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vid Benatar, "Still Better Never to Have Been: A Reply to (More of) My Critics", J Ethics (2013) 17: 121-151

 

2. 왜 결코 태어나지 않았던 것이 좋은가.

2.1. 비대칭성 논변

첫 번째 논변은 해악과 이득(harms and benefits)의 비대칭성에 의존한다. 고통과 쾌락을 해악과 이득 일반의 한 사례군으로 활용하여, 나는 다음과 같은 것이 논란의 여지가 없을 것이라 제안하였다.

 

(1). 고통의 현존은 나쁘다. (The presence of pain is bad) 그리고

(2) 쾌락의 현존은 좋다. (The presence of pleasure is good)

 

그러나, 고통과 쾌락의 부재(absence)에 관해서는 대칭적인 주장이 개진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3) 고통의 부재는 좋다. 설사 그 좋음이 어느 누구에 의해 향유되지 않더라도.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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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쾌락의 부재는 나쁘지 않다.(not bade) 그 부재가 박탈이 되는 누군가가 존재하지 않는 한은.

 

(1)(2)의 조합[존재](3)(4) 조합[비존재] 사이의 이 비대칭성을 기본적 비대칭성basic asymmetry라고 부르자. 나는 기본적 비대칭성은 매우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설사 암묵적인 것에 그치더라도 말이다. 또한 그것은 압도적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몇 가지 다른 비대칭성에 대한 최선의 설명이 되기도 한다.

 

(i) 재생산 의무의 비대칭성The asymmetry of procreational duties

우리는, 비참한 삶을 살게 될 사람들을 존재케 하는 것을 피할 의무는 있는 반면에, 행복한 삶을 살게 될 사람들을 존재케 할 의무는 갖고 있지 않다.

(ii) 전망적 이득의 비대칭성The prospective beneficence asymmetry

그 아이가 존재하게 됨으로써 이득을 보게 될 것이라는 이유를 아이를 갖는 이유로 인용하는 것은 이상하지만, 그 아이가 고통을 겪을 것이라는 이유를 아이를 갖지 않는 이유로 인용하는 것은 이상하지가 않다.

(iii) 회고적 이득의 비대칭성The retrospective

고통받은 아이를 존재케 한 경우에, 그 아이를 존재케 한 것을 후회하는 것은 이치에 닿는다. 그리고 그 후회를 그 아이를 위해 하는 것이 이치에 닿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행복한 아이를 존재케 하지 않았을 때, 그 아이를 위해 그 점을 후회할 수는 없다.

(iv) 먼 거리에 있는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들과, 부재하는 사람들의, 비대칭성The asymmetry of distant suffering and absent happy people

우리는 먼 거리에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위해 올바르게 슬퍼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아무도 거주하지 않는 행성, 우리 행성의 아무도 살지 않는 섬에 살았을지도 모르는 부재하는 행복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아무런 눈물도 흘리지 않는다.

 

기본적 비대칭성이 이 다른 비대칭성들에 대한 최선의 설명이라고 논하면서, 나는 다른 비대칭성에 대한 대안적인 설명들을 거부하였다. 나는 또한 현존하고 부재하는 쾌락과 고통에 대한 대칭성을 확립하는 다양한 방법들을 탐구하였지만, 이러한 방법들이 실패한다고 논하였다. 그리하여 우리가 기본적 비대칭성을, 존재하는 것과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 사이를 비교하기 위하여 활용한다면, 우리는 그림 1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림1

 

시나리오 A          시나리오B

(1) 고통의 현존

(나쁨)

(3) 고통의 부재

(좋음)

(2) 쾌락의 현존

(좋음)

(4) 쾌락의 부재

(나쁘지 않음)

(X가 존재한다.)              (X가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다.)

 

(3)(1)보다 낫다. 그런데 (2)는 시나리오 AX를 위해 좋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나리오 B(4) 에 비해서 더 이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한 번도 존재하지 않는 것에 비해 존재하게 되는 것에는 아무런 순 이득도 없다. (There are thus no net benefits of coming into existence compared to never existing)

 

2.2 삶의 질 논변

 

비대칭성 논변은 한 번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게 되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하게 되는 것이 얼마나 큰 해악인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두 번째 논변은 해악의 크기를 보여준다.(magnitude of that harm)

124 그러나 이 두 번째 논변은, 존재하게 되는 것이 해악이라는 결론을 뒷받침하는 별도의 논변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 논변의 첫 번째 단계는, 삶의 질에 대한 자기 평가(self-assessments of quality of life)가 극도로 신뢰하기 힘든 것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낙관주의 편향을 갖고 있다는 광대한 경험적 증거들이 있다. 이 낙관 편향은 그들의 삶의 질을 과대평가하도록 만든다. 삶의 질 평가는 또한 다른 방식으로도 부패하게 된다. 첫째, 인간들은 적응을 쉽게 하는 경향이 있다. , 무언가 나쁜 일이 그들에게 발생하면, 처음에는 복지의 자기 평가에 쑥 들어간 부분이 생기지만, 복지에의 실재의 개선 없이도 원래의 기준선 평가에 가깝게 곧 회복이 된다는 것이다. 둘째, 삶의 질에 대한 사람들의 자기 평가는, 다른 사람들의 삶의 질에 대한 평가에 영향을 받는다. 그 해악이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한, 그 해악은 사람들의 복지의 자기 평가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 경향이 있게 된다. [다 똑같은 해악을 맞으면 그것이 해악이라고 마이너스 평가를 하지 않게 된다.]

삶의 질 논변의 두 번째 단계는, 자기 평가에서 얼마나 많은 나쁜 것들이 놓쳐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삶이 그들이 전형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쁘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한 삶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은 중대한 해악이다.

이 논변의 세 번째 단계는, 설사 앞서의 단계들의 논변이 실패한다고 여겨진다 할지라도, 재생산을 비판할 좋은 이유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결론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나는 세계에 얼마나 많은 고통들이 있으며, 이 심각한 해악의 적어도 일부에 새로운 생명이 얼마나 노출될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어떠한 재생산도 그들이 존재하게 되어 맞이하게 되는 심각한 해악의 위험을 부과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재생산을 함으로써, 그들의 자녀들이 대가를 치르게 되는, 총알이 모두 탄실에 장전되어 있는 재생산 러시안 룰렛게임을 하게 되는 셈이다. 그러나 설사 비대칭성 논변이 실패하고, 그 총의 탄실에 총알이 일부만 장전되어 있다 하더라도, 자기 자녀에게 그러한 위험을 감수케 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다.

 

3. 비개인적으로 나은가, 아니면 그 개인을 위해 나은가?

나는 비개인적인 평가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신에 나는 그 존재하게 되는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존재하게 되는 것이 나쁘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을 위하여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더 낫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혼동의 일부는, 내 생각에는, 사람들이 한 번도 존재하지 않은 그 사람을 위하여 한 번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념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 때문에 생긴다. 이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게 되는 이들의 경우에는, 존재하지 않기가 이득이 될 아무런 주체가 없기 때문이라고 이야기된다. 예를 들어 David DeGrazia는 다음과 같이 쓴다.

 

오직 현실의 존재(actual being)만이 이익을 보유한다. 이제 만일 누군가 아이를 존재케 하게 되면 그 아이의 삶의 전망이 너무나 핍진적이어서 그러지 않았아어야 하는데 존재케 했다고 할 경우에는, 잘못된 선택의 피해자가 있는 셈이다. , 현실로 존재하는 아이가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어떤 불확정적인 그저 가능한 아이들이 그를 존재케 하지 않는 결정으로부터 이득을 본다는 주장이 나의 판단에서 이치에 닿게 되는 것은 아니며, 따라나오지도 않는다. (DeGrazia, D. 2010, Is it wrong to impose the harms of human life? A reply to Benatar. Theoretical Medicine and Bioethics 31: p.323)

만일 누군가가 결코 존재한 적이 없다면, 그로 인해 이득을 볼 현실의 사람이 없다는 것은 명백히 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가 결코 존재하지 않은 것이 그 사람을 위해서 더 낫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그 발화를 더 복합적인 관념의 단축어로서 이해한다면 말이다. 그 더 복합적인 관념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두 가능 세계를 비교한다. 한 가능세계는 어떤 사람이 존재하는 세계이고 다른 가능 세계는 그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다. 우리가 이 두 가능 세계 중 어느 것이 더 나은가를 판단하는 한 가지 방식은, 이 두 가능 세계의 하나 (그리고 오직 하나)에서만 존재하는 사람의 이익을 준거로 하는(with reference to) 것이다. 명백히 그 이익은 그 사람이 존재하는, 가능 세계 중 하나에서만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점이, 대안이 되는 가능 세계의 가치에 대하여 우리가 판단을 내리는 것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판단을 내리는 것은 그가 실제로 존재하는 가능 세계에서의 그 사람의 이익을 준거로 하여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See Benatar 2006, p. 31 (and p. 41)] Benatar, D. 2006. Better never to have been: The harm of coming into existenc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그리하여, 우리는 존재하는 누군가에 관하여, 그가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그를 위해서 더 나았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된다. 그 누군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에 대해서, 그가 존재했더라면, 그가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더 나았을 뻔 했다고 진술할 수 있게 된다. 각 경우에 우리는, 선택지가 되는 두 가능 세계 중 한 가능 세계에서는 존재하는 누군가에 관하여 무언가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126 이 사유의 노선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 항상 더 낫다는 발화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본적 비대칭성의 주장(3)을 포함한 연관된 발화에도 또한 적용된다. , 고통의 부재는, 그 좋음이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향유되지 않을 때도 좋다는 주장을 포함한 연관된 주장들 말이다. 그것이 좋다는 판단은 비개인적impersonally으로도 내려질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 판단을, 대안이 되는 가능세계에 존재할 그 사람의 이익을 언급하여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고통을 겪는 아이를 그 아이를 위하여 존재케 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에도, 우리는 문자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해관심을 갖고 있다고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에, 이것은 우리가 두 가능세계를 비교하여 즉 우리는 다른 가능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한 가능세계에 존재하는 사람의 이익에 의거하여 사안을 판단할 때, 그가 존재하지 아니하는 가능세계가 더 낫다는 진술의 단축어(약칭shorthand)이다.

몇몇 문자주의자들은 그러한 움직임에 저항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한 가능세계가 다른 가능세계보다 누군가에게for somebody 더 낫기 위해서는 그 사람은 두 가능세계 모두에 존재해야만 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이 접근의 문제점은, 그것이 이례적인 사안-그리고 사람들을 존재케 하는 사안은 확실히 이례적인 사안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무엇이 더 낫다고 판단하는 더 전형적인 사안에 무조건 일치해야만 한다고 보는 프루크루테스적 고집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독단주의는, 정확히도 비동일성 문제를ㅈ ㅔ기하는 것이다. 그 문제는 어쨌거나 문제problem이다. 이 문제를 푸는 길은,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파리의 비유를 활용하자면, 언어의 병 밖으로 빠져나오는 길을 찾는 것이다. (Wittgensstein 1953, 문단309).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재생산 사안이 통상적인 사안과 다르며, 우리의 언어는 이 차이를 설명하여야만 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4. 기본적 비대칭성에 대한 비판

내 논변에 대한 대부분의 비판은 나의 기본적 비대칭성에 집중되어 왔다. 하나의 반응은 비대칭성은 그냥 직접 부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고통의 부재가 그 사람을 위해 좋다고 주장할 수 있다면, 부재하는 쾌락은 나쁘다는 대칭적인 주장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Harman 2009, pp. 781-782). 이 논변에 따르면, 우리는 내 기본적 비대칭성 중 (4)를 부인해야만 한다. 여기서 제안은, “우리가 창조했을 수도 있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위하여, 그의 쾌락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은 나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쾌락이 발생했더라면 그에게 좋았을 것이기 때문에.”(Harman, 2009, p.782)라는 것이다. 이 반론의 오류는, 그것이 내 기본적 비대칭성을, 가치론적 주장(axiological claim)이 아니라 논리적 주장으로 오해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확실히 (논리적으로는) 시나리오 B의 부재하는 고통이 좋고, 그리하여 부재하는 쾌락은 나쁘다고 진술할 수는 있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제안했듯이, 우리가 그렇게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 중 하나는, 그렇게 될 경우에, 기본적 비대칭성에 의해 설명되는 네 비대칭성에서 우리가 내리는 가치 판단 모두를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 있다.

기본적 비대칭성에 대한 다른 더 흔한 반응은, 기본적 비대칭성의 부인이 이 다른 네 비대칭성 중 일부를 부인하는 결과를 수반한다는 점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비대칭성에 대한 비판가들 중 몇몇은, 이 기본적 비대칭성이 다른 비대칭성의 유일한 또는 최선의 설명이라는 점을 부인하려고 하였다.

127 그들은 이 다른 네 비대칭성은, 기본적 비대칭성이라고 부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설명될 수 있다고 한다. 이 주장을 옹호하면서, 몇몇 사람들은 네 비대칭성 중 오직 일부에 대해서만 대안적 설명을 제시하였다. 이는 그들의 논변이 부족한 점이 있게 만든다. 나는 기본적 비대칭성은 다른 비대칭성 모두를 설명한다고 주장했다. 만일 내 비판자들이 그들의 논의가 더 낫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일부가 아니라 전부가 다른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점을 밝혀야만 한다.

 

4.1. Elizabeth Harman

엘리자베스 하먼은, (i)-(iv)의 비대칭성 중 하나에 대해서만 대안이 되는 설명을 제시한다. 그는 우리는 사람들이 고통을 겪도록 야기하는 것을 피할 명확히도 강한 이유를 갖고 있다고 쓰면서, “사람들이 좋은 경험을 하도록 야기할 적극적 이유는 훨씬 더 약하다”(Harman 2009, p.781)고 한다. 이것은 내가 고려했던 것이고 내 책에서 거부했던 것이기 때문에 아예 그걸 제대로 들쳐보지도 않았다ᅟᅳᆫ 것이 신기하다. 이유가 아니라 의무에 대해서 쓰면서 나는 우리가 여하한 적극적 의무를 갖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제시한 설명에 대한 대안적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극적 의무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오직 극소수만이, 이러한 의무 가운데 행복한 살마들을 존재케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고 썼다. (Benatar 2006, p.32) 다른 말로 하면, 쾌락을 야기할 이유보다, 고통을 피할 이유가 더 강하다는 설명은, 덜 만족스러운 설명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재생산 의무의 비대칭성을 받아들이는 사람 모두에게 열려 있는 설명이 아니라 오로지 일부에게만 열려 있는 설명이기 때문이다. [, 적극적 의무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들에게만 열려 있는 설명]

 

4.2. Chris Kaposy

 

크리스 카포시는, 하먼의 논변광 얼핏 보기에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논변을 제시한다. 그는, (i) 재생산 의무의 비대칭성과 (ii) 전망적 이득의 비대칭성에 대한 최선의 설명은, “부재하는 고통의 적극적인 가치라기보다는,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을 피하는 일의 적극적인 가치라고 한다. (Kaposy 2009, p. 105) 그는 부재하는 고통의 가치(the value of absent pain)와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을 피하는 일의 가치(value of avoiding the cause of suffering)를 구분하면서 (128) 우리는, 고통의 부재가 꼭 좋은 것이 되어야 함이 없이, 고통을 야기하는 것을 피할 의무를 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고통의 부재는 무차별한 것이 될 수 있다고 그는 쓴다. (Kaposy 2009, p. 106)

다른 말로 하면, 카포시 교수는 기본적 비대칭성에서 (3)을 부인한다. (3)은 고통의 부재가 내재적으로 좋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고통의 부재가 고통의 현존보다 낫다고, 즉 비교적으로 좋다고 하는 것이다. (3)을 부인하는 것은 그러므로 이례적인 견해일 뿐만 아니라 극단적인 견해이기도 하다.

(3)을 부인하는가? Kaposy 교수는 두 가지 관련된 논변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것들은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는 않지만 둘 다 이상하다. 그의 두 번째 논변을 우선 살펴보자.

어떤 사람이 포로로 갇혀서 음식을 박탈당함으로써 갖게 되는 배고픔의 고통을 겪게 된다고 생각해보자. 누군가를 그런 종류의 상황에 처하게 하는 것이 그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을 피하는 것이 의무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배고픔의 고통의 부재그 자체는 좋은 상태라고 하기보다는 중립적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 배고픔의 고통을 늦출 정도로 충분히 음식이 주어진다면, 그 사람은 악을 피하게 되는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적극적인 좋은 또는 즐거운 상태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악을 가까이 못 오게 저지하는 것 이상의 것이 요구되는 것 같다.”(2009; 106)

여기에서 나타난 그의 두 번째 논변은 부재하는 고통은, 그것들이 현존하는 사람들에게 부재할 때조차도 좋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함을 알 수 있다. 그가 여기서 저지르고 있는 오류는 그가 부재하는 고통의 경험적 질(experiential quality)과 가치론적 가치(axiological value)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배고프지 않는 것은 정말로 경험적으로는 중립적이다. 그것은 즐거움도 아니고 고통도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가치론적으로 중립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고통에 처하지 않는 것은 (상대적으로) 좋은 것이다. 고통은 나쁘며 그리하여 그 부재는 좋은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존재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것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매우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이것을 받아들인다. 이 원리를 존재하지 않는 살마들에게는 확장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사람들에게는 적용하는 사람들은 카포시 교수의 논변을 끌어다 쓸 수는 없다.

 

4.3. David DeGrzia.

데그라지아 교수는, 존재하는 것의 이득이 해악을 능가하는 한, 존재는 순 이득이며 따라서 이 경우에는 해를 가하지 말 의무가 적용되징 ᅟᅡᆭ는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답의 문제는, 그것이 재생산에 대한 다른 도전에 굴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Seana Shiffrin (1999) 교수가 제기한 바 있다. 존재하게 되는 것의 의도된 이익은, 오로지 또한 존재의 해악을 가함으로써만 부여될 수 있다. 쉬프린 교수가 논하길,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사람들의 반대의 소망의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는, 우리는 더 큰 해악의 고통을 겪는 것을 막기 위하여 더 작은 해악을 부과하는 것이 허용되고 때로는 의무지워질 때에도 있지만 (132) 우리는 사람의 동의가 부재한 상태에서는, 이득을 부여하기 위하여 그에게 해를 가하는 것이 동의 없이는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재생산 사안에서 우리가 그들의 동의를 얻을 수 없음이 확실하다. 나의 삶의 질 논변에 따르면, 존재의 해악은 심각한 것이다. 이것은 동의를 할 수 없는 존재에게, 그들이 얻을 이득을 위해 해를 가하는 것을, 더 문제되게 만든다.

 

135

4.5 Ben Bradley

 

Albert Brogan G.H. von Wright 의 견해에 따르면 “p는 좋다. 만일 그리고 오직 만일 p~p보다 나을 때에만.” (Bradley 2010, p. 2 citing Brogan 1919, p. 98 and von Wright 1963, p. 34). Roderick Chisholm Ernest Sosa는 이 설명을 거부하면서 대신에, “사태는 좋다. 그것이 무차별한 어떤 사태보다 더 낫다면.”이라고 한다. (a state of affairs is good provided it is better than some state of affairs that is indifferent) (Bradley 2010, p. 3, citing Chisholm and Sosa 1966, p. 246). 두 설명 모두 (2)가 좋지만 (4)보다 낫지는 않다는 중과 양립불가능하다고 이야기된다. (그럴법한 가정에 의하면 (4)는 또한 좋지는않다.) 만일 (2)가 두 설명 모두에서 좋다면, (4)보다 더 나아야만 한다고 주장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점을 함의하게 된다고 한다. , 나는 (2)가 좋고, (4)는 나쁘지 않다는 주장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2)(4)보다 낫지 않다는 주장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논의의 목적을 위하여, (2)(4)보다 낫지 않다는 나의 주장을 포함한 기본적 비대칭성이, 정말로 좋음에 관하여 진술된 두 설명과 양립불가능하다고 가정하여보자. 그렇다고 해서 내가 틀렸다는 점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는 없다. 현존하는(extant) 좋음에 대한 설명이, 존재하기와 결코 존재하지 않기 사이의 비교라는 이례적인 사안을 고려해보지 않았다는 것은 거의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 없다. 바로 이런 종류의 문제가,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비동일성 문제가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설명한다. 비동일성 문제는, 사람들이 재생산 해악을, 비재생산 맥락에서 발전된 해악 관념에 의거하여 바라보기를 원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재생산 맥락에는 무언가 명확히 다른 점이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례적인 사안과는 단절되어 발전되어온 해악 관념을 사용한다면, 무분별한 짓을 저지르는 셈이 된다. 우리는 좋음의 관념에 관하여도 같은 것을 주장할 수 있다. 좋음에 대한 흔한 설명이 오직 통상적인 사안들만을 주시하고서 발전되어 왔다는 건 전적으로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이 설명들을, 그 관념을 정식화함에 있어서 무시되어 왔던 이례적인 사안에 경직되게 적용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와 달리 주장하는 것은, 내가 앞서 언급하였던 개념적 프로크루스테스주의(conceptual procursteanism)을 범하게 되는 셈이다. 다른 말로 하면, 만일 좋음에 관한 두 설명이 이례적인 사안을 설명할 수 없다면, 그 두 설명은 거부되어야 한다.

그러나 브래들리 교수의 개념적 프로크루스스주의는 좋음에 대한 두 설명이 나의 기본적 비대칭성과 양립불가능하다는 그의 주장에까지 확장될 수 있다.

시나리오 A 시나리오 B

                    (X가 존재한다.)                             (X가 존재하지 않는다.)

(5)

고통의 부재

(좋음)

(1)

고통의 현존

(나쁨)

(3)

고통의 부재

(좋음)

(6)

쾌락의 부재

(나쁨)

(2)

쾌락의 현존

(좋음)

(4)

쾌락의 부재

(나쁘지 않음)

그림2. 확장된 기본적 비대칭성

 

그림2를 살펴보자. , 예전에는 암묵적이었던 (5), (6)이 이제는 명시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이제 Broganvon Wright의 주장이 “p~p보다 나을 때에만 오직 그 경우에만 p는 좋다는 것임을 기억해보자. 만일 (2)p이라면 무엇이 ~p인가?

선택지는 다음과 같다.

(a) ~p(6)이다.

(b) ~p(4).

(c) ~p(6)이며 ~p(4).

Borgan-von Wirght의 견해는 첫 번째 (a)와는 양립가능하지만, (b), (c)와는 양립가능하지 않다. 그러므로 (6)(2)의 유관한 부정으로 취급함으로써 나는 brogan-von Wright의 견해를 지지할 수 있게 된다. 어떤 이는 이를, (c)가 적합한 옵션이라고 주장하면서 거부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이렇게 되는 이유는 (6)(4) 모두 쾌락의 부재의 경우이기 때문이라고 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중대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2)의 부정은 모호하다. 그리고 오직 부정의 가능한 의미 중 오직 하나만이, 내 견해에서는, 유관하다.

그 모호성을 인정하기 위하여, 외적 부정과 내적 부정(external and internal negation) 사이의 구분을 고려해보라. (Slater 1979). (2)쾌락을 가진 X가 존재한다고 진술한다. 이것의 외적 부정은 쾌락을 가진 사람 X가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이 부정은 쾌락을 갖지 않은 사람 X가 존재한다.”-(6)-와 내적 부정인 X는 존재하지 않아서 그래서 쾌락을 갖지 않는다, (4)와의 사이에 모호하다. (6)(4) 모두 (2)의 부정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2)의 가치론적 평가에 둘 다 유관한 부정인 것은 아니다. (2)(어떤 시점에) 존재하는 어떤 사람의 쾌락의 현존이다. 그것의 유관한 부정은, 내가 논했듯이, (어떤 시점에) 존재하는 사람의 쾌락의 부재이다. 브래들리 교수는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137)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의 견해가 부정합적이라거나 선호할만함 또는 더 나음의 논리를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6)(4)가 가치론적 등가라고 주장하는 것은, 다시 한번 프로크루테스적 악득이 표명되는 지점이다.

 

병약이(Sick)는 한차례식 정기적으로 병을 앓지만, 거기서 빨리 회복할 수 있는 능력도 갖고 있다. 건강이는, 빨리 회복할 능력은 결여하고 있지만 결코 아프지 않는다. 빠른 회복의 능력의 현존은 병약이를 위해 좋지만, 건강이가 그 능력을 결여하고 있는 것은 건강이에게 나쁘지 않다. 다른 말로 하면, 빠른 회복의 능력은, 비록 병약이에게는 좋긴 하지만, 병약이가 건강이에 대하여 누리는 이점은 아니다. 병약이가 되는 것은 건강이가 되는 것보다 낫지 않다.

 

138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 사안은 A시나리오와 B시나리오의 비교에 유비적이지 않다고 말이다. , 빠른 회복 능력은 도구적인 좋음이라고 말이다. 반면에 쾌락은 내재적인 좋음인데 반해서 말이다. 좋음에 대한 두 설명이, 내재적 좋음(intrinsic goodness)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에, 이 반론에 따르면 이 설명들은 병약이와 건강이의 경우에는 적용되지만, 기본적 비대칭성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반론 배후에 있는 추론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만일 쾌락이, 예를 들어, 내재적으로 좋다면, 쾌락의 현존은 그 부재보다 더 낫다. 다른 말로 하면, 무언가 그 자체로”(in itself) 좋은 무언가의 결여는 그 현존보다 나쁨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2)(4)보다 나음에 틀림없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독적인 좋음의 결여는 도구적인 좋음의 현존보다 꼭 더 나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도구적 좋음의 가치는, 그것들이 도구가 되어 봉사하는 추가적인 좋음으로부터 파생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병약이의 빠른 회복 능력은 병약이를 위해 도구적으로 좋다. 왜냐하면 병약이는 정기적으로 아프기 때문이다. 반면에 건강이가 그 능력이 부재한 것은 나쁘지 않다. 왜냐하면 그런 회복 능력은 건강이에게는 아무런 도구적 가치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추론의 문제점은, 이것이 부당하게 좁고 경직된, 내재적 가치에 대한 관념을 상정한다는 것이다. 시나리오 A에서 쾌락의 부재가 내재적으로 좋다고 이야기되는 한에서는, 나는 그것은 그 쾌락을 갖게 되는 그 사람을 위해서 (내재적으로) 좋음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단순히 그 쾌락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좋다기보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들을 위해서 내재적으로 좋은 것은, 현존하는 사람들이 코락을 갖는 것이다. 또는, 달리 표현하자면, 만일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쾌락을 갖는 것은 좋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쾌락의 부재가 나쁘지 않을 가능성을 허용한다. 만일 그 부재가 박탈이 될 사람이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일단 이것이 참이 되면, 내재적 좋음과 도구적 좋음 사이의 유관한 차이점은 사라진다. 비록 쾌락의 존재가 사람들을 위한 내재적 좋음으로 남아 있다 하더라도, 그리고 빠른 회복 능력이 병약이라는 위한 도구적 좋음으로 남아 있다 하더라도, 하나의 부재는 나쁘지 않은데도 다른 하나의 부재는 나쁨에 틀림없다고 하는 것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니게 된다. 대신에, 둘 모두의 부재는 이제 나쁘지 않다고 할 수 있게 된다. 만일 쾌락의 부재가 그 그 쾌락에 관하여 어느 누구도 박탈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4.6. Campbell Brown

 

Campbell BrownProfessor Bradley와 마찬가지로, “더 나음betterness” 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나의 견해가 두 원리의 결합으로 진술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의 논변을 시작한다. (Brown 2011, p. 46)

 

(P1) 만일 어떤 사람이 두 세계 모두에서 존재한다면, 이 세계들 중 그녀를 위해 어떤 세계가 더 나은지는, 그녀가 세계들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쾌락에 달려 있다. 다른 사정이 동일하다면, 그녀가 한 세계에서 더 많은 쾌락을 경험할수록, 그 세계는 그녀를 위해 더 낫다. 더 많은 고통을 경험할수록 그 세계는 그녀에게 더 나쁘다.

(P2) 만일 어떤 사람이 두 세계 중 기껏해야 하나의 세계에서만 존재한다면, 이 세계들 중 어느 세계가 그녀를 위해 더 나은가는, 그녀가 이 세계들에서 경험하는 고통에만 의존한다. 그녀가 한 세계에서 더 많은 고통을 경험할수록, 그녀를 위해 더 나쁘다. (Brown 2011, p. 46)

 

그는 그리고 나서 우리에게 다음을 고려해볼 것을 주문한다.

 

세 세계, A, B, C, 그리고 어떤 사람 Jemima을 생각해보자.

세계 A에서는 제미마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 B에서는 제미마는 존재하지만 쾌락도 고통도 경험하지 않다.

그리고 세계 C, 제미마는 존재하고, 오직 쾌락만을 경험한다. (Brown 2011, p. 47)

 

그는 그리고 나서 “(P2)로부터, AB는 제미마를 위해 동등하게 좋고, AC도 동등하게 좋다는 결론이 따라나온다. 그러나 (P1) 으로부터 CB보다 제미마를 위해 더 낫다는 결론이 따라나온다.”(Brown 2011, p. 47) 이것은 단순히 부정합적인 것으로 보인다.”고 그는 쓴다. (Brown 2011, p.47)

나는 그의 논변을 더 이상 따라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처음부터 실패하기 때문이다. , 내 견해를 진술하는 데서부터 틀렸기 때문이다. 이는 (P2)가 내 견해가 아니기 때문이다. 왜 브라운 박사가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해하기란 쉽다. 그는 내가 그림1에서 (2)(4) 사이에 성립한다고 말한 관계를 살펴보고는, 거기로부터 하나의 원리를 외삽해냈다. 그러나 그 그림은 나의 완결된 견해를 포착하지 않는다. 나는 쾌락의 부재는, 그 부재가 박탈이 되는 누군가가 존재하지 않는 한, 나쁘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Benatar 2006, p.30) 이것은 쾌락의 부재는, 그것이 누군가에게 박탈이 될 때에는 나쁘다는 것을 함의한다. 이것은 브라운 박사의 세계B(즉 제미마가 존재하지만 쾌락도 고통도 경험하지 않는 세계)와 직접 유관하게 된다. 나의 견해가, 브라운 박사의 AB세계에 관하여 무엇을 말하는지를 고려해보라.

우리가 이 두 세계를 비교해보면, 우리는 (P2)는 내 견해를 포착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제미마는, 두 가능 세계중 기껏해야 한 세계에서만 존재하지만, 이 두 세계 중 어느 것이 그녀에게 더 나은가는, 그녀가 이 세계에서 경험하는 고통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140 대신에, 이 특정한 비교에서, 고통은 고려할 가치가 없다(pain is moot). 왜냐하면 어느 세계에서도 고통은 존재하지 않고 이 부재에 대한 적합한 평가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대신에, 이 세계들 중 어느 것이 그녀에게 더 나은가는, B 세계에서 쾌락의 부재가 나쁜 반면에 A에서의 쾌락의 부재는 나쁘지 않다는 사실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세계 B가 제미마를 위해서 더 나쁘다는 결론이 따라나온다.

 

4.7. 기본적 비대칭성에 대한 추가적인 생각

나의 기본적 비대칭성에 대한 비판가들은, Benatar (2006)2장에서, 그것을 지지하는 직접적인 논변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6장에서의) 인구에 대한 도덕 이론의 문제로부터 간접적으로도 뒷받침이 나온다는 점을 주목하지 않았다. 그 장에서 나는, 존재하게 되는 것이 항상 심각한 해악이라는 나의 논변이, 비동일성 문제를 풀어서, 혐오스러운 결론을 피하고 단순한 더하기 문제를 피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Benatar 2006, pp. 168-178).

만일 두 가설들이 있고 한 가설만이 문제를 풀고 다른 가설은 그 문제를 야기한다면, 그것을 푸는 가설이 확실히 강점을 가진 것이다. 그것은 그 가설을 선호할 이유가 된다. 대조적으로, 어떤 가설이 사람들을 속상하게 한다(upset)는 것은 이를 거부할 이유가 전혀 되지 못한다. 태양중심설 가설은, 인간의 허세(human pretensions) 깨뜨림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속상하게 만들었다. 나는 왜 다른 인간의 허세를 깨뜨리는 도덕적 가설-인간 조건의 대단한 중대성에 관한 허세-, 단지 그러한 허세를 부리는 이들을 속상하게 한다는 이유로 내던져져야 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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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인간 삶의 질은 어떠한가? What is the Quality of Human Life?

거의 대부분의 비판가들은 비대칭성 논변에만 비판을 집중한다. DeGrazia 교수는 삶의 질 논변을 다룬다. 그는 사람들이 그들의 삶의 질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are prone to) 나의 논변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나의 염세주의적 결론에 그다지 많은 뒷받침을 해주지 못한다고 한다. (DeGrazia 2010, p. 325) 삶의 질을 평가하는 세 설명 어느 것을 택하더라도, 삶의 질은 매우 나쁘다는 나의 논변에 그는 도전한다.

첫 번째로 코락주의적 견해를 살펴보자. 쾌락주의적 견해는 긍정적 또는 부정적 정신 상태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정도만큼 삶이 더 낫거나 더 나쁘다고 한다. 나는 다양한 심리적 경향에 근거하여, 우리는 부정적인 정시 상태를 경험하는 정도를 간과하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가장 흔한 것 중 (가장 나쁜 것은 아닐지라도), 나는 배고픔, 갈증, 똥누고 싶음, 오줌누고 싶음(bowel and bladder distension) (이 기관들이 가득 참에 따라), 피곤함, 스트레스, 온도와 관련된 불편thermal discomfort가 있다. (Benatar 2006, p.71) DeGrazia 교수는 그가 이러한 상태를 얼마나 자주 겪는지 잘 모르겠다고 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는 그가 물리적으로 어떻게 느끼는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DeGrazia 2010, p.325)

그가 이 진술을 하였을 때, 그는 바로 내가 언급한 그 계산상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예를 들어, 그가 배고프거나 목이 마를 때 그러한 정신 상태에는 무언가 불쾌한 것이 있음에 틀림 없다는 점을 알아야만 한다. 그가 그것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한, 그가 그것들의 총합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도 참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내가 사람들이 그러한 부정적 정신 상태에 얼마나 만연한지에 관하여 신뢰할 만한 판단을 내릴 사람들의 능력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그러한 과소평가인 것이다.

142 실제로, DeGrazia 교수는, 그가 빈번하게 체크했다면, 그가 ᅟᅩᆼ상 괜찮다고 느끼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지도 모르겠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문제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쾌락주의가 날것 그대로의 감각에 초점을 맞출필요가 있다는 점을 부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DeGrazia 2010, p. 325) 대신에 그는 쾌락주의는 복지를 전반적 삶의 만족overall life satisfaction으로 다룬다고 제안한다.(DeGrazia 2010, p. 326)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의 삶에 대체로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이 판본의 쾌락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은”, 나의 것보다 훨씬 더 낙관주인 인간 삶의 평가를 뒷받침한다고 결론짓는다. (DeGrazia, 2010, p.326)

이것은 쾌락주의의 설득력 있는 판본인가? 그리고 만일 그러하다면, 그것은 사람들의 삶의 질에 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인가? (인간의 지각된 삶의 질에 관한 설명과는 구분되는 설명으로서) 나는 이 두 질문이 모두 아니오라고 생각한다. 왜 그런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것의 함의 중 일부를 살펴보자.

 

1. 어떤 사람이 그의 전반적인 삶의 만족을 빈약하다고 판단한다. 그로부터 시간이 흐른 뒤에, 그는 그의 이전의 평가를 잊어먹거나 그것이 얼마나 나빴는지를 과소평과하고는, 그 이전의 시절의 그의 전반적인 삶의 만족이 더 나앗던 것으로 판단한다. 만일 전반적 삶의 만족에 대한 주관적인 평가가 무오류적이라면, (이것은 데그라지아 교수의 설명에서는 무오류적으로 드러나는데) 우리는, 특정한 기간 동안의 삶의 질이, 그 기간 동안에 무언가가 벌어진 것 때문이 아니라, 그 기간이 끝나고 난 뒤에 개선된다는 기이한 함의를 마주하게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삶의 만족에 관한 주관적 평가가 틀릴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예를 들어 사람들이 잊어먹기 때문에 틀릴 수 있다고 인정한다면, 우리는 삶의 만족에 대한 판단이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 즉 그러한 판단들이 나쁜 감각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오류에 의존하기 때문에 틀릴 수 있다는 사유에 길을 열게 된다.

아마도 이에 대응하여, 전반적 삶의 만족에 대한 판단은, 삶의 부분들의 만족에 관한 판단이 아니라고 주장될지도 모르겠다. 이 주장의 문제는, 그러나, 데그라지아 교수는 그들의 삶에 걸쳐 오직 부분적으로만 내려진 그러한 판단들에 호소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삶이 아직도 많이 남았는데 어찌하여 그들의 전체 삶의 만족에 관하여 판단을 내릴 수 있단 말인가? 많은 사람들의 삶의 가장 나쁜 부분은 흔히 그 끝에 있다. 그리고 그들이 그들의 삶 전체에 관하여 만족하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죽음에 가까워지기 전까지는 그 판단을 가장 시험하는 테스트를 직면하지 않은 것일 터이다.

2. 다음으로 두 삶을 비교해보자. 한 삶은 다른 삶보다 많은 더 부정적인 감각을 갖고 있다. 더 많은 고통, 좌절, 실망 등등을 담고 있다. 만일 이 각 삶을 사는 사람들이 동일한 전반적인 삶의 만족을 갖는다면, 우리는, 만일 데그라지아의 쾌락주의의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한 삶이 다른 삶보다 낫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설사 그 다른 삶이 더 많은 그리고 더 심한 부정적인 정신 상태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말이다. 이것은 믿기 힘들다.

3. 어떤 사람의 삶이 잘 진행되지 않는다. 그것은 많은 부정적인 감각을 갖고 있고 또한 그 사람은 이 점을 자주 알고 있다. 우리가 이 사람의 전반적 삶의 만족을 개선시킬 수 있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 번째는 불만족의 원천을 제거하는 것, 즉 부정적인 감각을 제거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143) 그 사람이 그의 전반적인 삶의 만족을 계산함에 있어 부정적인 감각에 주의를 덜 기울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자기기만을 고양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데그라지아 교수가 선호하는 쾌락주의 판본에 의하면, 이 행위 지침 중 우리가 어느 것을 채택하더라도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어떤 행위를 우리가 선택하는가는 정말로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보인다. 비록 자신의 전반적 삶의 만족을 계산함에 있어 부정적 감각에 주의를 덜 기울이는 것이 그 사람의 삶을 더 잘 진행하도록 만들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부정적인 감각이 없어졌고 그 이유로 삶의 만족이 더 커졌을 경우만큼 좋아졌다고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데그라지아 교수는 또한 우리의 삶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덜 나쁘다고 한다. 욕구 충족 이론의 규준에 의해서 판단했을 때 말이다. (by the standards of desire fulfillment theories) 첫째로, 그는 우리 삶의 극히 적은 부분이 만족된 욕구에 의해 특징지어지며, 많은 부분이 불만족된 욕구로 특징지워진다는 나의 주장에 의견을 달리한다. (Benatar 2006, p.74) 그러면서 내가 아무런 설득력 있는 논변을 제시하지 않는다고 제시한다.

나는 내 논변을 여기서 반복하지는 않겠지만 개요는 짧게 제공하겠다.

욕구는 만족되거나 만족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우리가 전형적으로, 우리가 얻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기 때문에, 더 많은 욕구가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수십억명의 사람들이 더 젊어지고, 더 똑똑해지고, 더 잘생겨지고, 더 섹스를 자주 하기를 바라고 (그리고 더 잘생긴 사람들과 섹스를 더 많이 하기를 바란다.) 더 나은 직장을 갖기를, 더 성공적이 되기를, 더 부유해지기를, 더 많은 여가 시간을 갖기를, 병이 덜 걸리기를, 그리고 더 오래 살기를 원한다. 우리의 욕구가 만족되는 경우에도, 그것들이 즉각 만족되는 경우는 드물고 만족되기 위해여 매우 긴 시간을 소요한다. 그 욕구는 그리하여, 그 욕구가 발생되었을 때와 결국 만족되었을 때 사이에 긴 기간 동안 만족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게 된다. 그것들이 마침내 만족되었을 때에도, 그 만족은 지속되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후자가 더 흔하다. 욕구의 만족이 지속되는 경우라도, 새로운 욕구가 출현하는 것이 전형적이다. 그리하여 일반적인 패턴은, 욕구하기의 끊임없는 상태가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의 만족에 의해 잠시 그치는 모양새를 취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족된 상태에서보다 만족되지 않은 상태로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생각할 매우 좋은 이유가 있다.

더군다나, 우리가 우리의 욕구를 가능한 것의 영역에 한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욱 더 만족되지 않은 많은 욕구를 갖게 된다. 예를 들어 1000년을 살고자 하는 어떠한 욕구도 패퇴될 것이고 그래서 사람들은 때때로 그들의 욕구를 재단하여 그저 늙을 때까지 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한 욕구는 그들의 인간의 수명의 한계에 상대적으로 이해하여 만들어낸 욕구다. 왜 이것이 낙관주의 지지자들에게 좋은 뉴스가 아닌지는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 강제수용소의 수용자들이 그들의 욕구를 감축한다. 정기적으로 주어지는 식사, 따뜻한 옷, 편안한 침대-그 여건에서는 좌절되게 되는 욕구-를 욕구를 제한하는 것이다. 그들은 대신에 그저 물이 많이 들어간 수프, 다 헤지지는 않은 신발 한컬레, 이가 들끓지 않는 담요 정도만을 욕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수용자들의 삶이 만일 그들의 이렇게 겸손한 욕구가 충족되었을 경우 잘 진행된다고는 거의 주장할 수 없다. (설사 그것들이 다른 수용자에 상대적으로는 잘 진행된다고 하여도) 만일 우리가 비교나 적응과 같은 심리적 속성들이 수용자들의 욕구의 인위적 제한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수용자들의 복지를 그의 제한된 욕구가 만족되는 정도에 의거하여 판단하는 것은 분별 없는 판단을 내리는 셈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여하한 욕구 충족 이론, 즉 제약되지 않은 욕구 충족을 고려하는 욕구 충족이론도, 우리의 삶을 그것이 우리의 제한된 욕구에 의거해서만 평가되는 때보다 더 나쁘다고 평가해야 할 수밖에 없다. 제한된 욕구에만 한정하는 그러한 욕구 충족 이론은 (아마도 이 이유로) 정말로 삶의 질에 대한 덜 설득력 있는 이론이 되어버린다.

나의 비판가들은 단순히 그것들이 강력하지 않다고 우기기보다는 이러한 논변에 직접 대적해야 한다.

DeGrazia 교수는 또한 욕구는 하나씩 총합계될 필요가 없다. 하나가 각각 동등한 것으로”(DeGrazia 2010, p. 326)라고 한다. 대신에 그는 어떤 욕구는 다른 욕구보다 더 중요한 보푠적인 구조”(global structure)을 추천한다. 그리하여 그는 설사 어떤 사람이 충족되지 않은 덜한 욕구들의 집합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몇가지 보편적 욕구들, 즉 충족되고 욕구의 위계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그러한 욕구들을 가질 수 있다.”(DeGrazia 2010, p. 326)고 한다.

하먼 교수는 유사한 움직임을 보인다. 비록 그녀는 욕구에 의거해서 특정해서 그러기보다는 더 일반적으로 그런 움직임을 보이지만 말이다. 그녀는 밀주의 관념, 더 높은 질의 쾌락이라는 관념에 호소하면서, 만일 그녀가 보통의 삶이 우리가 주의를 통상 기울이지 않는 많은 사소한 괴로움(distress)를 담고 있다 할지라도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의 일정한 긍정적인 특성들이 이들 부정적 특성들이 나쁜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Harman 2009, p. 783)

이러한 움직임은 삶의 질에 대한 낙관주의 견해를 구출하기에는 불충분하다. 첫째, 데그라치아 교수는 여기서, 그가 쾌락주의 견해를 논의하면서 그랬듯이, 내가 사람들이 겪는다고 한 사소한 해악의 사례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내가 제시한 사례들 중 극히 일부일 뿐이다. 또한 충족되지 않은 많은 중요한 욕구들이 있다.

데그라지아는 다음과 같은 욕구들은 흔히 충족된다고 사례를 제시한다. 아이를 기르는 것. 적정한 직업경력을 갖는 것. 나이든 시점까지 건강하게 지내는 것.(DeGrazia 2010, p. 326) 이 목록에는 좋은 것만 골라내기와 오류가 모두 담겨 있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아이 기르기를 원하고 그것을 충족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가족 영역에서도,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원한다. 그들은 행복한 가족 생활을 원한다. 잘 조율되고, 좋은 행동을 보이고, 잘 생기고, 건강하고, 성공적인 아이와, 번영하고, 보살핌을 많이 주며, 사랑을 주고, 성적으로 매력적이고 충실한 배우자를 원한다. (145) 이러한 욕구들은 수백만의 사람들에 있어서 좌절된다. 이러한 욕구들이 처음에는 충족되는 경우에도, 나중에는 좌절되어버리는 경우가 흔하다. 자신의 아이가 병들거나, 범죄와 비행을 저지르거나(a delinquent), 어떤 중요한 방식으로 실패로 드러나게 된다. 자신의 배우자와 정서적으로 멀어지게 되거나, 더 이상 매력적으로 느끼지 않게 되거나 반대로 매력적으로 생각되지 않게 된다. 또는 그 배우자가 냉담하거나 잔인해지거나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수십억명의 사람들은 또한 적정한 경력을 결여하고 있다. 그리고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나이든 시점까지 건강한 상태로 남아 있는다. 정말로, 늙은 아니 그 자체는, 조크가 말하듯이, 모두가 도달하기를 원하는 곳이지만 어느 누구도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젊은 상태로 머무르려는 욕구는 나이듦이나 죽음에 의해 좌절된다. 나쁜 건강이 거의 모든 사람들을 덮친다. 젊을 때는 아니더라도 나이가 좀 들면 다 그런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죽는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죽기를 바라지 않는데도 말이다. 사람들이 정말로 살려는 의지를 잃을 때는 전형적으로, 다른 중요한 욕구들, 이를테면 좋은 건강이나 생기에 대한 욕구가 완전히 그리고 전적으로 좌절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때에는 이전에는 두려워했던 죽음이 바라는 풀려남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패착이 운명지워진 매우 중요한 욕구들이 있음을 보게 된다. 설사 그것들이 일시적으로 만족되더라도, 장기적으로 그것들은 좌절된다. 그리하여, 욕구들의 위계를 지적하는 것은 나의 논변을 훼손하는 일을 전혀 하지 못한다.

또한 왜 하먼 교수가 높은 질의 고통들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지도 이해하기 어렵다. 첫째,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사람들에게 일어나느 매우 중대한 나쁜 일들의 사례가 아주 많다. 둘째로, 우리 삶의 가장 최악의 부정적인 특성들은 가장 긍정적인 특성들보다 훨씬 더 무거울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예를 들어 우리가 견뎌낼 수 있는 최악의 고통을 한 시간 받는 대신 사람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지고한 즐거움들을 한 시간 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후자를 포기해서 전자를 피할 것이다. 이것은 최악의 고통을 피하는 것이 최선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대한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왜 고통의 질에만 초점을 맞춰야 하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고통의 양과 지속성 역시 유관하다. 여기서 우리는 대부분의 강렬한 쾌락들 (성적인 쾌락이나 미각의 쾌락)은 상재거으로 짧은 생을 살다 가지만, 반면에 최악의 고통들은 훨씬 더 길게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을 주목하게 된다. 만성적인 고통(chronic pain)이라는 것은 있지만 만성적인 쾌락이라는 것은 없다.

데그라지아 교수는, 그의 욕구 만족 설명이, 나의 삶을 가치롭게 느끼는 것과 그것들을 나에게 가치 있게 만드려는 노력과 잘 부합한다고 말한다. 그는 사람들이 타산적인 자기 평가에서 왜곡을 겪는 것을 허용할 수는 있지만” “사람들이 그들의 복지에 관하여 틀릴 수 있는 정도에는 한계가 있다”(DeGrazia 2010, p.326)고 한다. 그는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들의 복지에 관하여 크게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나의 견해는 과도하게 후견주의적이며”, 이 후견주의는 오직 강력한 오류 이론에 의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DeGrazia 2010, p. 327)

나는 내가 그러한 오류 이론을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람들의 낙관주의 경향성과 그들 자신의 삶의 질을 평가함에 있어 저지르는 많은 오류에 관한 애매하지 않고 논박되지 않은 경험적 데이타를 지적했다. 그리고 (146) 나는 이것이 어떻게 하여 자신의 삶의 질에 대한 체계적이고 중대한 과대평가에 이르는지를 보여주었다. 더군다나, 나는 이런 종류의 자기기만은 진화적 관점에서는 놀랍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살을 방지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고(militates against suicide) 그리하여 재생산에 좋게 작용하기 때문이다.(Benatar 2006, p. 69) 우리는 그리하여 자기 기만이 심층을 흐른다고 생각할 이유가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이유가 사람들이 오류 이론을 이해하는 데 저항하게 만든다고 덧붙일 수도 있겠다.

사람들은 많은 사안들에게 관하여 깊은 오류를 저질러왔다. 인간의 비합리성에 관한 증거들은 차고 넘친다.(Ariely 2009를 예를 들어 보라.) 그렇다면 왜 우리가 그러한 오류와 비합리성이 삶의 질에 대한 자기 평가의 영역에서도 발생한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않아야 하는가? (a) 내 삶에 대한 나의 평가가 삶을 나에게 가치 있게 만든다는 것은 참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b) 내가 탁월한 삶의 질을 갖고 있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이 나의 삶의 질을 탁월한 것으로 만든다라는 것과 상당히 다른 문제다. 삶을 가치 있게 여기는 것과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상이한 일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 자신의 평가가 그 사람의 삶의 질에 얼마간의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은 동의하며, 그것들이 그 삶을 얼마나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드는가에 영향을 준다는 점에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점이 근본적인 오류를 배제해주지는 않는다.

다음으로 DeGrazia 교수의 나의 주장, 즉 우리의 삶의 질이 객관적 목록 이론에 의거하여 매우 나쁘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을 살펴보자. 이 객관적 목록 이론은 우리의 삶의 질은, 그것들이 객관적 선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정도만큼 결정된다고 한다. (그리고 객관적인 나쁨에 의해 특징지워지지 않는 정도만큼). 나는 객관적 좋음의 목록이론은 전형적으로 인간 종의 형태 하에서sub specie humaitatis 구성된다고 논했다. , 그것들은 인간적으로 가능한 것에 시선을 두고 구성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삶이 다른 사람의 삶에 비해 얼마나 잘 진행되는가만을 이야기해줄 뿐이다. 그것은 인간 삶이 얼마나 좋은가는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이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관점을 더 넓혀 받아들여 그 영원한 상에 있어서sub specie aeternitatis 우리의 삶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데그라지아 교수는, 이것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우리가 채택하는 관점은 인간이 어떤 종류의 존재인가를 고려해야만 한다”(DeGrazia 2010, p. 238)라고 이야기한다. 한 가지 방식으로 이해되었을 때, 나는 이 주장에 대하여 아무런 반대를 갖지 않는다. 예를 들어, 수생의 환경에서 거주하는 것은 물고기에게는 좋지만 인간에게는 나쁘다. 왜냐하면 물고기와 인간이 어ᄄᅠᆫ 종류의 존재인가에 따라 그것이 달리 좋기 때문이다. 물고기는 물 속에 사는 존재이고 인간은 땅 위에 사는 존재이다.(terrestrial creatures) 그러나 이것은 내가 객관적 좋음의 목록이 영원한 상에 있어서 구성되어야 한다고 추천했을 때 부인하고자 했던 바가 아니다.

우리가 인간을 위해 객관적 좋음의 목록을 올려 놓게 되는 많은 것들이 있다. 만일 우리의 시야가, 접근 가능한 좋음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즉 우리의 손이 닿는 범위 밖에 있지만 인간에게 좋았을 것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몇백년을 젊음의 온전한 생기를 갖고서 사는 것, 아무런 질병도 겪지 않는 것은 확실히 좋을 것이다. 훨씬 더 지능이 높고 지혜롭고 훨씬 도덕적으로 나은 것 역시도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획득불가능한 좋음은 전형적으로는, 객관적 좋음의 목록에 포함되지 않는다. 만일 포함되었더라면, 우리의 삶은 현재 그러한 것보다 훨씬 더 나쁜 것으로 판단되어야 할 터이다.

147 이에 대응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좋음은 인간에게는 획득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좋음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어떠한 삶도 인간의 삶이 아닐 것이라고. 그리하여 우리는 인간의 삶의 질을 평가하려면, 우리는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규준을 활용해야 한다고. 그러나 이 대응은 인간 삶을 페티쉬화하는 것이다. 왜 그런지를 보기 위해서는, 상상의 종을 살펴보자. 우리는 그들을 호모 불운(Homo infortunatus)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종의 구성원들은 대부분의 인간보다 나쁜 삶의 질을 갖고 있다. 그들의 고통과 괴로움은 가득하지만, 그들의 삶이 아예 아무 쾌락도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종의 구성원들이 나쁜 질의 삶을 산다는 주장에 대응하여, 그들 가운데 낙관주의자들은, 만일 그들의 삶이 중대하게 더 나아진다면, 그것은 단순히 호모 불운의 삶이 아니라고 쏘아붙인다.(retort) 그 응수는 인상적이지 못하다. (a) 한 종의 구성원의 삶이 얼마나 좋은가를 묻는 것과 (b) 훨씬 더 나은 삶이 그 종의 구성원이 되는 것과 양립가능한가를 묻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아마도 호모 불운의 훨씬 더 나은 삶은 더 이상 그 종의 삶이 아닐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호모 불운의 삶이 그만큼 더 나쁘지 않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보다 훨씬 더 나은 삶은 더 이상 인간 삶이 아닐지는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삶이 더 나은 삶보다 그리 많이 나쁘지 않다는 결론이 따라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의 논변의 마지막 부분에서 데그라지아는 이 세상에서 분명한 고통의 수많은 형태의 상기에 대해서 답변한다. 그는 내가 제시한 사실은 받아들이지만, 그로부터 끌어낸 결론은 부인한다. 나는 일부 사람들은 그들의 자녀가 더 불운한 사람들에 속할 것이라는 점을 확신할 수 있는 반면에, 어떤 커플도 그들의 자녀들이 수십억명의 사람들 위로 떨어지는 가장 끔찍한 것들을 겪지 않으리라고는 확신할 수 없다고 하였다.

데그라지아 교수는 이에 대해서 두 가지 답변을 한다. 첫째, 그는 소수의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좋은 삶을 갖고 있으며, 그리하여 좋은 삶을 살 확률은 나의 염세주의적 견해가 제시하는 것만큼 나쁘지는 않다고 한다. 그리고 둘째로, “아이를 갖는 것을 고려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장래의 아이가 좋은 삶을 살 것인지에 관하여 합당하게 확신에 찬 예측을 할 지위에 있는 경우가 흔하다고 한다.

나의 논변이, 중대한 고통이 존재하게 되는 이 어느 누구에게라도 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에, 데그라지아 교수는, 몇몇 비율의 사람들이 좋은 삶을 갖고 있다는 주장으로 대응하였다. 이제, “좋은 삶의 문구라는 것이 중대한 고통이 없는 삶을 가리키거나, 그러한 고통을 담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좋은 것으로 판단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만일 전자라면, 데그라지아 교수는 간단히 틀린 것이다. 왜냐함면 그들 삶 전반에 걸쳐서 중요한 고통을 겪지 않는 사람은 매우 적은 비율의 사람들뿐이기 때문이다. 몇몇 사람들은 이를 보지 못하는데, 이는 그들이 삶의 몇 단면들만을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삶이 꽤나 잘 진행한다고 생각한다. 그 앞에 놓여 있는 것을 보지 못한채, 어떤 고통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지를 보지 못한 채 말이다. 나이가 든 사람들은 사태가 안좋게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에게 발생할 수 있는 끔찍한 일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있으며, 이 필연적이지는 않은 해악을 모두 다 격찌 않으려면 이례적으로 운이 좋아야만 한다. 다른 해악들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이 가장 명백하다. 그러나 가족과의 사별은 오직 자기 자신의 죽음만이 때이른 것일 때에만 피할 수 있다. (또는 가족의 죽음에 의해서 상실감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다른 사람을 신경쓰지 않는 사람만이 피할 수 있다.)

아마도, 그렇다면, 데그라지아 교수는 좋은 삶이라는 용어를, 아무런 심각한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 삶에만 한정하지 않는 것 같다. 아마도 그는, 내 자신의 견해와는 반대로, 설사 그러한 고통들을 포함하고 있다 하더라도 삶은 좋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148 만일 그것이 참이라면, 그의 주장은 나의 논변에 아무런 대응이 되지 못한다. 나는 존재하게 되는 사람 누구에게라도 거대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였다. 만일 좋은 삶이라는 것이 그러한 고통을 포함하는 것이라면, 좋은 삶의 발생 정도는 나의 주장에 대한 논박을 구성하지 않는다. 나의 논변은, 중대한 고통을 담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삶을 시작하는 것에 관한 것이었으니까.

데그라지아 교수는 아마도, 좋음을 겪을 높은 확률이 있는 한, 중대한 고통을 담을 높은 확률을 갖는 삶을 시작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일 게다. 문제는, 이것은 취하기에는 무감한 입장으로 들린다는 것이다. 아이를 갖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다. 자신의 아이의 삶이 좋음을 담을 높을 확률이 있는지를 안다. 그것은 크게 고통을 겪을 것이다. 그것은 일생 동안 지속되는 질병을 겪거나 강간을 당하거나 일생 동안 후유증을 겪거나, 어려서 고아가 되거나, 폭행을 당하거나 살인을 당하거나 암에 걸리거나 에이즈에 걸리거나 서서히 자신의 근육에 대한 통제력을 잃게 되는 신경변성질병(neurodegenerative disease)에 걸리거나, 뇌졸증을 겪어 걷거나 말하지 못하거나, 그 밖에 다 열거하기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다른 재앙적인 일을 겪을 것이다. 데그라지아 교수가 제안한 것과 반대로, 그들의 아이가 이러한 말할 수 없는 부담 중 어느 하나라도 겪지 않을 것을 합당하게 확신에 차서 예측할 수 있는이는 어느 누구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 재생산하는 이들은 이 재생산 러시안 룰렛을 정당화하는 부담을 지게 된다.”(Benatar 2006, p. 92) 더 나아가, 그것은 모든 탄실이 총알을 담고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탄실이 총알을 담고 있는 형태의 러시안 룰렛이다. 나는 그런 입증부담이 충족될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

삶의 질 논변은 비대칭성 논변을 강화해주는 것이자, 재생산이 그릇되다는 것을 독립적으로 보여주는 논변이다.

150

곧바로 자살해야 하지 않나 논변에 대하여: 첫째로, 삶이 매우 나쁘다는 논변은 삶 전체에 관한 주장이다. 많은 삶에서 최악의 부분은 처음에 경험되지 않는다. 아직 삶의 나은 부분이 남아 있는 이들은 자살을 더 나쁜 측면들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때까지 늦추는 것이 이치에 닿을 수 있다. 둘째, 설사 삶의 어떤 단계가 매우 나쁘다고 생각하면서도, 죽음을 선호할 만큼 충분히 나쁘다고는 생각지 않을 수 있다. 죽음 자체가 심각한 해악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죽음을 선호할 만하게 하기 위해서는, 삶을 훨씬 더 나쁘게 되어야 할 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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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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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우맨
    2017.05.08 02:43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댓글
    <1>


    4.6. Campbell Brown 절에서,

    버나타는 처음에 제시했던 비대칭성 논변,

    "(4) 쾌락의 부재는 나쁘지 않다. 그 부재가 박탈이 되는 누군가가 존재하지 않는 한은."

    위 (4)의 함의는 <쾌락의 부재는, 그것이 누군가에게 박탈이 될 때에는 나쁘다> 라고 말하는데요.

    그러면 쪽수 번호 140 에서,

    "대신에, 이 세계들 중 어느 것이 그녀에게 더 나은가는, A 세계에서 쾌락의 부재가 나쁜 반면에 B에서의 쾌락의 부재는 나쁘지 않다는 사실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세계 A가 제미마를 위해서 더 나쁘다는 결론이 따라나온다." (원문은, Instead, which of these worlds is better for her depends on the fact that the absence of pleasure in World A is bad, whereas the absence of pleasure in World B is not bad.It follows that World A is worse for Jemima.)

    여기에서 A세계는 아예 제미마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고, B세계는 제미마가 존재하면서 쾌락은 없는 세계인데, 이럴 경우에는 A세계가 아니라, B세계가 박탈이 되는 누군가가 있는, 쾌락의 부재가 가치론적으로 나쁜 것이 되는 세계이고 따라서 A세계보다 B세계가 제미마를 위해서 더 나쁜 세계가 아닌가요?



    <2>


    (4) <쾌락의 부재는 나쁘지 않다. 그 부재가 박탈이 되는 누군가가 존재하지 않는 한은>

    위 (4)의 함의라고 하는, <쾌락의 부재는, 그것이 누군가에게 박탈이 될 때에는 나쁘다>

    즉,

    <어떤 사람이 존재하고 그 사람에게 쾌락이 부재하고 있다면 그것은 나쁘다>라는 것은,


    (i) 세계 A에서, 영달이는 존재하고, 오직 쾌락만을 경험한다.
    (ii) 세계 B에서는 영달이는 존재하지만, 쾌락과 고통 모두를 경험하지 못한다.
    (iii) 세계 C에서는 영달이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1. 세계 B는 세계 A보다 나쁘다.

    2. 세계 C는 세계 A보다 나쁘지 않다. 즉, 두 세계는 가치론적으로 평가할 때 동등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어떤 섬에서 어쩌면 태어나 살았을지도 모르는 부재하고 있는 누군가의 쾌락에 대해 조금도 안타까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쾌락의 부재'라는 사태가 단순히 그걸 향유할 사람이 애초에 존재치 않아서 벌어진 사태라고 한다면, 그것을 어떤 사람이 쾌락을 느끼고 있는 사태보다 가치론적으로 나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3. 따라서 1, 2에 의해서 세계 B는 세계 C보다 나쁘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 2017.05.08 22:51 신고
      댓글 주소 수정/삭제
      1. 말씀하신 대로 오기가 맞습니다. 수정하였습니다. 지적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2. 그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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