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tin Morris, "On the Logic of the Performative Contradiction: Habermas and the Radical Critique of Reason", The Review of Politcs, Vol. 58, No. 4, 1996.

요약번역: 이한

 

740 “수행적 자기 모순의 고발은, 그 기본적인 형태로 보자면, 화자는 다음과 같은 경우에 그러한 모순을 범한다고 한다. 그 화자가 말하는 바의 명제적 내용이 주장된 명제 그 자체의 조건과 모순될 때. (that a speaker commits such a contradiction when the propositional content of what the speaker says contradicts the conditions of the asserted proposition itself) 아펠은 이 개념을 선험화용론 논변에 도입하였다. 의식 철학의 기본 문제에 적용함으로써 말이다. (K-O. Apel, "The Problem of Philosophical Foundations in Light of Transcendental Prgamatics of Language," in Baynes et al., After Philosophy, pp. 250-90, p. 276ff.) 예를 들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발언(untterance)는 그 화행(speech act)의 수행적 구성부분에 모순된다. 그 자기 지시적인 문장에 의해 표현된 수행적 부분 말이다. , 자기 재귀적성의 그러한 발언이 실제로 말해지기 위한 조건 말이다. 이 추론은 더 나아가 사용될 수 있다. 아펠이 주장하듯이 말이다. , 보편화가능성의 원리를 근거지울 가능성을 부인하는 철학적 회의주의자에 반대하여 말이다. 왜냐하면 회의주의자가 그러한 신념을 가질 이유들을 제시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 또는 그녀는 이미 논증적 대화의 타당성의 보편적 전제를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아펠, 이 가정들의 불가필성은 합리적 비판 그 자체가, 선험화용론 논증에서의 철학적 토대의 의미에서 정당화된다는 것을 수반한다. (Ibid; and Apel, "Is the Ethics of the Ideal Communication Community a Utopia? On the Realtationship between Ethics, Utopia, and the Critique of Utopia." in The Communicative Ethics Controversy, ed. S. Benhabib and F. Dallmayr (Cambridge, MA: MIT Press, 1990), pp. 23-59)

하버마스의 견해는 또한, 회의주의자가 주장하는 행위 그 자체가, 화자가 스스로를 수행적 모순에 연루시키게 한다. 만일 그러한 논증을 하면서, 비판적 검토를 목적으로 하는 여하한 논증 게임에서 피할 수 없는 가정을 할 수밖에 없다면 말이다.” (주석 12)

 

 

아도르노의 부정 변증법으로서의 진정한 비판의 관념은, 동일성 사유에 대한 비판을 통해 도달된다. “동일성 사유, 개념을 개념의 주제(대상Sache)과 등치시키는 모든 견해를 나타낸다. 이것은 개념적 사유의 중개를 통하여,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과는 독립적인 즉각성의 사실을 파악하는, 보편적인 것 하에 구체적인 것을 포섭하는 분류적 의식이다. 수학의 형식주의는 이런 종류의 사고를 가장 추상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을 거쳐 매일매일의 실증주의적 이데올로기 전반에까지 다 닿는다. 인식은, 그 자신의 개념을 통해, 존재 그 자체를 굴종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존재에 대하여 통제력을 획득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인식이 이러한 일을 더 많이 하면 할수록, 의식이 그것에 의해 계몽하는 의식 그 자체를 위해 중개되는 그러한 과정에 대해 더 눈이 멀게 된다.

 

746 계몽은 신화로 돌아간다. 계몽은 신화를 어떻게 피해야 하는지를 진정으로 안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 형태에서 외관은 현상태를 반영했기 때문이다. 세계의 사이클, 숙명, 그리고 지배. 희망 없는 진실처럼 말이다. 신화적 심상의 간단명료함(succinctness)와 과학적 공식의 명료성 양자 모두, 사실인 것의 영원함(permanence)에서 확인되며, 그리고 순수하고 단순한 것의 단순한 존재는 그것이 가리는(occludes) 의미로서 표현된다.“(계몽의 변증법, p.27) 근대, 그리고 계몽된 의식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신화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사유로서 그것들에 대한 이 비판은, 계몽의 변증법을 조직화하는 논제다.

그러나 이것 이상으로, 사물과 다른 사람들의 외부의 적대적인 외관-즉 동일하지 않은 다른주체성-은 동일하게 되어야만 한다. 만일 주체가 그 자신에 대하여 통제력을 가지려면 말이다. 도구적 이성은 자아를 규율하는데 기여한다. 다른 자아의 지배에 요구되는 도구적으로 합리적인 통제를 통해서 말이다. 주체의 자기 보존에 기여하는 도구적 이성의 진전은 다른 사람임과 비동일성을, 합리적이고 동일한 것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무언가로, 즉 그리하여 그 자신과 같은 것으로 처리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낯설고 적대적이며 비합리적인 채로 남아 있어서, 파괴되거나 비존재로 억압되어야 한다. 모든 것은 주관적이고 동일화하는 이성에게로 예속되어야만 한다. 여기에 수반되는 것은, 주체성을 위한 주체성의 희생이다. 남성과 여성은, 증강된 정신적 그리고 사회적 억압에 의해 획득된 그들의 증강된 권력을 위해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747 그런데 아도르노의 이러한 비판은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고 역사적인 것이다. 즉 바뀔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계급 지배의 기원은 지적인 노동과 육체 노동의 분리와 후자의 전자에 대한 예속에 있다고 한다.

 

 

 

751 아도르노에 대한 하버마스의 불만은 이것이다. 부정의 변증법은, 개념적 사유에서 억압되는 객관적 요소에 동정을 표시하나, 개념과 사물을 등치시키는 지배하는 원칙을 반복할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개념화하려는시도 자체를 금지당하게 될 수밖에 없다. 하버마스의 관점에서, 아도르노는, 그러한 공식에서 새로운 신화를 창조하고 있을 뿐이다. , 그 자신의 지배하하는 주체성을 충분히 일관되게 부정하는 의식과 함께에서만 억압된 자연은 돌아올 것이라는 신화 말이다.

 

755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필수적이라는 주장은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을, 그것의 역사적 표현과는 독립적인 이성을 재구축하는 유사 선험적인 정당화(quasi-transcendental justification)로 사용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여기서 하버마스는 아도르노가 심혈을 기울여 구분하려 했던 것을 섞고 있다. , “사회의 역사적 관념, 참되지 않은전체로서 인식된 것과, 그 사회 안에서 그 사람 자신의 합리적 삶을 살아가는 개인.

하버마스에게 진리 추구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초석으로서, 사회적이기 때문에 합리적이다. (그것은 상호작용을 요구한다.) 그리고 또 그 역도 성립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에 대한 지성화된 관념이다. (....) 인식적으로 구속적인 것이 사회적으로 구속적인 것이 되도록 결정하는 것이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다. 하버마스의 관념이 놓치고 있는 것은, 둘 다 진리 주장을 하는, 개인적 합리성의 차원과 사회적 합리성의 차원 사이에 변증적 구분과 관계의 논리이다. <이하생략. >

 

 

신고
Posted by 시민교육

댓글을 달아주세요:: 네티켓은 기본, 스팸은 사절


BLOG main image
대안민주주의와 사회윤리학 담론 형성을 위해 노력하는 '시민교육센터-배움의 연대망’ 홈페이지 입니다. 이곳에서는 열린 강의 형태의 시민교육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트위터 아이디: civiledulee, 이메일: civiledulee@gmail.com (이한) by 시민교육
전체 글 보기 (935)
공지사항 (20)
강의자료 (87)
학습자료 (309)
기고 (513)
  • 게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