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et Radcliffe Richards, “Why Feminist Epistemology isn’t”, New York Academy of Sciences 775(1):385 412

 (2017. 9. 13. 수정 ) [회원이신 마** 님께서 메일로 보내준 오탈자 교정을 반영하여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발췌번역] 자넷 래드클리프 리처드 "왜 페미니스트적 인식론이 아닌가"

 

20년 전, 페미니즘이 더 젊고 더 푸르렀을 때, 이성과 과학으로부터의 도피한 관점에서 나온 운동에 관한 논의를 공격하는 것은 훨씬 더 쉬웠다. 그리고 그러한 입장은, 회의주의적 아웃사이더가 공격하기에도 상대적으로 쉬웠다.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에 대한 현재의 대우가 도덕적으로 그르다거나, 여성의 본성에 관한 지배적인 이념들이 거짓이거나 토대가 없는 것이라거나, 그들의 지위에 대한 전통적인 추론이 혼란에 빠진 것이거나 오류에 찬 것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되지 않으려면, 그들이 페미니스트의 신조를 어떤 기반 위에 놓을지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웠다. 물론 페미니스트들은 그러한 말들을 하였고, 그 모든 시간 동안 윤리와 합리성을 거부하려는 어떠한 체계적인 시도도, 페미니스트들 자신들의 논변에 의해 체계적으로 약화되었다.

 

그러나 이 더 미묘한 시기에, 그 쟁점은 훨씬 더 복잡해졌다. 적어도, 언어가 변했다. 그리고 극소수의 페미니스트들만이 이제는 이성이나 과학이 전적으로 포기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대신에 그들이 말하는 것은, 이러한 것들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은 사라져야 하며, 새로운 설명, 즉 그것들에 대한 페미니스트 관념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 사태를 매우 다르게 만든다.

 

여기서, 예를 들어, Elizabeth Groz는 페미니스트 인식론(feminist epistemology)에 대한 에세이에서 다른 페미니스트인 루이스 이리가레이(Luce Irigaray)의 작업을 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용문 시작) 이리가레이의 작업은 이나 거짓같은 그러한 전통적인 가치들에 무심하다. (...)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논리(삼단논법의 논리), 그리고 그것에 기반한 이성에 대한 설명. 이것들은 그녀의 작업이 비합리적, 비논리적이거나 거짓으로 기술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그녀의 작업은 상당히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고, 참이다. 이것은 오늘날 지배적인 것과는 상당히 다른 기준(different criteria), 관점, 가치에 의거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이리가레이는 전략적으로, 남근중심적인 지식을 의문시하는 전투를 하며 질문을 구성한다. 그러한 지식을 단순히 더 포괄적이거나 더 중립적인 진리들로 대체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대신에 그녀는 진리, 논리, 그리고 이성의 정치학(politics)를 드러내려고 한다. (인용문 끝) (주석 3)

 

이런 종류의 진술들은 분명히도, (386) 이성과 과학 일반으로부터의 도피에 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고 현대 페미니즘이 그러한 도피의 최전선에 있다고 의심하는 비판자들에게 사태를 더 어렵게 만든다.

 

387 우리는 그렇다면, 어떤 논증이, 그러한 표준적인 인식론적 과학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 누군가를 설득하여, 그리고 현대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론의 익숙하지 않은 세계를 찬동하도록 할 수 있는가의 질문에 집중함으로써 그 문제를 살펴보아야 한다. 특히, 왜 페미니스트가 그러한 변화를 추진하는 것을 생각해보아야 하는가의 질문에 집중해야 한다.

 

그 인식론적 견해가 여전히 상당히 상식적인 종류인 누군가의 상황을 고려해보라. 그러한 놀랍지 않은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이들은 우리가 아는 것들이 있으며 모르는 것이 있으며 우리가 확실치 않다고 생각하는 다른 것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상이한 사람들은 상이한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실은 알지 못했다는 것이 드러나는 것을 우리는 종종 알고 있다고 생각함을 안다. 그리고 또한, 아마도-Alcoff and Potter철학적 신화라고 불렀던 것으로- 철학적 작업은 그것이 그 실질적이고 기술적인 내용이 정치적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한에서좋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표준적 인식론자가 또한 페미니스트라고 해보자.-그리고 현재 논의하고 있는 주제와 무관한 복잡성을 피하기 위하여, 여성이라고 해보자.- 이 사람은 다소 놀라운 바다의 해안가에 있다. 이 사람은 바다에 발가락을 이따금씩 일시적으로 담그면서 어떤 이유들을 인어(mermaids), 그녀에게 익숙한 풍경을 포기하고는 출항(casting off)할 근거로 제시할 수 있을지를 궁금해 하고 있다.

 

페미니즘의 토대

 

페미니스트는, 적어도(at the very least), 여성의 전통적 위치와 여성에 대한 대우에 무언가 심각하게 잘못된 것이 있어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 이러한 정의는 여기서 내 목적에서는 충분하다. 왜냐하면 페미니스트는 현재의 상태에 관하여 불평을 제기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불평의 세부사항이 무엇이건 간에, 그녀의 출발 위치에 관하여는 일반적으로 참이어야만 하는 다양한 것들이 있다.

 

첫째로, 그녀는 사태가 어떠한지에 관하여 하나의 견해를 분명히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또는 그녀는 거기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생각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녀는 변화를 찬성할 어떤 가능성에 관한 얼마간의 관념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사태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를 말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른 말로 하면, 세계에 대한 일련의 일차적 신념들(a range of first-order beliefs)를 갖고 있다. 경험적, 흔히 과학적 탐구에 의해 뒷받침되는 종류의 신념들 말이다. 이런 종류의 신념들은 그녀가 인식론과 과학 방법론(epistemology and scientific method)의 이차적 질문(second-order questions)에 관한 다른 신념들도 갖고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세계가 어떠하며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관하여 무엇을 믿을지에 관한 결론에 도달함에 있어서, 그녀는, 얼마나 무의식적이건, 어떻게 사태들이 발견되며 지식을 그보다 못한 것들로부터 어떻게 구별해야 하는지에 관한 가정에 의존하여 왔다. 이 가정들은 만일 그녀의 페미니즘의 여하한 일부라도 (그것이 꽤나 그렇듯이) 편견의 전통적인 반대를 고발할 때 또는 여성에 관한 거짓 신념을 범하거나 영속화하는 반대를 고발하는 일을 포함한다면, 더 명시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비슷한 논점이 가치의 질문에도 적용된다. 사태가 그러한 방식이 무엇이건 거기에 대하여 여하한 불평(이의)라도 제기하기 위해서는, 페미니스트는 적어도 암묵적으로, 한 사태 또는 어떤 종류의 행동이 다른 것보다 더 낫거나 못하다는 것을 결정하는 규준에 호소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녀의 이의가 단순히 사리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면-사실상 모든 페미니스트들이 그러하듯이, 만일 그녀가 그녀의 이의를 부정의, 억압, 그리고 평등에 대한 자격과 같은 것에 의거하여 표현한다면, 그녀는 좋음과 나쁨 또는 옳음과 그름에 관한 도덕적 규준에 호소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그러한 도덕적 규준에 현재의 사태가 못미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녀가 그러한 규범적인 일차적인 규준들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결국 그녀가 그 자체로 그것에 관하여 생각해보았건 아니건 메타윤리학의 더 고차적인 질문들에 관한 그녀의 태도에 관한 무언가를 함의하게 될 것이다.

 

만일 페미니즘이 실제로 그러하듯이, 본질적으로 수용된 신념들 및 태도들에 대한 도전이라면, 그 출발점은 이러한 견해들이 어떤 방식으로 그릇되다는 관념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가장 조심스러운 페미니스트마저도 받아들이는 것과, 이런 정도의 계몽에 아직 이르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 표준적으로 믿어지는 것 사이에 무언가 차이가 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물론 이것은 참이다. 그 본성 자체에 의하여, 페미니즘은 수용된 관념들의 일부에 도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페미니즘은-그리고 아마도 대부분의 개인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모든 익숙한 규준들을 거부하라고 그 지지자들을 이끄는 어떤 갑작스러운 해명(eclaircissement)를 가진 운동 그리하여 여성에 관한 지배적인 관념을 그릇된 것으로 판정하는 그 새로운 해명을 받아들이라는 운동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 보다는, 페미니즘은 실제로는 여성에 관한 익숙한 관념들이 이례적(anomalus)이라는 깨달음으로 사실상 시작했다. , 이 관념들의 보유자들이 꽤나 일상적으로 다른 맥락에서 받아들이는 규준에 의해서는 여성에 대한 익숙한 관념들이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깨달음으로 시작한 것이다. 그 시발점은, 과학에서 증거와 논변의 전통적인 규준 그 자체가 (389) 여성에 관한 전통적인 결론들을 뒷받침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가장 단순한 수준에서, 여성의 본성에 관하여 수용된 신념에 대한 초기 페미니스트의 도전을 살펴보자. 예를 들어, 밀은 여성과 남성이 역사가 기록된 이래로 상이한 사회적 상황에 놓이고 체계적으로 상이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모두가 알 듯이, 그것이 여성의 차이에 대해 주장하는 이들이 옹호하고자 하는 현상태였기 때문에) 두 성 사이에 관찰된 심리적 지적인 차이 중 어느 것도 본성에 신뢰성 있게 돌려질 수 없다고 지적했다. (주석 10) 이것은 기성의 신념들에 대한 반론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인식론이나 과학적 절차의 무슨 새로운 규준을 채택하는 일은 전혀 포함하지 않았다. 지배적인 신념들은, 다른 여느 과학적 맥락에서 적용될 규준들에 호소함에 의해 도전을 받았던 것이다.

 

설사 대부분의 여성들이 선천적으로(congenitally) 남성에게 유보된 종류의 직업에 적합하지 않다고 가정되더라도 (이것은 앞의 논변에 의해서 어쨌거나 가정할 아무런 적정한 이유가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열린 기회 및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노력으로 성취하게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널리 견지되는 견해들은, 여성을 일률적으로 배제(wholesale exculsion)하여 그들로 하여금 시도조차 못하게 하는 것과는 양립불가능했다. 설사 여성들이 남성보다 그 힘이나 지성에 있어 열등하다는 것에 동의한다고 양보하더라도, 그리고 약한 이는 보호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여성들을 남성들에게 사회적 법적으로 종속되도록 함으로써, 여성들을 더 약하게 만드는 것에 대한 정당화를 이것이 제공한다는, 수용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추론의 꽤나 놀라운 비틀기가 필요하였다.(주석 11)

 

그러므로, 전통적인 페미니즘이 그 첫 번째 결론에 도달하는 데 사용한 논변은, 윤리학, 인식론, 그리고 과학에서의 증거와 논증의 익숙한 규준으로부터의 아무런 이탈도 포함하지 않고, 오히려 실제로 그러한 규준을 전제하였다. 이 규준에의 호소에 의해서야말로, 여성의 위치는 처음으로 그릇된 것으로 주장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모든 논증들이, 완전히 통상적인 논리에만 의존했다는 점을 주목하라. 수용된 견해에 대한 도전이 그 자체의 규준에 의거하여 가능하였던 것은, 전통적인 결론들은, 전통적인 전제로부터 따라나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는 전통적인 신념들이 평가의 전통적인 규준과 양립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주석 12)

 

390 페미니스트적 진보

 

지금 살펴봐야 할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일차적 그리고 이차적 종류의 신념에서 시작하여, 그리고 그것들의 기반 위에서 어떤 종류의 페미니즘에 도달하고 나서, 새로운 페미니스트가 그녀의 페미니즘에 의하여, 그러한 신념들을 거부하게끔 이끌어질 수 있는지, 그리하여 이성과 과학에 관하여 근본적으로 상이한 이념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이다.

 

신참 페미니스트를 상정해보자. 그녀는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이 전통적인 규준에 의해서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물론 정치적 변화의 작업의 필요성을 즉각 깨닫게 될 것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세계에 대한 그녀의 새로운 견해의 동등하게 중요한 결과 하나는, 대답을 필요로 하는 새로운 질문들에 대해 점점 더 자각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전에는 지식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 이제는 의문시된다. 그리하여, 무엇이 이제는 그러한 지식의 자리에 놓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필연적으로 제기된다.

 

예를 들어 그들은 역사적 기록을 뒤져 증거를 찾아내는 것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장애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전통적으로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성취했다는 증거를 찾아낼 수도 있다. 또는, 일부 영역에서 외관상 성평등 대우가 있는데, 페미니스트들은 여전히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잘 해내지 못함을 발견하고, 더 미묘한 형태의 장애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여, 그 가능성을 조사하는 실험을 설정할 수도 있다. 그들은 그러한 것들을, 학계 논문에서 남성과 여성의 이름을 바꾸는(swapping round) 식으로 해서, 이것이 심사자의 논문의 장점에 대한 평가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또는 과학에 관심이 있는 소녀가 그들의 교사나 다른 어린이들에 의해서 의욕이 꺾이는지를 살펴보는 통제된 관찰을 할 수 있을 것이다.

 

391 그러나 이런 종류의 신념들을 변화시키는가와 페미니즘이 어떻게 정확하게 연관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디를 살펴보아야 할지를 시사하는 페미니즘이 없었더라면 어느 누구도 그러한 연구를 추진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연구가 완료되었을 때, 페미니스트들은 그들의 페미니스트 아젠다가 확장되었음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들은 페미니스트 연구의 더 큰 범위를 인식하고, 페미니스트 행동의 더 큰 필요를 인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발생하는 것은, 그 조사 결과가 어떻게 드러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며, 이 조사 결과가 어떻게 실제로 드러나는가는 페미니즘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지금까지 살펴본 그런 종류의 조사들에서, 페미니즘이 신념의 여하한 변화에 대한 정당화(justification)를 제시하는 지점은 어디에도 없다. 페미니즘은 적절한 탐구(proper inquiry)가 어떤 것인지를 결정하지 않으며, 무엇이 어느 쪽으로 결론을 내리기에 무엇이 증거로 간주되는지, 또는 결과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하지 않는다. 이런 종류의 탐구를 수행함에 있어, 페미니스트들은 여전히, 애초에 그들을 페미니즘으로 데려다놓았던 증거와 논증의 규준을 사용하고 있다. 만일 소녀들이 과학 수업에서 무시되거나 의욕이 꺾인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면 또는 여성에 의해 쓰인 학술 논문들이 체계적으로 평가를 낮게 받는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면, 이는 증거가 그렇다고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페미니스트 원칙이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요구하기 때문에 그런 걸 믿는 것이 아니다.

 

설사 신념에서의 어떠한 변화가, 페미니즘이 아니었더라면 수행되지 않았을 이러한 조사로부터 결과하더라도, 새로운 신념들은, 비페미니스트는 가지지 않을 신념을 페미니스트는 가져야 한다는 그런 의미에서, 그 신념들을 믿을 여하한 이유를 제공한다는 의미에서는, 페미니스트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을 강조하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논점이 일단 이해하게 되면 비록 간단하고 분명한 것이기는 하지만, 널리 간과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는 적어도 원인(cause)과 정당화(justification) 모두에 사용되는 때문에(because)”라는 말의 모호성의 결과에 부분적으로 적어도 책임이 있을지 모르겠다. 당신은 당신의 견해를 페미니즘 때문에 바꿀 수 있다.(because of feminism) 여기서 이 의미는, 페미니즘이 아니었더라면 그러한 변화에 이를 탐구에 착수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그 뜻에서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신념의 변화에 대한 정당화를 페미니즘이 제공해준다는 그런 의미에서 페미니즘 때문에(because of feminism) 그 신념들을 바꿨다는 뜻이 아니다. 과학에서 여러 잘 알려진 진보들은, 그러한 진보를 낳은 과학자들이 목욕탕에 들어갔다거나, 과수원에 비스듬히 누웠다거나, 자기 꼬리를 입에 물고 있는 뱀 꿈을 꾸었다거나 했기 때문에 (세평에 의하면reputedly) 이루어졌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러한 영감의 원인이, 그로부터 결과한 배수량 이론, 중력 이론, 벤젠 고리 이론을 받아들이는 정당화의 여하한 일부라도 제공하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페미니즘은 새로운 발견을 궤도에 올려 조사할 수는 있고, 페미니스트 프로그램은 그러한 조사의 결과로 확대될 수는 있지만, 새로운 신념들 그 자체를 페미니스트적인 것으로 여길 아무런 이유가 없다. 배수량 이론이나 중력 이론이나 벤젠 고리 이론을 목욕주의나 사과주의나 뱀주의라고 여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따라서, 이 모두를 페미니스트 인식론의 해안가에서 꾸물거리는 사람(lingerer)과 관련시켜 보면, (392) 우리는 그녀의 페미니즘이 그것이 처음 시작한 이래로 상당한 진보를 이루어 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견해의 여하한 변화에의 정당화는 여태까지 그녀가 페미니스트라는 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 신참 페미니스트는, 자신이 애초에 페미니스트가 되게끔 한 이유와 정확히 동일한 종류의 이유로, 페미니즘 내에서 진보를 찬성하는 이유를 갖고 있다. 그녀의 마음이 변한 것은 오로지 증거가 그렇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며, 이것은 그녀의 옛 익숙한 인식론과 과학 방법론의 규준에의 호소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중개적 규준(intermediate standars)

 

그런데 두꺼운 페미니스트적 인식론에서 페미니스트들의 견해는 이런 식의 사고는 시작에 불과하다고 한다.

 

(인용 시작) 페미니즘은 운동에서 철학에의 첫 번째 습격(incursions)을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가져왔다. 응용 분야, 특히 응용 윤리학은 페미니스트들의 작업이 출간된 첫 분야였다. (...) 그러나 우리가 미학, 윤리학, 과학철학에서 남성중심주의(androcentrism)에 의해 생성된 문제들을 이해하기 시작하게 되면, 응용 분야에서 우리는 더 중심적 분야로 옮겨가게 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꽤나 최근에는 인식론과 형이상학의 핵심(core)” 분야로 옮겨가게 되었다. (...) 페미니스트 철학자들의 작업은, 철학을 통째로(in its entirety) 그 영역의 구성, 경계, 문제상황을 생성하는 과정에 있다.(주석 15)

 

그리고 페미니즘이 이런 새로운 땅에 이르렀을 때, 꽤나 상이한 질문이 제기된다. 추정컨대, 응용 주제로서 전통적 틀 내에서, 페미니즘의 진보에 관해 이야기되었던 어떠한 것도, 그 틀(framework) 그 자체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도전에 적용된다고 가정될 수 없다.

 

그럼에도, 덜 근본적인 종류의 변화에 대해 논의했던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수용된 규준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변화라는 일반적 쟁점을 명료화하는 데 본질적이기 때문이다. 규준들은 위계 구조를 가지고 온다. 그리고 아주 많은 변화들은, 합리성, 과학철학, 그리고 인식론의 근간에 접근하기도 훨씬 전에 피상적인 또는 중간 레벨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특히, 일차적 신념들에서의 변화-세계가 어떻게 존재하고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관한 신념들-는 항상 그 자체로, 규준에서의 잠재적 변화에 상응한다. 왜냐하면 잘 안착된 일차적 신념들은 자동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다른 신념들을 덜 잘 확립된 것으로 평가하는 기반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추론하는-그리고 추론할 수밖에 없는-방식에 관한 근본적인 사실이다. 이런 사정은 그에 관해서 생각해보는 순간 명백해진다. 예를 들어 헤로도토스의 작품에 나오는 페니키아인(Phoenicians)를 생각해보라. 이 페미니키아인은 아프리카를 빙 돌았던 그들의 항해에서 돌아와서는, 우리가 곶으로 알았던 곳을 서쪽으로 향하여 둘레를 돌아 항해함에 따라 해가 그들의 오른 쪽에 북쪽으로 졌다고 주장한다. 이 설명은 지구와 태양의 관계에 관한 당대의 견해와 양립불가능했기 때문에, 헤로도토스는, 비합당하지 않게, 그 주장을 믿지 않았다. 즉 그에게는 여행에서 돌아온 여행자들이 그들의 판타지를 제시한다고 보는 것이 더 그럴법하다고 여겨졌다. 태양이 그 경로를 바꾸는 일이 생겼다고 보는 것보다는. 그러나 지금은 천문학에 대한 우리의 변화된 신념은, 그 이야기를 평가하게 되는 우리의 규준을 바꾸어놓았다. 그래서 우리는 페니키아인들의 주장을 참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페니키아인들이 정말로 아프리카를 빙 돌아 항해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최선의 가능한 증거라고 여긴다. (393) 이런 종류의 일들은 삶의 모든 측면에서 일어난다. 법의학(forensic medicine)에서 우리는 유죄 여부를, 혈액형 집단이나 DNA에 관한 우리의 근본적 신념을 준거로 하여 결정한다. 예전에는 우리가, 피고인이 물 속에 빠지는지 뜨는지에 의해서 그 유무죄 여부를 결정했을 수 있지만 말이다. 만일 어떤 주류에서 이탈하는 의학이, 잘 안착된 과학 이론과 양립불가능한 주장을 한다면, 그 이론은 그 비주류적인 주장들이 틀렸음에 틀림없다는 증명으로 쓰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비주류적 이론을 찬성하는 어떠한 일화적인 증거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해서 치워져버리게 될 것이다.(will be explained away) 그러나 만일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인과적 기제가 결국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진다면 (몇 년 전에 동종요법 사건에서 간략하게 주장된 것처럼), 태도들은 변할 수 있으며, 비주류적인 것(the fringe)는 전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주류(main stream)에 수용될 것이다.

 

그러한 변화가 일어날 법한 확률이 얼마나 되는가는, 일련의 특정한 신념들이 얼마나 잘 안착되어 있고, 얼마나 포괄적이고, 얼마나 취약한가에 달려 있다. 그리고 페미니즘이 일단 시작되면, 이런 수준에서의 규준의 광범위한 변화에 궁극적으로 이를 것이라는 점은 일어날 법하다. 세계에 대한 이해는 다양한 여건에서의 그것의 구성원에 대한 관찰을 통하여 온다. 그리고 여성과 남성에 대한 관념들이, 여성들은 오직 다소 제한된 상황에서만 관찰되는 동안 발달되어 왔으므로, 적절한 탐구(proper investigation)가 여성들과 연관된 많은 전통적인 신념들을 몰아내게(dislodge) 될 것이라는 점은 기대되는 바이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가 실제로 일어났을 때(...) 다른 신념들 및 관념들에 대한 평가의 규준도 함께 필연적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대략(more or less) 일상생활에서 이미 익숙한 것이다. 만일 여성의 본성이 그들로 하여금 오직 남편과 아이들을 그들의 관심의 주된 초점으로 만드는 것을 통해서만 발견하도록 한다는 관념이 도전받는다면, 그것은 그들의 삶의 과정에서 고질적으로 불만족하고 있는 개별 여성들의 평가에 대해 근본적으로 상이한 접근을 귀결하게 될 것이다.

 

394 그러나 과학과 지식의 문제에 대한 이 연관성 때문에, 다시금, 이런 종류의 규준에서의 변화가 실제로 발생했을 때라도, 그것은 인식론이나 과학 방법의 규준의 변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방금 논의한 종류의 일차적 신념에서의 변화는, 표면 수준의(superficial) 또는 중간 수준의(intermediate), 지식주장에 대한 평가의 규준에서의 상응하는 변화에 대한 기초만을 제공해줄 뿐이다. 그것들은 여전히, 인식론이나 과학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에 있어서의 변화의 아무런 이유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와는 완전히 반대다. 사실, 페미니스트적으로 고취된 연구가 실제로 일차적 신념들에 있어서의 관련된 변화를 정당화하는가 여부는, 다시금, 더 근본적인 과학 규준과 인식론의 수용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논점은 인식론적 해안가에 서 있있는 전통적인 페미니스트에게 거대한 중요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그녀가 대단한 주의를 기울여 이 상이한 수준의 규준을 구별하지 않는다면, 그녀는 페미니즘을 발전시키는 와중에 우연히 페미니스트 인식론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녀가 의심을 가지고 대하는 많은 전통적인 지식 주장(traditional knowledge claims)에 직면한다. 그리고, 그러한 지식주장에 대하여, 만일 그것들은 전통적인 인식론이 지식으로 여겼던 것이므로 전통적인 인식론에는 무언가 틀린 것이 있음이 틀림없다고 말함으로써 대응한다면 이는 심각한 오류가 될 것이다.

 

인식론 및 철학과 과학의 근본적인 부분에 대한 페미니스트적인 개입을 향한 충동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이 구분을 희미하게 흐림으로써 일어났는지를 말하는 것은 어렵다. 나의 의심은, 그 개입 충동의 많은 부분이 그런 구분을 희미하게 함으로써 일어났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인식론

 

그녀가 새로운 인식론적 이념들을 살펴보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느 누구라도 어느때라도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여기서 특수한 질문은, 이 이념들에로의 이동이 정당화될 수 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러한 이동의 여하한 정당화의 일부라도 페미니즘에 의해 제공될 수 있느냐이다.

 

우리의 페미니스트의 세계에 대한 견해에서의 모든 변화는, 그녀가 애초에 페미니스트가 되었을 때 호소되었던 것과 동일한 인식론적 과학적 규준에 의거하여 정당화되었다. 그러한 규준들이 그러나 이제는 그 자체가 쟁점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페미니즘-여성에 대한 적절한 대우의 추구에 대한 그녀의 헌신-, 옛 이념들을 버리고 새 인식론적 이념으로 바꿀 이유를 그녀에게 제공하느냐라는 질문이 다시금 제기된다.

 

이러한 노선에서 무언가가 널리 함의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런 일이 단지 페미니스트 인식론이라는 용어로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Alcoff and Potter는 예를 들어, 그들의 선집anthology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용 시작) 페미니스트 인식론의 역사 그 자체가, 세계에 대한 여성의 이해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여성의 투쟁에 대한 페미니스트적 헌신과, 안다는 여성의 주장(women’s claims to know)를 줄곧 훼손해왔던 지식에 대한 여러 설명에 대한 전통적인 철학적 헌신(....) 사이의 충돌이다. (주석 21) (인용 끝)

 

AAlcoff and Potter는 또한, 페미니스트 인식론의 목적에 대한 더 폭넓은 주장들도 개진한다.

 

(인용 시작)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인식론의 목적은 지적인 호기심을 충족하는 것뿐만 아니라, 해방적 목표에 기여하는 것, 지식의 생산에 있어 민주주의의 확대에 기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목표는 우리의 인식론이 어떻게 지식에 권위가 부여되며 누가 그러한 지식에 의해서 힘을 갖게 되느냐를 살펴보는 것을 가능케 할 것을 요구한다. (주석 23) (인용 끝)

 

그들은 또한 그들의 선집에서의 에세이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것은 (...) “인식론의 정치학을 벗겨내는 것에 대한 헌신”(주석 24)이라고 하며, “철학에서 페미니스트들의 작업은 숨길 것이 없이 정치적 개입”(주석 25)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선집 저자들 중 한 명의 작업을 언급하면서 페미니스트 인식론은, 실제적인 정치적 투쟁 (..._ 에 대한 그 효과에 의해 검증되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주석 26) 그리고 다른 저자는 인식론에 대한 하나의 특정한 (비페미니스트) 설명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판가들은, 이 인식론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누구의 이익에 복무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누구를 무시하거나 억압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주석 27)

 

이 모든 것은, 인식론에 대한 이 접근을 취할 페미니스트의 해방적인, 억압에 저항할 이유들이 있다고 시사한다. 그리고 또 여하한 후보 이론의 적정성은, 그것이 그 해방에 기여하는 정도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해안가에 있는 페미니스트가 이러한 주장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가? 그녀는 그녀의 현재의, 전통적인 이론들이 그 자체로, 그것에 의해 여성이 억압되었던 기구의 일부라는 근거에서, 인식론에 대한 이 새 접근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첫째로, 전통적인 인식론이, 늙은 아내의 민담의 지위로 여성의 지식을 격하시키는 데 책임이 있다는 주장을 살펴보고, 그래서 그 인식론이 바로 그 이유에서 내던져져야 하는지를 살펴보자. 해안가에 있는 페미니스트는, 이 경로에 의해서 페미니스트 인식론의 결론으로 도달할 수 있는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첫 번째 논점은, 인식론에 대한 익숙한 이념들이 여성들의 안다는 주장을 줄곧 훼손해왔다는 주장이, 마치 명백히 참인 것처럼 논변으로 그냥 미끄러져 들어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도전은, 전통적인 페미니스트에게 그녀의 현재의 입장의 부적정성을 입증하고, 왜 그녀가 대신에 페미니스트 인식론의 이념을 채택하여야 하는지를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그 참에 대해 그녀가 설득되어야 할 무엇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녀는, 남성과 여성에 의해 개진된 종류의 지식 주장에 있어서 그러한 실질적이고 체계적인 차이가 정말로 있는지, 그리고 전통적 페미니스트의 현재의 규준에 의해 흔히 가장 배제되는 것은 여성의 지식 주장이라는 점에 대해서 입증을 받을 필요가 있다. , 여성들의 지식 주장이 배제되게 하는 것은 그녀의 일차적 신념이 아니라 실제로 그녀의 인식론이며, 그래서 인식론에서 이 권고된 변화가 여성들의 주장을 지식으로 인정되게끔 해준다는 점에 대하여 입증을 제시받을 필요가 있다.

 

이것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전통적인 페미니스트가 새 인식론에 대하여 특별한 식견이 없는 사람이라면(uninitiated), 이 모든 것은 그녀를 설득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상당한 문제를 안겨준다. 성별에 따라 그들의 지식 주장이 체계적으로 상이하게 다루어진다는, 그 주장의 가장 단순한 부분은, 전통적인 페미니스트에게 설득력이 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리고 그녀가 실제로 신용하지 않는(discount) 신념이 무엇이든간에, 그렇게 보는 것은 그녀의 전통적인 인식론의 결과라는 점을 입증하는 데는 더 난점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녀가 거부할 가능성이 높은 것일 뿐만 아니라, 그런 말은 이해하기조차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주석 29) 그래서 이런 종류의 문제들은 그것 자체만으로, 전통적인 페미니스트를 이런 종류의 논변에 의해 페미니스트 인식론으로 개종시키는 진정한 전망에 종결을 가져오기에 충분하다고 할 만하다.

 

설사, 그러한 난점이 극복될 어떤 합당한 전망이 있다 하더라도, 그러나, 여전히 더 근본적이고 완전히 해결불가능한 문제들이 남을 것이다. 우리의 페미니스트가, 적어도, 논의의 목적상, 그녀가 여전히 받아들이고 있는 전통적인 인식론적 규준들이 정말로 여성들이 전통적으로 안다고 주장한 것의 많은 부분을 신용치 않게 하였다고 가정한다고 양보해보자. 이것이 정확히 어떻게, 새로운 인식론으로의 변화를 정당화한단 말인가?

 

Alcoff and Potter가 말하는 위에서의 인용 부의 처음 부분에서는, 전통적인 인식론에 의해 훼손되어왔던 것이 여성의 안다는 주장(women’s claims to know)이라는 점, 그리고 뒷부분에서는 훼손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여성의 지식(knowledge)라는 점이 중요하다. 물론 만일 우리의 (397) 페미니스트의 전통적인 이론이 여성들의 지식을 실제로 배제하였다면, 그것은 정말로 그릇된 것이고 변경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변경 필요성은 분석적으로 참이다. 그러나 전체 문제는, 그녀는 그녀가 기각하고 있는 것이 지식이라는 점을 아직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녀가 기각하고 있는 것은 지식 주장(knowledge claims)이다. 이 지식주장은 그녀의 현재의 규준에 의하면, 정말로 늙은 아내의 민담에 지나지 않는 것에 해당한다. 이 주장들이 정말로 진정한 지식을 표현한다는 결정적인 전제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 논변이 정당화한다고 여겨지는 그 새로운 인식론을 이미 받아들였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이런 종류의 논변에 의해 변화에로 설득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만일 취해져야 하는 전제가 지식 주장에 관한 것이라면, 인식론에 있어서 여하한 변화에 대해서도 이유를 제공하지 못한다.[왜냐하면 그릇된 지식 주장을 지식이 아니라 그릇된 것으로 판정한다는 점은 아무런 이유가 되지 않으니까] 만일 취해져야 하는 전제가 지식에 관한 것이라면, 그것은 극악하게 선결문제요구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it is flagrantly question begging) [, 지식 주장을 이미 지식으로 봐야지만, 인식론을 변경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지식 주장을 참된 지식으로 보게끔 하는 새 인식론을 이미 받아들였어야만 한다. , 결론을 받아들여야만 전제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순환 논리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녀가 그녀의 인식론을 변화할 이유를 보기 전까지는, 여전히 전통적인 인식론의 페미니스트는 또한, 여성들을 그릇되게 대우하는 자는 페미니스트 인식론의 옹호자들이라고 결론지어야만 한다. 그녀의 현재의 인식론적 견해와 결합된 페미니스트 원칙은, 오도된 지식 주장을 하는 어떤 여성에 대해서도 그들을 대우하는 적절한 방식은 그들에게 적절한 교육을 제공하고 그들의 무지에서 빠져나오도록 해주는 것임을 시사한다. 대신에 그들에게, 그들의 무지를 지식처럼 통과시켜주는 인식론을 가져다주는 것은, 그들 자신의 지식 결핍 상태와 공모하도록 속이는 것에 불과하다.(to cheat them into collusion with their own deprivation) 그리고 이것은 명백히도 그녀가,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부당대우를 가증스럽게 영속화하는 것(scandalous perpetuation of the traditional wrongs of women)으로 여기는 바이다. 그리하여 이는 그녀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페미니스트적 정력을 가지고서 맞서 싸워야할 짓이 된다.

 

예를 들어, 우리의 여전히 전통적인 인식론의 페미니스트가 페미니스트 인식론자에 의해서, 지배적인 인식론적 규준이 남성에 의해 수립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도록 촉구받았다고 해보자. 그리고 여성들은, 그들이 인식론이건 아니건 남성의 규준에 의해 판단된다면 억압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도록 촉구받았다고 해보자. 그녀는, 다시금, 남성과 여성의 규준 사이에 정말로 그러한 차이가 있는지에 대하여 설득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확실히 현재 당면한 문제다. 왜냐하면 그녀 자신이 남성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규준을 채택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녀는 또한, 여성의 지식과 능력은, 남성의 규준이 지배적인 한에서는 나쁘게 전개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 대해서도 설득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동등한 정도로 어려운 일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녀가 페미니스트에 의해 권고된 규준에 대해 이해한 바가, 그들에 의해 판단되는 것을 그녀로 하여금 열망하게끔 만들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사 그러한 난점들이 극복될 수 있다 하여도, 더 근본적인 문제는 남을 것이다. 어떤 집단의 지식 주장은 다른 집단의 규준에 의해서는 적절히 평가될 수 없다는 이념 그 자체가, 전통적인 페미니스트가 지금 견지하고 있는 것과는 대비되는, 지금 새 인식론자들에 의해 옹호되고 있는 인식론적 이론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녀의 현재의 견해가 변해야 한다는 점을 주장하는 논변의 여하한 일부로서도 거론될 수가 없다. 그리고 다시금, 인식론에 관한 그녀의 현재의 이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각 집단을 (398) 그 집단 고유의 규준에 의해 판단하는 것을 향한 변화는 그 자체가, 여성에 대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구성한다. 왜냐하면 그런 변화는 여성들로 하여금 여성들의 진정한 지식 결핍 상태를, 특권층의 부적절한 태도에 의해서 지식을 보유하고 있다고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고 잘못 생각하도록 속이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지식이 그 근저에서는 정치의 문제라고 주장된다고 해도, 마찬가지 일이 발생한다. , 페미니스트 인식론은 진리, 논리, 그리고 이성의 정치학을 벗겨내는 문제라고, 그리고 이것이 이해되기 전까지는 여성은 실제로는 부정의한 남성 권력의 표명에 지나지 않는, 객관성을 가장하는 규준에 의해 잘못 이끌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고 해도 마찬가지 일이 발생한다. 다시금, 지식이 정치의 문제라는 이념 그 자체가, 옹호되고 있는 인식론적 입장이다. 그러므로 여성들이 인식론에 의해서 부당하게 대우받고 있다는 주장은, 그 옹호를 위한 논변의 일부로 쓰일 수가 없다. 그리고 전통적인 인식론의 페미니스트가 그녀의 마음을 바꾸도록 설득되기 전에는, 그녀는, 여성들에게 페미니스트 인식론의 참을 설득하려는 시도는, 그들의 무지를 지식으로 변환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정치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도록 속이는 일이며, 따라서 여성들로 하여금 어떠한 종류의 효과적인 정치 활동에도 필요한 것인 진정한 지식을 획득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으로 여길 것이다.

 

그 문제는, 가장 노골적인 정치적 입장으로 퇴각한다고 해서 구출될 수가 없다. 그 노골적인 정치적 입장이란, 우리가 그러지 아니하면 사태는 여성에게 더 나빠질 것이므로, 우리는 페미니스트적인 것으로 주장된 인식론적 이념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여성의 진보는 이러한 변화를 이룩하는 데 달려 있다는 주장이다. 그것조차도, 만일 그것이 진지한 인식론에 대한 옹호로 여겨진다면 (공공연하게는 이야기되지만 사석에서는 거부되는 수사가 아니라) 인식론이란 윤리학에 이차적이라는 이념, 그 자체가 인식론적 이론인 그 이론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주석 30)

 

이 문제의 뿌리는 논리적인 것이기 때문에, 새 인식론을 찬성하는 논거의 세부사항이 어떻게 여러 판본으로 시도되건 아무런 차이를 가져오지 않는다. 그 논점은 본질적으로 이 논문의 서두에서 밝힌, 페미니즘의 토대에 관한 것이다. , 현재의 사태가 어떤 규준에 못미친다고 이야기될 수 있으려면 그렇게 이야기되기 이전에 적절한 대우와 평가의 기준이 인식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전통적 인식론의 페미니스트에게 제시될 수 있는 어떠한 논변에서도, 만일 권고된 변화를 찬성하여 주어지는 이유들이 그 자체가 페미니스트적인 것이라면, 즉 그러한 변화의 이유가 어떠한 방식으로든 현재의 인식론이 여성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생각에 의존한다면 또는 현재의 인식론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여성에 나쁘다는 생각에 의존한다면, 그 이유들은 고도로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경험적인 전제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그 결론을 전제하기 때문에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를 범하는 수정적인 인식론에도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399 철학자들은 페미니즘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인식론에 대한 논변들을 생산해왔다. 그리고 몇몇 그러한 비페미니스트적인 논변이 페미니스트적인 것이라고 현재 주장되고 있는 접근을 받아들이도록 그녀를 설득할 수는 있겠다. 더 나아가, 그녀가 정말로 이 새로운 인식론적 이념들이 옳다고 확신하게 되었으며, 여성들은 예전의 인식론 하에서보다도 새 인식론 하에서 더 잘 지내게 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면, 그녀는 또한-필연적으로- 여성들은 전통적인 인식론에 의해 부당하게 대우되었다고 결론내릴 것이며, 그것을 발전시켜야 할 그녀의 페미니스트의 정치의 일부로 여기면서, 그녀가 지금은 옳은 것으로 여기고 있는 인식론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채택하라고 설득할 것으로 보게 될 지도 모른다.

 

이것이 페미니스트 인식론의 경우에 발생한 일이라는 점은 꽤나 분명하다. 그들은 인식론에 대한 특정한 접근에 의해 설득되었다. 특히 지식 사회학과 과학 사회학에 관한 이념들로부터 끌어낸 종류의, 그리하여 지배적인 집단이 규준을 설정한다는 이념을 강조하는 그런 종류의 인식론에 의해서 설득되어-, 이 이념들을 그들의 미래의 탐구와 그들의 페미니스트 정치가 취해야 할 형태의 토대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논증이 성공하는 한에서는, 원칙적으로는 괜찮은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론에 대한 이런 저런 접근을 받아들이는 데 여하한 페미니스트적인 것이라고 여기는 오류를 범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페미니즘은, 아마도, 특정한 인식론적 질문을 제기하도록 그녀에게 촉구할 수도 있으며, 그리고 그 질문이 그녀로 하여금 인식론적 변화를 채택하게끔 이끈다면, 그 변화는 그녀의 정치와 미래의 탐구 양자 모두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의 페미니즘은 그 자체로는 그 답변의 결정인자가 되지 못한다.

 

페미니즘은, 다른 말로 하면, 응용 분야(an applied field)로서의 그 출발점에서 결코 탈출할 수가 없다. (주석 34) 여성을 위해 무엇이 행해져야 하는가에 관한 페미니스트의 결론은(...) 모든 단계에서(at all stages) 본질적으로 파생적인 것이며, 더 근본적인 이념들에 의존하는 것이다. 사실들의 문제에 관한 어떠한 신념도, 인식론과 과학에 대한 어떠한 이론도 페미니즘에 의해 요구될 수 없다. 왜냐하면 페미니스트의 결론들이 그러한 신념들과 이론들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식론의 특정한 이론들에 페미니스트라는 명명을 붙이는 것이 완전히 자의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주석 35) 어떠한 의미에서도, 페미니스트 인식론과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심각하게 오도하는 것이다.

 

과학과 이성으로부터의 도피

 

이제, 이것은 이 논문의 주제와 모두 연결되어야 한다: 과학과 이성으로부터의 도피.

 

400 과학자들이 탐구를 유리겔러의 텔레파시와 스푼 구부리기에 관하여 탐구를 시작했을 때, 그들은 물론, 그들이 주의깊은 탐구를 실시하고 있었으며, 사기의 가능성을 제거하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마술(conjuring)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랜디가 불려져 왔을 때 그의 훈련된 시각은 즉각 평범한 관찰자에게는 보이지 않던 지점으로 갔고, 유리겔러의 트릭은 노출되었다.

 

랜디의 기여는 전적으로 과학적 탐구의 익숙한 틀 내에 있는 것이다. 랜디는 과학자들을, 오도하는 일정한 정보를 제거하는 방식 속에 놓았지만, 과학자들 자신이, 의심되는 트릭이 실제로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어야만 했다.

 

일 랜디가 그 트릭이 그의 마술적 통찰을 결여한 어느 누구의 눈에도 여전히 보이지 않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면, 어느 누구도 조금이라도 흥미를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오도하는 정보를 제거하고 난 후에(purge) 과학자들은 예전과 똑같이, 그러한 종류의 사기의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자각하는 정도만큼만 마술 지식에 의해 영향을 받은 채 자신들의 탐구를 계속해 나갔다. 랜디가-적어도 마술사의 자격으로서는-, 가짜의 자료가 제거되고 난 뒤에 어떤 자료가 고려되어야 하는지에 관하여 무언가라도 말하거나, 어떤 이론이 가장 유망하거나 미래의 연구가 어떤 방향을 취해야 할지에 관해서 무언가라도 말했다면 터무니 없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그가, 과학 전체에 대한 마술사적 접근으로 주장된 무엇이라도 제안하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두 사안의 분명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의 학적 탐구(academic inquiry)에 대한 기여는, 동일한 종류로 출현했다. 페미니스트들은 특정한 관심을 가지고 모든 종류의 학적 탐구에 다가갔다. (...) 즉 그들로 하여금 다른 이들이 살펴보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을 살펴보도록 만들고,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바를 발견하거나 모든 것이 매끄럽게 가정되었던 부분에서 변칙사례를 발견하는 등의 결과에 흔히 이르는 그러한 관심을 가지고서 말이다. 그러나 이 모든 발견들은, 그 발견을 살펴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눈에 보이는 것이었다. 일단 그 발견이 이루어지고 나면, 과학과 철학이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가에 관한 질문은, 다른 어느 누구의 관심사보다 더 페미니스트의 관심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여하한 종류의 일차적 또는 이차적 신념을 채택함에 있어서는 페미니스트적 이유들이란 것은 없다.

 

401 앞서의 논변 중 어느 것도, 어떤 페미니스트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세부사항에 의존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페미니스트 인식론으로 주장된 것이 정확하게 특징지어졌느냐 여부에 따라 무슨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 여기서 중핵적인 논점은 논리적인 것이다. , 여하한 인식론에 대하여 페미니즘이 맺는 관계에 관한 논리적인 것이다. 또는, 페미니스트의 것으로 주장된 유형의 여하한 다른 이론과 페미니즘과의 관계에 관한 논리적인 것이다.

 

둘째, 그 주장은 그 자체로 간단하고 직설적이다. 관련된 모든 것은 단순한 논리적 논점이다. , 페미니즘은 한 이론이 아니라 다른 이론을 채택함에 있어 아무런 정당화를 제공할 수 없다는 논리적 논점 말이다.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논점(...), 왜 여전히 전통적인 인식론 견해를 갖고 있는 페미니스트가, 페미니스트의 것으로 주장된 견해로 변화해야 하는가이다. 그리고, 만일 제시된 논변이 그녀의 페미니즘과 여하한 관련이 있다면, 그것은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를 범하거나 자기모순적으로 됨이 곧바로 보여질 수 있다. 그녀는 그녀의 현재 인식론적 견해가 여성들의 지식을 신뢰하지 않게 한다는 근거에서 그녀의 인식론을 변경하도록 설득될 수 없다. 이는 예를 들어, 그녀가 그 인식론적 견해를 바꾸기 전에는, 그녀가 신뢰하지 않는 것이 지식이라는 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402 가장 중요한 직접적 함의는 의문의 여지 없이 분명하다. , 페미니즘에 대한 헌신-즉 여성에 대한 잘못을 바로잡는 것-, 페미니스트라고 스스로 우연히 명명한 일련의 신념들에 관한 여하한 이론을 찬성하는 조금의 추정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gives not the slightest presumption) 일단, 그러한 이론들이 아무런 페미니스트적 정당화를 가질 수 없다는 점이 인식된다면, 그리고 그 명칭이 자의적이고 오도하는 것이라는 점이 인정되면, 그러한 이론들은 마치 그 이름이 아예 없는 것과 똑같이 다루어져야 함이 분명해진다. 그러한 이론들이 대학이나, 진지한 출판사들에 의한 출간물에서 가르쳐지는 것의 적합성에 관한 결정은, ㅇ여성의 과거 억압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부르는 것에는 무엇이건 특별한 고려를 주어야 한다는 잘못된 발상에 의해 왜곡되지 않도록 적극 노력해야 한다.

 

이 논변의 두 번째 이설적인 함의(heretical implication) 이 지식 관련 주제들(knowledge connected subjects)-인식론과 과학-에서는, 페미니스트임에 의해서는 아무런 전문성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과 연관된 변칙 사례가 특정한 분야에서 발생할 수 있다는 페미니스트적인 경각심이나, 그리하여 주목되지 않았던 질문이 그러한 영역에서 제기될 수 있다는 점은, 그 영역에서의 전문지식(expertise)을 구성하지 않는다. 사실, 그 반대 방향이다. 그녀가 특정한 주제에 대하여 충분한 정도로 파악하기 전에는, 페미니스트는, 성과 연관된 변칙 사례가 그 영역 내에 어떻게 숨어있게 되는지 그 방식에 대하여 적정하게 알 수가 없다. 또는 페미니스트적인 의미를 가질 수도 있는 발견되지 않는 사실들을 살펴보기 위하여 어디를 살펴봐야 하는지에 대하여 적정하게 알 수가 없다. 다시금 마술 유비가 유용하다. 만일 랜디가 소수만 이해하는 현대 물리학의 분야(esoteric parts of modern physics)를 다루는 과학자들 사이의 마술사의 기술을 이용한 사기를 찾아내도록 소환되었다면, 그는 마술에 의한 사기의 가능성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보기 위해서 충분한 정도의 물리학을 배워야만 할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의 억압에 대해 얼마나 의식적이건 간에, 그녀가 논리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갖고 있으며 좋은 논변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하고 있지 않다면, 그녀는 가부장적인 논변의 미묘한 실수를 적발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적정한 증거들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과학의 어떠한 분야에서도 부적정한 증거를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주석 38)

 

그리고 이것이 도식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과학도 인식론도, 여성학 분과에서는 제대로 연구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페미니스트의 자격으로서의 페미니스트에 의해서는 제대로 가르쳐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주제들은, 성과 연관된 변칙사례들을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과학과 철학 분과에서 가르쳐져야 한다. , 탐구를 어떻게 수행하는지를 이해하고 변칙 사례를 찾는 법을 이해하고 있는, 그 분야의 충분한 배경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가르쳐져야 한다. 이에 관해서는 아무런 원칙상의 문제도 없다. 왜냐하면 어떠한 이론도 신념도 페미니스트적인 것일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논변은 또한, 그 함의상, 어떠한 이론이나 신념도 가부장적이거나 남근중심적일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만일 신념이나 이론이 내재적으로 해방적일 수 없다면, 그것들은 내재적으로 억압적인 것일 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분과가 새로운 교원을 임명할 때(403) 만일 여성에 대한 관심이 그들로 하여금 페미니스트 인식론이나 페미니스트 무어무어라는 이름을 가진 것에 대한 전문가를 임명할 의무를 지운다고 생각한다면 심각하게 오도된 것이다. 그들은 여성의 대의를, 페미니스트 쟁점이 그 분야에서 제기될 수 있는 방식에 대하여 특별한 자각을 갖고 있는 탁월한 과학자와 철학자를 찾아봄으로써 전진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 일은 전혀 상이한 과업인 것이다.

 

애초에, 페미니즘의 이름으로-외관상 진정성의 봉인을 갖고서-, 페미니스트적인 것으로 주장된 이론들이 접근되는 방식에, 세계에서 모든 차이를 가져온다는 것은 명백하다. 페미니스트 인식론의 흡수자들은 인식론 탐색가들이 아니다. 그래서 인식론을 탐색하다가, 이 이론들의 내용을 지나치다가 들어서게 되었으며, 나중에 가서야, 그것이 페미니스트 인식론이라고 주장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군중을 끌어모은 것은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이며, 그렇게 모인 사람들의 페미니즘에 대한 태도가 필연적으로 그들이 페미니스트적인 것으로 보는 바에까지 확장된 것이다. 페미니즘에 헌신하고 있는 사람들은, 난해함을 그들 자신의 혼동에 돌리지, 페미니스트 이론으로 주장되고 있는 것의 혼동에 돌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뒷받침하는 논변에 대해서 그들이 평가할 시간이나 기술이 거의 없는 결론을 받아들이고 신뢰하기가 더 쉽다.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에 의해 제공된 보호는, 더 나아가, 관련된 이념이, 과학, 인식론 기타 어느 것이라도 페미니즘을 통해서 접근되어야 한다는 발상에 뿌리를 두고 있을 때 훨씬 더 멀리까지 확장된다. 과학이나 인식론을 통해서 페미니즘이 접근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유관한 학계의 훈련된 지성(relevant academic disciplines)의 먼 쪽에서 그들의 주제를 접근하는 사람에게는 거의 어느 것이나 그럴법하게 보일 수 있다. 그들은 과학과 철학에서 모든 진정한 진보의 기초인 상세한 비판의 테크닉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어리석거나 단순화된 이념들의 캐리커처를 반대의견에 귀속시키는 것을 식별해낼 아무런 입장에도 있지 못하다. 점성술은 그 과학적 배경지식이 너무나 박약하여 설득력 있는 일반성에 대한 비판을 할 입장이 아닌 사람들에게 아주 잘 정립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과학자들은 지구에 별이 미치는 영향을 밝혀냈다“) 그러나 점성술은 뉴턴 이후의 물리학에 대해 최소한도라도 익숙한 사람들의 검토를 견뎌낼 수가 없다. 그 일반성에 의해 숨겨진 비일관성은 세부사항 속에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창조과학은 바이블을 가지고 출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번영한다. 그들은 창조론자들에 의해 완전히 둘러싸인 상태로 스스로를 놓아두고는, 고생물학과 과학적 방법론에 관하여 그들이 접하는 것을 선별된 자질구레한 잡동사니(odds and ends)에 한정시킨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코 고생물학으로부터 창조론으로 가는 경로를 택한 것이 아니다. 페미니스트적인 것으로 주장된 인식론적 이념들이 어떠한 장점을 갖고 있건 간에 (404) 그것들은 만일 억압받는 집단에 대한 외부의 규준을 부과하는 것(“남성들은 권력을 가져왔고, 여성의 지식을 기각하기 위한 그들의 가부장적 규율을 사용하여 왔다.”)에 관하여 전면적인 이념을 통하여, 페미니즘의 방향으로부터 접근된다면, 설득력 있는 것을 보일 수가 없다. 이론들을 위한 검증은 다른 방향에서의 접근을 견뎌낼 수 있는 정도를 살펴보는 것이다. , 세부적 비판의 유관한 테크닉을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그리고 페미니스트들의 문헌에서 때때로 등장하는 다소 놀라운 설명에 표준적인인식론에 대한 이해를 의존시키지 않는 이들에 의해서 살펴질 때, 말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내 견해로는 별로 많은 것이 살아남지 않으리라고 본다. 만일 페미니스트 인식론의 전체 발상이 오류에 기반하고 있다면, 그 자체로 그것은 세부사항에서 오류가 있으리라는 나쁜 징조가 된다.(bodes ill) 그리고 이미 충분히 지나가면서 살펴본 엉터리들예를 들어 인식론적 규준과 일차적 규준 사이의 혼동, 지식과 지식 주장 사이의 혼동, 지식의 정치와 인식론의 정치 사이의 혼동들-은 일련의 심각한 문제를 시사한다. 그리고 AlcoffPotter, 페미니스트 인식론이란 숨김없이 정치적인 개입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은 한, 정치가 모든 것의 뿌리에 놓여 있어야 한다는 것은 차치하고, 놓여 있다는 발상에는 이미 근본적인 논리적 문제가 있는 것이다. 정치는 다른 사람들을 조작하여 일련의 욕구된 목적들을 야기하는 문제이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정치적 계산을, 그들이 대략 세계의 유관한 부분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안다고 생각하기 전에는, 정치적 계산을 할 수가 없다. 그것은, 일차적인 신념들이 정치에 선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정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인식론을 전제하는 것이다. 지식이 실제로 무엇이었는가의 뿌리에 권력이 있다고 여기는 인식론의 기반 위에서, 정치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진지하게 그리고 세부적으로 사고해보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곧바로 현기증에 의해 생각을 멈출 수밖에 없게 된다.

 

일단 소위 페미니스트 인식론이라는 것이, 그 명칭은 가짜라는 인식 하에서 접근된다면, 그리고 그 명칭 하에 제시되는 저술들이 마치 그 이름이 거기에 붙어 있지 않은 것처럼 해서 평가된다면, 과장되고 번거로운 것처럼 보이는 어떠한 것도, 달리 입증되기 전까지는 과장되고 번거로운 것으로 여겨져야 하며, 따라서 무시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의 목적The Point of All this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은 과학과 합리성의 이 흥겹고 즐거운 모임에 직면하게 되는 일반적인 문제와 연결될 수 있다.

 

이미 이성을 전적으로 적대하기로 한 사람들을 상대하여 이성은 별로 그리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 우리의 논변과 같은 것은, 그들이 저항하고 있는 과학과 합리성 관념의 표현에 불과한 것으로 기각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정확히도 우리가 출발했던 지점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래도 이런 지적은 의미가 있다.]

 

첫째로, (....) 합리성과 과학에 대한 헌신에 특징적인 구별되는 속성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정련되지 않은 직관을 여하한 사안에서라도 목적 자체로 여기기를 거부하는 일이다.

 

둘째로, 우리는 인기 있는 비합리성의 조류에 휩쓸려갔던 모든 사람들이 구제 불가능하다고 추정할 필요가 없다. 많은 것이 그들이 어디까지 쓸려 갔느냐, 그리고 왜 그들이 그들 자신을 그렇게 휩쓸리게 두었는가에 달려 있다. 논변에 수사로 맞서는 이들, 그리고 그들 스스로를 전문가로 여기는 주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념에 저항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별로 해줄 수 있는게 없다. 또는 (누가 그들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많은 다른 사람들-대부분의 시기 중 우리 중 대부분, 그리고 우리 자신의 주제 밖의 지식을 다루는 사람들-, 혼동되거나 그릇된 신념을 갖고 있을 때, 그 이유는 우리가 논변을 비틀거나 우리가 어쨌거나 믿기로 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실을 날조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나쁜 논변 또는 사실의 문제에 대해 오도하는 거짓된 주장에 의해 오도되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만일 논변에서의 오류가, 오류에 찬 결론의 원인이지, 그 반대 방향으로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다면, 적어도 그 오류가 입증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바꾸는 데 아무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406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것은 그저 설득의 목적을 위해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설득된 자들의 도덕적 결의를 단단하게 하기 위해서도(for stiffening the moral resolution) 중요하다. (...) 페미니즘을 천명하는 이들이 여성의 정당성 있는 이익의 수호자들임이 틀림없다는 가정, 그리고 억압된 집단은 그들 자신의 억압을 규정할 자격이 있다는 모호한 이념과 결합된 그러한 가정은, 페미니스트 인식론이나 페미니스트 무시기무시기에 저항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무모한 이들이, 가부장제, 남근중심주의, 남성중심주의, 그리고 심지어 그들의 젊은이들을 걸신들린 듯이 먹어치우는 이들로 고발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압력은 견뎌내기가 쉽지 않다. (...) 그러나 페미니즘의 명칭으로 취해진 만일 여러 접근들에 대한 관용이 여성의 해방에 대한 관심에 의해 요구되지도 않으며, 그것이 짜증나긴 하지만 내재적으로는 무해한 배경에 불과하지도 않고, 실제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페미니즘이라면 반대한다고 여기는, 여성에 대한 억압 그 자체를 단단히 자리잡게 하고 영속화하는 실제 경향이 있는 적극적인 방해물로 인식된다면, 더 쉬워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여성들로 하여금, 배울 온전한 기회가 보장되기 위해 노력해왔던 철학과 과학의 바로 그 관념들을 가부장적인 것으로 업신여기도록 여성들을 부추기거나, 당신이 구제하려고 투쟁했던 부자연스러운 무지를 무언가를 아는 특수한 방법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하는 여하한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반대해야 한다. (...) 만일 그러한 운동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부른다면, 그 운동을 좌절시키기 위하여 노력을 배가할 이유만을 제공하는 것일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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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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