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orge C. Christie, "Dworkin's 'Empire'", Duke Law Journal, Vol. 1987, No. 1, 1987, pp.157-189

 

드워킨은 보여주려고 한다. 법의 관행적인 원천 (소위 법률과 이전의 판례뜰)이 명확한 답을 보여주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에서도, 법원은 하트가 상정한 재량의 상당한 정도를 행사하도록 요청도지 않는다는 것을.

드워킨은 처음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현존하는 법의 규칙이 그 사건을 포괄하지 않거나, 현존하는 법의 규칙들이 상충할 때, 배태된 원리에 의존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 사건에서 옳은 결정을 확인하기 위해 법 체계에 배태된 원리들에 의지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몇몇 원리들이 상충하는 방향으로 가리킬 수 있고 직접 충돌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원리들의 비중을 가리는 수단이 그러므로 요구된다. 드워킨도 그리고 다른 이들도 그러나 원리들의 비중이 가려진 목록을 산출하지 못했다. 이와는 약간 다른 전략을 취하면서 드워킨은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난해한 사건들에서는, 판사가 그의 판결을 정당화해줄 원리들의 정합적인 세트를 발견하는 것이그의 과업이다. 이 지도 원리들은 공정성이사회의 법 구조의 제도적 역사에비추어 요구하는 방식대로선별되어야 한다. 그 제안을 더 추구하면서, 드워킨은 그 다음으로는, 거의 모든 사건에서, 적어도 긴 법 전통을 가진 발전되고 복잡한 사회에서는, 한 원리 집합, 그리고 그것들을 정당화하는 판결이, 상이하거나 심지어 반대의 판단을 향하는 경쟁하는 원리들보다는, 사회의 기본적 법 구조에 더 잘 부합하는 것을 제공해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드워킨은 그러나 이 주장을 뒷받침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것이 명백히 참이라고 추정하였다. 그는, 그의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의존될 수 있는 규범적 일관성의 어떤 관념이 있다고 추정하게 되었다. 아가, 이 드문 사건들이 발생하고, 법적 과업의 참여자들에 의해 사건의 방향을 결정하는(dispositive) 것으로 어떤 한 원리들의 세트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드워킨은 도덕적 사실이라고 그가 부른 것에 의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도덕적 사실들은 정치 이론으로부터 어떤 방식으로 진행하여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도덕적 권리들을 낳는다. 그러므로, 난해한 사건에서는, 관행적 법 이론이 정답을 산출할 수 없는 난해한 사건에서는, 어떤 도덕적 권리가 걸려 있는가를 물음으로써 정답이 발견될 수 있다.

 

159 그의 비판가들의 반론에 대응하려고 하면서, 드워킨은 사회가 직면하는 도덕적 질문에는 거의 항상 정답이 있다고 추정한다. 그렇지 않으면, 드워킨의 이론에서는 법 질문에 대하여 거의 항상 정답이 있을 수가 없게 된다. 이 논제를 뒷받침하려고 하면서, 드워킨은 그의 지성적 관심의 범위를 넓힌다. 그는 해석에 관심을 갖게 되고, 문학 비평과 법 해석 사이의 유사성에 관심을 갖게 된다. 드워킨은 법적 결정이 정치적 결정의 한 종임을 인정하게 된다. 그것들이 필연적으로 국가 기관의 권력의 적용을 꼭 포함하기 때문만은 아니고, 또한 그것들이 기본적 정치 이론에 의해 동기가 지워지고 또 동기지워져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몇몇 사람들은 법과 정치가 전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드워킨은 그 둘을 등치시키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 정치는 궁극적으로 도덕에 전제를 두고 있으며,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법 체계가, 모든 법적 질문에 정답이 진정으로 있다고 주장하는 완결성을 획득하는 것은 오로지 도덕에 의존함으로써만이다. <법의 제국>에서 드워킨은 그의 입장의 정합적인 재진술을 제시한다. 그렇게 하면서 그는 덜 논란의 여지가 있게, 그리고 불운하게도 덜 독창적이고 덜 흥미로운 것으로 만드는 몇 가지 중요한 뉘앙스를 가미한다. 비록 잘 쓰여지긴 했지만, <법의 제국>은 길고 복잡한 책이다. 따라서 나는 드워킨의 논변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펼쳐보이겠다.

 

160 드워킨은 사람들이 무엇이 관련된 법이냐에 관하여 의견이 일치할 수 없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분쟁의 두 상이한 종류를 구분하는 것으로 <법의 제국>을 시작한다. 첫 번째 종류의 분쟁에서 사람들은 관련된 여하한 법률이나 선례가 있느냐에 관하여 의견이 불일치할 수 있다. 드워킨은 이것을 법에 관한 경험적 의견불일치라고 한다. 아마도 그러한 분쟁은 법령집이나 법 보고서의 보다 철저한 검토에 의하여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드워킨이 관심을 가지는 종류의 분쟁이 아니다. 그렇기 보다는 그는 그가 이론적 의견불일치라고 부르는 것에 관심이 있다. 이론적 의견불일치는 사람들이 법의 근거에 관하여 의견이 불일치할 때, 어떤 다른 종류의 명제가 참일 때 법의 특정한 명제를 참으로 만드는지에 관하여 의견이 불일치할 때생긴다. , “그들이 법령집이나 판례의 결정이 관련된 법의 근거를 소진시키는지에 관하여 의견이 불일치할 때생기는 것이다. 법에 관한 의견 불일치의 본성을 검토하면서, 드워킨은 법 과정의 참여자의 내적 관점을 채택한다. 그리고 특히 판사의 관점을 채택한다. 사회학자나 역사가의 외적 관점이 아니라 말이다. 드워킨은 그가 실증주의의 중심 테제라고 기술하는 것을 공격하고자 한다. 이 테제는 법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진정한 의견 불일치는 법 제도의 역사에 관한 경험적 의견 불일치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 역사에 대한 철저한 검토가 의견불일치를 해결할 수 없다면, 무엇이 법인가에 대한 의견불일치는 법이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위장된 의견불일치이다.

실증주의에 반대하는 그의 논변을 발전시키면서 드워킨은 그가 의미론적 독침이라고 부르는 바를 공격한다. 이것은 그가 다음과 같은 사고방식(mind-set)에 대하여 폄하하는 용어이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우리의 주장이 언제 건전한지를 판단할 동일한 기준을 모두 받아들이고 따르는 경우 오직 그 경우에만 서로 논의를 이치에 닿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설사, 철학자들이 그러기를 원하는 바와 같이, 이 기준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진술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드워킨은 반대로, “실천과 전통을 공유하는 특정한 공동체의 구성원, “구체적인 여건에서 그 전통과 실천의 요구에 관하여 진정한 의견불일치를 가질 수 있다고 한다. “설사 이러한 사람들이 그들의 해석을 형성하고 틀지움에 있어 상이한 기준을 사용하더라도 말이다. 그들의 의견 불일치는 진정하다. 왜냐하면 경쟁하는 해석들이 해석의 동일한 대상 또는 사건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161 “예절이라는 사회적 관행을 가능한 패러다임으로 들어, 드워킨은 그 관행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예절의 규칙에 대하여 해석적태도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한다. 해석적 태도는 두 구성부분을 갖고 있다. 첫째, 그것은 예절의 관행이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를 갖고 있으며, 어떤 이해관심이나 목적에 봉사하거나 어떤 원리를 관철하는 데 기여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것들은 어떤 목적이 되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고 이 목적은 관행을 구성하는 규칙들을 그저 기술하는 것과는 독립적으로 진술될 수 있다.” 둘째로, 그 해석적 태도는 예절의 요구는 (...) 그것들이 항상 그렇게 여겨진 바가 필연적으로 되거나 배타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대신에 그것은 그 목적에 민감하다. 그래서 엄격한 규칙은 그 목적에 의해 이해되거나 적용되거나 확장되거나 수정되거나 조건이 붙거나 제한되어야 한다.” 일단 해석적 태도가 성립하면, 사회적 관행이나 제도는 더 이상 기계적인 것이 되기를 멈춘다. “사람들은 이제 그 제도에 의미(meaning)를 부과하려고 한다. 그것을 최선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리고 나서 그 최선의 의미에 비추어 재구조화하려고 한다.” 이것이 드워킨 논의의 해심이다. 이것은 그가 그의 책의 나머지 부분 전체에 걸쳐서 계속해서 활용하는 접근이다.

물론 드워킨의 논변은, 우리가 만일 법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해석적 태도를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 우리는 법이 목적(a point)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며, 우리는 개별적인 법 조항들을, 우리가 그 목적이 무엇인가라고 생각하는 바에 비추어 이해해야만 한다. 드워킨의 논변을 위해서는, 그러나, 우리가 채택하는 해석적 태도가 대화적 해석의 형태가 아니라는 것이 본질적이다. “대화적 해석화자가 가지고 있다고 상정하는 동기와 목적과 관심에 비추어 의미를 할당하고, 그가 말한 바에 있어서 그의 의도에 관한 진술로서의 결론을 보고하는 것이다.” 그렇기 보다는, 예절이나 법과 같은 사회적 관행의 해석은 예술 해석과 같은 것이다. 그것들은 간단히 말해서 창조적 해석의 유형이다.

 

162 드워킨이 사회적 관행의 창조적 해석과 예술 해석 사이의 유사성에 그토록 많은 중요성을 부과하기 때문에, 그는 예술적 해석이 필연적으로 어떤 저자의 의도를 발견하는 문제가 아니며, 해석자 자신의 가치와 독립적인 사실적인 과정이 아니라는그의 주장을 방어해야만 한다. 드워킨은 그의 방어를, “예술가의 의도를 발견하는 일과 그가 한 일에서 가치를 발견하는 일 사이에예리한 여하한 구분을 긋는 것도 거부함으로써 시작한다. 드워킨은 어떤 통찰은 예술가의 의도에 속한다. (....) 그것이 그의 예술적 목적에 그가 인정하고 지지할 방식으로 부합하고 조명해줄 때. 설사 그가 이미 그러지 않았다 할지라도 말이다. 이 기술은, 물론,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저자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더 중요하게, 드워킨은 이 접근이 적어도 분명한 방식으로 예술가의 의도에 대한 그의 재구성에 예술적 가치에 대한 해석자의 이해를 들고 들어오는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저자가 무엇을 받아들였을가에 대한 해석자의 판단은, 저자가 무엇을 받아들였을가에 대한 그의 감각에 의해 인도되기 때문이다. , 어떤 독법이 그 작품을 더 낫게 만들고 어떤 독법이 그 작품을 더 나쁘게 만드는가에 대한 그의 감각에 의해 인도되기 때문이다.“ 사회적 실천에 대한 해석에 대한 이 접근을 적용하면서, 드워킨은 창조적 해석이 어떤 실제의 역사적 의도를 발견하려는 걸 목적으로 한다는 논제를 거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도라는 개념은 (...) 모든 해석적 주장에 형식적 구조를 제공한다.“고 한다.

 

163 “해석은, 그 본성상 목적의 보고다. 그것은 무엇이 해석되는가를 이해하는 한 방법을 제안한다. 즉 사회적 실천이나 전통 그리고 텍스트나 그림과 같은 무엇이 해석되는가를 이해하는 한 방법을 제시한다. 마치 이것들이 일정한 주제나 비전이나 목적의 한 세트를 추구하려는 결정의 산물인 것처럼. 다른 목적이 아니라 한 목적point’을 추구하려는 결정의 산물인 것처럼. ”

 

이것은 해석되고 있는 것은 사회적 실천일 때에도 참이다. , “그 역사적 정신이 헤아려질 수 있는 역사적 저자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에도참이다.

사회적 실천의 창조적 해석의 패러다임으로서의 예술적 해석에 대한 그의 논의에서, 드워킨은, 그가 그의 관심을 해석의 질문으로 돌렸을 때부터 그를 공격해왔던 비판가들에게 얼마간의 양보를 한다. 그는, Stanley Fish의 공격, 즉 해석자는 그들이 전적으로 탈출할 수 없는 전통 내에서 사고한다는 공격에 동의한다. 드워킨은 전적으로라는 조건을 집어넣는다. 왜냐하면 그는 한 해석적 견해가 진정으로 다른 의견보다 나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다라는 결론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II.

드워킨이 방법론에 대한 이 예비적 논의로부터 진행해나아가기를 바라는 관념은, 예절이나 법과 같은 사회적 실천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 해석자는, 실제의 참여자가 의미하는 바를 보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천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결정하고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드워킨은 참여자들이 그 실천(또는 법)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관하여 항상 의견이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물론 사전을 공유해야 하며, 비트겐슈타인이 삶의 형식이라고 부른 것을 충분히 구체적일 정도로 공유해야 한다. 그래서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말하고 하는 바의 의미와 목적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 그러나 이해관심과 확신의 이 유사성은 오직 한 지점에서 멈출 필요가 있다. 그것은 진정한 의견불일치를 허용할 정도로는 조밀해야 하지만, 그 의견 불일치가 터져나오지 못할 정도로 조밀해서는 안 된다.

164

드워킨이 보는 바에 따르면, 해석적 과업은 세 단계를 갖고 있다. 첫째, “전해석적 단계가 있다. “이 단계에서, 실천의 잠정적 내용을 제공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규칙과 규준이 파악된다.” 둘째, “전해석적 단계에서 파악된 실천의 주된 요소를 위한 어떤 일반적인 정당화 위에서 해석가가 문제를 해결하게 되는 해석적 단계가 있어야만 한다.” 이 과정은 왜 그 일반적 형태의 실천이 추구할 가치가 있는가에 관한 논변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만일 그것이 추구할 가치가 있다면 말이다. 셋째로, “후해석적 단계 또는 수정 단계가 있어야만 한다.” 이 단계에서 해석가는 그 실천이 진정으로요구하는 바에 대한 그의 감각을 조정한다. 그리하여 그가 해석적 단계에서 받아들인 정당화에 더 잘 기여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과업에 참여하면서, 우리의 가설적인 해석가는 몇 가지 유형의 확신과 가정을 필요로 한다. 처음에, “그는 무엇이 실천의 일부로 여겨질 것인가에 관한 가정과 확신들을 필요로 한다. 전해석적 단계에서 그의 해석의 로 데이타를 정의하기 위하여.” 다음으로 그는 그가 해석적 단계에서 제안하는 정당화가 어느 정도나 실천의 상설적인 특성에 부합해야만 하는가에 관한 확신을 필요로 한다. 어떤 새로운 것의 발명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해석으로 여겨지기 위해서.” 이 두 번째 유형의 확신이 해석가의 무엇이 부합하는가에 대한 감각으로 집단적으로 여겨질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해석가는 어떤 종류의 정당화가 그 실천을 최선으로 진정으로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더 실질적인 확신들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마지막 확신은 해석가의 궁극적인 가치, 그의 정의에 대한 감각으로부터 따라나오게 된다.

그의 해석 기획에 회의적인 사람들에게, 드워킨은 그의 과업에 대한 회의주의 유형 가운데 유일하게 지성적으로 정합적인 회의주의는 내적 회의주의라고 한다. 그는 이것을 외적 회의주의와 대비한다. 드워킨에게 외적 회의주의는 형이상학적 이론이지, 해석적이거나 도덕적 입장이 아니. 외적 회의주의는 놀이가 목적을 갖는다거나, 사회적 실천이 도덕적 가치를 보유하거나 보유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류라고 말하지 않는다. 외적 회의주의자는 그러한 진술들이 물리학처럼 증명되거나 테스트 될 수 있는 기술이 아니라고 할 뿐이다. 외적 비판가들은 놀이에 관한 해석에 관해서 그 자신의 의견을 갖는다. 또는 사회적 실천의 가치에 관한 그 자신의 의견을 갖는다. 그러나 외적 회의주의자는, 이 모든 의견들은 실재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투사된 것이라고 한다. 외적 회의주의자는 상이한 문화들은 도덕적 쟁점들을 상이하게 바라본다는 사실에 기대며, 또한 문화 내에서도 자주 의견불일치가 있다는 사실에 기댄다. 그러나 드워킨에, 그러한 증거는 결코, 도덕적, 그리하여 법적 질문에 정답이 없다는 점을 증명해주지 않는다.

내적 회의주의자, 특히 드워킨이 보편적 내적 회의주의자라고 부르는 이들은 사회적 실천에 대한 어떠한 해석도 옳거나 그를 수 없다고 한다. 즉 도덕적 쟁점에 관한 판단은, 아이스크림의 맛에 관한 판단처럼 개인적이라는 것이다. 보편적 회의주의는 정합적인 지성적 입장이지만, 드워킨은 많은 사람들이 일관되게 그것을 채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적 회의주의자의 입장을 철학적 논쟁에서 취하고는 돌아서서는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노예제가 그르다고 생각한다고 할 수 없다. 노예제가 그르다고 믿는 사람은 어느 누구나, 그 사람이 내적 회의주의자건 외적 회의주의자건 상관 없이, 노예제의 질문에 대한 정답이 있다는 점에, 즉 그것이 그르다는 점에 헌신하고 있다고 한다.

동시에, 드워킨은, 그가 관행주의의 어떠한 형태도 거부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하기를 원한다. 특히 그는 일정한 권위들-법률과 선례들- 및 일정한 형태의 논변들이 결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법적 질문에 대한 정답에 합의할 수 있다는 관념을 거부한다.

드워킨은 법의 성격에 관한 추가적인 논변을 조직하는 어떤 추상적인 설명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그리고 나서 이어 말한다.

우리의 법에 대한 논의는 대체로 내가 생각하기에, 다음과 같은 것을 전제한다. , 법 실천의 가장 추상적이고 근본적인 목적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정부의 권력을 인도하고 제한하는 것이다. 법은, 그 힘이 전망하는 목적에 얼마나 유용하건 상관 없이 그리고 그 목적들이 얼마나 이롭고 고귀하건 상관 없이. 집단적 힘이 언제 정당화되는지에 관한 과거의 정치적 결정으로부터 따라나오는 개인의 권리와 책임에 의해 허가되거나 명해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힘이 사용되지 않거나 철회될 것을 주장한다. (Id. at 93)

통합성으로서의 법은 법실용주의의 결론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법실용주의는 판사의 재판상의 결정이, 원고의 여하한 상정된 권리에 의하여, 과거에 내려진 다른 정치적 결정과의 일관성을 갖게끔 요구함으로써 공동체가 여하한 특별한 이득을 확보한다는 점을 부인한다. 그렇기보다는, 관행주의와 마찬가지로, 통합성으로서의 법은 법과 법적 권리를 진심으로wholeheartedly 받아들인다. (...) 그것은 법의 제약이 예측가능성이나 절차적 공정성을 제공함으로써만 이득을 사회에 준다고 보지 않는다. 또는 다른 도구적인 방식으로만 이득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시민들 사이의 어떤 종류의 평등을 확보함으로써 이득을 준다고 본다. 이 평등은 그들의 공동체를 더 진정한 것으로 만들고, 그것이 행사하는 정치적 권력의 행사를 위한 도덕적 정당화를 개선시게끔 해준다.

 

드워킨의 통합성으로서의 법 모델은, 관행주의로서의 법 모델과 다르다. 통합성으로서의 법이 사람들이 좋고 나쁘다고 믿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통합성으로서의 법은 법에 대한 더 일반적인 관념이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그것은 정치적 도덕의 다른 부분 또는 부문과 외적인 연관관계를 가져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외적인 연관관계를 통하여 더 일반적인 이데올로기적 그리고 심지어 형이상학적 환신과도 외적인 연관관계를 가져야만 한다.”

관행주의에 대한 드워킨의 거부는, 이론적 고려사항에만 기반하고 있지 않다. 실천에 대한 이론적 기술로서, 관행주의는 작동하지 않는다. 만일 판사가 엄밀한 관행주의의 태도를 채택한다면, 새로운 사건이 현존하는 법의 원천에 의해 통치된다고 말할 수 있기 전에, 그것은 그러한 원천의 명시적인 확장의 일부가 되어야 할 것이다. 드워킨은 그러한 확장은 “(거의) 모두가 그것의 확장의 일부로서 실제로 받아들이는 관행에 당사자로서 이야기할 수 있는 일련의 명제라고 주장한다. 이 합의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그리고 그러한 합의가 흔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법에는 간극이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양심적인 판사들은 그들 앞에 놓인 사건에 관하여 법의 받아들여진 원천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에 자주 의견이 불일치하기 때문이다. 엄밀한 관행주의는, “법외적인 사법부의 재량 행사를 통하는 것 외에 이 간극을 메울 어떠한 다른 방법도 제공해주지 않는다. 만일, 다른 한편으로, 판사가 연성 관행주의라고 불릴 것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공동체의 법이, 이러한 관행의 암묵적인 확장 내의 모든 것을 포함한다는 것을 인정할 준비가 되게 된다. 그러나 연성 관행주의(soft conventionalism), 무엇이 현존하는 법 자료에서 암묵적으로있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서, “통합성으로서의 법의 매우 추상적인 미발달된 형태이다. (...) 이것은 관행주의 이론이 (...) 확보하려고 하는 법과 정치 사이의 분리를 거부하는 것이다.” (Id. at 127-28) 연성 관행주의는 집단적 힘의 행사를, 널리 받아들여진 관행이 그 적용을 논란의 여지가 없는 곳에만 한정함으로써 기대를 보호하지도 않고, 아무런 법이 없는 상정된 상황들을 명확하게 식별하지도 않는다. 오직 엄격 관행주의(strict conventionalism)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 엄격 관행주의는 그러나, 부적절하다. 단순히 엄격 관행주의가 광범위한 재량의 여지를 판사에게 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것은 물론 우리가 이론적 근거에서 반대할 만하다고 여기게 되는 측면이다. 그리고 또한 판사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더 평범한(prosaic)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의 판사들은 소위 법의 관행적 원천, 즉 법령이나 선례와 같은 관행적 원천에, 관행주의가 판사들에게 허용하는 것보다 더 주의를 실제로 기울인다. 자기의식적인 엄격 관행주의자 판사는, 그러한 상정된 관행의 명시적인 확장이 소진된다는 점이 명백해진 지점부터 입법과 선례에 흥미를 잃게 된다.

실제의 사법부의 실천은 오직 다음과 같은 가정 하에서만 이치에 닿는다. , 판사들이 집행할 책무가 있는 법은 그것이 무엇인가가 논란의 여지가 있을 때조차도 법령에 대한 올바른독법에 의존한다는 가정 말이다. 만일 우리가 관행주의를 고른다면, 왜냐하면 우리가 확실성과 유연성 사이의 균형을 추구하기 위해 관행주의를 고른다면, 우리는 실용주의를 고름으로써 더 잘 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조언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드워킨 자신은 물론 실용주의를 고르지 않는다. 만일 실용주의가 법적 의사결정에서 지도력을 가진다면, 판사들이 사건을 당사자들에게 있다고 알려진 권리들에 기초하여 사건을 판결함에 있어, 판사들이 광범위한 규모의 사기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것은, 드워킨의 용어에서는, “마치as if” 당사자들이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판결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고귀한 거짓말을 하는 셈이 될 것이다. 법원은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이 실용주의자를 위하여 결정된다는 점을 어디까지나 위장할까 하는 점은, 다시금 그 자체가 전략적 질문, 즉 공동체가 판사들이 실용주의자로 행위하지 않기를 너무나 염려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이 고귀한 거짓말이 진정한 공동체의 이익에 더 잘 복무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할까라는 전략적 질문에 의해 결정된다.

 

168 III.

드워킨에게는 공동체 법 체계의 정합성과 통합성 그리고 정의의 관념을 논의하는 것이 가능해지게 되는 것은, 공동체를 인격화하여 그것의 정치적 표현인 국가를 단일하게 구별되는 도덕적 주체로 다룰 것이라고 선언하는 방식에 의해서만 가능해지게 된다. 드워킨은 공동체는, 공동체의 이름으로 행위하는 공직자의 원리와는 구별되는 원리들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드워킨은, 그의 논의가 전개되면서, 사회의 법체계를 하나의 단일한 정합적 제도로 형성하는 모든 별개의 규칙과 다른 규준들을 끌어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나 통합성에 대한 우리의 헌신은, (....) 우리가 이 사실을 결함으로 보고해야 한다는 것, (...) 그리고 원리에서의 비일관성이 무엇이건 우리가 직면하는 그러한 비일관성을 고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동체의 책무에 대한 드워킨의 논의는 <법의 제국>의 설득력 있는 부분 중 하나다. 그는 동의를 정치적 책무의 원천으로 거부한다. 실제의 사회 개혁은 업었으며 암묵적 동의라는 관념은 적정한 대체가 아니다. 설사 우리가 이민하지 않기로 양심적으로 결정한다 하더라도, 이러한 결정이 정부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유형의 동의를 구성한다는 논변은 실패할 것이다. (....) 왜냐하면 한 주권국가를 떠나는 사람은 오직 다른 주권국가에 가담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주권국가 전체로부터 자유로워질 선택은 전혀 갖고 있지 못하다.” (Id. at 193) 드워킨은 또한 정치적 책무가 공정한 경기의 관념에 기반하고 있다는 현재 더 인기 있는 관념도 부적정한 것이라고 본다. 정치적 책무가 공정한 경기에 기초하고 있다는 논변은, 사람들이 단순히 그들이 추구하지 않았으며 기회가 있었다면 거부했을 무언가를 받음으로써 책무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의문스러운 관념을 전제로 하고 있다.

 

169 더군다나, “공정한 경기논변은, 정치적 조직으로부터 사람들이 이득을 얻는다고 가정한다. 만약 그 논변이, 정치적 책무를 발생시키기 위하여(in order to political obligations) “그 장소에서 발달하였을지도 모르는 다른 여하한 체제 하에서보다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체제에서 더 나아짐에 틀림 없다는 것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지나치게 강한 조건이다. 만일 그 논변이, 무정부 상태에서보다 지금 살고 있는 사회 하에서 더 나아지는 것만을 요구할 뿐이라면, 그 조건은 지나치게 약하다.

드워킨에게는 결사적 책무associative obligations”, 이를테면 가족, 이웃, 친구관계와 같은 것의 책무는, 우리가 그것을 떠안기로 하는 선택과 무관하게 발생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책무들은 공유된 역사를 통해서 발생한다. 그러나 결사적 책무들은 일종의 호혜성을 요구하지만, 요구된 호혜성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다른 사람이 책무라고 생각하는 바를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것이 참이라면 우정은 오직 우정에 관한 세부적인 관념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할 것이며, 실제로 그러한 것보다 더 계약적이고 의도적인 것이 되어서, 그들이 서로 친구가 되기에 충분히 그들의 우정관이 잘 맞는가를 미리 살펴봐야 하는 그런 문제로 되어버릴 것이다.” (주석 89) 이 지점에서 드워킨은 통합성이라는 개념 그리고 그 저변에 깔린 해석적 태도라는 개념에 다시 의지한다.(turns again to the concept of integrity)

친구는 서로를 친구로 대우할 책임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주관적으로 표현하자면, 각자가 우정에 대한 관념에서 행위하며, 그 관념이 해석적 테스트에 취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해석적 테스트에 취약하다는 것은 우리의 문화에서 우정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이라는 이의에 열려 있는 것으로 여김을 의미하는 것이다.”(Id. at 199)

국가 구성원이라는 정치적 결사가 우정으로 유비될 수 있다는 관념은,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만큼이나 오래되었다.

드워킨은 진정한 박애적 책무의 개념으로부터 그 관념의 그의 판본을 끌어낸다. 그는 사람들이 그러한 박애적 책무를 가지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여건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첫째, 그들은 그 집단의 책무를 특별한 것으로 여겨야만 한다. 그리하여 그 집단 내에서 고유하게 성립하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 그 집단 밖의 사람들에게도 동등한 정도로 빚지고 있는 일반적 의무로서가 아니라 말이다. 둘째, 그들은 이 책임이 개인적이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 그 책임이 한 구성원에서 다른 구성원으로 직접 향하는 것이지, 어떤 집단적인 의미에서 집단 전체에 그저 향하는 것이 아니다. (...)

셋째, 구성원들은 이러한 책임을, 그 집단의 다른 이의 복지에 대하여 각자 가지는 더 일반적인 배려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구성원들은 오직 특별한 여건에서만 발생하는 이 구별되는 책무를, 큰 재정적 필요에 빠진 친구를 도울 책무와 마찬가지로, 상이한 방식으로 그 결사체 전체에 걸쳐서 살아 있는 더 일반적인 책임에서 파생적이며 그 책임을 표현하는 것으로 대해야 한다.

넷째, 구성원들은, 집단의 실천이, 모든 구성원들에 대한 단순한 배려가 아니라 평등한 배려를 보여준다고 상정해야만 한다. 박애적 결사체는 그런 의미에서 개념적으로 평등주의적이다.

드워킨은, 한 마디로 말해서 날 것 그대로의 공동체(bare community)와 진정한 공동체(true community)를 구분하기를 원한다. 다음과 같은 것이 그의 결론이다.

정당성-즉 정치적 공동체가 그 구성원들을, 집단적인 공동체의 결정에 의거하여 책무를 가지는 것으로 대우할 권리-, 낯선 사람들 간의 계약의 영역이나 정의의 의무나 공정한 경기의 책무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박애, 공동체, 그리고 그들 사이에 수반되는(attendant) 책무라는 더 풍부한 근거들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정치적 결사체는 가족이나 우정, 그리고 더 국지적이며 친밀한형태의 결사체들과 같다.

이제 드워킨이 정치적 책무에 대한 이러한 논의를 그의 책의 일반적 논제와 어떻게 통합시키는지는 분명해진다. 그는, 그의 말로 표현하자면, “우리의 정치적 실천이, 우리가 만드는 것으로 보이는 진정한 공동체의 가정들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표현해야 하는 상호 배려와 책임의 성격이 무엇인가라는 해석적 질문에 관심이 있다.

드워킨은 정치적 공동체를 역사와 지리의 사실상의 사고로 보는 관념을 거부한다. 그는 마찬가지로, “정치적 공동체의 구성원이, 그 공동체에 특수한 일정한 방식으로 확립된 규칙에 복종하는 일반적인 헌신을 받아들인다고 가정하는공동체에 대한 규칙집 모델”(rulebook model)도 거부한다. 그러한 공동체의 구성원은 설사 완전히 정직하다할지라도 사리적일 수가 있다.” 그들은, “그들이 단순한 전략이 아니라 책무의 문제로서 받아들이거나 협상한 규칙에 대하여 복종할 수는 있으나, 그들은 이 규칙들의 내용이 그들의 책무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공동체에서의 규칙은 적대적인 이익이나 관점의 타협이다.”

171 공동체에 대한 그러한 관점은, 물론, 법을 관행주의 모델을 염두에 두고 바라보는 사람들의, 이미 거부된 견해를 닮아 있다. 드워킨에게는 사실상의de facto" 공동체도 규칙집 공동체진정한 공동체가 아니다. 오직 원리의 모델이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공동체로서의 정치적 공동체를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원리의 사회의 구성원들은 그들의 정치적 권리와 의무가 그들의 정치적 제도들이 도달한 구체적인 결정들에 의해 다 소진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받아들인다. 오히려, 더 일반적으로, 그러한 결정들이 전제하고 지지하는 원리들의 구조에 정치적 권리와 의무가 의존해 있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원리의 모델 위에 기반한 공동체는 물론, 법 논변에서, 통합성 관념을 지도력을 가진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IV.

드워킨은 통합성으로서의 법 관념이 법원에 적용될 뿐만 아니라 입법자에게도 적용된다고 한다. 그 자체로, 사법부의 의사결정은 입법부의 의사결정과 다르지 아니하다. 만일 사법부의 의사결정이 통합성에 헌신해야 한다면, 입법부의 의사결정이 그러지 않을 이유는 무엇인가? 드워킨이 통합성으로서의 법 견해를 입법 영역에 적용함에 있어 있다고 보는 문제는, 소위 내적 타협그리고 장기판식 법률들을 제정하려는 유혹으로부터 생겨난다. 장기판식 규칙은, 예를 들어, 차량 제조업자에게는 엄격 책임을 부과하면서 세탁기 제조업자에게는 엄격 책임을 부과하지 않는 타협을 포함할지도 모른다. 그 문제는 난해한 것이다. 왜냐하면 드워킨이 다음과 같이 지적하는 문제 때문이다.

(인용시작) 물론 우리는 일부 문제에서는 자의적인 구분을 받아들인다. 예를 들어 제한구역(zoning)과 같은 것에서 말이다. 우리는 일부 영역에서는 가게와 공장이 금지되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금지되지 않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주차가 날에 따라 길 각각의 편에서 금지되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우리는 원리의 문제가 걸려 있을 때에는 견해의 양측 사이를 일부씩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한다. 우리는 상이한 모델을 따른다: 각 관점은 숙고의 과정에서 목소리가 허용되어야 하지만, 집단적 결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권위의 자연적 한계에까지 확장되는 영향을 가진 어떤 정합적인 원리 위에서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72) 만일 정의에 관하여 사람들이 의견이 갈렸기 때문에 타협이 필요하다면, 그 타협은 외적인 것이어야지 내적인 것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어떤 정의의 구조를 받아들일 것인가에 관한 타협이어야지 정의의 타협된 구조여서는 안 된다. (Id. at 179)(인용문 끝)

 

사법부는 더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드워킨은 명확하게, “통합성의 재판 원리는 절대적으로, 판사들이 그 날의 끝에서 해야만 하는 것에 대하여 주권을 갖지 않는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드워킨의 논지는, 재판상의 통합성의 원리는 판사들이 법으로서 인식하는 바에 대하여 결정적이지만판사들이 특정한 사건을 어떻게 결정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결정적이지 않다. 드워킨이 제시하는 사례는 도망노예법Fugitive Slave Act이다. 만일, 통합성의 원리 하에서, 도망노예법이 미국법의 일부로 여겨져야만 한다면, 판사는 그의 정의감이 그로 하여금 그 법을 노예소유주의 요구에 따라 실제로 집행하도록 허용하는지 아니면 그는 거짓말을 하고 이것이 결국 법은 아니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사임해야 할지를 허용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주석 110-Id. at 219) 드워킨이 130년 이상이 된 사건을 사례로 사용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가 그 이야기를 하는 방식은 그가 하는 이야기만큼이나 중요하다.

 

V.

질문은, 어떻게 통합성이, 드워킨이 사법 결정의 정수라고 주장하는 해석적 과업에서 등장하는가이다. 드워킨이 통합성으로서의 법이라고 일컫는 바에 따르면, 법명제는, 공동체의 법 실무에 대한 최선의 구성적 해석을 제공하는 정의, 공정성, 그리고 절차적 적정절차의 원리로부터 도출될 때 진이다. 더 구체적인 용어로 설명하자면, 구체적인 사건을 결정하려고 하는 판사는, “만일 공동체가다른 원리 대신 한 원리를 받아들인다고 가정한다면, “법 실무가 최선의 것으로 보이게 되는지를 판단해야만 한다. (Id. at 226) 이 과정 전반에 걸쳐, 드워킨은 그의 학문 경력을 시작했던 그 주장을 잊지 않도록 한다. -과거의 결정들로부터 따라나오는 권리와 의무, 그리고 그 이유에서 강제를 허용하고 명하는 것-은 이러한 결정들의 좁은 명시적 내용뿐만 아니라, 더 넓게는, 그것들을 정당화하는 데 필요한 원리들의 체계도 포함한다는 주장을 잊지 않도록 한다.

드워킨은 그리고 나서 진행하여, 최근 그가 익숙하게 만들었던 근거들과 함께, 법의 발전을 연작 소석의 저술에 비유한다. 각 뒤를 이어 쓰는 저자는 그에게 제공된 텍스트에 가장 잘 부합하는, 그 텍스트에 대한 해석을 찾을 책무가 있다.

174 연작소석의 비유는 물론 법 해석의 기획에 자동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다. 우선(to begin with) 드워킨 그 자신이 지적하듯이, 소위 법 텍스트를 망라하는 최선의 이야기를 찾는 기획은 미학이 아니라 정치적 도덕의 입장에서 최선의 이야기를 찾으려는 기획이다. 더 중요한 점으로, 그 기획은 드워킨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받아들일 것을 요한다. 통합성의 재판 원리는 판사들에게 법적 권리와 의무를, 가능한 한, 그것들이 단일한 저자-인격화된 공동체-에 의해 창설되었다는 가정 하에서, 그리하여 정의와 공정성의 정합적인 관념을 표현하고 있다는 가정 하에서, 파악할 것을 지시한다.” (Id. at 225) 이 요구는 많은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것으로 기각할지 모른다. 이어지는 면에서, 드워킨은 그의 충실한 또다른 자아인 헤라클레스를 부여시켜, 그가 방금 기술한 해석 테크닉을 일련의 사안에 적용한다. 그는 McLoughlin v. O'Brian 사건에서 시작한다. 이 사건은 영국 상원이, 그녀의 아이들이 죽고 남편 그리고 다른 몇명의 아이들이 부상을 입은 사고가 발생하고 약 1시간 반 후에 겪은 정서적 해악에 대하여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을 인용한 사안이다. 그녀는 이 사건에서 그녀의 살아남은 딸이 먼지와 기름으로 범벅이 된 것을 보았고그녀의 남편은 셔츠가 다 떨어져서그녀를 보았을 때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살아남은 얼굴 왼쪽 면 전체와 왼쪽 편이 덮여 있었다.” 이와 함께 드워킨은 보통법에 대한 경제적 해석에 반대하여 논한다. 법과 경제 학파의 이론과 공리주의의 인기 있는 도덕 이론들은, 드워킨의 견해에서는, 법실무에 대한 도덕적으로 충분한 정당화가 아니기 때문에 둘 다 받아들일만 하지 않다. “해석은 실무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해석하는 실무를 또한 정당화해야 한다.” 법과 경제 이론은 우리가 부를 극대화할 의무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공리주의는 정당화로서 실패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자기 자신의 이익과 그 중요성에서 동등한 것으로 아상 고려하라는 엄격한 요구에 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175 드워킨이 법률 해석에 주의를 돌렸을 때, 그의 또다른 자아인 헤라클레스가 의회를, 법의 연작에서 그 자신을 앞선 저자로 여길 것이라는 점은 놀랍지 않다. “비록 그 자신의 것과는 상이한 책임을 가지고 있고 특별한 권한을 가진 저자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헤라클레스는 그 자신의 역할을, 그가 최선의 방식이라고 믿는 바대로, 의회가 시작한 법률의 체계를 계속해서 발전시키는 동반자의 창조적인 역할로 보게 될 것이다. 드워킨은 헤르메스와 같이, 그보다 못한 판사가, 헤라클레스의 해석적 접근을 결국 받아들이게 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주려고 한다. 헤르메스는, 법률의 다투어지는 조항을 해석함에 있어, 그 진술이 입법 기록에 드러난 입법자의 희망과 기대에 의해 지도되어야 한다고 믿으면서 일을 시작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법률 해석의 화자 의미 이론은, “(입법자) 스미스의 의도를 그녀의 확신에 놓여 있는 것으로 다루는 것을 요한다. , 정의와 건전한 정책이 무엇을 요할지에 관한 그녀의 확신에 놓여 있는 것으로 다룰 것을 요한다. 이것은 물론, 그녀의 희망이나 그녀의 기대와는 다를 수가 있다.”

헤르메스는 스미의 희망이나 기대 또는 스미스가 입법할 당시 발생하지 않은 여건에서 그녀가 무엇을 했을 것인가가 아니라, 그녀가 그 법안을 찬성하여 투표하게 된 근거가 된 정치적 확신, 또는 그녀가 원리에 의거하여 투표하였다면 가졌을 확신을 살펴보아야만 한다.” (쭈석 134) 궁극적으로 헤르메스는 그 법률은 원리의 공동체의 목적을 증진하는 것으로 읽혀야 한다. , 그것들은 그것을 제정한 입법부 내에 지배적인 확신들의 정합적인 체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읽혀야 한다.”

176 그가 집행할 것을 요구받는 각 법률에 대하여, 헤라클레스는 그 법률에 부합하고 그 법률로부터 따라나오며, 가능하다면, 효력 있는 다른 법률과도 일관된정당화를 구성하려고 한다. 이 접근은, 드워킨이 주장하기를 그로 하여금 입안자의 구체적인 의도에 더 가까울 수 있는 해석을 거부하게끔 이끌 수 있다.”. (142) 헤라클레스가 입법사에 무신경한(cavalier) 것이 아니다. 단지 목적의 공식적인 진술은 (...) 그 자체가 인격화된 국가의 행위로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진술들은 통합성의 명령에 의해 수용된 정치적 결정들이다. 간단히 말해서 헤라클레스는 입법의 이야기를, 전체로서, 최대한 좋게 만드는 목적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헤라클레스가 입법사를 구성하는 공식적 진술들을 국가의 행위로서 다룰것이기는 하지만 그는 그것들을 법률 그 자체의 일부로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논지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드워킨으로 하여금 법률의 의미가 특정한 시점에 고정되지 않는다고 논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드워킨에게는, 공정성이 입법사에 대한 이 접근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입법사에서 발견되는 선언들은 공적인 목적과 확신들의 보고이며, 따라서 그것들은 자연스럽게 재평가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법률이 제정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이러한 선언들에 의존할 이유를 덜 가지게 된다. 그것들은 관련된 쟁점의 이후의 법률에 부가된 다른 여러 해석적 설명들에 의해서, 공적인 헌신의 공식적 해석으로서, 보완되거나 아마도 대체되었을지도 모른다. (Id. at 350) 결과적으로 헤라클레스는 원래의 입법사에 점점 덜 관심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종국에는,

(인용문 시작) 헤라클레스는 입법사를 움직이는 것으로 해석한다. 왜냐하면 그의 판결과 그 이후의 판결을 통해 그가 최선으로 좋게 만들어야 하는 이야기는, 전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는 화자의 의미 이론에 대한 형이상학이 시사하듯이, 과거의 낡은 법률을 새로운 시대에 맞게 고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오래된 법률이 그 이후로 어떤 것이 되어 왔는가를 인식하는 것이다.

 

178 드워킨은 마지막으로 헌법 판결을 살펴본다. 최근에는 해석주의자 그리고 비해석주의자 진영사이의 구분이 있는데 이것은 대단히 오도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개념들은 오류이다. 왜냐하면, 독자들이 이제는 잘 알게 되었듯이, 그것은 해석적인 것으로서 법의 철학적 성격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드워킨은 Brown v. Board of Education 판결에 대한 비판에 응답한다. 이 비판은 당시 수정헌법 제14조를 찬성하여 투표하였던 법제정자들은 그들이 인종분리 교육을 불법화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명제게 기반하고 있다. 헤라클레스는 이 법제정자들이 인종 분리 교육에 대하여 말하였을 수 있거나 말하지 않았을 수 있는 바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지배적인 확신에 초점을 맞춘다. 즉 모든 시민들을 동등한 주체로 대우하라는 확신 말이다. 그리하여, 설사 역사주의자조차도, 만일 그가 인종 분리는 입안자들이 더 추상적인 수준에서 받아들였던 평등관과 모순된다고 생각한다면, 전체로서의 그들의 확신에 대한 충실은 인종분리를 위헌으로 판결하는 것을 요한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드워킨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다음과 같다.

179

수정헌법 제14조에 처음 투표한 이들의 견해를, 한 세기 뒤 미국의 공적 도덕을 보고하는 것으로 다루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한 세기 가량 흐르면서 인종 쟁점은 거의 모든 방식으로 변환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변태적일 것이다. 그것은 공동체로부터, 목적에 대한 공적 감각을 변경할 권한을 박탈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공동체가 애초에 공적 목적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부인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고 나서, 드워킨은 안정성과 예측가능성이 헌법 판결을 그 저자의 구체적 의도에 묶어둘 것을 요구한다는 논변에 맞선다. 그 더 강한 판본에서, 이 논변은 법원은 역사적 탐구가 이 결과가 구체적인 방식으로 의도되었다는 것을 입증하지 않는다면 어떤 입법 결정이나 행정 결정을 위헌으로 하지않을 것을 의미한다. 그 더 약한 버전에서는 어떠한 법률이나 결정도, 역사적 근거에서 입안자들이 그것이 위헌으로 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했다는 점을 보이지 않는다면, 위헌으로 될 것이다.”를 의미한다. 드워킨은 이 역사주의 판본 중 어느 하나라도, “미국 헌법 실무의 적정한 해석을 제시하는지 묻는다. 그는 더 강한 판본은 실무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고 결론짓는다. 그리고 더 약한 판본은 실무에는 더 잘 부합하지만 그 이유는 그것이 더 약하기 때문이며, 만일 안정성에 기초한 논변이 그 실질에서 충분히 강하다면 살아남기에 충분히 부합할 수 있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서, 질문은, 안정성에 근거한 논변이 얼마나 강한 정치적 도덕의 논변인가 하는 점이다. 드워킨은, “헌법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그 저자들의 구체적인 의견에 의존하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얼마나 오래되었든 상관 없이, 그것과 모순될 수 있는 현대의 해석적 참신한 결정 대신 그러한 옛날의 구체적인 의견에 의존하도록 만드는 것이얼마나 그럴법한가를 묻는다.

드워킨에게, 역사주의자들의 논변은, 그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확실성의 중요성에 대부분을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확실성이라는 것이 적어도 좋은 정부에 중요한 덕목일 때 말이다.” 일부 쟁점과 관련해서, 이를테면 대통령의 재직 기간과 관련해서는, 법이 무엇인가보다는 법이 안착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다른 쟁점 집합에 관해서는, 안정성 또한 중요하기는 하지만, 무엇이 결정되어왔는가의 세부사항보다 항상 더 중요하지는 않다. 연방주의의 전반적 체계에 의해 요구되는 권한의 배분에 대한 결정들은, 드워킨에 의해 이 집합에 자리하게 된다. 그리고 또다른 집합이 있는데, 이 집합은 그 쟁점이 원리의 문제인 것으로, 안정성이라는 역사주의적 이념보다 그 내용이 더 중요하게 되는 쟁점들이다. 이러한 사안들은 국가에 대한 개인의 권리를 인정하는 헌법 조문들의 구성을 포함한다. 표현의 자유, 형사 기소에서 적정절차, 그리고 교육을 포함한 공적 자원의 처분에 있어서 동등한 구성원으로서의 대우를 포함한다. (180) 드워킨이 주장하는, 중대한 종류의 안정성이란, 통합성의 안정성이다. “권리의 체계는, 가능한 한, 정합적인 정의의 이상을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만 한다.” (Id. at 368) 역사주의는, 특히 그 강한 형태에서는 헌법이 원리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원리들은 어떤 과거의 정치 지도자의 시기, 상상력, 그리고 이해관심이 멈추는 것에서 멈춘다고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헌법은 권리를 진지하게 여긴다. 역사주의는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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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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