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vka Weinberg, "Identifying and Dissolving the Non-Identity Problem", Philos Sud (2008), 137, 3- 18

요약번역: 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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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동일성 문제는, 존재 그 자체가 미래 사람들의 삶의 이익에 대한 저해를 압도한다는 가정에 의존하지만, 미래 사람들은 존재 그 자체에는 이익을 갖고 있지 않다고 논할 것이다. 존재 그 자체를 삶의 저해를 압도하는 것으로 사용하는 것은, 그저 가능한 사람들에 대한 잘못된 고려를 드러낸다. , 가능하게 존재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을 가상적 살마들에 대한 잘못된 관심 말이다. 가능하게 존재할 수 있고 그리고 실제로 존재할 사람들은 미래 사람들이다. , 미래에는 존재할 터이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아니할 사람들이다. 미래 사람들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저 가능한 사람들은merely possible people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가능한 사람들이라는 용어는 그저 가능한 사람들과 미래 인간 모두를 포함하는 더 폭넓은 범주이다.

 

1. NIP

 

The NIP: 그들의 삶의 이익을 저해하는 것으로 보이는 재생산 결정에 의해 해악을 입는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식별하는 문제. 그들의 존재가 살 가치가 있고 또한 그 존재가 바로 동일한 재생산 결정에 의존하는 경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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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벡키가 약을 먹고 있는 도중에 그 약을 먹는 기간에 임신하면 기형이 된 아이가 출산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임신을 했다면, 그 행위로 인해 누가 해를 입었는가? 그 아이가 해를 입었다고 말하고 싶은 생각이 들겠지만, 그 아이는 그러한 기형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비동일성 원리 The Non-Identity Principle: 재상산은, 미래 사람의 삶이 살 가치가 있을 가능성이 높은 한 도덕적으로 허용된다. (3자의 이익을 논외로 한다면 말이다.)

 

그리하여, 비동일성 역설Non-Identity Paradox가 생긴다.

 

비동일성 역설미래 사람들의 이익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예를 들어, 과실로 부과된 기형이 없는 삶을 살게 하는 것), 미래 사람들의 이익과는 반하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과실로 가해진 기형을 가진 출산을 허용해야 하는 것처럼 보이므로)

 

비동일성 원리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문제를 풀지 않고 그냥 직접 그 원리가 틀렸다고 보이고 싶어한다. 이를테면 부모의 입장만을 고려하여, 아이의 이익에 반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도덕적으로 잘못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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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재생산 행위를 저지르는 사람들의 관점에만 집중하는 것이, 비동일성 원리를 피할 수 있게 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아이의 이익이 정말로 저해되었다는 우리의 신경을 갉아먹는 직관은 남는다.

Harman, 2004, pp.88-109Can we harm and benfit in creating? Philosophical Perspectives, 18, 89-113은 이와 같은 시도를 한다. 그녀는 비동일성 문제를 다룬다. 과실 있는 재생산에 의해 해를 입는 사람은, 미래 아이라고. 왜냐하면 그 미래 아이가 중대한 손상을 입기 때문이다. 그 고통은 존재의 이익에 의해 압도된다고 하더라도, 그 고통은 도덕적으로 압도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해악에 반대하는 이유들은 충분히 심각해서, 단순히 보상하는이유의 존재들만으로는, 그 해악을 허용가능하게 하기에 불충분하기 때문이다.”(Harman, op. cit., p.107) 왜 그런가? 아무런 답도 주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그 답이 분명해보이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문제의 혜택이라는 것은, 병원에 가서 아팠으니 막대사탕을 준다는 시의 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보다는 그 해악을 압도한다고 말해지는 이득은 해악 자체와 묶여 있다. 즉 그 해악을 가하는 것이 오로지 그 사람에게 이득을 가하는 방법이 되는 것이다. 즉 그 이득은 종두(inoculation)와 같은 것이 될 것이다. 하먼은 왜 존재가 재생산 해악을 궁극적으로 이로운 것으로 만들지 아닌지를 설명해야 한다. 중심 문제는 남는다.

 

2. 해악을 가하지 않고 잘못을 하기wronging without har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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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드워드는 말한다. 설사 재생산자나 인구 정책 입안자가, 미래 사람들에게 그들의 행동이 수여할 전반적인 이득을 의도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의도나 그들의 행위의 이로운 효과는, 가해진 잘못을 압도하거나 상쇄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권리의 위반은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가능한 한 더 나아진다는 더 근본적인 이익으로 간단히 집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주석 13 Woodward (1987, p. 802)

Woodward, J. (1986), The non-identity problem, Ethics, 96(4), 804-831.

나치 집단 처형소에서 살아난 사람은 그가 거기서 고통을 겪은 것이 궁극적으로 이로웠다고 느낀다 할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생각이 나치가 그의 궐니를 위반한 일을 도덕적으로 수용가능하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그리고 나치가 그런 이로운 효과를 의도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권리 침해가 허용가능하게 되지도 않는다. (같은 글, pp. 809-810) 우드워드는 미래 사람들은, 비록 해를 입지는 않지만, 여전히 잘못을 당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한다. 이것이 그 원리가 틀린 이유라고 그는 논한다. 그러나 파핏은 동등하게 설득력 있는 사례로 맞선다. 의식이 없는 사람의 팔을, 그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절단하는 것은 그 환자에게 해를 입히거나 잘못을 가한 것이 아니다. 파핏은, 선을 위해 필수적인 해악은, 궁극적으로 해로운 것이 아닌 것으로 여겨져야만 하며, 그리하여 권리 위반이 아닌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 해악을 당한 주체가, 전반적으로 원하였을 것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Parfit, 1986, p. 857) Parfit, D. (1986) Comments, Ethics, 96(4), 832-872. 우드워드는 외과의사와 나치 사례의 차이는, 외과의사는 그녀의 환자의 권리를 애초에 침해했지 않기 때문이라고 응수한다. (1987, p. 807) 그러나 이것은 선결문제요구의 오류를 범한 답변이다. 왜 우리는 절단환자의 권리는 건드려지지 않았지만 나치 처형소에서 살아난 사람의 권리는 심각하게 침해당했다고 여겨야 하는가? 파핏은, 외과의사 사례에서, 외과의사가 그녀의 권리를 위반하였는가를 결정하기 위해서 선택지가 고려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재생산 결정에서도 선택지, 즉 비존재가 고려되어야 한다고 하였다.(Parfit, 1986, p. 855-857_ 그리고 이 지점에서 파핏은 옳다.

그러나 파핏의 반박은 NIP의 해소에 이른다. 왜냐하면 그의 답변이 드러내듯이, NIP는 미래 사람들에 대한 두 선택지를 비교하는 것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와 비존재. 그러나 나는 존재 그 자체는 미래 사람들이 가지는 이익이 아니라고 논한다. 특히, 비존재가 그들에게는 선택지가 아니기 때문에. since nonexistence is not an alternative for them. 비존재는, 그저 가능한 사람들에 대해서만 선택지가 될 뿐이다. 그것은 여하한 진정한 사람들(현재나 미래)의 이익(또는 권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3. NIP를 해소하기

 

NIp가 실제의 삶의 손상(detriments)를 압도하기 위하여 존재의 선 그 자체(the good of existence itself)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것은 미래 사람들의 희생 하에 그저 가능한 사람들의 가상적 이익을 무심코(inadvertently) 증진하게 된다. 일단 우리의 관심을, 어느 시점에 존재하게 될 사람들에게만 제한한다면, NIP는 해소된다. 만일 우리가 비동일성 문제를 겪지 않는다면, 우리는 문제가 되는 비동일성 원리를 산출하지 않게 될 터이고, 그래서 당혹케 하는 역설에도 빠지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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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개진할 논변은 다음과 같다.

1. 비동일성문제는, 좋은 삶의 좋은 것들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를, 특정한 삶의 손상을 압도하기 위하여 사용한다.

2. 존재 그 자체에 가상적인 이익을 갖고 있다고 몇몇 이들이 이야기할 수도 있는, 그저 가능한 사람들은, 아무런 도덕적인 유관성을 갖지 아니하며, 여하한 실재의 이익도 갖지 않는다.

(a) 그럼에도 비동일성 문제는 그저 가능한 사람들을 이익의 보지자로 다루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다.

3. 미래의 사람들은 존재 그 자체에 이익을 갖지 않는다.

4. 따라서 비동일성 문제는 도덕적으로 오류에 빠진 것이며, 따라서 미래 사람들의 삶의 이익을 소홀히 하는 것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다.

 

1. 비동일성문제는, 좋은 삶의 좋은 것들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를, 특정한 삶의 손상을 압도하기 위하여 사용한다.

문제에 대한 몇몇 분석과는 달리, 존재 그 자체가, 비동일성 사례에서 부담을 압도하는 정당화 작용을 한다. 그 모가 맛이 좋은 음료를 마시면서도 미래 아이가 맹인이 될 것을 알고서 임신하여 맹인이 된 아이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 맹인 아이 샐리는, 존재를 향유한다. 특히 초콜렛을 즐긴다. 아마도 초콜렛이 맹인됨을 그 비중에서 능가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논증 끝. 여기에는 아무런 존재에 대한 언급도 없다. 그러나 이 사례를, 생식력 증강 약제를 섭취하는 여성의 사례와 비교해보라. 그녀는 그렇게 약제를 먹으면 쌍둥이를 임신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녀는 쌍둥이를 임신해서 낳는다. 쌍둥이는 쌍둥이의 함께 함을 좋아하지만, 동일한 연령의 형제자매를 가짐에 의해 때때로 짜증이 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그들은 쌍둥이 됨을 좋아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모가 생식력 증강 약제를 섭취하여 쌍둥이에게 얼마간 부담이 주어질 것을 알면서도 쌍둥이를 임신할 확률을 높였다. 그들의 모는 그들이 쌍둥이가 된 것을 전반적으로 좋아하며, 쌍둥이 됨은 좋은 ᅟᅳᆨ성과 나쁜 특성과 함께 온다고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좋은 면이 나쁜 면을 압도하고, 쌍둥이됨의 좋음과 나쁨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떼어낼 수 없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쌍둥이 됨에 의해 해를 입지 않았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론은 맹인됨과 초콜릿의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이 둘은 본질적으로나 또는 불가분하게(inextricably)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모의 음료 섭취는 초콜렛을 야기하지도 초콜렛을 주지도 않았다. 이것이 쌍둥이 됨과 쌍둥이됨의 이득이 연결되어 있는 것과는 다른 점이다. 초콜렛과의 유일한 연결관계는, 그것이 존재를 수여함으로써 간접적인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 존재를 통해서 초콜렛을 위한 기회를 주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존재 그 자체가 이익으로 여겨진다. 샐리가 맹인이 되지 않고서는 초콜렛을 가질 수 없다는 유일한 이유는, 그녀가 맹인이 아니었다면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존재가 초콜렛의 기회를 제공해주고, 맹인됨은 단지 그 기회에 승차하여 같이 간 것 뿐이라는 것이다. 초콜렛은 맹인됨을 정당화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맹인됨 없이도 초콜릿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샐리의 경우에는 맹인됨 없이는 초콜렛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녀가 존재를 가질 때에만 초콜렛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존재는, 그녀의 경우에는 맹인됨과 함께 온다. 쌍둥이 됨은 일정한 혜택과 부담과 묶여 있지만, 맹인됨은 그 자체로는 초콜렛과 묶여 있지 않다. 샐리에게, 초콜렛과 맹인됨을 묶는 것은 오로지 존재 그 자체이다. 샐리의 맹인됨을 능가한다고 이야기되는 것은 존재 그 자체이다. 이 논점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혜택과 해악이 서로에 대해 형량될 때, 초콜렛은 맹인됨을 능가할 수 있지만, 존재가 등식에 포함되지 않는다면 여전히 맹인됨에 의해 해악을 입는다는 것이다.

9비록 존재가 샐리에게 초콜릿을 즐길 수 있게 하는 기회를 제공해주기는 하였지만, 맹인됨은 인과적으로 필수적이고 그리고 거의 인과적으로 충분조건이다라고 논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샐리의 존재, 그리하여 초콜렛에 인과적으로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맹인됨은 초콜렛을 위해 인과적으로 필수적인 것이며, 초콜렛은 나쁨을 능가한다. 다시금, 존재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이것은 상황을 잘못 묘사하는ᅟᅥᆺ이다. 샐리의 맹인됨 그 자체는 그녀의 초콜렛을 위한 인과적으로 필수적인 조건이 아니다. 그리고 그녀의 모가 미래 아이를 맹인이 되게 만드는 쥬스를 먹는 것도 존재의 필수 조건이 아니다. 그렇기 보다는, 수많은 여건들이, 샐리가 초콜렛을 즐길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그 중 하나는 (쥬스 드링킹)은 또한 샐리가 맹인으로 태어나게끔 야기하였다. 만일 그 쥬스가 맹인됨을 야기하지 않았다면, 그 쥬스가 그냥 오렌지 쥬스였다면, 샐리의 초콜렛을 위해서 여전히 그 오렌지 쥬스는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렌지 쥬스가 맹인됨 없이도 샐리의 초콜렛 향유 기회를 촉진하였을 수 있었다고 보인다. 맹인됨은 샐리의 초콜렛에 인과적으로 무임승차한 것이다. 그것은 샐리의 초콜렛에 인과적으로 진정으로 필수적인 것의 부산물일 뿐이다. 즉 시간 그 자체말이다. 쥬스를 먹는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 쥬스가 미래 아이를 눈 멀게 하는 것이든, 아니면 그냥 영양분만 담고 있는 쥬스이든 말이다. 쥬스를 마시는 데 걸리는 시간이, 샐리가 존재할 기회를 제공하고, 존재는 초콜릿을 위한 기회를 제공해준다. 만일 쥬스가 우연히 맹인됨을 야기하였다면, 반사실적으로 맹인됨을 정당화하는 것은 존재 그 자체이다. 샐리의 어머니가 눈을 멀게끔 야기하는 쥬스를 죽 들이키지 않았더라면, 샐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초콜릿을 즐기려면 그 누군가는 존재해야만 한다.

 

2. 존재 그 자체에 가상적인 이익을 갖고 있다고 몇몇 이들이 이야기할 수도 있는, 그저 가능한 사람들은, 아무런 도덕적인 유관성을 갖지 아니하며, 여하한 실재의 이익도 갖지 않는다.

모든 이익들은 일정 시점에서는 존재 여하에 달려 있다. (All interest are contingent upon existence at somme point) 그렇지 않다면 이익을 향유할 실재하는 주체가 없을 터이니 말이다. 어떤 시점에 존재하는 자만이 이익을 가질 수 있으므로, 그저 가능한 사람들은 이익을 갖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저 가능한 사람들은 존재 자체에 대하여 이익을 가질 수는 없다. 그들의 존재가 아무리 놀랍고 좋은 것이, 가상적으로 될지라도 말이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미래 사람들의 이익을 보호하려고 할 때에는, 존재 자체는 가정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거기에는 보호할 이익이 전혀 없을 것이다.

비록 그저 가능한 사람들을 고려할 아무런 도덕적 이유가 없음에도 루구하고, 미래 사람들을 고려할 우리의 도덕적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그저 가능한 사람들을 고려하도록 강제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특정한 구체적인 살마들이 미래에 존재할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참이 아니다. 우리가 모든 빌딩에, 휠체어가 접근가능하도록 경사로(ramps)를 건축한다고 하여보자. 그리하여 모든 미래 휠체어 탄 사람들이 모든 빌딩에 접근권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고 해보자. 우리가 모르는 미래 사람들은 실제로는 경사로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될 것이다. (10) 왜냐하면 미래의 휠체어는 계단 위를 날라다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위해 경사로를 건축한 것이다. 우리는 미래 사람들을 위해 경사로를 건축하였다. 그러나 사태가 판명난 바에 의하면, 그들은 그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가 그저 가능한 사람들을, 경사로 건축해 있어서 그 이익을 고려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가능한 사람들을 위해 경사로를 건축하지 않았다. 우리는 미래 사람들의 이익을 고려하여 경사로를 건축하였지만, 우리의 인식론적인 제약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이익을 어떻게 가장 잘 받들까에 대하여 실수를 범한 것이다. 우리의 인식론적 제약은 우리가 미래 사람들의 이익을 고려함에 있어 실수하게끔 할 수도 있지만, 그저 가능한 사람들의 이익을 고려하도록 하는 도덕적 오류를 범하게 하지는 않는다. 만일 내가 가지려고 하는 두 번째 아이를 위해 첫 번째 아이에게 지나치게 돈을 좀 아낀다면(simp a bit), 그러나 결국 두 번째 아이를 갖지 않았다면, 나의 인식론적 제약은 미래 사람의 이익을 고려함에 있어 실수를 범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내가 가질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가지지 않을 두 번째 아이를 위해서 첫 번째 아이에게 쓰는 돈을 아꼈다면, 나는 그저 가능한 사람의 이익을 고려한다는 도덕적으로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가 만일 전적으로 비참한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높은 위험을 고의적으로 감수하지만, 실제로는 임신하지 않는다면, 또는 내가 근거없이(gratuitously), 미래 사람들이 필요로 하거나 원할 것이라고 내가 잘못 생각한 것들을 파괴한다면, 나의 행위는, 실재 사람들의 복지에 대한 나의 무모한 무관심 때문에 잘못된 것이다. 그저 가능한 사람들의 복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부정합적인 것이다. 대신에, 앞서 언급한 행위들은 그것들이 실재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위험을 감수하였기 때문에 그른 것이다. 그것들이 아무도 해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운이 좋은 것에 불과하다. 마치 음주운전을 했지만 아무도 치지 않았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여전히도, 술에 취해 운전을 하거나, 비참한 삶을 살 가능성이 높은 사람을 임신할 위험을 지니는 행위를 할 때에는, 실재 사람들에 속하는 이들의 이익이 걸려 있는 것이다.

미래 사람들의 이익을 고려할 우리의 도덕적 이유와 같은 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저 가능한 사람들의 이익을 고려하도록 강제하는 것처럼 보이는, 다른 유형의 사안은, 그로부터 결과할 삶의 본성 때문에 재생산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사례이다. 이것은 극도로 난해한 문제이며, 그것이 역설의 아우라 없이는 답해질 수 있는지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우리의 행위가 그들의 존재를 배제하기 때문에, 이 경우 우리가 그 비참하게 될 사람들을 위하여 행위하고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저 가능한 사람들을 위하여 행위하는 것은 훨씬 더 이치에 닿지 않는다. 어떻게 우리가, 결코 존재하지 아니할 사람들을 창조하는 것을 삼갈 수 있는가?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렇게 삼갈 수 있다면, 왜 그러겠는가? 왜 결코 존재하지 않을 그저 가상적인 존재를 위하여 굳이 행위하겠는가? 나는 이것이, 우리가 비참한 사람들을 창조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재생산을 하지 않겠다고 결정할 때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신에,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더 합당해 보인다. 만일 우리가, 가정에 의하여, 존재할 것인 비참한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는 비참한 사람들을 창조하는 것을 피한다고 말이다. 설사 그러한 행위는, 역설적으로 그들의 존재를 배제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내가 비참한 사람을 존재하는 것을 삼갈 때, 나는 실제로 내가 그들을 존재했다면 그 사람이 가졌을 실제의 이익을 고려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다. 나는 실제의 비참한 사람들을 창조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창조를 하지 않는 것이다. (비록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그들을 실제로 배제하기는 하지만.)

 

11 (a) 그런데도 비동일성 문제는 그저 가능한 사람들을 이익 보지자로 다룬다.

부당하게 대우르 받으려면 어떤 시점에서는 존재해야만 한다. 그 존재 그 자체가 걸려 있는 경우에도 말이다. 그러나 일단 존재한다면, 당신은 더 이상 존재를 박탈당한 상태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저 가능한 사람들이, 존재의 선을 확보하기 위하여 장애를 가지는 것이 이익이라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저 가능한 사람들은 이익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존재 그 자체에 대하여는 이익을 갖는다고 이야기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존재의 이득이 장애를 수반하는 것에 비추어 보았을 때, 미래 사람들이 그들의 장애를 갖는 것이 그들의 이익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존재는, 그 미래 사람들이 결여할 무언가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미래 사람들은 존재할 것이다.

미래 사람들의 존재를 보장된 것으로 특징지우는 것은 오류적으로 운명론적인 것이라고 논할지도 모르겠다. 당신의 존재는 보장되지 않는다고, 당신의 비존재가 선택지가 되는 것이라고. 당신의 부모가 당신을 재생산한 시점에, 재생산하지 않았더라면, 당신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리고 나는 당신의 비존재가 선택지 중 하나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그저 그것은 당신에게는선택지가 아니라는 소리다. 당신의 부모가 재생산하지 않았더라면 당신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존재하지 아니한 것도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렇기 보다는, 그 경우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가상적으로 가능한 인간이다. 말하자면, 비존재는, 그저 가능한 당신에 대한 선택지였을 뿐이지, 실재의 여하한 사람에 대한 실재의 선택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대신에 나는 만일 x가 미래 인간이라면 x가 존재할 것이다라고 말할 뿐이다. 후자의 주장은, 미래 인간이 되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의거하여 참이다.

아마도 혼란의 일부는, 미래 사람들에 관한 언표 양상de dicto와 사물 양상de re과 관련되어 인식된 혼동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구두끈을 발명한 사람인 밥을 고려할 때, 누군가가 구두끈의 발명자인데 그 사람이 구두끈을 발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de dicto) 그러나 밥, 실제의 구두끈 발명자인 밥이, 구두끈을 발명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은 가능하다. 또는 문제는 인식론적으로 베일이 씌워진 운명론의 외관일 것이다. 예를 들어, 4살된 이웃 아이 노아는, 미래 대학생일 수도 있고 그저 가능한 대학생일 수도 있다.(merely possible college graduate) 그러나 그녀의 미래가 그저 인식론적으로 열려 있는 것만은 아니다. 즉 단지 그녀의 가능성 중 어느 것이 참으로 판명될지를 지금 알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인식론적으로 열려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렇기 보다는 그것은 형이상학적으로 열려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각 미래 인간들이 존재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마찬가지로 오류를 범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의 세계에서, 밥은 구두끈을 발명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는 벨크로나 화장지를 목표로 정했을 수도 있다. 우리는, 다음 두 가지 방식으로 그를 언급할 수 있기 때문에, 그를 언급하는 데서도 아무런 문제를 갖지 않게 된다. 그는 밥으로서도 언급할 수 있고, 구두끈의 발명자로서 언급할 수도 있다.

 

12 유사하게, 이웃 노아는 대학을 졸업하거나 졸업하지 않을 수 있다. 그녀는 대학 졸업생인 노아이거나, 비 대학 졸업생인 노아인 노아가 될 수도 이다. 삽천년 전에, 밥과 노아는 미래 인간이다. 그들 각각이 수정되던 그 날에 그들의 모가 두통을 앓았다면 그들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참이라면, 삼천만년 전에 밥과 노아는 미래 이간이 아니었을 것이다. 대신에 그들은 그저 가능한 인간들이었을 것이다. 가상적 존재자들은 가능하게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 인간이라는 용어future people는 미래에 존재하게 될 바로 그 사람들을 골라 낸다. the very people who will exist in the future. 밥은 구두끈 개발을 할 수도 있고 그냥 소파에 앉아서 쳐묵쳐묵 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내 이웃 노아는 대학을 졸업하거나 졸업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미래 인간이라면 우리는 그들에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다. 그들은 존재할 것이다.

그럼에도 파핏은 미래 인간의 존재를 주어진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가 그저 가능한 사람들의 가상적인 이익(존재에 대한 이익을), 미래 인간들의 실제의 이익들을 희생해서 증진하는 것으로 끝이나는 이유다. 파핏이, 비동일성 문제에 의거하여, 이익 보지자(interest bearers)로서 그저 가능한 인간들을 대우하는 것은, 그가 미래 아이들의 수가 고정되어 있다고 하는 사례에 관하여 비동일성 문제를 풀어낸다고 그가 주장하는 원리에서 가장 분명하다. 이것이 원리 Q.

 

원리 Q: 만일 두 가능한 결과 어느 쪽도, 살게 될 사람들의 숫자가 동일하다면, 살았을 사람들보다 삶이 더 나쁘거나 삶의 질이 더 낮은 쪽을 선택하는 것이 더 나쁘다. (Parfit, 1984, Reasons and persons, Oxford: Clarendon Press. p.360)

 

Q에 따르면, 실제의 미래 사람들 중 일부를 재생산하는 것을 그릇되게 만드는 것은, 낮은 질의 삶을 사는 실제의 사람들 대신에, 높은 질의 삶을 살았을 그저 가능한 사람들이다.

Q 원리가 잘못이 어디에 놓여 있는가Wherein lies the wrong”이라는 질문에만 답하며, 또한 미래 아이들의 수가 유연한 것이 아니라 고정된 사례에서만 답변을 제공한다는 것을 주목하라. “누가 해를 입는가?”의 문제를 직접 다루지 않는다. 이것이 실제의 문제인데 말이다. 그리고, 그 답이 어느 범위까지 미치든 간에, 그 답은 오직 그저 가능한 사람들에 호소함으로써만 답을 줄 수 있다. 비동일성 문제를 고정된 수의 미래 아이들 문제와 변동이 있는 수의 미래 아이들 문제로 나누는 것은 진정한 문제로부터 주의를 흩뜨려 놓는다. 그리고 해악 없는 잘못을 찾는 것은 거기에는 아무런 피해자가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범죄를 헛되게 찾도록 내버려둔다. 이것은 그 문제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된다.

파핏은 Q원리를 루스와 제인 사례에 적용한다. 루스와 제인은 선천적인 질병congenital disease을 가지고 있다. 이 병은 그들을 50살에 고통 없이 죽게 만든다. 제인은 그녀의 아이들이 그녀의 병을 물려받을 것이라는 점을 안다. 루스는 그녀의 남자아이만이 그녀의 질병을 물려받을 것을 안다. 그리고 그녀는 여자 아이를 선별하기 위해서 체외수정을 위해 지불할 돈이 있다. 그녀는 체외수정을 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녀는 자연스럽게 인심을 하며 그녀의 남자이가 태어나 그 병을 갖게 된다. 루스의 선택이 제인의 선택보다 더 나쁜 것 같다. (주석 28-Parfit, 1984, Reasons and persons, Oxford: Clarendon Press. op.cit., p. 375)

 

설사 제인의 선택에 대해서 반대가 있다 하더라도 루스의 선택에 대해서는 더 큰 반대가 있다. 이 반대는 루스의 실제 아이에 미치는 효과에만 호소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제인의 선택이 제인의 아이에 미치는 효과와 정확히 동일하기 때문이다. 루스의 선택에 대한 반대에는, 새로운 기술에 대하여 돈을 지불함으로써, 루스가 가질 수 있었던 다른 아이에 미치는 가능한 효과에 호소해야만 한다. (주석 29 - Parfit, op. cit., p. 376)

 

마찬가지로, 파핏은, 그녀의 위험한 정책”(주석 30- Parfit, op. cit., p. 371) 사례에서, 우리가 아마도, 몇백년 뒤에 재앙을 야기할 에너지 정책의 선택을 비난하는 것은, 이것이 미래 사람들에게 해를 입힐 것이 때문이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만일 위험한 정책이 시행되지 않았더라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에, 파핏은 말하길, 우리가 그 선택을 비난하는 이유는, 그저 가능한 사람들, 즉 우리가 상이한 정책을 시행했다면 살았을 그저 가능한 사람들이, 위험한 정책 하에 사는 실제의 사람들의 삶보다 더 나은 삶을 가졌을 것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고 논한다.

 

이 반론은, 우리가 달리 선택했더라면 살았을 가능한 사람들에게 미치는 효과에 부분적으로 호소해야 한다. (Parfit, op.cit., p.376)

 

그러나 한 정책이 그저 가능한 사람들에게 미치는 효과는, 어떠한 것에 대하여도 도덕적으로 반대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람들은 없으므로 그러한 효과는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에 우리는 루스의 선택이 더 반대할만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비록 그 선택의 효과는 동일하지만, 루스가 이 효과를 더 쉽게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인은 아예 재생산을 하지 않았어야 하지만, 루스는 IVF를 통해 재생산할 수 있었다.) 루스와 제인의 어린이들은 똑같이 그들의 모의 재생산 활동에 의하여 병에 걸리게 되었지만, 병에 걸린 아이의 창조를 피하는 것이 제인에게는 루스보다 더 많은 비영을 치르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루스 선택이 제인 선택보다 나쁜 것이다. 그리고 물론, 우리는 위험 정책에 대하여, 그것이 미래 사람들에게 부당한 위험을 부과하고/부과하거나 그것이 미래 사람들이 재앙을 겪게 야기하기 때문이다.

 

3. 미래 사람들은 존재 그 자체에는 이익을 갖지 않는다.

Futur people do not have an interest in existence itself

파핏은 비동일성 문제는, 그저 가능한 사람들의 가상적인 이익에 의해서는 생성되지 않는다고, 대신에, 과실에 의해 가해진 장애를 가진 이들을 포함한, 미래 사람들의 실제의 이익에 의해 생성된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장애를 가진 미래 사람들은 (합리적으로) 그들의 존재에 이른 재생산 결정을 후회할 수 없다. 그들의 삶이 비존재보다 나쁘지 않은 한 말이다.

14 미래 아이들의 후회의 가능성은, 파핏이 재생산 결정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동일을 물을 수 없을 때, 우리는 이 사람이 나중에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을 후회할 것인가를 대신 물어야 한다.” (주석 35- Reasons and Persons, Oxford: Clarendon Press, p.373.) 그리고 파핏은 주장한다. “만일 이 비동일성인간들이 그 사실을 안다면, 그들은 우리가 행위한 대로 행위한 것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주석 36, Parfit, op.cit., p. 365) 그러나, 우리는, 비동일성 문제가 실제로는 그러듯이, “그들의 존재가 바로 그 여건이 정확히 그랬던 것과 같은 탄생 여건에 의존한다는 사실이 주어졌을 때, 살 가치 있는 삶을 사는 미래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재생산 과실을 후회할 것인가?”라고 물어서는 안 된다. 대신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물어야 한다. “이미 존재한 상태에서, 살 가치 있는 삶을 사는 미래 사람들은 (합리적으로) 재생산 과실을 후회할 수 있는가?” 사람들이 그들의 이익의 기준선으로 존재를 취하는 것이 합당하다. 왜냐하면 존재 없이는 그들은 결코 여하한 이익을 갖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코 이익 그 자체를 갖지 않는 것은 사람들의 이익에 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익 보지자가 없이는, 그것이 나쁠 누군가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존재가 모든 우리의 이익의 전제조건이기 때문에, 우리의 이익을 평가할 때는, 존재를 상정하고, 그리고, 아마도, 우리의 (최초) 존재의 여건 중 일부를 후회하는 것이 적합하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의 존재의 여건의 많은 부분을 후회할 수 있다. 재생산 잘못행위의 피해자가 되지 않으면서도 말이다. 나는 더 크거나, 더 똑똑하거나 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할 수 있다. 이것은 사람들의 후회를, 재생산 행위의 평가적 기준으로 쓰는 것에 반대하여 논하게 한다. 대신에 우리는 합당하게 반대하는 것이나 다른 어떤 재생산 주의의 규준들을 써야 한다.)

일단 개인이 존재하게 되면, 그녀는 목숨을 잃는 대신 장애를 초래하는 데 이익을 갖는다. 존재하는 존재(existent beings)은 그들의 계속된 존재에 파생적인 이익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실제의 사람이 그들이 애초에 존재하는 것을 확보하기 위하여 장애를 받아들이는 데 이익을 가진다고 말하는 것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파핏은, 계속된 가치 있는 존속에 관하여 갖는 이익이, 우리의 최초 존재에 대한 간접적인 이익을 부여한다고 논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최초의 존재는 계속된 존재에 대한 인과적으로 필수적인 조건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나는 나의 가치 있는 계속된 존속을 향유하기 위하여 최초에 존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애초에 존재할 필요가 없다. 비존재는 나에게 어느 것도 박탈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내가 존재하게 되면 나는 많은 필요를 가지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적절한 시각 말이다. 비동일성 추론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가상적 대화가 쥬스를 마신 모와 그 미래 아이 사건에서 당사자들 간에 오고가게 될 것이다.

 

15

샐리어머니, 당신은 그 주스를 마심으로써 나를 해하였습니다.

너의 계속되는 존재는 가치 있다. 네가 눈이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고 너는내가 그 쥬스를 마시지 않았다면 너는 결코 지속된 존재를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마심으로써 너에게 해를 가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 대화로 강제되어야 할 아무런 이유를 보지 못한다. 나는 다음과 같은 대안을 제안한다.

 

샐리: 어머니, 당신은 그 쥬스를 마심으로써 나에게 해를 가하였소.

그러짛만 내가 그 쥬스를 마시지 않았다면, 너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너의 존재는 지속할 가치가 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쥬스를 마심으로써 너에게 해를 가한 것이 아니다.

샐리: 나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 비존재는 나에게 나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내가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볼 필요가 있다. 맹인인 것은 나에게 나쁘다. 어머니는 그 쥬스로 나에게 해를 입힌 것이오.

 

내가 제안한 대화는 라이벌 대화에 비해, 비동일성 문제의 난국(morass)을 피한다는 분명한 이점을 제쳐놓고도, 두 가지 이점이 있다. 첫째, 그것은 사전적 재생산 관점ex ante procreative perspectives와 사후적 재생산 관점ex post procreative perspecives 사이의 중요한 직관적 차이를 표현한다. 사전적으로, 존재 그 자체existence per se에 이익을 가지고 있는 어떠한 존재자도 없다. 그것이 우리가 왜 아이들을 위하여 재생산하지 않는 이유이다. That's why we don't procreate for the sake of our children. 사후적으로Ex post, 좋은 삶을 내에서 이익을 가진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왜 우리가 우리의 아이들에게 좋은 것들을 제공하여 주려고 하는 이유다. 둘째로, 나의 대화는, 비존재는 박탈이 아니라는 사실과 일관된다. (왜냐하면 박탈을 당할 실재하는 주체가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NIP 대화는 비존재가 박탈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렇지 않았더라면 존재할 사람에게 지속된 존재계속의 향유를 박탈하게 될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파핏이 옳다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 미래 사람들에게 그들의 최초 존재에 대한 비간접적인 이익을 귀속시키는 것이 옳다 해도, 그것은 여전히 매우 기이한 이익이 될 것이다. 그 미래 사람은 그 이익 없이도 더 나빠지지도 않고 그것 때문에 더 나아지지도 않는다. 그것을 갖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한탄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것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한탄하지도 않을 것이다. 비록 파핏이, 이 최초의 존재에 대한 이익이 기이해보일 수는 있다 하여도, 그것은 우리의 모든 이익을 증진하는 데 인과적으로 필수적이어서, 가장 중대한 이익이 된다고 주장한다손치더라도, 이런 종류의 기이한 이익을 증진하기 위하여 심각한 장애를 가지는 것이 과연 이익이 되는가는 전혀 명백하지 않다.

더군다나, 설사 미래 사람들이 그들의 최초 존재에 대하여 비간접적인 이익을 가진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존재의 이득을 확보하기 위하여 미래의 이익(예를 들어 시각의 이익)이 훼손되는 것이 그들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없다.

 

16왜냐하면 존재의 이익은 이미 확보된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가 이미 확보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도대체 누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가? 그저 가능한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저 가능한 사람들은, 가능하게 존재할 수 있을 뿐이지, 실제로 존재할 것은 아니다.

존재는 다른 종류의 분배 사안과는 매우 다르다. 다른 종류의 분배 사안에서는 재화를 수령할 몇몇 후보자들이 재화를 갖게 되고 다른 후보자들은 갖지 않게 된다. 예를 들어 조나단과 앤디 중 한 명에게 케이크 한 조각을 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미래의 케이크 수령자가 케이크를 어쨌거나 케이크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에, 조나단이나 앤디가 그 케이크를 받는 자가 되기 위해서 다른 아무 것이라도 포기하는 것도 이치에 닿지 않는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케이크의 미래 수령자가 케이크를 가질 것이며 그것을 먹는 것도 즐길 것이지만, 그 수령자는 조나단이거나 앤디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둘 중 누가 케이크 미래 수령자라는 말에 의해 지시되는지는 모르지만, 이 말이 둘 다를 지시하지 않는다는 것은 안다. 한 명은 케이크 없이 내버려지게 될 것이다. 미래 사람들은 가능한 케이크 수령자와는 다르다. “미래 사람들이라는 용어가 그들 모두에게 적용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미래사람들 모두가-그들 모두가-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존재가 비어 있는 공허한 쟁반 앞에서 쑬쓸하게 배회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들이 존재할 것이라는 점을 확보하기 위해서 한 푼이라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다. 그들이 미래 인간이라면 그들은 존재하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쥬스 마시기에 의해 맹인으로 태어난 아이에게, 보장된 것은 눈이 먼 존재의 이득일 뿐이라고 논할 수도 있게 될 것이다. 그건 맞는 말이다. 그러나 맹인됨을 야기한 쥬스를 마시지 않는 것은 그저 가능한 사람들에게 존재를 박탈할 뿐인데 반면에 (, 그저 가상적인 존재의 그저 가상적인 이익을 저해하게 될 뿐임에 반해), 맹인됨을 야기하는 쥬스를 마시는 것은 실제의 사람(real person)을 눈이 멀게 한다. (, 실재하는 사람의 실재하는 이익을 저해하게 된다.) 더 나아가, 통상 불완전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존재란 모든 미래 사람들이 가지게 될 무엇이다. 그것은 우리가 다른 부담을 능가하는 것으로 선물로 주는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샐리는 맹인이고, 그녀의 존재는 그녀의 맹인됨을 능가하지 않는다. 왜냐햐면 그녀의 존재는 그저 가능한 샐리에게 선물로 수여된 무언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그것은 샐리가 이익과 부담의 보지자로서 되는 전제조건이다. 존재 그 자체, 즉 비동일성 문제가 다른 부담을 능가시키기 위해 의존하는 존재 그 자체는, 당연히 있는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도덕적 고려를 받을 자격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당연히 인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17

4. 그러므로 비동일성 문제는 도덕적으로 오류를 범한 것이며, 미래 인간들의 삶의 이익을 소홀히 하는 변명의 이유가 될 수 없다.

비동일성 수사에 따르면, 삶이 가치 있는 삶이라고 하는 전제에서는, 누가 재생산 과실에 의해 해를 입는가 하고 묻는다. 아무도라고 그들은 말한다. 왜냐하면 대안은 비존재일 뿐이고, 그것은 살 가치가 있는 삶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까 하고 말한다. 그러나 누가 (최초의) 존재에 의해 도움을 얻는가? 아무도 얻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존재할 필요가 없으며, 모든 미래 사람들은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제의 사람(acutal person)의 초초의 존재(initial existence)는 그녀의 삶의 이익 중 어느 것도 능가하는 것으로 여겨저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비동일성 문제의 비동일성 해소를 갖게 된다.

재생산 과실은 미래 아이들에게 해를 미친다. 이 미래 아이들은 그 부담을 지게 될 존재이다. 존재는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며, 가치 중립적인 것이며, 모든 미래 살마들이 가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존재는 어느 것도 그 비중에서 능가하지 않는다. (does not outweigh anything) 이것은 모든 재생산 해악을 허용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자주, 해악은 허용가능할 것이다. 이와 길항하는 고려사항 때문에. 예를 들어 그 해를 피하는 것이 끼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비용 때문에. 그러나 그것은 재생산 과실에 의해 해를 입는 미래 사람들을 식별하는 문제는 정말로 해소한다. 그것은 그녀의 삶이 살 가치가 있다 하더라도, 과실로 인해 부담을 지게 되는 그 주체이다.

미래 사람들의 이익을 평가하는 방법은, 그들을 그들이 실제로 그러한 바대로 미래 사람으로 대우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비동일성 문제는 해소된다. 그리고 그것의 원리와 역설은 결코 발생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와 비존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상상의 장벽을 가상적 존재가 뛰어넘는 것을 돕는 것에 대하여 자부심을 느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우리는 만일 우리가 그 가상적 존재가 존재로 넘어오게 하기 위해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해야만 한다면 까짓거 뭐 그렇게 하지 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대신에 우리는 그들이 높은 질의 삶을 살 능력이 있게끔 확보해주기 위해서 우리의 최선을 다함으로써 미래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대우해야만 한다. <>

 

Posted by 시민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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