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ipkeSaulSpeakersReferenceandSemanticReference_크립키_화자의지시와의미론적지시.hwp
키스도넬란_지칭과한정기술_Donellan_ReferenceandDefiniteDescription.hwp
법률가로서 키스 도넬란 및 솔 크립키 논문 독해의 맥락:
많은 이들이 원본주의라는 법해석이론은 그저, 원본주의 학파에 속한 사람들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법실무가들과 이야기해보면 자신들이 지지하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데 유리할 때는, 원본주의의 유령에 사로잡힌 주장을 엄청 대단한 것처럼 펼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이를 원본주의적 독단이라고 한다. 칸트가 흄을 읽고 경험주의의 독단에서 깨어났듯이, 많은 법률가들이 도넬란과 크립키를 읽고서 원본주의의 독단에서 깨어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사례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미국 수정헌법 입안자들은 "법의 평등한 보호"(Equal protection of law)를 기초하였을 때, 인종분리학교가 이것에 어긋난다고 보지 않았다. 그 당시의 의사록, 그리고 바로 그 수정헌법 입안자들로 이루어진 의회의 이후 행보 어디에서도, 그들이 인종분리학교가 법의 평등한 보호에 어긋난다고 구체적으로 확신을 가졌다고 볼 증거가 없다. 오히려 그들은 인종분리학교라는 구체적인 정책은 법의 평등한 보호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은 있다.
여기서 중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그렇다면 이 헌법을 해석하는 연방대법원은, "법의 평등한 보호"가 인종분리학교제도의 위헌을 결정함으로써, 바로 그 수정헌법 입법자의 의도를 위배하게 되고, 그리하여 헌법문서의 네 모서리를 벗어나 자기 마음대로 헌법을 발명함으로써 오히려 헌법에 명시된 다수에 의해 설립된 정부의 권한을 침해하게 되는 것인가?
이 문제를 다른 표현으로 다시 던지자면 다음과 같다. "법의 평등한 보호"라는 문구는, 당시 입법자들의 다수가 구체적 사건으로 직면해 보았더라면 법의 평등한 보호에 위반된다고 생각했을 개개의 결론을 지칭(refer to)하여 그것을 따르라는 것가, 아니면 이후 문제된 정부의 작위 또는 부작위가 무엇이건 그것은 법의 평등한 보호라는 속성(attributes)이 귀속될 수 있는 것이었는가를 따져 그 속성이 귀속될 수 있는 것만 합헌으로 인정해라는 것인가?
조금 더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법의 평등한 보호"는 그 문구를 포함한 문장을 발화한 수정헌법 입법자들(기초자들이나 비준자들)이 염두에 둔 판단들의 특수자들(particulars)만을 가리키는 것인가, 아니면 그 문구가 기술하는 속성을 갖는 모든 보편자들(universals)들을 가리키는 것인가?
이 문제를 보다 더 와닿는 문제로 생각해보자.
다음은 로널드 드워킨의 예이다.
회사의 회장은, 기업의 고위인사담당책임자에게 "회사를 위해 기획팀장으로 적합한 최고의 능력을 가진 인물을 뽑으라"고 시켰다. 책임자는 "예"라고 답했다.
그런데 이 회장은 평소에도 자신의 둘째 아들A가 기획팀장으로서 그 나라에서 최고의 능력을 가진 인물이라고 늘 말하고 다녔다. 그런데 책임자는 회장과는 아무 혈연관계가 없는 B가 기획팀장으로서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책임자는 A를 뽑아야 회장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한 것인가, 아니면 B를 뽑아야 회장의 명령을 수행한 것인가?
'기획팀장으로 적합한 최고의 능력을 가진 인물'은 한정기술(definite description)이다. 이 기술구가 과연 구체적인 사람A를 뜻하는가, 아니면 실제로 그러한 능력을 가졌다는 속성이 귀속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 사람을 뜻하는가?
이 문제가 바로 한정기술구의 지칭적 용법(referential use)과 속성적 용법(attributive use)을 결정하는 사용론의 문제이다.
만일 회장의 명령을 지칭적 용법으로 읽어야 한다면, 둘째 아들A를 뽑는 것이 그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다.
만일 회장의 명령을 속성적 용법으로 읽어야 한다면, 실제 최고능력자 B를 뽑는 것이 그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일 수정헌법 입안자들의 헌법적 명령을 지칭적 용법으로 읽는다면, 인종분리학교는 합헌이라고 보는 것이 그 헌법을 따르는 것이다.
만일 수정헌법 입안자들의 헌법적 명령을 속성적 용법으로 읽는다면, 인종분리학교는 위헌이라고 보는 것이 그 헌법을 따르는 것이다.
이 문제를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키스도넬란의 본 논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입법자의 의도" 또는 "문언의 의미"라고 할 때, 지칭적 용법과 속성적 용법 어느 쪽을 택하느냐의 문제를 선결문제로 결정하지 않고 논한다. 원본주의(Originalism)란 바로 이러한 혼동에서 비롯된 지적 퇴행에 다름아니다. 원본주의자들은 자신도 알지 못한 채 일상대화이론의 분석에 적합한 의미론을 전제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일상대화이론은 비규약적이고 맥락의존적인 방식으로 기술구나 개념들이 많이 사용되기 때문에, 많은 경우 지칭적 용법으로 기술구나 개념이 사용된다. 그런데 원본주의자들은 이를 모든 언어의 발신과 수신 활동에까지 확장되어, 모든 기술구와 개념들을 지칭적으로 읽는 수밖에 없다고 잘못 전제한다.
만일 원본주의자들이 "입법자들이 원래 의도한 것만 따라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 원래 의도한 것이, 지칭적 용법에서의 의도를 의미하는가, 속성적 용법에서의 의도를 의미하는가의 문제로 사용론의 차원에서 나뉜다는 점을 알아차렸다면, 그들은 오로지 그들만이 헌법에 충실한 자들이며, 다른 이들은 헌법을 자기 마음대로 발명해내는 무도한 자들이라는 비난의 폭격을 함부로 퍼붓지 못했을 것이다.
헌법 해석은 일종의 언어적 수행행위(linguistic performative action)이며, 그 수행행위를 적합하게 실행하는 것은, 그 해석과 관련된 언어철학적 관련사항들을 제대로 아는 것을 필수조건으로 한다.
한국에서 많은 법률가들은 대한민국 헌법에 사형을 선고하는 경우에는 단심으로 하지 못한다는 조항이 나온다는 이유로, 사형은 어떠한 경우에도, 헌법상 과잉금지원칙이나 본질적 침해금지 원칙, 그리고 인간존엄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그 조항은 헌법 입법자들이 사형이라는 구체적인 사건을 생각해보고는 당시에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음은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으로 결론이 종결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사형을 선고한다면'이라는 문구는 사형이 합헌이라는 문구와는 전혀 같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만일 인종분리학교를 실시한다면'이라는 문구가 미국 수정헌법의 어느 조항에 들어간다 하여도, 그것이 인종분리학교가 평등보호원칙에 어긋나느냐의 문제를 결정해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남는 문제는 사형제도가 과잉금지원칙, 본질적 침해금지원칙, 인간존엄원칙상의 명령을, 당시 개정안 입안자들과 그 개정안을 통과시킨 국민의 대부분이 사형제도가 그 원칙들에 어긋난다고 구체적으로 생각했느냐에 따라 결정하라는 명령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헌법적 추론에 의해 그 원칙들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위헌으로 금지하라는 명령으로 볼 것인지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사례들을 많이 갖고 있다. 예를 들어 헌법개정안 입안자들은 동성동본혼인금지제도는 평등원칙, 행복추구권, 과잉금지원칙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문제를 아예 생각해보지 않았거나, 생각해보았다 하더라도 의견이 크게 갈렸거나, 아니면 생각해보았다면 아예 합헌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후에 동성동본혼인금지제도는 위헌으로 폐지되었다. 마찬가지로 입안자들은 간통죄가 과잉금지원칙에 어긋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후에 간통죄는 위헌으로 폐지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어야 한다. 헌법해석이라는 입헌민주주의의 실천(practice)의 규범적 맥락에서, 원리(principles)에 관한 헌법 문언들은 지칭적으로 독해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속성적으로 독해되어야 하는가?
그 답은 입헌 민주주의의 정당성이라는 더 넓은 규범적 논증의 맥락에서 정해진다. 단순히 지칭적 용법만이 입법자의 의도에 충실한 것이라고 그냥 우기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정당성'(legitimacy)가 일단 헌법해석이론을 택하는 데 작동하기 시작하면, 단지 죽은 자(dead hand)의 마음 속에 있던 특수자들의 표상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원본주의는 대단히 매력 없는 이론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여기에 더해, 언어철학적으로도, 속성적 용법이 적어도 의미론에서는 더 기본적이라는 대답이 있다.
바로 뒤에 소개할 Sauk Kripke의 논문은, 도넬란이 포부 가득하게 외치는 것과 달리, 도넬란의 이론은 전혀 러셀 이론에 대한 논박이 되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지칭적 용법에서의 화자 지시체는, 맥락 의존적이고 비규약적인 특수한 개념들을 사용하기 때문에, 의미론적 차원에서 비기본적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칭적 용법에 사용된 기술구를 곧이곧대로 다시 받아서 의미론적 분석을 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법문언 의미론적 분석에는, 특별한 예외가 없는 한, 속성적으로 읽는 것이, 타당한 의미론 위에서 작업하는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도넬란의 이 논문은 바로 위의 크립키의 논문과 같이 읽어야 할 것이다.
이로써, 러셀, 도넬란, 크립키의 한정기술구에 관한 논문이 모두 시민교육센터에 번역되게 되었다. 이로써 아무쪼록 이 문제에 관하여 고민하는 후학들의 공부 시간을 절약해주기를 희망한다.
또한 법률가들이 법의 해석이 당연하거나 자연스러운 명명백백한 의미 위에서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철학적 가정 위에서 작업하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