉, 사법 적극주의나 소극주의 개념은 전적으로 '타당한 헌법해석'의 관념에 철저히 종속된 관찰자 관점의 인상비평의 개념일 뿐이지, 헌법논증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에게는 적어도 법적 결론과 관련해서는 논증값을 갖는 (독립적인 내포나 외연을 갖는) 개념이 되지 않는다.
이런 개념을 써서 "이러이러한 판결은 사법 적극주의 태도의 발로로, 권력분립 원칙에 따라 비판받아야 할 것이다" 따위의 문장을, 하나의 유의미한 근거로 써서 판결을 논평하는 글은, 내포와 외연도 정하지 않고서, 논리적으로 선결적인 것과 종속적인 것을 구분하지 않은 채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