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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자료/외국문헌소개

[요약번역] 주디스 자르비스 톰슨, <좋음과 조언> 제1부

by 시민교육 2018. 8. 12.

Judith Jarvis Thompson, Amy Gutmann (ed.), Goodness & Advice, Princeton, New Jersey: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1,

 

3

1: 좋음(Part One: Goodness)

 

20세기 영미 도덕철학은, 사실-가치 간극에 관한 관심에 의해 지배되었다. 또는 적어도 간극으로 보이는 것, 정말로, 다리를 놓을 수 없는 간극으로 보이는, 사실과 가치 사이의 간극에 의해서 말이다. 사실의 문제들은 인식론적으로 지성적으로 이해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그것들에 관하여 관찰과 실험이라는 익숙한 방법으로 알아낸다. 가치의 문제들은 상당히 다른 것 같다. 만일 우리가 사실의 문제로부터 가치의 문제들에로 추론함으로써 가치 문제들에 관하여 알게 될 수 없다면, 우리가 가치에 관하여 알게 될 수 있는 방도란 없는 것 같다. 그렇지만, 사실의 문제에서 가치의 문제로 데려다 주는 것이 가능한 추론이란 무엇인가? 그 어떠한 추론이라도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지 알기란 어렵다. 우리는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어떠한 가치 판단에 대하여도, 그것이 참이라고 믿을 좋은 이유를 가지지 않는다고 결론 내려야만 하는가? 많은 도덕 철학자들은, 그것을 끔찍한 결론이라고 여기며, 그것이 보증되지 않음을 보여주려고 한다. (4) 다른 이들은 그것이 타당한 결론이라고 생각하며, 우리가 그렇다고 곤혹스러워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한다. 어느 경우든, 이 모든 것은 외관상의 사실-가치 간극에서 출발한다. 그것이 제기하는 위협에 대응하는 것이, 방금 막 지나간 세기의 영미 도덕철학의 중심적 과업이 되었다.

그것은 그저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사실-가치 간극이 있다는 신념이 이제는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또는 적어도, 중간계급의 교양 있는 공중에게서는 어떤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나는 내가 가르치는 1학년 학생에게 사실-가치 간극에 대해 소개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이미 그것을 알고서 대학에 들어온다.

나는 공중의 구성원들이 대체로, 그리고 나의 대학 1학년생들이, 도덕적 신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실-가치 간극이 있다는 관념에 대한 그들의 수용은, 그 자체로는 더 미묘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만일 내가 학생들에게, 사람들이 그렇게 할 때 이득이 될 때마다 거짓말 하고 속이는 것이 도덕적으로 허용되겠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아니요, 물론 그렇지 않지요.”라고 답한다. 내가 만일 계속 질문을 던져,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점에 관해 의견을 달리한다면 무엇이라고 말하겠냐고 물으면, 그들은 그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잘못 되었어요: ...”라면서 이유를 주는 식으로 답하지 않는다. 거기서 등장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답이다. “그건 그저 의견의 문제일 뿐이에요. 저는 저의 의견을 갖고 있고, 그는 그의 의견을 갖고 있지요. 그리고 그 두 의견이 다른 겁니다.” 또는 그건 당신이 어떻게 느끼느냐의 문제일 뿐이에요. 나는 이런 방식으로 느끼고 그는 저런 방식으로 느끼는 것이지요.”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무엇이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른가에 관하여 아주 많은 신념들을 갖고 있다. 이것들이 그들의 일차적 신념이다. 그들이 오늘날 결여한 것은, 그들의 일차적 도덕적 신념이 참이라고 믿을 좋은 이유가 있다는 이차적 신념이다.

나는 몇몇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이차적 신념의 결여는 그 자체가 그들의 일차적 도덕적 신념에의 확신의 결여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일이 많은 사람들에게 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대부분, 다리를 놓을 수 없는 사실-가치 간극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리하여 어느 누구도 그 어떠한 가치 판단이 참이라고 믿을 좋은 이유가 없다고 결론 내리는 사람들은, 거짓말 하고 사기 치는 것이 그르다고 전적으로 확신을 느낀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차적 신념은, 그들이 일상의 삶으로부터 물러나, 그들의 일차적 신념을 반성하는 경우에만 스스로를 드러낸다.

이런 이차적 신념 결여의 해악은 무엇인가? 만일 도덕적 신념을 참이라 볼 이유가 없으면서도 확신이 있는 것이 가능하다면 (양립가능하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아마도, 어떤 사람이 일정한 수가 내일 로또 당첨번호가 될 것이라고 전적으로 확신하면서, 그 번호가 당첨번호가 되리라고 믿을 아무런 좋은 이유를 갖고 있지 않다고 믿는 것이, 문자 그대로 비일관된 것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기껏해야 분열된 의식을 갖고 있다.(a divided consciousness) 그리고 그가 그 숫자에 많은 것을 거는 것은 명백히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그 어떤 가치판단도 참이라고 믿을 좋은 이유를 갖지 않는다는 결론을 받아들이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말하기와 치팅하기가 그르다고 전적으로 확신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분열된 의식을 갖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거짓말하기와 사기 치기가 그르다는 것이 참이라는 데 많은 것을 거는 것은 그들에게도 어리석은 일일까? 이것들은 좋은 질문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답해져야 할 질문은, 어느 누구라도 그 결론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 조금 더 뒤로 갈 필요가 있다. 사실과 가치 사이에는 다리를 놓을 수 없는 간극이 있는가?

 

7 일반적으로, 사람이 행위한다는 것은, 그가 행위하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건들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 어떤 사람이 행위한다는 것은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 방식으로, 세계가 진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for a person to act is for the world to go in a way that it otherwise would not).

이것이 사람이 행위한다는 것이라면, 그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행위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그가 그 방식으로 행위할 때 세계가 어떠할지와 그에게 열려 있는 다른 방식으로 행위했을 때 세계가 어떠할지의 비교에 달려 있음에 틀림없다고 보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알프레드가, 초인종을 눌러야만 하는지 여부는, 그가 초인종을 눌렀을 때 세계가 어떠할지와 그가 대신에 그의 발을 구르거나 빠르고 경쾌한 춤(jig)을 추거나, 가만히 서 있거나, 등등을 했을 때에 세계가 어떠할지 사이의 비교에 달려 있는 것이다. 행위를 해야 하는지 여부는 그 이외에 다른 어느 것에도 달려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요구되는 비교의 조건들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행위하였을 때의 세계가 어떠할 바가, 그가 그에게 열려 있는 다른 방식 중 하나로 행위하였을 때에 세계가 그러할 바보다 더 나은지 못한지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알프레드가 초인종을 눌렀을 때의 세계가 그가 대신에 그의 발을 굴렀을 때 그러할 세계보다 더 낫다면, 등등이라면, 그는 초인종을 눌러야 한다. 그리고, 만일 세계가 만일 알프레드가 초인종을 눌렀을 때가, 그가 대신이 이러한 것들 중 어느 하나를 했을 때보다 더 낫지 않다면, 그렇다면 그가 초인종을 눌러야 한다는 것은 참이 아니다.

요약하자면, 사람은, 그가 그것을 한다면, 그가 그 시점에게 그에게 열려 있는 다른 어느 것 중 하나를 하는 것보다, 세계가 더 나아질 것이고 오직 그런 경우에만, 어떤 것을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만일 그가 그것을 한다면, 그가 그 시점에게 그에게 열려 있는 다른 것들 중 어느 하나를 하는 것보다, 세계가 더 나빠지는 경우 오직 그 경우에만 사람은 어떤 것을 하지 않아야 한다.

만일 동점일 경우엔? (8)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 그는 어느 쪽도 할 필요가 없지만, 어느 것도 해도 된다. , 어느 것도 다른 것보다 더 하지 않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동점 가능성은 이런 관념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난점을 구성하지 않는다.

현재의 용법을 따라, 나는 그 이념(idea)을 결과주의라고 부르겠다.(주석 2- 그 이념은 G. E. M. Anscombe“Modern Moral Philosophy,” Philosophy 33 (1958)에서 처음으로 이 이름이 주어졌다.그녀의 논문은 G. E. M. Anscombe, Collected Philosophical Papers, vol. 3 (Oxford: Basil Blackwell, 1981)에 재수록되었다. 그 명칭은 불운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도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결과주의자는, 만일 결과가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 효과로 이해된다면, 사람이 어떤 것을 해야 하는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이, 그것을 하는 결과와 그것 이외에 다른 어떤 것을 하는 것의 결과의 비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이 어떤 것을 해야 하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그렇기 보다는, 그가 그것을 한다면 세계가 어떠할 바와 그가 다른 어느 것을 한다면 세계가 어떠할 바 사이의 비교라고 믿는 이가 결과주의자다. 이들은 매우 상이한 이념들이다. 이 차이에 대해서 추가적인 논의는 아래의 주석 3을 보라.) 내가 생각하기에 그 이념은 깊이 만족스럽다. 만일 당신이 그 대신에 다른 것을 하는 것보다 당신이 그것을 한다면 세계가 더 나빠질 텐데 어찌하여 그것을 하는 것이 완전히 괜찮을 수가 있겠는가?

9 나는, 결과주의는 무엇이 그러지 않았을 경우보다 세계를 더 낫고 못하게 만드는가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음을, 강조하겠다. 그 이념은 그 문제는 열린 채로 놓아둔다. *****

(I stress that Consequentialism says nothing at all about what would make the world be better or worse than it otherwise would be. The idea itself leaves that open.)

 

3.

더 좋은(better)”은 그저 좋은의 비교급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질문을 다음과 같이 재표현할 수 있겠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것을 한다면 그러할 바보다 어떤 것을 할 때에 세계까 더 좋은 것이 된다는 것을 참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세계가 좋은 것을 더 많이 담고 있거나 나쁜 것은 더 적게 담고 있거나, 아니면 둘 다 일때, 더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다.

어떤 사건들이 좋으며 어떤 사건들이 나쁜가? 익숙한 발상은, 사건은 누군가의 느낌이 유쾌해지는 그런 경우에 좋고, 사건은 누군가가 고통을 느끼는 것일 때 나쁘다. 이 이념은 벤덤과 존 스튜어트 밀로부터 우리에게로까지 내려왔다.

나는 어떤 사건이 좋거나 나쁜가에 관한 이 이념을,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좋거나 나쁜가에 관한 이 이념을, 좋음에 관한 쾌락주의(Hedonism About Goodness)라고 부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매우 매력적인 이념이라고 생각해왔다.

만일 우리가 좋음에 관한 쾌락주의와 결과주의를 결합한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며 왜 해야 하는지에 관한 이론을 하나 산출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만일 그가 그것을 하였을 때 뒤따르는 쾌락과 고통의 균형이, 그가 그에게 열려 있는 다른 것들 중 어느 하나를 할 경우에 뒤따르는 쾌락과 고통의 균형보다 클 경우 오직 그 경우에만-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그렇기 때문에-어떤 것을 해야만 한다.

물론 우리가 도달한 이념은, 공리주의다. 공리주의는, 결과주의의 한 판본이다. 결과주의자는 그가 좋음에 관한 쾌락주의를 받아들이는 경우 오직 그 경우에만 또한 공리주의자이다.(주석 3- 나는 주석 2에서, 다음 두 이념이 서로 매우 다르다고 하였다. (i)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해야 하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그가 그것을 하는 효과(effects)와 그가 다른 어떤 것을 하는 것의 효과 사이의 비교이다. 그리고 (ii)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해야 하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만일 그가 그것을 한다면 세계가 어떻게 될 것인가와 그가 다른 어떤 것을 한다면 세계가 어떻게 될 것인가 사이의 비교이다. 그리고 나는 (i)이 아니라 (ii), 결과주의자가 선택하는 이념이라고 하였다.

이 이념들 사이의 차이는, 결과주의자가 좋음에 관한 쾌락주의를 거부하는 경우에만 명확하게 출현한다. 결과주의자가 좋음에 관한 쾌락주의를 받아들인다고 가정해보자. 그럴 경우, 그의 견해에서는, 알프레드가 초인종을 눌러야 하는지 여부의 질문에 중요한 것은, 알프레드가 그렇게 하는 것의 효과와 알프레드가 다르게 행위하는 것의 효과일 뿐이다. 예를 들어, 만일 알프레드가 그 초인종을 누른다면, 세계는 그가 초인종을 누르는 것으로 구성되는 사건을 포함할 것이다. 그것은 도덕적으로 무관하다. 왜냐하면 그가 초인종을 누르는 사건으로 구성되는 사건은 그 자체가, 그 효과로서, 누군가가 쾌락을 느끼거나 고통을 느끼는 것으로 구성되는 사건인 것은 아니고, 기껏해야 그 효과중 하나로서 그런 사건을 갖는다

그러나 결과주의자는 좋음에 관한 쾌락주의를 거부할 수도 있다. 특히 그는 어떤 행위들은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 견해에서는, 그렇다면, 도덕적으로 중요한 것은 행위의 효과인 사건들만이 아니다. 그리고 (ii)를 선택하는 것은 (i)에 의해 산출되는 도덕적 결과들과는 상이한 도덕적 결론들을 산출할 수도 있다. ***)

즉 공리주의는 두(1)(2) 이념으로 이루어지고, 어느 것에 대한 반대인지를 분명히 해야 논의가 명확하게 된다. 나는 결과주의에 초점을 맞추겠다.

 

12 좋음에 관한 쾌락주의를 그럴법하게 보이게 만드는 일은 쉽지 않다. 많은 반론들 중에서도, 사람은 누군가가 고통을 느끼는 것에 쾌락을 느낄 수도 있다는 점이 지적되어 왔다. 쾌락을 느끼는 그의 느낌은 정말로 좋은 사건으로 여겨져야 하는가? 우리는 확실히,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서 쾌락을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무언가 적극적으로 사악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데 끌린다. 우리가 좋은 사건으로 여겨지는 것에 관한 직관을 갖고 있는 한, 우리에게는, 직관적으로, 다른 사람의 고통에 쾌락을 느끼는 것이 좋은 사건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좋음에 관한 쾌락주의와 결과주의 사이에는 상호작용이 있다. 우리가 결과주의를 받아들인다고 해보자. 만일 우리가 좋음에 관한 쾌락주의도 또한 받아들인다면, 그 경우 우리는 우리가 그것을 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보고 쾌락을 어떤 사람을 느끼는 일을 야기하리라는 사실이, 우리가 그것을 하여야 한다는 결론에 찬성하여 고려되는 것이라고(count) 생각하게끔 된다. 실제로, 남의 고통을 보고 그가 더욱 쾌락을 느낄수록, 그의 결론은 우리가 그 일을 해야 한다는 결론에 더 강하게 찬성하여 고려된다.

좋음에 관한 쾌락주의에 반대할 만한 점은 그것에 내적이다. 쾌락을 느끼는 것은, 무언가에 의하여 쾌락을 느끼는 것이다.(is feeling pleased by something) 그리고 쾌락의 대상이 서로 달라짐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쾌락들 사이에도 차이의 세계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음에 관한 쾌락주의를 거부한다고 해보자. 만일 우리가 결과주의를 보존하고 싶다면, 우리는 이제 문제를 갖게 된다.

 

4.

그 문제는 심각하다. 왜냐하면 어ᄄᅠᆫ 사건을 좋고 어떤 사건을 나쁘다고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어떤 답이 좋음에 관한 쾌락주의를 대체할 것인가?

13 내재적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 도구적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여 접근이 가능할까.

몇몇 사례들을 구성해보자. 알프레드가 베르타에게 총을 겨누고 발사한다. 그러나 알프레드는 총을 못 맞추고, 그래서 베르타는 살아남는다. 우리는 아마도 베르타의 생존이 내재적으로 좋은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베르타의 죽음은, 발생했더라면, 내재적으로 나쁜 사건이었을 것이다. 운 좋겠도, 그녀의 죽음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에는 난점이 있다. 알프레드가 그의 총을 베르타에게 겨눈 이유가 만일 베르타가 악당처럼 알프레드를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이라면 어떤가? 베르타가, 생존하고 나서, 이제 원래 그녀의 악당 같은 계획대로 알프레드를 죽인다고 해보자. 여전히 베르타의 생존이 내재적을 좋은 사건이었다고 확신하는가? 그리고 그녀의 죽음이 내재적으로 나쁜 사건이었을 것이라고 확신하는가?

우리는 어떤 사람의 생존은-그 사람이 악당이건 아니건 간에- 그 살아난 사람에게 좋고, 그의 죽음은 그 사람에게 좋다고 말하기를 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한 사람에게 좋고 나쁜 사건은, 다른 사람에게 좋고 나쁜 사건과 반대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사건이 어떤 사람에게(for) 좋으냐 나쁘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좋으냐 나쁘냐 여부임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what is in question here is not whether an event is good for or bad for a person, but rather whether it is just plain good or just plain bad.) 그것이 우리의 질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답해져야 할지가 조금도 명확하지가 않다.(it is not in the least clear)

 

14 그러나 사람들에게 좋거나 나쁜 것은 확실히도, 어떤 방식으로든, 사람들이 행위해야 하는가 여부와 유관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사람들에게 좋거나 나쁜 것 그 자체가 그냥 좋으냐 나쁘냐를 결정하는 것인가? 아마도 결과주의자들은 이에 따라, 좋음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이념을 선택할 것이다: 한 사건은, 그것이 다른 사건보다 더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더 나을 경우오직 그 경우에만 더 낫다고. 다시금, 내 팀이 당신 팀을 경기에서 이기는 경우를 생각해보라. “그것은 좋다.”라고 나는 말하고, “그것은 나쁘다라고 당신은 말한다. 나는 물었다: 우리 중 누가 옳은가? 아마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그 사건이 좋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그 사건이 나쁜가, 그리고 그 사건이 좋은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좋으며 그 사건이 나쁜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나쁜가를 알아봄으로써 찾아져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이념을 좋아하는 한 결과주의자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나을 때, 어떤 사람이 이러저러하게 하여 세계가, 만일 그 사람이 그에게 열려 있는 다른 어떠한 것들을 하는 경우의 세계보다 더 낫다. 그리고 만일 그것이 더 낫다면, 그로부터 바로 그것이 그가 해야만 하는 것이라는 결론이 따라나온다.

이 견해에는 난점이 있다. 이 난점은 우리가 앞서 두 번 마주쳤던 난점의 가장 가까운 사촌이다. 당신이 사소한 손실을 겪게 하는 것이 나에게 이득이 많이 된다고 가정해보자. 또한 나의 행위로 인해 당신과 나 이외에 다른 어느 누구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해보자. 이 견해에 의하면, 내가 당신이 손실을 겪도록 해야 한다는 결론이 따라나온다. 이것은 옳을 수가 없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손실을 야기하는 것이 허용되는 사안들이 있을 수는 있겠고, 심지어 도덕적으로 요구되는 사안도 있을 수는 있겠다. 그러나, 내가 행위함으로써 당신이 잃는 것보다 더 많이 얻는다는 사실 그 자체만 가지고서 내가 그렇게 행위해야 하는 것이 참이라는 것에 찬성하여 고려된다는 것은 결코 그럴법한 사고로 생각될 수 없다.

좋음에 관한 이 이념을 거부하는 결과주의자는, 이 결과를 물론 거부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도덕적으로 중요한 것은,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을 위해 더 좋은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상기시킬 수 있다. 그가 말한 것은, 도덕적으로 중요한 것은 더 좋은 것이라는 ja이다.(what matters morally is what is more good).

 

15 그는, 더 많은 수를 위해 더 좋은 어떤 사건들은, 그럼에도 완전히 나쁜 사건들일 수 있다고 선언할 수 있다. 특히, 행위자 자신의 이득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해먹는 것인 사건은, 설사 행위자에게 그 시점에 열려 있는 다른 여느 대안보다 더 많응ㄴ 수를 위해 더 낫다고 할지라도, 나쁜 사건일 수 있다.

이 논지를 강조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It pays to stress this point) 어떤 사람이 해야 하는 것이, 세계를 최선의 것으로 만들-여느 대안보다 더 좋은 것으로 만들-것이라는 점은 거의 필연적 진리처럼 보인다. 이것이 결과주의가 그토록 매력적인 이유이다. 대안보다,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을 위해 더 낫게 세계를 만드는 것이 어떤 사람이 해야만 하는 것이라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필연적 진리가 아닐 뿐더러 거짓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물론 좋음에 관하여 이 이념을 거부하는 결과주의자는, 우리에게 더 나은 이념을 제시할 빚이 있다. 그 이념은 어떤 것이 될 수 있을까?

결과주의에 따르면, ‘해야 한다개념은 좋은의 개념으로 환원된다. 만일 당신이 누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여부를 알고 싶다면, 당신은 그가 그것을 한다면 어떤 사건이 발생할 것이며, 그가 다른 무엇을 한다면 어떤 사건이 발생할 것인지, 그리고 그러한 사건들이 좋을지 나쁠지, 만일 좋거나 나쁘다면, 얼마나 좋거나 나쁠지를 알아야 한다.

16 결과주의를 따랐을 때 도덕에 회의적으로 되는 두 가지 방식이 있을 수 있게 된다.

(i) 각 선택지별 결과를 다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회의적이 되는 것. 그러나 이것은 얕은 회의주의다. 그것이 회의하는 것은 사실의 문제이므로, 그 사실의 문제만 해결되면 사람들이 해야 하는 것은 바로 도출된다. G. E. Moore가 얕은 회의주의자였다. 그는 윌가 최선을 그저 희망하는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만일 우리가 해야만 하는 것을 그럭저럭 하게 된다면, 그건 그냥 우리에게 운이 좋은 일이라는 것이었다. 다른 결과주의자들은 도덕에 관하여 얕은 회의주의자(shallow skeptics)이 되는 전망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목적에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실제로 도달한 것은, 무언가 더 놀랍도록 걱정스럽게 만드는 전망, 즉 도덕에 관한 깊은 회의주의(deep skepticism)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도달한 것은, 설사 우리가 어떤 사람이 행위할 때 발생할 모든 사건들과 그가 그렇게 행위하지 않았을 때 발생할 모든 사건들에 관하여 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인식론적인 곤란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17) 이 사건들 중 어느 것이 좋고 나쁠지를 해결할 아무런 만족스러운 방법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곧 닥치는 것이 사실-가치 간극이며, 그것은 다리를 놓기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는가?

 

우리가 어떤 사건이 좋고 나쁜지 만족스러운 답을 낼 수 없는 이유는, 그런 질문이 없기 때문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결과주의는 그런 질문이 있을 것을 요하며,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해야 하는지 여부를 알 수 있으려면 우리가 그 질문에 답할 수 있을 것을 요한다. 이 점이 오히려 결과주의에 대한 결정적인 반대 근거라고 나는 본다.

만일 어떤 사람이 우리의 주의를 어떤 사건-이를테면 알프레드가 어떤 초인종을 누르는 사건-에 기울인다면, 그리고 그것이 좋은 사건이었는지 나쁜 사건이었는지 아니면 둘 다 아니었는지를 묻는다면, 우리는 , 얼마나 어려운 질문인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대신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우리가 질문한 것을 그만큼 이해하고 있는지 여부를 물어야 한다.

우리는 왜 우리가 그 질문을 이해한다고 생각하는가? 또는, 왜 그토록 많은 도덕철학자들은 그들이 그 질문을 이해한다고 생각하는가? 하나의 답이 G. E. MoorePrincipia Ethica에서 명확하게 출현한다. 이 책으로 20세기 영미 도덕철학이 시작하였다.

무어는, 어떤 것들이 좋고 어떤 것들이 나쁘며 어떤 것들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점이 명백하다고 하였다. 그는 말하길, 좋음은, 좋은 것들 모두가 그리고 좋은 것들만이 공통으로 갖는 속성이라고 하였다. 이 발상은 영어 형용사 좋은이 기능하다는 방식에 대한 과잉단순화된 견해보다 더 나은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 같지 않다. 사람들이 그것은 좋다”(That’s good)이라고 무언가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그들이 의미하는 것은 항상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좋다는 것이다.(what they mean is always that the thing is good in some way.) 아마도 그들은 그것이 좋은 만년필이라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또는 좋은 책, 또는 좋은 사과. (18) 만일 그렇다면 그들이 의미하는 바는, 그것이 어떤 종류의 좋은 것이라는 것이다.(If so, what they mean is that the thing is good of a kind.)

분류는 더 있다. 종류로서 좋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일에서 사용하기에 좋다는 것(that it is good for use in doing this or that)일 수도 있다. 아마도 어떤 것이 치즈케이크를 만드는 데 사용하기에 좋다는 것일 수 있다. 또는 그들은 어떤 것이 이러저러한 또는 그러저러한 것을 위하여 좋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아마도 어떤 것이, 알프레다를 위해, 영국을 위해, 또는 나의 뒷마당에 있는 나무를 위해 좋거나 좋은 것이 될 수 있다.

살마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들은 그는 좋다고 말하며, 그가 체스 경기 실력이 좋다고(he’s good at playing chess), 또는 그가 도덕적으로 좋다-정의롭거나 명예롭거나 관대하다고-고 의미할 수 있다. 경험이나 활동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들은 그것은 좋다(It’s good)”고 말하며, 그것이 유쾌하거나 즐겁다고 의미할 수 있다.

사람들은 말하는(say) 것이 그것은 좋다거나 그는 좋다또는 그것은 좋다는 말일 때, 사람들이 의미하는 바는-그 말이 아니라 사람들이 의미하는 바는-, 내가 드러낸 방식들 중 이런 종류의 또는 저런 종류의 방식으로 좋다는 것이다.(주석 4) 그들이 그 말들을 주장함에 있어서 그러한 말들로 의미한 바를 명확하게 만드는 것은, 그 맥락이다. , 그들이 그 전에 한 언급, 그들의 청자가 그들이 의미하는 바로 생각할 법한 것과 같은 것이다. 만일 그 맥락이 이 점을 명확하게 해주지 않는다면, 그들의 청자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게 된다.(their hearers are at a loss)

우리는, 내가 드러낸 어떤 것들이 좋을 수 있는 방식들이, 어떤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근거들은 아님을 명확히 해야 한다. 성 프란치스코는 좋았다. 어떻게 좋았는가? 글쎄, 그는 도덕적으로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정의롭고 친절했다. 초콜릿은 좋다. 어떻게 좋은가? 글쎄, 그건 맛이 좋다. 만일 내가 당신에게 제공한 것이 성 프란치스코와 초콜릿이 좋다고 생각할 근거들이라면, 즉 그 둘 다 속성 좋음을 보유한다고 생각할 근거들이라면, 어떤 것이 더 좋냐(better)고 묻는 것이 조리에 맞아야 한다. 왜냐하면 형용사 좋은은 비교급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19) 그러나 성 프란치스코가 초콜릿보다 더 좋았는지 묻는 질문을 이치에 닿는다고 이해하는가?

나는 우리가, 좋음이라는 속성 같은 것은 없다고 결론내리는 것이 낫다고 본다. 우리가 표현하는 바대로의 모든 좋음은, 어떤 방식으로서의 좋음이다. 어떤 것이 좋은가라고 질문을 받았을 때-어떤 것이 책인지 파이 뚜껑인지 사람인지 사건인지 여부인-맥락 또는 화자가, 좋은 것이 되는 유관한 방식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으며, 심지어 어떤 질문이 던져졌는가를 알 수도 없다.

특히 사건들을 살펴보자. 누군가, 알프레드의 초인종 누르기가 좋은 사건인지 또는 좋은 사건이 될 것인지를 묻는다고 해보자. 우리는 무슨 의미인가? 당신은 그것이 누군가에게 좋을 것인가를 의미하는가?”로 대답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바로 의미된 것인지, 아니면 어떤 다른 것이 의미되었는지를 이야기 듣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문제되고 있는 것이 대신에 그 사건이 그냥 좋은지 아닌지, 순전히 좋은지 아닌지의 질문을 듣지 않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없으니까.

 

8.

결과주의는, 그렇다면, 사라져야 한다. 결과주의를 무엇이 대체해야 하는가는 어려운 질문이다. 결과주의가 매우 매력적인 이념에 기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더 어려운 질문이 된다. 나는 그 질문은 II부에서 집중하겠다. 그 때까지는, 그러나, 만일 우리가 어떤 것이 그냥, 순수하게 좋은지 아닌지를 묻는 질문을 거부한다면, 우리가 얻게 되는 몇가지 것들을 주목할 가치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 ,우리는 이제 다리를 놓을 수 없는 사실-가치 간극(an unbridgeable fact-value gap)을 대면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어떤 만년필에 관하여 많은 사실들을 알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이 어떤 양의 잉크를 채울 수 있다는 점, 그것이 새지 않는다는 점, 그 촉이 매끄럽다는 점 등등을 알고 있다고 해보자. , 그런데 그것은 좋은 만년필인가?(good fountain pen?) 다시금, 우리가 어떤 사건들이 야기할 것에 대해 많은 사실들을 알고 있다고 해보자. 그 사건이 알프레드가 어떤 따뜻한 레모네이드를 마시는 일이라고 해보자. 그러고는, 우리가, 특히, 알프레드가 현재 처한 주어진 조건에서 무엇을 야기할 것인지를 알고 있다고 해보자. 이를테면, 그가 인후염이 있다고 해보자. , 그러나 알프레드가 어떤 따뜻한 레모네이드를 마시는 것은 그에게 좋을 것인가?(good for him?) 다시금, 우리가 어떤 브랜디의 맛이 어떤가에 관하여 많은 사실들을 알고 있다고 해보자. (나는 이 묘사를 New York Times의 브랜디에 관한 기사에서 취하였다.) , 그러나 그 브랜디는 맛이 좋은가?(taste good?) 만일 사실-가치 간극들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그 중 셋을 든 셈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여기서, 사실들은 알고 있으면서, 어떤 고려사항-세 사안에서 같은 고려사항-이 사실로부터 가치로 우리를 데려다 줄 것인가에 관하여 들어야 할 필요가 있는 그런 세 사안을 앞에 두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그럴법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년필에 관한 사실로부터 그것이 좋은 만년필이라는 결론으로 우리를 건너가게 해줄 자격이 있는 그런 것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알프레드와 따뜻한 레모네이드에 관한 사실로부터 알프레드의 레모네이드 마시기가 그에게 좋을 것이라는 결론으로 우리가 건너갈 자격을 부여하는 것으로는 전혀 그럴법하게 생각되지 않는다. 또는 브랜디가 어떤 맛이 나는가에 관한 사실로부터 그것이 맛이 좋다는 결론으로 건너갈 자격을 부여할 것과 동일하다고는 전혀 그럴법하게 생각되지 않는다.

만년필에 관한 어떤 사실이, 그것이 좋은 만년필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을 보증하는가? 글쎄, 몇 가지 것들은 명확하다. 그것은 새지 않아야 하고, 튼튼해야 하며, 새로 잉크를 채우기 전에 몇 페이지는 쓸 수 있도록 충분한 양의 잉크를 채울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의 촉은 부드러워서 쓰고 있는 종이를 찢어서는 안 된다. 좋은 만년필은, 만년필을 원하는 이의 전형적 목적들에 잘 기여하는 펜이다. 그리고 어떤 펜이 이 목적들에 잘 기여하는가는, 우리가 항상 알아낼 수 있고 알아내는 무언가이다.

만일 알프레드가 인후염이 있다면, 그가 얼마간의 따뜻한 레모네이드를 마시는 사건은 그에게 좋을 것이다. 왜 그런가? 글쎄, 그가 얼마간의 따뜻한 레모네이드를 마시는 것이 그의 기분을 더 좋게 해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잘못 생각한 것일 수도 있다. 아마도 그는 인후염 뿐만 궤양(ulcer as well as a sore thorat)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 경우에는, 아마도 (21) 따뜻한 레모네이드를 마시는 일은 그를 기분이 더 좋게 만들어주지 않고, 사실 그에게 나쁠 것이다. 우리는, 그 사건이 그에게 좋은지 여부의 질문과 관련이 있는 고려사항들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완전히 잘 알고 있다.

어떤 것이 맛이 좋은지는 더 번잡한 문제이다. 이것은,-“달고” “시고” “쓰고” “것을 넘어서면- 맛의 현상적인 특성을 거의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대부분에게는, 다소 과장이 되기 때문이다. 브랜디를 소박하다든지 우아하다든지 기술하기 위해서는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더군다나, 우리는 맛에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전문가들이 알아채는 것들을 알아채지 않는다. 우리에게 사물들의 맛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해본다면, 이는 매우 놀라운 일일 수 있다. 여기서 제기되는 문제는 흥미롭고, 나는 철학자들이 이 문제를 충분히 연구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목적에서는, 그러나, 아마도, 다음 두 가지에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 우리 모두에게 명백한 것으로서, 무언가의 맛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liking the taste of something)과 무언가의 맛이 좋다는 것(and its tasting good)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스트로베리 쿨에이드의 맛을 좋아한다. 그것은 아주 잘 팔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트로베리 쿨 에이드는 맛이 좋지 않다. (주석 6-내가 여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용어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키치라고 가장 잘 기술될 수 있는 것을 좋아한다. 쿨에이드는 맛의 영역에서 키치(kitsch).)

 

22 도덕철학자에게 특별한 흥미의 대상이 되는, 좋은 것이 되는 방식들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II부에서 다시 살펴보겠다. 어쨌든, 우리의 지성적 삶이 다리를 놓을 수 없는 사실-가치 간극에 의해 어디서나 엇갈리고 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참이 아니라는 것이다. 형용사 좋은, 영어에서 가장 흔히 쓰이는 단어들 중 하나다. 우리가 해왔어야 하는 것은,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살펴보고, 무엇이 실제로 그것이 적용가능한지 아닌지를 결정해주는지를 살펴보는 일이다.

 

9

좋은 것이 되는 방식들(the ways of being good)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이득이 있다. 많은 현대 도덕철학자들이 의지해왔지만, 다른 철학자들에게는 매우 알수 없어 보이는(semmed ver dark) 개념이 있다. 내가 언급하는 개념이란 어떤 사람이 이러이러한 것을 할 이유’(reason for a person to do such and such)라는 개념이다. 그것은, ‘해야 한다ought’ 개념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몇몇 철학자들은, 그에게 할 이유가 있지 않은 한은, 그 사람이 어떤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은 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또는 한층 더 강하게,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어떤 사람이 해야 하는 것은, 정확히도 그에게 가장 큰 이유가 있는 것이다.(what a person ought to do is precisely what there is most reason for him to do.) 나는 당분간은 해야 한다개념이 행위할 이유reason for acting’ 개념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제쳐놓고자 한다. 대신에 나는 그 사전에 물어야만 하는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무엇이 어떤 사람이 이러이러한 일을 할 이유인가?(whta is a resason for a person to do such and such?)

시작하기에 충분히 쉽다: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할 이유는, 그가 그것을 하는 것을 찬성하는 것으로 고려되는 이유이다.(a reason for a person to do a thing is something that counts in favor of his doing it-역자: 여기서 고려되다count는 이유로 셈해진다, 산정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가? (주석 7- T. M. Scanlon은 이유 개념을 근본적(primitive)으로 본다. 그러나 나는 section 12 이후에서 드러날 바대로, X가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하는 데 찬성하는 이유로 고려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X가 그 사람이 그것을 할 이유라는 답변보다 더 정보를 많이 주는, 더 나은 다른 답변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중 나는 두 가지를 논의하겠다.

그러나 그것들을 살펴보기 전에 두 가지 규격화(regimentations)를 채택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 규격화는 이유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표현법(locutions)의 흩뿌려짐(scatter)이 존재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우리는 그들 중 가장 흔한 것들을 어떻게 연관지을 것인지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

내가 출발하게 될 가장 약한 사례는 다음과 같다:

 

(1) 알프레드가 초인종을 누를 이유, X가 있다. (There is a reason for Alfred to press the doorbell, namely X.)

 

나는 (1)은 알프레드가, X가 그가 초인종을 누를 이유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일관된다고 여긴다. 실제로, 나는 (1), 그에게는 초인종을 누를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도 일관된다고 여긴다.

실제의, 가장 흔한 다음 표현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2) 알프레드는 초인종을 누를 이유, X를 갖고 있다.(Alfred has a reason for pressing the doorbell, namely X)

 

단순함을 위해, 나는 용법에 관한 논증은 넘어가겠다. 나는 그럴 이유가 실제로 없는 한, 알프레드가 초인종을 누를 이유를 가질 수 없다고 여기겠다. 그래서 나는 (2)(1)을 함축한다고 여기겠다. 다른 한편으로, 알프레드 자신이 X가 그 초인종을 누를 이유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 나는 또한 알프레드가 초인종을 누를 이유, X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 참일 수는 없다고 여긴다. 그래서 나는 비록 (2)(1)을 함축하지만, (1)(2)를 함축하지 않는다고 여길 것이다. [역자- 그러니까 이유를 가짐은, 실제로 이유가 있으며 그리고(AND) 그 사람이 그것이 행위할 이유라고 생각하는 사태까지 연언으로 이어진 사태이다.] 나는 이 결정이 (2)의 가장 흔한 용법을 실제로 포착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런지 아닌지는 우리의 목적에 중요치는 않다.

알프레드가 지금 초인종을 누르는 중이라고 해보자.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 알프레드가 초인종을 누르는 이유는 X이다.

 

나는 (3)(2)보다 더 강한 것(stronger)이라고 본다. 알프레드는 초인종을 누를 이유, X를 가지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누르지 않을 수 있다. [역자-표현 (3)은 이유가 있음, 이유가 있다고 생각함, 그리고 바로 그 이유대로 행위함이라는 세 사태의 연언이다.] (아마도 그는 초인종을 누르지 않을 더 좋은 이유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24) 이와는 대조적으로, 알프레드가 X 이유를 이유로 초인종을 누르지 않는 한, 그리고 그래서 알프레드가 실제로 초인종을 누르지 않는 한 X는 알프레드가 초인종을 누르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그래서 (3)(2)를 함축하지만, (3)(2)에 의해 함축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3)(2)보다 더 강하고[역자-더 많은 사태를 연언으로 이야기하므로 주장내용이 더 많다], (2)(1)보다 더 강하다. 나는 (1), (2), 그리고 (3)에 관한 이와 같은 용법상의 결정에는 아무런 이론적 쟁점도 걸려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문제되는 것이 (한낱) 규격화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것을 또는 어떤 것에 믿을, 원할, 기대할, 후회할, 희망할, 분노할 이유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리하여 될 수 있으며 가질 수 있는 이유라면 무엇이든 그것들에 적용된다.

두 번째 규격화는, 우리가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일반적인 특성서술(a general characterization of what a reason is)에 고정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X가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유는 누군가가 그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무언가이다.(A reason is something one might reason from.) 사람은 무엇으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가? 알프레드가 베르타의 돼지가 날 수 있다고 믿는다고 가정해보자. 그 상황이 다음과 같다고 해보자: 알프레드는 모든 돼지가 날 수 있다고 믿으며, 그러므로 베르타의 돼지도 날 수 있다고 결론 내린다. 우리는 세 선택지가 있다.

(i) 우리는 베르타의 돼지가 날 수 있다고 믿을 알프레드의 이유는, , 알프레드가, 모든 돼지는 날 수 있다고 믿는다는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이 선택지가 그리 괜찮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 명백하다고 생각한다. 알프레드는, , 알프레드가 모든 돼지는 날 수 있다고 믿는다는 사실로부터 베르타의 돼지가 날 수 있다를 추론하지 않는다. 그의 추론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모든 돼지는 날 수 있다. 그러므로 베르타의 돼지는 날 수 있다.” 그의 전제는, , 알프레드가, 모든 돼지가 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돼지가 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이것 또는 저것을 믿는다는 사실로부터 일정한 결론들을 추론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가능한 것 같다. 찰스가 수년 동안 도라를 사랑해 왔지만, 그의 구애(suit)는 항상 가망이 없어 보였다. (25) 그는 갑자기, 도라도 그를 사랑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가 그녀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다는 바로 그 사실로부터, 그는, 그녀의 과거 행동에 그를 향한 그녀의 사랑의 어떤 증거가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결론 내린다. 당시에는 그 자신이 알아채지 못하였고, 또한 지금도 그에게 여전히 불명확한 증거가 말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그가 이것 또는 저것을 믿는다는 사실로부터 결론을 추론해내는 사안들은, 확실히 드물수 밖에 없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무언가를 믿는다는 점으로부터가 아니라, 우리가 믿고 있는 내용으로부터 추론한다.(normally, we reason not from out believing something, but rather from what we believe.)

두 번째 가능한 알프레드에 대한 기술 (ii), 그가 베르타의 돼지가 날 수 있다고 믿을 그의 이유는, 모든 돼지는 날 수 있다는 명제라는 것이다. 그 명제는 거짓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건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할 수도 있다: 알프레드는 그것을 참이라고 생각하며, 그로부터 그의 결론에로 추론한다. 더 일반적으로, 우리는 어떤 이유는 항상, 참이나 거짓인, 그것을 참으로 생각하는 누군가가 그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명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어떤 명제가 참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으로부터 추론한다면, 그것은 그의 이유이다.(and where a person thinks a proposition is true and reasons from it, it is his reason.)

알프레드에 대한 세 번째의 가능한 기술 (iii)는 알프레드는 베르타의 돼지가 날 수 있다고 믿을 아무런 이유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만일 우리가 이유란 항상 사실이라고 여긴다면, 말하게 되는 것이다. 알프레드는 스스로는 베르타의 돼지가 날 수 있다고 믿을 나의 이유는, 모든 돼지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할 수는 있겠다. 만일 그것이 그가 말하는 것이라면, 비록 그가 베르타의 돼지가 날 수 있다고 믿을 이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그는 실제로는 그런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돼지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은 없기 때문이다.

(iii)을 선택하는 일이, 알프레드가 베르타의 돼지가 날 수 있다고 왜 믿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양립가능하다는 점이 주목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가 모든 돼지들이 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베르타의 돼지가 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베르타의 돼지가 날 수 있다고 그가 믿는 것을 설명(explain)할 수 있다. 우리는 베르타의 돼지가 날 수 있다고 그가 믿는 것을, 그에게 그것을 믿을 이유를 제시함으로써는 설명할 수 없다. (26) 왜냐하면 (iii)에 의하면, 그는 그런 이유를 전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모든 돼지들이 날 수 있다고 믿으며, 그의 믿음이 비록 거짓이긴 하지만, 그가 그 믿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왜 그가 베르타의 돼지가 날 수 있다고 믿는지의 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ii)(iii) 사이에 어느 쪽으로 택하는가의 결정에, 아무런 깊은 이론적 쟁점도 달려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왜냐하면 나는, 이유들이 명제들이라는 가정 위에서 우리가 이유들에 관하여 하는 그 어떠한 흥미로운 주장도, 그것들이 사실들이라는 가정 위에서 이유들에 관한 동등하게 타당하거나 부당한 유비를 가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금, 그것이 바로 내가, 여기서 문제되는 것이 (그저) 규격화라고 여기는 이유이다. 이유들을 사실들로 여기는 것이, 나에게는 그것들을 명제들로 여기는 것보다 용법과 잘 들어맞는 것 같으므로, 나는 그것들을 사실들로 여기겠다.

다음과 같은 점이 아마도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어떤 이유가 사실이라는 점을, 그저 그것이 무언가를 믿을 이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무언가를 할 이유인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성립한다고 본다. 실제로, 그것이 무언가를 느낄 이유인 경우나, 무언가를 원하는 이유인 경우나 등등에도, 이유는 사실이다. , 그것이 무엇을 할 이유가 된다에서 그 무엇에 어떤 것이 들어가더라도, 이유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제 규격화는 이만하면 되었다. 나는 이 절의 서두에서,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할 이유는, 그가 그것을 하는 것을 찬성하는 것으로 고려되는 것이라고 하였다.(is something that counts in favor of his doing it) 우리의 두 번째 규격화를 감안하며, 우리는 이 논점을 다음과 같이 다시 표현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할 이유는, 그가 그것을 하는 것을 찬성하는 것으로 고려되는 사실이다. 어떤 사실들이 그러한 사실들인가? 나는 문헌에서 발견될 수 있는 두 답을 논의하겠다고 말했다.

 

10.

첫 번째 답에 의하면, 모든 각 행위 이유는 욕구 또는 소망(desire or want)이다.(주석 8- 내가 여기서 기술하고 있는 것은, Dennis Stampe in “The Authority of Desire,” Philosophical Review (July 1987)에 의해 찬성하여 논의된 이론의 단순화된 판본이다.) 알프레드가 베르타를 기쁘게 하기를 원한다고 가정해보자. 또한 그가 어떤 초인종을 누르는 것이 그녀를 기쁘게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27) 이 견해에서는, 알프레드가 그 초인종을 누를 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 그가 베르타를 기쁘게 하기를 원한다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가 그녀를 기쁘게 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그가 초인종을 누를 하나의 이유로 만드는 것은, 그의 초인종 누르기가 그녀를 기쁘게 하리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사실이므로, 그가 그녀를 기쁘게 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그가 초인종을 누를 하나의 이유이다.

우리의 첫 번째 규격화를 감안하면, 물론 다음과 같은 것이 성립할 수 있다. , 비록

 

(1) 알프레드가 그 초인종을 누를 하나의 이유, 즉 그가 베르타를 기쁘게 하기를 원한다는 것이 있다.(There is a reason for Alfred to press the doorbell, namely his wanting to please Bertha)

가 참이지만,

 

(2) 알프레드는 그 초인종을 누를 하나의 이유, 즉 그가 베르타를 기쁘게 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갖고 있다

 

는 거짓일 수 있다. 어쨌거나, 그는 그가 그 초인종을 누르는 것이 베르타를 기쁘게 한다는 점을 모를 수도 있고, 그래서 그가 베르타를 기쁘게 하기를 원한다는 것이 그 초인종을 누를 하나의 이유라는 점을 모를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실제로 그가 초인종을 누르는 것이 그녀를 기쁘게 하리라는 점을 안다면, 그래서 그가 그녀를 기쁘게 하기를 원하는 것이 그 초인종을 누를 하나의 이유라고 생각한다면, 그 경우에는 (2)는 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유가 어떻게 하여 그가 초인종을 울리는 것에 찬성하는 것으로 고려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그가 그 초인종을 울리는 것이 그에게 매력적으로 만든다.

이 견해는, 우리가 행위의 나쁜 이유들을 갖는 것과 전적으로 양립가능하다. 알프레드가 베르타를 짜증나게 하기를 원한다고, 그리고 그가 그 초인종을 누르는 것이 실제로 그녀를 짜증나게 하리라고 가정해보자. 그 경우, 그에게는 그 초인종을 누를 하나의 이유, 즉 그가 베르타를 짜증나게 하기를 원한다는 것이 있다. 만일 그가 이 점을 안다면, 그는 그 초인종을 누를 이유를 갖고 있는 것이다.-그리고 그 이유는 그가 그 초인종을 누르는 것을 찬성하는 것으로 고려된다. 그 이유가 그의 초인종 누르기를 그에게 매력적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 결과는 되어야 할 방향대로 된 것이다. 왜냐하면 행위 이유들에 관한 그 어떠한 이론도, 좋은 이유들뿐만 아니라 나쁜 이유들이 있을 가능성, 그리고 실제로 있다는 사실을 허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28 그 이론은 또한, 행위의 더 강한 이유나 더 약한 이유가 있는 것도 허용해야 한다: 이 차이는 (그 견해가 말하길) 소망의 강함이나 약함에 달려 있다고 한다.

우리의 두 번째 규격화를 감안하면, 그러나, 이것은 겉보기 처럼 그렇게 성공적이지 않다. 욕구란 아마도 정신적 상태(mental state)일 것이다. 예를 들어, 그리고 더 정확하게 말해서 다음과 같을 것이다: 알프레드가 베르타를 기쁘게 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일정한 정신 상태에 그가 있다는 것이다.(Alfred’s wanting to pleas Bertha consists in his being in a certain mental state) 알프레드가 베르타를 짜증나게 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그가 상이한 정신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그가 어떤 정신 상태에 있다는 것은 사실(fact)인가? 확실히 아니다: 그 발상은 범주 오류를 범하는 것으로 보인다.(that idea seems to be a catergory mistake)

만일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원하는 것이 그 사람이 어떤 정신 상태에 있다는 것이라면, 그 어떠한 욕구도 행위의 이유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어떠한 욕구도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의 교정이 거의 머리에 떠오른다. 이 첫 번째 이론의 친구라 할법한 이론은, 행위의 이유는 그 자체가 욕구는 아니고, 대신에 그것은 그 사람이 그 욕구를 갖는다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알프레드가 그 초인종을 누를 이유는, 알프레드가 베르타를 기쁘게 (또는 짜증나게) 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그 사실이- 그가 그 초인종을 누르는 것을 그에게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론은 여전히 성공하지 못한다. 내가 앞서 말했듯이, 이유란 사람이 그것으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무언가이다. 어떤 사람이, 그가 무언가를 원한다는 사실로부터 그 무언가로 추론해 나가는 그런 사안들이 확실히 있기는 하다. 특히, 어떤 사람이 그가 무언가를 원한다는 사실을 그 무언가를 하는 이유로 여기는 그런 사안들이 있다. 캐롤이 과거에 우유를 항상 싫어해왔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그녀는 자신이 이제 얼마간의 우유를 마시고 싶어한다는 점을 알게 된다. 사람들이 음식에 대해 갖는 소망이, 영양분의 결핍으로부터 보통 발생하며, 그래서, 예를 들어 얼마간의 우유를 마시기를 원하는 것은 칼슘이 부족해서 발생할 수 있다는 그런 이론이 있다. 그 이론이 참이고, 캐롤이 그 이론을 믿는다고 가정해보자. 그 경우 그녀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여기에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방금 막 알아챈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난 얼마간의 우유를 마시기를 원해. 우유 마시기를 원하는 것은 때때로 칼슘 부족에서 발생하지. 그러므로 나는 (우유가 공급해주는) 얼마간의 칼슘을 아마도 필요로 할 거야. 그러므로 내가 얼마간의 우유를 원하는 것은, 내가 그것을 얼마간 마실 하나의 이유야.” 그러나 이것은 아마도 상대적으로 드문 종류의 사안일 것이다: 통상적으로는, 우리는 우리가 무언가를 원한다는 사실로부터 추론하지 않으며, 우리가 원하는 것에 관한 사실들 및 그것이 어떻게 얻어질 수 있는가에 관한 사실들로부터 추론한다.

그녀가 무언가를 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그것을 할 하나의 이유로 여기는 캐롤은, 우리에게 찰스를 상기시킬 수밖에 없다. 찰스는, 어떤 것을, 다른 것을 믿을 이유로 생각한다. 두 종류 사안 모두 확실히 드물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각 행위 이유가, 욕구라고 상정할 수가 없다. 기껏해야 일부만이 그럴 뿐이다.

 

11.

나는 내가 어떤 사실들이 행위의 이유들인지의 질문에 두 답변을 논의하겠다고 말했다. 운 좋게도 우리는 두 번째는 간략하게 다룰 수 있겠다.

이 두 번째 견해에서는, 행위의 모든 각 이유는, 욕구와 신념의 조합(? 결합?)(combination(a pair? a conjunction?)이다.(주석 10- 영향력 있는 사례는 도널드 데이비슨의, “Actions, Reasons, and Causes,” Journal of Philosophy 60 (1963)에서의 행위의 이유들에 대한 해명이다. 이 논문은 그의 Essays on Actions and Event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0)에 재수록되었다. 데이비슨에 따르면, 무엇을 찬성하는 그 어떠한 태도도, 요구되는 욕구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이 이론의 친구 이론은 아주 많은데, 전형적으로는, 그 조합의 양식(the mode of combination)이 무엇인지의 질문은 수고를 들여 다루지 않으며, 그래서 나는 그 문제는 열린 채로 놓아둔다.) 알프레드가 베르타를 기쁘게 하기를 원하며 그가 초인종을 누르는 것이 그녀를 기쁘게 한다고 믿는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이 견해에서는, 알프레드가 그 초인종을 누를 하나의 이유가, 즉 그가 베르타르르 기쁘게 하기를 원하는 것과 그가 초인종을 누르는 것이 그녀를 기쁘게 할 것이라는 그의 믿음으로 구성된 조합이 있는 것이다. 이에 더해, 알프레드는 그 초인종을 누를 이유를, (30) , 그것이 그렇게 하는 것을 그에게 매력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그의 초인종 누르기를 찬성하는 것으로 고려되는 그 소망/믿음 조합을 갖고 있다.

우리는, 내가 말했듯이, 이 이론을 간략히 다룰 수 있다. 우리의 두 번째 규격화를 감안할 때, 이유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이론을 행위할 이유가 소망/믿음 조합이 아니고, 어떤 사람이 이것을 원한다는 사실과 그가 그것을 믿는다는 사실로 구성된 조합이라고 말하는 이론으로 재이해하는 것이 낫겠다. 그러나, 이유는 주체가 그것으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무언가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이, 사람이 그가 이것을 원한다는 사실로부터 무언가를 추론하는 일은 드물다. 그리고 사람이 그가 그 점을 믿는다는 사실로부터 무언가로 추론해 나가는 것도 드물다.-캐롤과 찰스의 사안들을 기억하라- 그리고 그래서 아마도, 적어도, 사람이 그가 이것을 원한다는 사실과 그 원한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사실로부터 무언가로 추론해 나가는 것은 그만큼 드물 것이다.

왜 그토록 많은 철학자들이, 행위하기의 이유가 소망/믿음 조합이라고 말하는 데 끌릴까? 나는 왜 그런지 이유가 꽤 명확하다고 생각한다. 첫째, 그들은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할 이유가 그가 그것을 하는 것을 설명한다고 생각한다.(주석 11- 이 동기는 Davidson, “Action, Reasons, and Causes”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나는 또한 좀 위험을 감수하여 추측하면 Stampe, “The Authority of Desire”에서 제시된 이론도 이 동기가 추동했다고 본다.) 왜 그런가? 알프레드가 어떤 이유에서 초인종을 누르고 있다면, 우리가 그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냈을 때 우리는 그가 왜 그 초인종을 눌렀는지를 알아내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그럴법해 보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그의 초인종 누르기에 관한 설명을 알아내게 된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알아낸 것, 즉 그 초인종을 누른 그의 이유는, 그 자체가 그가 그 초인종을 누른 것을 설명하낟.

흄을 따라, 많은 현대 철학자들이 그러듯이, 우리는, 둘째로, 무언가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하는 것을 설명한다면, 그것은 오직 그 무언가가 소망과 믿음을 담고 있을 때에만 그렇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무언가는, 오직 그것이, 소망과 믿음을 담고 있을 때, 특히 그것 때문에 알프레드가 초인종을 누른 소망과 믿음을 담고 있을 때에만, 알프레드의 초인종 누르기를 설명한다.

 

31 이로부터, 어떤 사람의 행위하기 이유는, 소망과 믿음을 담는다는 결론이 따라 나온다: 행위하기의 이유는 소망/믿음의 조합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공하지 못한다. 흄을 따르자면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은, 그가 이것을 원하고 저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것을 원하고 저것을 믿는다는 사실은, 그것을 하는 그의 이유일 가능성은 낮다: 그러한 사안들은 드물다. 더 통상적인 사안들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알프레드에게, 왜 그가 그 초인종을 눌렀냐고 묻자, 그는 답한다: ”베르타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가 이것을 말하였다는 점으로부터, 그가 베르타를 기쁘게 하기를 원한다는 점, 그리고 그의 초인종 누르기가 그녀를 기쁘게 하리라고 믿었다는 점을 알아낸다. 그리고 그것-그가 베르타를 기쁘게 하기를 원하고 그의 초인종 누르기가 그녀를 기쁘게 하리라고 믿는다는 그 복합 사실(the compound fact), 정말로 그의 초인종 누르기를 설명한다. 그러나 그 복합 사실은, 초인종을 누른 그의 이유는 아니다.

이것은, 왜 우리가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할 아무런 이유가 없고 단지 그런 이유가 있다고 그가 생각한 경우에도, 어떤 사람이 그것을 왜 하는지를 알아낼 수 있는 이유이다. 예를 들어, 첫째로, 믿음의 이유들을 살펴보자. 나는 독자 여러분에게 알프레드가 베르타의 돼지가 날 수 있다고 믿게끔 상상하게 하였다. 우리는 그에게 왜 그가 그것을 믿냐고 묻자, 그는 모든 돼지는 날 수 있어요라고 말한다. 우리의 두 번째 규격화에 따르면, 알프레드는, 베르타의 돼지가 날 수 있다고 믿을 아무런 이유도 없다. 왜냐하면 모든 돼지가 날 수 있다는 그런 사실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가 베르타의 돼지가 날 수 있다고 믿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 그는 이것을, 그가 모든 돼지는 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이는 행위의 이유들에도 마찬가지로 성립한다. 우리가 알프레드에게, 왜 그가 어떤 초인종을 누르고 있냐고 묻자, 그는 답한다: “베르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그러나 그의 초인종 누르기가 실제로는 베르타를 기쁘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해보자. 오히려 그녀를 짜증나게 할 것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럴 경우, 알프레드는 (32) 그 초인종을 누를 아무런 이유를 갖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초인종을 누르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 그가 베르타를 기쁘게 하기를 원하며 그가 초인종을 누르는 것이 베르타를 기쁘게 하리라고 믿기 때문에, 초인종을 누르고 있는 것이다.

 

12.

그렇다면 어떤 것을 할 이유란 무엇인가? 그것을 하는 것을 찬성하는 것으로 고려되는 무언가이다.(It is something that counts in favor of doing it) 우리의 두 번째 규격화를 감안하면, 우리는 이 논점을 다음과 같이 다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할 이유는, 그가 그것을 하는 것에 찬성하는 것으로 고려되는 사실이다. 어떤 사실들이 그러한 사실들인가? 우리는 이제 문헌에서 발견될 수 있는 두 답변을 거부했다.

나는 모든 좋음이 어떤 방식으로서의 좋음이다(all goodness is goodness in a way)라는 사실을 자유로이 활용하여, 하나의 사실이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할 이유로 되는 다음과 같은 충분 조건을 살펴보는 것이 가치 있으리라 제안한다: 어떤 사실은, 만일 그 사실이 그가 그것을 하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 좋다는 그러한 사실이라면,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할 하나의 이유이다.(a fact is a reason for a person to do a thing if it is a fact to the effect that his doing the thing would be good in some way.) 알프레드가 초인종을 누르는 것이 그에게, 또는 베르타에게, 또는 찰스에게 좋을 것이라면, 또는 즐겁다면, 등등이라면, 알프레드가 그 초인종을 누를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래서 나는 알프레드가 그 초인종을 누르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 좋을 것이라는 사실은, 그가 그 초인종을 누르는 것에 찬성하는 것으로 고려된다는 점이 명확하다고 주장한다.

알프레드가 그 초인종을 누르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 좋으리라는 사실은, 모든 경우에서, 그가 그 초인종을 누르는 것에 매우 강하게 찬성하는 것으로 고려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그 초인종을 울리는 것이 즐겁다는 것은, 당신이나 나의 초인종을 누르는 것에 매우 강하게 찬성하는 것으로 고려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즐겁다는 사실은 정말로 그렇게 하는 것에 찬성하는 것으로 고려되기는 한다.

더군다나, 알프레드는, 어떤 방식으로 좋은 것이 W라고 할 때, 그가 그 초인종을 누르는 것이 W 방식으로 좋으리라는 것을 안다면, 그 초인종을 누를 하나의 이유를 갖고 있다. 그가 그 초인종을 누르는 것이 W 방식으로 좋으리라고 아는 것은, 물론, 그가 그것을 누르지 않는 것과 전적으로 양립가능하다. (Moreover, Alfred has a reason for pressing the doorbell if, for some way of being good, W, he knows that his pressing the doorbell would be good in way W. His knowing that pressing it would be good in way W is, of course, entirely compatible with his not pressing it) (33) 예를 들어, 그는 그가 그 초인종을 누르는 것이 W 방식으로 좋으리라는 것에 대하여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관심을 가진다고 하여보자: 특히, 그가 W 방식으로 좋은 무언가를 하기를 원하며, 사실 그는 그가 다른 어느 것을 지금 하기를 원하는 것보다 W 방식으로 좋은 무언가를 하기를 더 원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럴 경우에는, 그가 그의 그 초인종을 누르는 것이 W 방식으로 좋으리라고 또한 생각한다는 점을 볼 때, 그는 그것을 누를 것이 예상될 수도 있다. 만일 그가 실제로 그것을 누른다면, 그 초인종을 누르는 그의 이유는,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이 W 방식으로 좋으리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가 무언가 W 방식으로 좋은 것을 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그가 그 초인종을 누르는 것이 W 방식으로 좋다고 믿는 것과 함께, 그가 그 초인종을 누르는 것을 설명한다.

알프레드가 그의 초인종 누르기가 W 방식으로 좋다고 (i) 그가 그것을 누르지 않기를 원하는 것, 그리고 (ii) W 방식으로 좋은 무언가를 그가 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과 양립가능하게 믿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할 가치가 있다. 그가 그 초인종을 누르는 것이 W 방식으로 좋으리라는 것을 그가 믿는 것이 (i), 즉 그가 그것을 누르기를 원치 않는 것과 양립가능하다는 것은 아마도 충분히 명백하리라고 본다. 설사 그의 믿음이, 그의 초인종 누르기가 그에게 좋으리라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나는 내가 어떤 맛이 고약한 약을 복용하면 나에게 좋으리라는 것을, 그것을 복용하기를 원하지 않으면서도, 알 수 있다. 만일 내가 약을 복용한다면, 아마도 그것은, 그 약을 복용하는 것이 나에게 좋으리라는 점을 감안하여, 내가 그것을 기꺼이 복용하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기꺼이 약을 복용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을 복용하기를 원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but being willing to take it is not the same as wanting to take it) 나는 알프레드가 그의 초인종 누르기가 W 방식으로 좋으리라고 믿는 것이, (ii) W 방식으로 좋은 무언가를 그가 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과 양립가능하다는 점도 또한 명백하기를 바란다. 설사 그 좋음임의 방식이 그에게 좋음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나는, 단지 약 맛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나에게 좋은 것을 하기를 지금 원하지 않기 때문에, 맛이 고약한 약을 복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34 어떤 것을 하는 일이 어떤 방식으로 좋으리라는 점을, 그것을 하기를 원치도 않으면서 또한 그 방식으로 좋은 무언가를 하기를 원치 않는 것과, 양립가능하게 알 수 있다는 사실은, 그것이 어떤 하나의 방식으로 좋음이라는 사실 덕분에 발생한다.(due to the fact that it is goodness in a way) [역자-여기서 좋음이나 옳음이 아니라 그름이 가장 기본적인 단위임이 드러난다.] 몇몇 철학자들은 어떤 것이 순수하게 좋고, 내재적으로 좋다고 믿는 것은, 그것을 믿는 자에게 그것을 야기하도록 동기부여한다고 주장해왔다.(주석 15-예를 들어, Charles L. Stevenson, “The Emotive Meaning of Ethical Terms,” Mind 46 (1937), reprinted in his Fact and Values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63). J. L. Mackie가 속성 좋음에 회의적인 이유는, 만일 그러한 속성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어떤 것이 그 속성을 갖고 있다고 믿는 것이 믿는자에게 그것을 야기하도록 동기부여하는 그러한 속성이어야만 할 것이라는 바로 그 사실-그는 그것을 사실로 여긴다-이다. 그의 Ehics: Inventing Right and Wrong (London: Penguin Books, 1977)) 특히, 그들은 주체가 어떤 것을 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믿는 것이 주체가 그것을 하도록 동기부여한다고 주장해왔다. 다른 철학자들은 이와 의견을 달리했다. 좋음과 같은 속성이 있다는 관념에서 생기는 부당한 추상과, 그 결과 그 속성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생기는 불명확성을 감안할 때, 이 의견불일치가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요약하자면, 어떤 사실이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하는 이유로 되기 위한 다음과 같은 충분조건을 살펴보는 것이 가치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어떤 사실은, 만일 그것이 그 사람이 그것을 하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 좋으리라는 그런 사실이라면,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할 이유이다. (a fact is a reason for a person to do a thing if it is a fact to the effect that his oding the thing would be good in some way.) 정말로, 나는 그것이 매우 그럴법한 관념이라고 생각한다.

13. 가능한 한 반론이 있다: 그 충분조건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신이 지금 할 수도 있는 많은 것들 각각에 대하여, 당신이 그것을 할 적어도 하나의 이유가 아마도 있다는 결과를 산출한다. 이는 좋은 것이 되는 많은 방식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이 지금 할 수도 있는 많은 것들 각각에 대하여, 당신이 그것을 하는 것이 좋게 되는 적어도 한 방식이 아마도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나의 잔디를 깎는 것은 나에게 좋을 것이다. 당신이 나의 잔디에 물을 주는 것은 나에게 좋을 것이며 나의 잔디에게도 또한 좋을 것이다.

(35) 당신의 이웃이 무언가 불법적인 일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이 그가 흔적을 지우는 것을 돕는 것은 그에게 좋을 수도 있다. 그리고 당신이 거리에서 지그를 추러 나가는 것은, 교외에서 특이한 행동의 (현재 수집되고 있는) 목록에서 사용되기에 좋을 수도 있다: 많은 것들을 하는 많은 이유들은 지나치게 많은 것이다.(주석 16)

나 자신의 인상은, 이것이 우려가 되는 반론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것을 하는 하나의 이유는, 그것을 찬성하는 것으로 고려된다. 그러나 당신이 어떤 것을 하는 것을 찬성하는 것으로 고려되는 한 사실이 있다는 것은, 그러한 한 사실이 있다는 점이 당신에게 하등의 관심이 되지 않는 것과 전적으로 양립가능하다.(****) 그러한 한 사실이 있다는 것은 또한 당신이 그것을 하는 것이 그르다는 것과도 또한 양립가능하다.

더군다나, 당신이 어떤 것을 하는 것이 어떤 한 방식으로 좋으리라는 사실들 중 어느 것이라도, 그것을 하는 당신의 이유가 될 수도 있다. 내가 말한 바와 같이, 당신은 당신이 어떤 것을 하는 것이 W 방식으로 좋으이라는 점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은 관심을 가질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러므로 당신이 그 이유에서 그것을 실제로 하게 될 수도 있다.

당신이 어떤 것을 하는 것이 W 방식으로 좋으리라는 사실은, 오직 당신이 W 방식으로 좋은 것을 하기를 원할 경우에만 당신에게 그것을 할 하나의 이유가 된다고 물론 주장될 수 있겠다. 그래서 당신이 나의 잔디에 당신이 물을 주는 것이 나에게 좋으리라는 점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dont’ care) 가정해보자. 당신이 관심을 갖는 것은 잔디라고-, 당신이 원하는 것은 잔디가 좋은 조건에 있는 것이라고 해보자. 그럴 경우, 당신이 나의 잔디에 물을 주는 것이 나에게 좋으리라는 사실은, 당신이 나의 잔디에 물을 주는 하나의 이유가 아니라고 이야기될지도 모르겠다; 그렇기 보다는, 당신이 나의 잔디에 물을 주는 것이 잔디에 좋으리라는 사실만이, 당신이 잔디에 물을 주는 하나의 이유라고 말이다.

우리가 이 관념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당신이 어떤 것을 하는 것이 W 방식으로 좋으리라는 사실은, 오직 당신이 W 방식으로 좋을 것을 하기를 원하는 경우에만, 당신에게 그것을 할 이유가 된다고 말해야만 한다.

 

36 더군다나, 그러한 사실은, 당신이 어떤 것을 할 이유가 한 시점에는 될 수는 있으나, 다른 시점에는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이전 시기에는 당신은 W 방식으로 좋을 것을 하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그 이후에 그렇게 하기를 원하게 되는 사안의 경우 그럴 것이다.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행위에 대한 이 좁은 이해(this narrow construal of reasons for action)을 매력적이라고 여길 것이다.

나는 이 좁은 이해를 거부할 아무런 이론적으로 중요한 이유도 없다고 본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일 이론적으로 중요한 이유도 없다고 본다. 우리가 도덕 이론에서 달성하기를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우리가 행위 이유들에 대해 이 좁은 이해를 택하건 아니면 내가 권고한 넓은 이해를 택하든 간에, 성취될 수 있고, 실제로 성취되는 것이 나을 것이다.(주석 17- 이 좁은 이해는 Beranrd Willams, “Internal and External Reasons,” Morla Luck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1)에서 권고되었다. 스캔론은 What We Owe to Each Other에서 윌리엄스의 논증을 주의 깊게 논의하면서, 넓은 이해를, 나처럼, 선호한다. 그러나 나는 그가 좁은 이해 대신 넓은 이해를 선호하는 것에 아무런 이론적인 중요한 이유도 없다는 점에 동의하는 것으로 여긴다.) 나는 이 문제를 II부에서 다루겠다.

어쨌거나, 나는, 내가 권고한 넓은 이해가, 행위 이유에 관한 우리의 관념에 더 잘 들어맞는다는 점이 명확하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익사하는 것을 바라보며 서 있는 남자를 생각해보자. 그는 구명조끼가 있으며, 그 어린아이에게 쉽게 그것을 던질 수가 있다.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은 그 아이에게 좋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그 아이에 대해서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으며, 아이에 좋게 될 일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나는 그가 구명조끼를 던질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간단히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에게는 이것을 할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이 그 아이에게 좋으리라는 사실에 놓여 있다. 그가 그 아이에게 좋을 것을 하지 않고 싶어한다는 점은, 그에게 그것을 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그가 철저히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요약하자면, 나는 우리가 이 반론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어떤 사실이, 그가 그것을 하면 한 방식으로 좋으리라는 것일 때,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할 이유라는 점에 동의해야 한다. (37) 어떤 사람에게 그것을 할 이유가 있을 때, 그 사람이 그것을 할 것이냐 아니면 해야 되는가 또는 해야만 하는가는, 이와는 상당히 다른 문제로서, 상당히 다른 고려사항들에 의해 고정된다.

 

14.

내가 제시한 조건은, 충분조건일 뿐만 아니라 필요조건이기도 한가? 하나의 선택지는 필요조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i) 다음과 같은 경우 오직 그 경우에만 어떤 사실은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할 이유이다. 그 사실이,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 좋으리라는 그런 사실일 때.

***

우리는 동의해야 하는가? 아니요. 당신이 어떤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 나쁘리라는 사실이, 당신이 그것을 할 이유라는 사실은 확실히 명백하다. 당신이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 나쁘리라는 사실은, 확실히, 당신이 그것을 하는 것에 찬성하는 것으로 고려된다. 그러나 당신이 그것을 하지 않을 것이 어떤 방식으로 나쁘리라는 사실 자체는, 당신이 그것을 하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 좋으리라는 사실은 아니다.[가치의 당위에의 간접성]

둘째, 우리는 당신이 어떤 것을 하는 것이, 다른 어느 것을 하는 것보다, 어떤 방식으로 더 좋으리라는 사실이, 당신이 그것을 할 하나의 이유가 되는 것도 허용해야 한다. (이 사실 역시도, 당신이 그것을 하는 것에 찬성하여 고려된다.) 그러나 이 사실 그 자체는, 당신이 그것을 하는 것이 한 방식으로 좋으리라는 사실은 아니다.

셋째, 우리는 또한, 당신이 어떤 것을 할 것을 요하는 권리를 누군가 갖고 있다는 사실이 당신이 그것을 할 하나의 이유라는 것도 허용해야 한다. 그러나 이 사실 역시도 그 자체가, 당신이 그것을 하는 것이 한 방식으로 좋으리라는 그런 사실은 아니다.

이 사실들은 모두 평가적이거나 규범적이다. 그리고 의문의 여지 없이, 추가될 수 있는 다른 사례들이 있다. 나는 우리가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ii) 어떤 사실은 다음과 같은 경우 오직 그 경우에만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할 하나의 이유이다. 만일 그것이 다음과 같은 사실일 경우에.

38 그가 그것을 하는 것이 한 방식으로 좋다, 또는

그가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이 한 방식으로 나쁘다, 또는

그가 그것을 하는 것이 그가 다른 어느 것을 하는 것보다 한 방식으로 더 좋다, 또는

누군가 그가 그것을 할 것을 요하는 하나의 권리를 갖고 있다, 또는 ...

그리고 위 또는 ... 부분은 다른 평가적 사실들이 추가될 여지를 남긴다.

그러나 다른 평가적 사실들만이 추가될 여지만 남긴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할 하나의 이유 그 자체가, 그가 그것을 하는 것에 찬성하여 고려되는 무언가라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행위의 이유들을 평가적 사실들에만 한정하여야 한다. (ii) 가 그러도록 의도되었듯이 말이다. 이 사실들을 행위의 이유들로 특징짓는 것은 그것들의 평가적임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의 평가적임 덕택에 그것들은 어떤 행위에 찬성하여 고려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우리는 행위의 이유들(reason for action)”이라는 용어를, 선택지 (ii)가 요구하는 만큼 엄격하게 쓰지 않는 것은 아닌가? 코라(Cora)가 스스로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고 가정해보자: “내가 얼마간의 우유를 마시는 것은 나의 칼슘 습취를 증가시킬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얼마간 마실 것이다.”(주석 18) 그리고 그녀의 전제가 참이어서, 그녀의 얼마간 우유를 마시는 것이 정말로 그녀의 칼슘 섭취를 증가시킬 것이라고 가정해보자. 이를 칼슘 사실(Calcium Fact)라고 부르도록 하자.

 

(칼슘 사실) 코라가 얼마간 우유를 마시는 것은 그녀의 칼슘 섭취를 증가시킬 것이다.

 

그녀는 칼슘 사실을, 그녀가 얼마간의 우유를 마실 이유로 여긴다.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럴법하지 않은가? 만일 그렇다면, -칼슘 사실은 평가적이지 않으므로- 평가적이지 않은 행위의 이유들인 사실들이 있는 것이며, 선택지 (ii)는 거부되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코라가 하고 있는 하나의 가정이 있다. , 그녀가 그녀의 칼슘 섭취를 증가시키는 것이 그녀에게 좋으리라는 가정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칼슘 사실을, 얼마간의 우유를 마실 이유로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 가정이 거짓이라면, 칼슘 사실은 그녀가 얼마간의 우유를 마실 하나의 이유가 아니다. (39) 그리하여 그녀의 칼슘 섭취를 그녀가 증가시키는 것은 그녀에게 좋지 않을 것이거나, 또는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나쁘게 될 것이라면, 칼슘 사실은, 그녀가 얼마간의 우유를 마실 이유가 전혀 아니다.

우리는 칼슘 사실은 다음과 같은 경우 그러나 오직 다음과 같은 경우에만 그녀가 얼마간의 우유를 마실 하나의 이유라고 말할 수 있다. 만일 그녀가 그녀의 칼슘 섭취를 증가시키는 것이 그녀에게 좋게 되는 경우에만. 만일 우리가 그렇게 말한다면, 우리는 상대적으로 단순한 선택지 (ii)를 거부해야 한다. 이와 달리, 우리는 칼슘 사실은, 그 자체로는 그녀가 얼마간의 우유를 마실 하나의 이유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끄것 자체는, 그녀가 얼마간의 우유를 마시는 것에 찬성하여 고려되는 것이 아니다.) 의문의 여지없이, 칼슘 사실은, 그녀가 얼마간의 우유를 마시는 것이 그녀에게 좋으리라고 믿을 하나의 이유이다. 어쨌거나, 우리 대부분은 정말로 우리의 칼슘 섭취를 증가시킴으로써 이득을 본다. 우리는 그러므로, 칼슘 사실은 그녀가 얼마간의 우유를 마실 이유가 있다고 믿을 이유(에 불과하다)라고 결론내릴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므로, 상대적으로 단순한 선택지 (ii)를 보유할 수 있게 된다.

나 자신의 인상은, 그 어떠한 이론적으로 중요한 것도, 우리가 이 선택지들 중 어느 것을 택하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가 상대적으로 단순한 선택지 (ii)를 선택할 것을 권고한다.

 

15.

[...]

우리는 전형적으로 무언가를 원할 하나의 이유를 가지며, 나는 우리가 무언가를 원할 이유들을, 무언가를 할 이유들과 유사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우선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을 권고한다: 하나의 사실 F, FS의 성립에 찬성하여 고려되는 오직 그러한 경우에만, 어떤 사람이 어떤 사태 S가 성립하기를 원하는 하나의 이유이다.

40 그리고 우리는 둘째로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을 권고한다: F, FS의 성립이 어떤 방식으로 좋거나 S의 불성립이 어떤 식으로 나쁘다는, 또는, 그 연속된 선언이 14절의 (ii)에서의 것과 같은 그러한 사실인 경우에만, S의 성립에 찬성하여 고려되는 것이다.(주석 19) 만일 그러한 아무런 사실도 없다면, 원하는 자는 그에게 S가 성립하기를 원할 하나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S가 성립하기를 원할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어떤 것을 원하지만 그가 그것을 원할 아무런 이유도 없을 수 있다. 그에게 그것을 원할 어떤 이유가 없다고 믿으면서도 무언가를 원할 수 있는가? G. E. M. Anscombe, 진흙 소스(saucer of mud)를 원한다고 말하는 남자를 상상해보라고 한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하고 우리는 묻는다. “당신이 진흙 소스를 얻는 것이 무엇이 좋은가?” “아무것도 없소라고 그는 답한다. “나는 그저 진흙 소스를 우연히 얻고 싶게 되었소.” 앤스콤은 이것이 이해불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나는 그녀가 옳다고 생각한다.(주석 20-Anscombe, Intention. Warren Quinn합리성을 그 자리에 놓기Putting Rationality in Its Place,” Morality and Action (Cambrdige: Cambrdige University Press, 1993). 또한 Richard Kraut, “Desire and the Human Good,” Proceedings and Addresses of the American Philosophical Association 68, no. 2.) ) 나는 당신이, 그것을 원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서는 무언가를 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그것을 기대하거나 후회할 어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서는 무언가를 기대하거나 후회할 수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말이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욕구가 근본적 개념이 아님-스캔론의 논의와 일맥상통] 만일 이러한 이념들이 옳다면, 그렇다면-심지어 내가 위 10절에서 주의를 촉구하였던 고려사항들과는 별개로-, 일부 철학자들이,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원한다는 사실이 그에게 그것을 얻도록 시도하는 이유라고 생각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어떤 사태 S가 성립하기를 원한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이 그 소망에 대한 한 이유를 갖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 S가 성립하는 것이 어떤 방식 W로 좋을 것이라는 사실을 갖고 있다고 해보자. 약간의 추론은, 당신을 그 사실로부터, 당신이 S가 성립하게끔 시도하는 것이 또한 W의 방식으로 좋으리라는 결론으로 데려다준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당신이 S가 성립하도록 시도하는 이유인 것이다. (41) 따라서 당신이 원하는 이유는, 행위의 이유에 비중을 빌려주며, 그러므로 원하기 그 자체가 행위의 이유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쉽지만, 나는 잘못된 생각이라고 주장한다.

 

16.

나는 I부에서, 결과주의는, 그것이 어떤 사람이 해야 하는 것을 좋음을 최대화하는 것으로 환원하는데, 좋음과 같은 그런 것은 없다는 근거에서 거부되어야만 한다고 논하였다. 모든 좋음은, 어떤 방식으로 좋음이라고 나는 말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우리가, 모든 좋음이 어떤 방식에서 좋음이라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그저 결과주의를 논박하는 것 이상을 얻는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무언가가 행위하기의 이유가 된다는 것이 무엇이냐에 대한 하나의 해명을 제시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이제 살펴봐야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냐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 해야 하는 것에 대한 이론을 생산하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러한 이론이 가져야 하는 구조에 관한 몇 가지 주장만을 할 것이다. <I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