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고

[조립물] 헌법은 소수의 이익을 보장하는 것이라는 상투적인 말에 관하여

by 시민교육 2016. 6. 27.

많은 권리에 관한 논의가 사실적인 묘사 개념을 혼입함으로써 흐트려진다. 또한 규범적 개념들도 다른 개념으로 전환해서 이해하는 인상 연접을 이어감으로써 전체 논증 체계가 엉망이 되는 경우가 흔하다. 이런 혼동을 가져오는 대표적인 도식이 민주주의는 다수의 이익 보호, 입헌주의는 소수의 이익 보호라는 상투적인 도식이다.

이러한 상투적인 도식에 의하면, 무엇이 기본권에 대한 합헌적인 제한이냐 위헌적인 침해냐의 논증이 갑자기, 무엇이 다수 이익과 관련된 규율이고 소수의 이익과 관련된 규율이냐의 구분 문제로 둔갑한다. 그 도식은 다음과 같은 식의 논의 차원 점프를 실행한다.

 

(1) 헌법소원 청구인A가 X라는 기본권에 대한 침해를 주장한다.

(2) X라는 기본권에 대한 합헌적 제한이냐 위헌적인 침해냐?

(3) 입법자는 이러한 기본권 규율에 대하여 광범위한 입법 재량을 가지는가 아니면 좁은 입법 재량을 가지는가?

(4) 청구인 A가 다수에 속한다면 청구인은 의회를 통하여 자신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사항에 대해서는 입법자는 광범위한 입법재량을 갖는다. 따라서 완화된 심사를 할 것이고, 웬만하면 기본권은 침해되지 않았다고 대충대충 심사하겠다. 만일 청구인 A가 소수에 속한다면 청구인은 의회를 통해서 자신의 이익을 보호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사항에 대하여 입법자는 좁은 재량만을 가진다. 따라서 엄격한 심사를 할 것이고 웬만하면 기본권이 침해되었다는 결론에서 출발하여 아주 엄격하게 심사하겠다.

(4) 청구인 A는 다수에 속한다.

(5) 따라서 입법자는 광범위한 재량을 갖는다.

(6) 따라서 입법자가 원래 할 수 있는 것을 한 것이므로 기본권은 침해되지 않았다.

(7) 합헌이다.

 

이런 식의 논의는 상당히 많은 헌법학 논문에서 눈에 띄며, 한국과 독일, 미국을 가리지 않고 헌법재판소와 연방대법원의 판결 이유에서 눈에 띈다.

 

여기서 민주주의는, 아니라고 부인은 하지만, 사실상 다수결 제도와 등치되고, 입헌주의는 소수와 다수를 모두 포괄하는 보편적 권리 보장이 아니라 소수의 이익 보호와 등치된다. 따라서 입헌 민주주의는 작위적으로 다수결과 소수의 이익 보호를 결합한 키메라로 변질되며, 권리 보장은 소수의 이익 증진으로 변질된다. 

 

이러한 생각이 틀렸음을 귀류법으로 증명해보겠다.

 

문제 명제: 헌법재판이 소수의 이익 보장하고만 관련되고, 다수의 이익은 입법부에 맡겨서 보호할 수 있고 입법부가 더 잘 규율하므로, 그 이익이 어떻게 제한되든 기본권 침해는 없다.

 

문제 명제는 다음 두 방식으로 논파된다.

 

첫째 방식:

문제 명제는 모든 사안에서 다수와 소수를 나눌 수 있고, 오로지 다수하고만 관련된 규율이 있음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그 전제는 틀렸다.

그 전제는 우선, 다수와 소수에 대한 지탱될 수 있는 일반적 구분 정식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틀렸다. 이런 식의 논의에서는 다수(majority)와 소수(minority)라는 단어만 등장할 뿐, 무엇을 기준으로 다수와 소수인가는 등장하지 않는다. 구성원의 범주 구획은 오로지 기준이 있어야 가능하다.

 

많은 이들은 직감적으로, 다수와 소수의 구분은 '변경할 수 없는 속성'(immutable traits)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즉, 개인이 바꿀 수 없는 속성을 기준으로 구획된다고 한다. 그리고 구획된 사람들의 숫자를 세어서 그 수가 다수인지 소수인지 알아본다고 하자. 이것을 '변경불가능한 속성 기준'이라고 부르자. 그러나 이 기준은 헌법의 기본권 규정에 부합하지 않는다.

 

우선, 성불평등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가상적으로 여성의 인구가 남성의 인구보다 약간 더 많다고 하자. (이러한 일은 조금 이례적이기는 하지만 시대와 사건에 따라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변경불가능한 기준에 따라 여성은 다수다. 이제 이러한 사회에서 여성이 공직을 맡지 못하게 하는 법률이 통과된다고 해보자. 변경불가능한 속성 기준에 따르면 여성은 다수다. 따라서 다수에 관한 사항을 규율했으므로 입법 재량이다. 권력분립상 입법부가 해야 되는 일이다. 유권자의 다수인 여성은 자신을 보호하는 입법을 다수결 절차에 따라 관철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다수 이익에 관련된 사항으로서 기본권 사항이 아니다. 따라서 기본권은 침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 역시 '공무담임권'과 '남녀평등'을 규정한 헌법 규범에 명백히 어긋난다. 공무담임권 규정은 '남성의 공무담임권 규정'으로 변질되게 되며 남녀평등은 '권리를 제약받는 쪽이 우연히 인구분포상 소수일 경우에만 적용되는 규범'이라는 단서(proviso) 조항을 단 규범으로 변질된다. 따라서 이렇게 헌법규범을 변질시키는 해석은 타당하지 못하다. 따라서 '변경할 수 없는 속성' 기준은 틀렸다.

 

즉, 변경불가능한 속성 기준으로 인구분포상 다수에 속한다는 것은, 기본권 침해가 발생할 수 없다는 점을 보증해주지 못한다.

 

다음으로, 종교의 자유와 종교 차별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X종교를 믿는 사람은 세금을 나머지 시민보다 두 배로 내는 법률이 통과되었다. 그러자 X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종교의 자유가 침해되었으며 또한 종교를 근거로 한 차별로 인해 평등권도 침해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자,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반론이 제기된다.

'종교라는 것은 변경불가능한 속성이 아니다. X종교를 믿는 것이 부담이 되면 신념을 바꿔서 Y종교를 믿으면 된다. 아니면 아무 종교를 믿지 아니하여도 된다. 따라서 변경불가능한 속성 기준에 따라서 그것은 소수에 속하지 않는다. 소수에 속하지 아니하는 사항이므로 다수에 속하는 사항이다. 다수에 속하는 사항 규율은 입법부의 재량이다. 따라서 원래 재량에 속하는 것을 입법부가 시행했으므로 기본권 침해는 없다. 따라서 종교의 자유 침해도 없고 평등권 침해도 없다.'

이런 반론에 의하면 우리 헌법의 종교의 자유는 적용 대상을 전혀 갖지 않게 된다. 게다가 우리 헌법의 '법 앞의 평등'을, '변경불가능한 속성에 관하여만 법 앞의 평등'이라는 훨씬 제한된 문구로 바꾸는 셈이 된다. 따라서 그것은 헌법 규범에 명백히 위반된다. 헌법 규범에 명백히 위반되는 해석을 도출하는 기준은 타당한 헌법 심사의 기준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변경할 수 없는 속성' 기준은 틀렸다.

 

 

이제 논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자.

변경할 수 없는 속성 기준을 버리게 되는 즉시, 기본권 논증에서 지탱할 수 있는 다수/소수의 일관된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변경할 수 없는 속성 기준을 버리면, 종교나 정치적 신조, 인생관과 같이 바꿀 수 있는 속성도 다수와 소수를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이러한 변경가능한 기준으로 다수에 속한다고 구획된 어떠한 집단 내에서도 다시 소수를 구획할 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증명된다.

(1) 변경가능한 기준에 의해 구획된 다수는, 그 변경가능한 기준에 따르면 현실적으로 어떤 특정한 속성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다수로 구획되었다.

(2) 그 속성은 변경가능하므로, 변경하려는 선택을 할 수 있는 대상이다.

(3) 따라서 그 속성을 현재 보유하고 있지만, 그 속성을 버리려는 선택을 하는 소수가 생기는 것은 늘 가능하다.

(4) 따라서 다수로 구획된 구성원 중에는 항상 소수가 있다.

 

이것을 하나의 예로 설명하면 더 잘 이해될 것이다.

(1) 인구분포상 다수를 차지하는 X종교인에 대해서만 배교를 금지하는 법률이 통과된다고 해보자. 이들이 다수로 구획된 이유는 그 종교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법률이 통과된 이유는, 오히려 그 종교를 믿는 이가 다수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무슬림을 주축이자 근간으로 하는 오스만 제국과 같은 나라인 것이다. 이런 나라에서는 다수의 종교적 정체성을 보존하고자 하는 강력한 정치적 압력이 존재한다. 즉, 소수 종교인이 다수 종교에 가담하건, 무신론자가 되건, 소수 종교를 계속 믿든 개의치 않지만, 다수에 속하는 종교인은 계속 그 종교를 믿게 하는 것이 국가의 전반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하는 압력이 가해지는 것이다.)

(2) 그런데 종교적 신념은 변경가능하므로, 변경하려는 선택을 할 수 있는 대상이다.

(3) 현재 X종교를 믿고 있지만, 그 종교를 버리려는 선택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생길 수 있다. 그 때 그들은 소수이다.

(4) 따라서 다수로 구획되었지만, 실제로는 소수가 되는 사람이 있게 된다.

(5) 만일 배교를 금지하게 된다면, 이렇게 신념을 변경하려는 선택을 하는 소수의 자유를 제약하게 된다. 따라서 그것은 소수에 대한 법률이 된다.

(6) 따라서 그것은 다수에 관한 법률이면서 소수에 관한 법률이다.

(7) 명제(6)은 모순이다.

(8) 따라서 변경가능한 속성을 기준으로 출발부터 끝까지 늘상 일관된 기본권 논증상의 구획 기준을 마련할 수 있다는 전제가 틀렸음이 틀림없다.

(9) 이것은 변경가능한 속성을 기준으로 구획된 다수에 관한 사항이, 기본권 침해가 될 수 없는 입법부의 영역이라는 논리가 틀렸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변경불가능한 기준으로 구획된 다수에 관한 사항 역시, 언제나 소수에 관한 사항으로 다시 재조명될 수 있다.

(1) 남성이 인구분포상 다수인 사회를 생각해보자. 이 사회에서 여성이 남성에 대해, 성범죄를 저질렀다고 수사기관에 고소한 경우에는, 설사 그 고소가 거짓으로 드러난다 할지라도 무고죄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법률이 통과되었다. 

(2) 남성은 인구분포상 다수이므로 변경불가능한 기준에 의해, 해당 입법은 다수에 관한 규율이다.

(3) 그런데 다수인 남성 중에서 거짓으로 드러난 고소에 의해 무고당한 남성은 극히 소수이다.

(4) 타인에 의해 거짓으로 무고당했다는 속성은 변경불가능하다.

(5) 따라서 변경불가능한 속성 기준에 의해, 거짓으로 판명된 고소에 의해 무고당한 남성은 소수이다.

(6) 명제(2)와 명제(5)는 모순이다.

(7) 따라서, 변경불가능한 기준으로 기본권 논증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고정된 다수 구획이 가능하다는 전제가 틀렸다.

(8) 즉, 기본권 상황이 구체적인 여건을 통해 보충되어 특정된다면, 그 보충과 관련된 사정은, 직접 그 상황에 연루된 당사자들을 언제나 소수로 공식화할 수 있게 해준다.

(9) 따라서 변경불가능한 속성 기준에 의하더라도, 오로지 다수에게만 관련된 규율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다수와 소수를 전반적인 사회적 지위나 기회, 자원의 분포에 따라 즉 역관계에 따라 가르는 시도를 생각해보자. 많은 사람들은 직감적으로 이러한 견해에 이끌리게 될 것이다. 즉, 권리는 약자의 이익 보호이며 약자가 아닌 사람의 삶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분 역시 강자/약자의 구획이 기본권 논증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유지될 수 없기 때문에 기본권 논증의 근거로 활용될 수 없다.

 

(1) 부유한 사람들은 사회적 지위나, 기회, 자원의 분포에서 부유하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우월하다.

(2) 이제, 전체 소득 분포에서 10%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쿨락'이라는 낙인을 잘 달궈진 쇠로 찍은 다음, 시베리아로 강제로 유배시키는 법률이 통과되었다고 해보자.

(3) 이들은 부유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회적 역관계상 다수에 해당한다.

(4) 사회적 역관계상 다수에 관련된 사항으로, 역관계상 다수는 입법부를 통해 이러한 법률을 저지시킬 힘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법률이 통과된 것은 이것이 누구의 기본권도 해치지 않음을 의미한다. 즉, 이것은 기본권 침해가 아니다.

(5) 그러나 어느 누구도 수인하지 않을 열악한 고통을 차별적으로 당하는 사람들은 역관계상 소수에 해당한다. 그들은 강제로 인간존엄에 반하는 지위에 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그들이 이러한 법률을 저지시킬 힘을 갖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소수에 해당되는 사항이며, 기본권 침해다.

(6) 명제(4)와 (5)는 모순된다.

(7) 그러므로 사회적 역관계에 의한 구분에 의해 기본권의 합헌적 제약과 기본권의 위헌적 침해를 나누는 논증 진행이 가능하다는 전제가 틀렸다.

 

여기서 핵심은, 기본권을 제약당하는 사람은 그러한 기본권 제약를 막을만한 입법적 힘이 결여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기본권이 이미 제약된 상태에서 그 기본권 제약을 막을 수 있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엉터리라는 것이다. 사회적 역관계에서 전반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는가 없는가는 문제되는 바로 그 기본권이 침해되었느냐 아니냐와는 아무런 논리적 관계도 갖지 않는다.

 

헌법이 어떤 변경불가능한 기준으로 구획된 소수나, 사회적 역관계상 소수의 이익 보호에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크고, 그런 경우들이 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일정한 패턴이다. 그러한 패턴은 사실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캐리커쳐다. 캐리켜처는 캐리커처에 그친다. 그러한 관찰에는, 논리적으로 엄밀성이 필요하지 않은 구획기준이 활용된다. 따라서 그러한 관찰을 토대로, 기본권 침해에 관한 심사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결론을 도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기본권 논증은 엄밀한 논리적 토대에서 진행되어야 하고, 모순을 포함하는 논증을 도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제까지의 논의, 즉 첫번째 방식의 논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변경불가능한 속성 기준에 의해 인구분포상 다수에 속하는 사람들도 기본권 침해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이것을 부인하는 것은 기본권 규범을 전혀 다른 것으로 변질시킨다.

(2) 기본권은 오로지 소수 이익하고만 관련된다는 주장을 유지하면서도 종교의 자유 등 기본권 규범이 그대로 유지되려면, 변경가능한 속성을 기준으로도 다수와 소수가 구획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변경불가능한 속성 기준을 버리고, 그때그때 관련된 속성으로 기준을 크게 확장하면 모순이 발생한다. 즉, 다수에 속한다고 구획된 사람들 중에서 그 속성을 현재 가지고 있지만 앞으로 버리려고 하는 소수를 언제나 상정할 수 있다. 즉, 다수로 구획되었지만 소수에 속하는 사람이 있다. 따라서 다수/소수 구획은 기본권 제한과 침해를 구분하는 논증 기준으로 유지될 수 없다.

(3) 게다가 변경불가능한 기준으로 구획된 다수의 경우에도, 구체적인 기본권 침해 의심 상황과 관련하여 사실 요소를 더 보정하면, 역시 변경불가능한 기준에서 소수에 속하게 된다. 즉, 모순에 봉착한다. 즉, 변경불가능한 기준에 의해 다수로 구획된 사람 중에 항상 소수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결과적으로 기본권 침해와 제약을 가르는 기준으로, 소수와 다수의 구분을 기본권 논증에서 활용하려는 모든 논의는 실패한다.

 

이제, 두 번째 논파 방식을 말해보자.

두 번째 논파 방식은 기본권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자유권의 본질적 성격에 비추어 보면, 자유권 박탈은 인구의 다수/소수와는 관계 없다는 것이다.

 

법적 자유는 누군가 무엇가를 하거나 하지 않음에 있어, 법적 장애에 부딪히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어떤 생활측면과 관련된 선택가능성이 법적으로 모두 열려 있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종교의 자유는 A종교를 믿거나 A종교를 믿지 않는 선택가능성이 모두 법적으로 열려 있어야 보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가상사회를 생각해보자.

이 사회는 구성원 전원이 A종교를 믿는다. 그리고 A종교를 믿는 전원의 만장일치로 배교, 배교의 선동, 다른 종교나 무신론에 대해 정보의 전달 금지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킨다. 즉, A종교를 의심케 하는 모든 정보를 철저히 생활공간에서 완벽히 배제시키기로 한다.

그 결과 이 사회에서는 A종교의 타당성에 대해서는 의심조차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도 현실적으로 A종교를 믿지 않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의문조차 품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그런 의문을 품게하는 정보의 전달 자체가 혹독한 형벌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전적으로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사회에서는 누구나 A종교를 믿고자 하며, 누구나 A종교를 버리고자 하지 않는다.

따라서 종교라는 기준과 관련해서 어느 누구도 소수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가상사회K를, 배교는 금지되었지만 배교의 선동이나 다른 종교나 무신론에 대한 정보 전달은 허용되어 있는 사회L과 비교해본다면 K가 행위의 법적 금지의 범위가 크므로 K가 더 자유가 억압된 사회다. 그런데 다수/소수의 구획 기준에 따르면 L사회에서는 종교를 버리고자 하는 소수 구성원이 생기므로 기본권이 침해되는 법률이 되는데 반해서, K사회에서는 아무도 그 종교를 버리고자 하지 않으므로 아예 소수가 생기지 않으므로 기본권은 전혀 침해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즉 동일한 헌법을 가지고도 소수/다수 구획 기준에 따라 기본권 논증을 하면 이런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논리법칙에 어긋난다.

왜냐하면 더 많은 것을 법적으로 금지하는 사회는 기본권 더 적은 것을 법적으로 금지하는 사회보다 더 많은 것을 제약하고 있으므로, 후자(L)가 기본권 침해라면 전자(K)는 더 큰 기본권 침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논파의 핵심은, 기본권은 구성원의 기본적 지위와 기본적 가능성을 표현하는 지위이지, 소수의 이익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두 번째 논파는, 기본권 보장을 이익 보호로 변질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수의 이익에 해당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기본권에 해당하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누진세를 내지 않고자 하는 부자(그들은 항상 사회의 소수이다)들의 이익은 기본권이 아니다. 반면에 모든 사람도 예외없이 통금제도의 적용을 받게 되는 경우 그것은 이동의 자유라는 기본권에 대한 침해다.

 

기본권은 소수의 이익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근본적인 보편적 권리이다. 보편적 권리는 소수와 다수를 가리지 않고 보장한다. 무엇이 기본권이냐, 더 나아가 무엇이 기본권 침해냐를 판별하는데, 논리적으로 지탱될 수 없는 다수/소수 구분을 끌어들이고, 그 지탱될 수 없는 구분을 지렛대로 다시 입법재량의 크고 작음을 끌어들여서, 기본권의 위헌적 침해와 합헌적 제약을 나누려는 시도는 논리적 파산을 맞이하게 된다.

 

기본권 보장은 모든 이들의 기본적 지위를 보장하는 것이지, 특수하게 구획된 사람들에게만 편파적으로 이익이 되는 것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기본권 보장은 권리 보장이지 이익 증진이 아니다.  

 

본 글에서는, 다수/소수의 구획을 통해 광범위한 입법재량/좁은 입법재량, 그리고 완화된 심사와 엄격한 심사를 거쳐서, 결국 기본권의 합헌적 제약과 위헌적 침해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갖는 흔히 보는 논증이 아예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논의임을 증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