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Martha C. Nussbaum, The Therapy of Desire: Theory and Practice in Hellenistic Ethics,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4
Chapter 10 "The Stoics on the Extirpation of the Passions" (격정의 근절에 대한 스토아주의)
요약번역: 이한
스토아적 치료관에 대한 더 심층적인 이해를 얻기 위해, 우리는 정서 또는 격정에 대한 그들의 해명을 이제 살펴보고, “치료된cured” 사람의 삶에 대한 그들의 그림에 대해 이것이 갖는 결과를 살펴봐야 한다. 나는, 인간 목적 또는 선에 대한 스토아적 관념의 일정한 특성들을 적어두는 일로 시작하겠다. 이 관념은 스토아주의의 진단과 처방에서 일 역할을 할 것이다. 스토아주의에 따르면, 오직 덕만이 그 자체를 위해 선택할 가치가 있다. 덕은 그 자체만으로, 완전하게(completely) 선한 인간 삶에 충분하다. 즉, 행복(eduaimonia)에 충분하다. 덕은 외적 우연성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무언가이다. 그 획득에 있어서나, 일단 획득된 뒤의 그 유지에 있어서나 말이다. 행위자의 통제 하에 온전이 있지 않은 항목들-건강, 부 , 고통으로부터의 자유, 신체 능력이 잘 기능하기-은 (360) 아무런 내재적인 가치가 없으며, 행복에 대한 그것들의 인과적 관계는 도구적인 필수 조건조차도 아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버린다 하여도, 즉 우리가 가능한 최악의 자연적 여건에서 살고 있는 현자를 상상한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선한 한-일단 선하게 되면 그녀는 타락할 수 없다-그녀의 행복은 여전히 완전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상당한 논란과 불명확성의 영역으로 진입하게 된다. 왜냐하면 스토아주의자들은, 이 외적 선들이 적합하게 선호된다고 주장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현자는 많은 경우에, 그리고 올바르게, (왜냐하면 현자는 결코 실수를 하지 않으므로) 병약이 아니라 건강을 추구할 것이며, 고통이 아니라 고통으로부터 자유를 추구할 것이다. 몇몇 문헌들은, 이 항목들이 그러므로 얼마간의 가치를 갖는다고 타당하게 이야기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설사 그것이 오직 파생적이거나 이등급의 가치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것이 정확히 어떤 가치인지, 그리고 선함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 (361) 나는 여기서 난해한 해석 문제에 휘말려 들어가지는 않겠다. 나는 그저 나에게는 논란의 여지가 없어보이는 일정한 사실들을 기록하고, 해석적 딜레마로부터 나오는 몇 가지 활용가능한 경로를 그리고, 그러고 나서는, 우리가 가장 관심 있어 하는 쟁점에 이 주장들이 갖는 중요성을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스토아주의자에게 덕은 다른 어떤 선과도 맞교환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은 명확하다. 실제로, 그것은 다른 어떠한 선과도 통약가능하지도 않다. 이 궁극적 선은, 키케로가 주장하길, 다른 그 어떠한 것의 정도나 양으로 환원불가능한 고유한 질을 갖고 있다고 한다.(Fin 3. 33-34). 이 이유에서 우리는 다른 선을 덕에 더하여 더 큰 총합을 얻는다는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된다. “지혜 더하기 건강이 지혜 그 자체만 보았을 때보다 더 가치 있다는 것은 참이 아니다.”(Fin. 3.44). 그러나 다른 선들과 덕이 서로 통약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리고 덕 그 자체만으로 최고의 가치를 갖는다는 점을 감안할 때, 우리는 그렇다면 덕의 조금이나 일부를, 아무리 “작다고” 하여, 다른 그 어떠한 선이나 선들의 심지어 가능한 최대한의 양과도 교환하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한 어떠한 맞교환도 정당화되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스토아주의자에게, 외적 선들은 행복의 부분도 아니며 행복의 필수조건도 아니다. 그것들은 “행복하게 살거나 비참하게 사는 데에 대하여 아무런 힘도 갖고 있지 않다.”(Fin. 3.50) 덕 그 자체만으로 자족적이며, 행복을 위해 충분하다. 그러나 스토아주의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처럼, 행복은, 그 정의상, 내재적 가치를 갖는 모든 것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즉, 그 자체로 선택할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 주장들을 한 데 모으면, 우리는 많은 수의 텍스트들이 실제로는, 외적 선, 덕이 아닌 모든 선들이, 아무런 내재적인 가치를 갖지 않는다고 주장한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양한 해석적 전략을 시도해볼 수 있다. 우리는 선호되는 중요하지 않은 것(indifferents)들은, 일종의 이등급의 가치를 갖고 있으며, 현대 철학에서 “축차적 순서짓기”로 알려진 일종의 위계 내에서 덕 아래에 배열된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덕의 주장을 모두 만족시킨 뒤에,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만족시킨 때에는 언제나 우리는 그 중요하지 않은 것들의 주장들을 고려해보아도 되는 것이다. 또는 우리는, 중요하지 않은 것들의 가치는, 그것들이 아이의 경력에서 덕목에 대하여 서는 생산적 관계에서 도출된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외적인 것에 대한 아이의 자연적 정향은 (362) 발달의 과정에서 중대한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362) 아이의 이성이 성숙하고, 그 사람이 덕을 발전시켰을 때, 그녀는 자연적인 존재가 되기를 그치며, 그녀는 덕이 허용할 때 그리고 허용함에 따라 그녀의 자연적 구성의 동물적 측면을 여전히 적합하게 따를 수는 있다. 유사한 많은 해결책들이 제안되었다.(주석 13) 그러나 나는 우리가 스토아적 관념의 정신에 충실하려면 절대적으로 피해야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들, 외적인 선들에,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명시적으로 그것들에 결부시키는 것으로 보이는 종류의 가치를 결부시키는 일이다. 즉, 우리는 그것들에 행위자의 행복의 구성적 부분으로서 그 어떠한 내재적 가치도 귀속시키지 않아야 하거니와, 그것들을 행복한 삶을 위한 필부술가결한 절대적인 조건으로 생각하지도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들과 견해를 같이 하는데, 정말로 사랑과 우정에 내재적 가치를 귀속시킨다. 이것들은 그 본성상 불안정하고 통제되지 않는 외적인 항목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시금, 스스로를 사회적 존재로서 본다. 그래서 국가의 상실이나 정치적 특권의 상실이, 내재적 가치의 상실이 되는 그러한 존재로 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은 인간 삶은, 일정한 양의 음식, 주거지(shelter), 그리고 신체적 건강 없이는 추구되고 실현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점이 이 항목들을 행복을 위한 필수조건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비록 그것의 구성부분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스토아주의자들은 이 모든 것들을 부인하는 견해를 지지한다.
스토아주의자들이 덕 이외의 항목들에 대한 모든 가치를 부인 할 때, 그들이 여기서 포함시니는 것에는 그 현존과 부재에 대하여 외적 세계의 우연이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것이 포함된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이는 그들이, 외적인 세속적인 행위의 내적인 가치, 심지어, 그들이 명시적으로 주장하듯이, 삶의 내재적 가치 그 자체를 부인하는 견해를 지지함을 의미한다.(they are committed to denying)(DL 7.102) 부나 명예 같은 전통적인 “외적 선들”, 그리고 아이를 갖고 친구를 사귀며 정치적 권리와 특권을 보유하는 것과 같은 “관계적 선들”뿐만 아니라, 용기 있고 정의롭고 겸손하게 행위하는 것과 같은 덕스러운 활동의 개별적 형태도, 엄밀하게 말해서, 가치 없는 것으로 주장된다. 이 근거는, 그것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논했고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의 통제 밖을 벗어난 사건들에 의해 중단되거나 저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자들은 자족적일 수밖에 없다. 그의 삶은 항상 행복이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간에 말이다. (TD 5. 83). (363) 덕은 영혼 상태라고 주장된다. 키케로의 화자는, 우리에게 덕이란, 마치 우리가 창 던지기에서 궁극적인 목적은, 아마도, 실제의 던지기는 자부심을 갖게 되는 것의 아무런 부분도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정확하게 과녁을 겨냥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과도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덕이란 불활성의 내적 조건이 아니다: 덕은 분투하기나 안간힘을 쓰기와 같이 상상된다. 그러나 이 내적 활동들은 명시적으로, 세속의 우연성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DL 7.128) 그리고 그것들은 그 자체로 완전한 것으로 주장된다. 세계에 그것들의 출현과는 꽤나 별개로, 그것들이 출발하게 된 순간부터 완전한 것으로 주장되는 것이다. 현세의 수행은, 성큼성큼 걸어나가 세계로 들어갈 필요가 전혀 없다. 즉 그녀의 영혼을 펼쳐 세계로 드러내보일 필요가, 그녀의 영혼의 긴급한 사항을 세계로 밀어붙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녀는, 세네카가 그토록 자주 이야기하듯이, 그저 집에 머무를 수 있다. 왜냐하면 집에서, 그녀 내면에서, 그녀는 그녀가 필요한 무엇이든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스토아주의자는 “외적 선들”의 통상적 리스트들의 가치를 부인할(repudiate) 뿐만 아니라, 거기서 더 나아가 그들은 인간 선에 관한 주장들 중 하나와도 단절한다. 이 주장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하듯이, 보통 사람들은 가장 기꺼이 동의할 주장이다: 즉, 좋은 삶은 활동에 있으며 이 활동은 현세에서 전개되어 나간다는 주장 말이다.
우리는 스토아학파의 현인의 래디컬한 초연함에 대한 하나의 그림을 얻기 시작하였다. 이 초연함은 평정(quanimity)를 가지고서 노예제와 심지어 고문까지도 맞이하는 초연함이다. 이 초연함은 아이의 사망 소식을, “나는 내가 죽을 운명의 존재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라는 놀라운 말로 맞이하는 것이다. 이 초연함과 그것이 함의하는 자아에 대한 견해에 관하여, 나는 (364) 이어지는 내용에서 더 이야기하겠다. 그러나 이 초연함은 그 당연한 귀결을 갖는다. 이것을 나는 지금 소개하겠다. 만일 현세의 활동이 외적이고 필연적이지 않은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그 행위자의 윤리적 부담을 한 방식으로 들어준다면, 즉 그녀를 지배할 수 없는 조건에 덜 의존적으로 만든다면,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선언은 윤리적 부담을, 핵심적인 내적인 수행에 윤리적 주의를 모두 집중시킴으로써, 증가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에서는, 외적으로 드러나는 행위(overt action)가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매우 중요하다. 자기 통제(enkrateia), 즉 반역적이지만 일시적으로 좌절된 느낌에 의해 수반되는 올바른 행위는, akrasia 즉 선한 원리와 선한 느낌에도 불구하고 부당한 일을 하는 것보다 도덕적으로 훨씬 낫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위자가 대부분의 선한 사람들은 견뎌낼 압력에 굴복하는 경우에는 그 행위자를 가혹하게 판단한다고 한다. 반면에 그녀가 극단적으인 여건적 압력에 굴복한다면 우리는 용서를 요구받고 또 내키는대로 판단을 내려도 좋ㄷ고 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사람이 실제로 한 일을 잊지 않을 것을 주문한다. 그 행위는 거기에 있고, 그 행위가 일어났다는 것은 도덕적 차이를 만들어낸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은, 만일 충분히 강하게 압박을 받으면 무언가 수치스러운 일을 할 것이다. 그러나, 나쁜 운을 가진 극소수만이 그렇게 압박을 받을 것이며 그들의 행위를 이유로 판단을 받을 것이다. 우리 중 대부분은 그러지 않을 것임에 반해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나쁜 사유와 소망을 형성하였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이를 행위로 한 번도 옮기지 않은 사람은, 확실히 가혹하게 판단받겠지만, 실제로 그 행위를 한 사람만큼 가혹하게 판단받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스토아학파가 이러한 외적인 것에 대한 강조에 별로 유쾌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이미 이해한다. 첫째, 그들은, 운과 외적 여건의 도덕적 유관성을 부인하는 견해를 지지한다. 그들은, 사람들의 의도와 동기와 사고를 이유로, 행위자가 온전한 통제력을 갖지 못하는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그리고 현세의 모든 조건이 어떠한가와는 꽤나 별도로 그런 것들을 이유로 사람들을 판단하는 견해를 지지한다.
365 이는 범죄를 저지를 기회를 한 번도 잡지 않은 범죄자와 실제로 잡은 범죄자 사이에 아무런 도덕적 차이가 없음을 의미한다. 극단적인 압력을 주는 여건 하에서 극도로 나쁜(vile) 일들을 범한 보통 사람과 당신과 나 사이에는 아무런 도덕적인 차이가 없다. 나와 당신은 단지 그렇게 하도록 한 번도 유혹을 받지 않아서 현재 옳을 뿐이고, 그러한 모든 유혹에 저항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안전하게 칭송할 수 있는 유일한 덕목은 순수한 오류를 범하지 않는 덕목(pure error-proof virtue), 상쇄하는 내적 힘 없는 덕목이다.(virtue without any counterbalancing inner forces) (우리는 왜 스토아학파가 오직 현자만이 결코 실수를 범하지 않는 이라고 말하고 싶어하는지, 그리고 왜 모든 다른 사람들은 바보라고 말하고 싶어하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스토아학파가 인정할 수 있는 자기통제와 akrasia 사이의 유일한 차이점은, 그 핵심에 실제로 거기 있는 하나뿐이다. 즉, 그 느낌과 사고의 균형에서 빈번하게, 내적 심리적 조건의 아주 작은 섬세한 차이 말이다. 우리는 행위자를 그녀의 사고와 격정으로 평가한다. 우리 스스로 결국에 모든 것이 잘되었다고 주장하는 도덕적 위안에 빠지지 않고서 말이다. 살인 소망을 갖고 있지만 이를 억제하는 사람과, 상충하고 내켜하지 않는 살인자를 구분하기가 어렵게 된다. 행위자와 현세 사이의 경계, 우리에게는 지금 둘을 별개로 구분시켜주는 결정적인 벽이 사라지고 만다: 그것은 아무런 도덕적 유관성을 갖지 않는 것이 허용된다.
우리는 여기서 더 나아갈 수 있다. 스토아학파의 그림에서, 내적으로 벌어지는 일은 하나의 행위이며, 그 자체로 평가가 가능하다. 덕스러웁고 악덕인 행위는, 기억하겠지만, 어느 순간에라도 완결적이다. 마음에 품는 그 순간에도 완결적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화한 살의 욕구에 대항하는 어려움에 맞서서 달성한 올바른 행위로 기술될 것이, 스토아적인 용어로는, 좋은 내적 행위로, 다만 극단적으로 사악한 내적 행위와 함께 수반된 좋은 내적 행위로 기술될 것이다. 키케로는 이 점을 분명하게 밝힌다.
367 공포, 슬픔, 화, 동정, 그리고 에로틱한 사랑은 우리에게 광포한 영혼에서의 정동 또는 격변으로 보인다. 이는 침착한 파악이나 이성을 제자리에 놓기와는 꽤나 다른 것으로 보인다. 격정을 신념이나 판단과 등치시키는 것은 더 나아가, 다른 일반종의 명칭으로 “격정”이라는 용어를 자리매김하는 수동성의 요소(the element of passivity)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판단은 우리가 능동적으로 내리거나 하는 것으로 보이지, 우리가 겪는 무언가로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사랑, 공포, 슬픔, 화를 느끼는 것은 정신적 동요(tumult), 광포한 움직임, 취약성의 조건에 있게 되는 것이다. 니키디온은 물을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조건이, 이러저러한 것이 참이라고 판단하는 것과 등가일수가 있는가?
우리는 스토아학파가, 이 이상한 주장을 왜 방어하기를 바랐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주장은, 삶의 기예로서 철학의 필수성과 효과성을 확립하는 일에 적잖게(in no small measure)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만일 격정이 우리의 동물적 본성에서 나오는 합리적인 것보다 못한 마음의 일어남(subrational stirrings)이 아니라면, 그게 아니고 합리적 능력의 변경(modification of the rational faculty)라면, 그렇다면 그것은 완화되고 궁극적으로 치유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이성의 기예를 활용하는 치료적 테크닉에 의해 접근되어야만 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만일 판단들이 격정들이 실제로 해당하는 것의 전부라면, 만일 그것들 중 어떠한 부분도 합리적 능력 바깥에 놓여 있지 않다면, 판단을 충분히 변경하는 합리적 기예는, 타당한 것을 찾고 그것들을 거짓의 자리에다가 가져다 놓음으로써, 니키디온을 격정에서 야기된 병마에서 치유하기에 실제로 충분할 것이다. 거짓 신념은 전부 제거될 수가 있으며, 여기에는 아무런 말썽많은 자국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이에 더하여 격정을 치료하는 것이, 니키디온이 삶의 기예에게 요구하는 중심적인 과업이라면, 철학은, 철학이 그것을 치유할 수 있다고 보임으로써, 그 자체의 실천적 최고성을 확립시킬 것이다. 그리하여 격정의 분석과 철학적 치유의 묘사는 손을 맞잡고 함께 간다. 크리시포스는, 격정에 관하여 네 권의 책을 썼다고 우리는 듣는다. 첫 세 책에서 그는 격정의 분석을 논하고, 특정한 격정들에 대한 그의 해명과 정의를 제시한다. 네 번째 책은 이 이론적 기초로부터 전환하여 치료의 실천을 살펴본다. (368) 그 책은 치료적 책이라고 불렸다. 확실히 이 책은 첫 세 책이 논한 분석을 요구하고 그에 기대고 있어다.
그러나 왜 일정한 논제가 철학자에게 중요한가를 이해하는 것과 그것의 참을 평가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러나, 더 자세한 분석은, 이 외관상의 기이한 논제는, 삶의 경험에 힘으로 부과된 그저 손쉬운 이론적 도구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드러낸다. 이것은 이 영역에서 진리의 가장 강력한 후보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우리가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덜 반직관적이기도 하다.
이 두 쟁점-직관적 수용가능성과 참-은 현대의 대부분의 윤리적 사유에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것들은 크리시포스의 사유에서도 또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369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정서에 관한 그리스의 사유에서는, 플라톤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거쳐 에피쿠로스에 이르기까지, 정서는 그저 그들의 느껴지는 질만으로 식별되고 서로 구별되는 감정의 눈먼 들이닥침, 일어남 또는 감각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not simply blind surges of affect, stirrings or senstaion) 갈증이나 배고픔과 같은 욕구(appetites)과는 달리, 정서들은 중요한 인지적 요소를 갖고 있다(cognitive element): 그것들은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들을 구현한다. 정서의 경험과 함께 가는 감정들은, 그것들의 기초나 근거가 되는 신념이나 판단들에 묶여 있으며 거기에 기대고 있다. 정서가 전체로서, 그 근거짓는 신념들에 대한 우리의 평가에 따라 참 또는 거짓으로 평가되는 것이 적합하게 될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말이다. 신념이 감정의 근거이기 때문에, 느낌 그리고 그리하여 전체로서의 정서는, 신념이 변경되면 변경될 수 있다. (370) 우리는 이러한 발상들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화와 동정 같은 정서에 대한 해명을 어떻게 제공해주었는지를 살펴보았다. 우리는 또한 그것들이 에피쿠로스적 치료에 어떻게 역할을 하였는지도 살펴보았다.
그 전통에 있는 연속성의 추가적인 두 요소가 크리시포스의 움직임을 위한 길을 준비한다. 첫째, 정서가 현저하게 기반을 두고 있는 신념들은 우리의 ㅍ여가적 신념들, 무엇이 좋고 나쁜지, 무엇이 가치있고 가치없는지, 유용하고 유해한지(noxious)에 관한 우리의 신념들을 포함한다. 어떤 것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은 그것에 높은 가치를 귀속시키는 것이며, 스스로에게 그것이 존재할 때 심대한 즐거움을 느끼며, 그것이 상실되었을 때는 슬픔을 느끼고, 그것을 누군가 훼손시켰을 때에는 화를 느끼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것을 가졌지만 당신은 가지지 않았을 때 선망하며, 누군가 그것을 자신의 아무런 잘못도 없이 상실하였을 때 동정이라는 반응의 기초를 부여하는 것이다. 둘째, 제3장에서 논하였듯이, 주된 정서가 기대고 있는 평가적 신념들은 모두 어떤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 신념들은 모두 취약한 “외적 선들”에 높은 가치를 귀속시키는 일을 포함한다. 즉, 행위자의 온전한 통제에 어느 정도는 들지 않는, 그리하여 현세의 우연한 사건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항목들에 말이다. 그것들은, 그렇다면, 가장 가치 있는 것들의 비자족성을 전제한다. 그것들은 그에 따르면 선이 그 안에 그저 “제자리에at home”에 있는 것은 아니게 되는, 대신에, 행위자와 불안정한 현세의 항목들 사이의, 사랑하는 친구, 시, 소유물, 행위 조건과 같은 항목들 사이의, 복잡한 연결관계망에 있다고 하는, 행위자의 선에 대한 관념을 구현한다. 그것들은 우리가 운에 인질로 사로잡혀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뜻에서, 우리는 정서들 사이의 놀라운 통일성이 있음을 주목한다. 그것들은 공통된 기반을 공유한다. 그리고 그것들의 근거짓는 신념들에 의해서보다는, 여건적이고 원근적인 고려사항에 의해 서로 더 구별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면 우리는 동정한다. 우리가 오늘 사랑하고 크게 기뻐하는(rejoice) 일이, 내일 그것이 사라지면 안 된다고 하는 두려움을 만들어낸다.(what we love and rejoice in today engenders fear lest fortune should remove it tomorrow) 우리는 우리가 두려워하던 것이 발생하면 비통해 한다.(we grieve when what we fear has come to pass) 다른 사람들이 우리 선의 취약한 요소를 증진할 때, 우리는 감사를 느낀다. 다른 사람들의 행위가 사악한 것으로 드러났을 때, 외적 선에 관한 그 동일한 관계가 화를 발생시킨다.
이 모든 사안들에서 정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하길, 평가적 신념이, 통제되지 않는 외적 항목들에 가치를 귀속시킬 뿐만 아니라 진지하거나 높은 가치도 부여하지 않는다면, 순조롭게 출발하지 않을 것이다.(will not get off the ground) 공포는, 우리의 아무런 잘못도 없이 중요한 손상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도 있는 사고를 요구한다. 다시금, 화는, 다른 사람에게 의해 등한시 여겨진 항목이 진지한 가치를 가진다는 사고를 요한다. 나는 내 커피잔이 깨질까봐 두려워하면서 돌아다니지 않는다. 나는 누군가가 페이퍼 클립을 가져간다고 해서 화하지 않는다. 나는 칫솔을 잃어버린 사람을 동정하지 않는다. 나의 아침 시리얼은 나를 기쁨과 환희로 채워주지 않는다. 나의 아침 커피마저도 사랑의 대상은 아니다.
371 이 사례뜰은 추가적인 사고를 시사한다. 이 사고는 스토아적 치료에 의해 활용될 것이다. 운의 손상은, 그것이 사소하거나 가벼운 것으로 여겨질 때, 그리하여 정서를 근거짓기에는 불충분한 것으로 드러났을 때에는, 빈번히 이런 방식으로 바라보아진다. 왜냐하면 손상되거나 증진된 대상 그 자체가, 그 가치와 관련하여, 대체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커피잔과 페이퍼클립은 비통의 이유가 되는 일이 대단히 드물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그런 것들에 대하여 신경쓰지 않기 때문이다. 새로 공급을 쉽게 받을 수가 있으며, 그렇게 공급되는 모든 것들은 우리가 그 항목을 가치있게 여기는 이유인 그 기능에 똑같이 잘 복무한다. 만일 우리가, 커피잔의 상실이 비통을 발생시키는 상황이 되는 사안을 상상해보려고 하면, 우리는 그 특정 커피잔이 그것을 고유한 특수자로 만드는 역사적이거나 감상적인 가치를 소유자에 의해 부여받은 그러한 사안을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특수성과 특별함의 감각의 제거는, 작은 것에 있어서나 큰 것에 있어서나, 우리가 그러한 정서들을 제거하기를 원한다면, 공포, 화, 심지어 사랑의 제거(eradication)에 기여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시사한다.
정서에 관한 그리스의 이 사유 전통은, 이때까지,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라 꽤나 직관적으로 그럴법한 것 같다. 만일 크리시포스가 정말로 반직관적인 입장으로 끝이 난다고 해도, 그는 이 주제에 관하여 그 어떤 철학자도 가졌을 법한 것일뿐만 아니라, 정서에 관한 우리의 직관을 정교하게 하는 기초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크리시포스는 그를 이 전통 안에 위치지운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로부터 래디컬한 이탈을 한다. 그가 무엇을 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 전통 내에서 옹호되는, 신념 또는 판단과 격정 사이의 관계에 대한 네 논제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필수성Necessity 유관한 신념은 격정을 위해 필수적이다.
구성적 요소.Constituent Element 그 신념은 격정에 있어서 (필수적인) 구성적 요소이다.
충분성Sufficiency 그 신념은 격정을 위하여 충분하다.
동일성Identity 그 신념은 격정과 동일하다.
충분히 정확하기 위해서는, 이 분류는 몇가지 세련화를 필요로 한다. 첫째로, 우리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격정(occurrent passions)을 단단히 자리잡은 성향적 상태(entrenched dispositional states)와 구분할 필요가 있다. 스토아학파 이론은 이 일을 잘 한다. 우리가 나중에 살펴보듯이 말이다. 둘째, 우리는 각 사안에서, 우리가 갖고 작업하는 어떤 신념 수준에 관한 것인가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으며, 상이한 수준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명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적어도 일부 외적으로 통제되지 않는 항목이 높은 가치를 갖고 있다는 신념은 일반종인 신념들(generic beliefs)이다. 더 구체적인 신념들은, 내가 누군가의 행위자성으로 인하여 심각한 손상을, 나의 잘못도 없이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매우 구체적인 신념은 (372) X가 나에게 이런저런 방식으로 방금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화의 격정에 작용한다. 그것들은 구분될 필요가 있으며 격정에서 그들이 하는 역할은 평가된다. 다시금, 스토아학파는 이것에 관하여 주의깊게 사유하였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특정한 현재 발생하는 평가적 신념들에 관하여 생각하겠다. (예를 들어 “X는 나의 좋은 삶의 하나의 중요한 요소에 심각한 손상을 방금 입혔다.”) 즉, 격정의 구체적인 삽화의 기반이 되는 신념을 생각하겠다. 이 구체적인 신념은 물론 더 일반적인 신념들을 전제하며, 이것들은 그것들의 제거와 함께 제거될 것이다.
거칠게 그리고 다소 조잡하게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플라톤과 에피쿠로스는 (1)을 주장하며 그리고 아마도 다른 어떠한 것도 주장하지 않는다. 비록 그들의 (2)에 대한 입장은 불분명하지만, 그리고 에피쿠로스는 (3)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내가 말했듯이 (1)과 (2)를 주장한다. (3)에 관한 그의 입장은 불명확하다. 그러나 그의 수사적 전략은, 격정에 대한 신념의 통상적 충분조건성에 기대고 있다.(rely on the usual sufficiency of belief for passion) 크리시포스의 선학자인 제논은, (1)을 주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2), 그리고 또한 (3)과도 양립불가능한 인과적 형태로 말이다. 그는 신념은 확실하게(reliably) 펄럭이는 감정을 야기한다고, 그리고 신념이 아니라 이 감정이, 격정 그 자체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2)를 부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필요가 있다. dhosio하면 그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들의 원인, 신념들을 통하여 격정들을 개별화하여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같은 감정이 다른 방식으로 야기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야기되었다면 파토스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로 보이기 떄문이다. 이 모든 사람들은, 그렇다면, 격정과 신념 사이의 가깝고 밀접한 연관성(a close and intimate connection)을 옹호한 것이다. 그러나 이 연관성은 동일성에는 못미치는 것이다.
373 III
이제 우리는 알고 싶다: 무엇이 크리시포스로 하여금 그 마지막 걸음을 취하도록 하였나? 우리는 제논적 입장 그리고/또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입장이, 스토아주의자들이 옹호하고자 했던 철학적 치료의 그림이 무엇이건 그것을 옹호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명백히도 크리시포스는, 격정의 감정적이고 운동적인 측면을 무시하거나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런 종류의 격동의 움직임이 판단이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것의 자리는 합리적 영혼에 있다고 말이다. 왜 그는 이걸 말하고 싶어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자주, 피상적인 답변을 얻는다. 스토아학파는, 오직 영혼에 단일한 부분만을 인정한다고 상기된다. 즉 합리적인 부분만 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플라톤이 영혼을 세 서로 구별되는 요소로 나눈 것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이 하나의 요소의 조건으로 모든 심리적 조건을 만들어야만 했다. 이것이 얼마나 기이하고 그럴법하지 않게 보이든 말이다. 이것은 나에게는 답변으로서는 상당히 부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영혼이 오직 하나의 부분만을 갖고 있다는 것은 스토아학파에게는 논증되지 않는 독단의 항목이 아니었다. 이것은 결론이었고, 그 결론은 도덕 심리학의 논증에 의해 도출된 것이었다. 특히 격정에 관한 논증을 주된 것으로 포함해서 말이다.
374 우리는 판단이, 스토아주의자에게는, 외관에 대한 동의로 정의된다는 점을 주목함으로써 출발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두 단계로 이루어진 과정이다. 첫째, 이러저러한 것이 사태라는 점이 니키디온에게 발생하거나 보인다. (스토아적 외관은 통상 명제적이다.) 그것은 그녀에게 그 방식으로 보인다. 그녀는 사태를 그 방식으로 본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녀는 그것을 진정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그녀는 이제 더 나아가 그 외관을 받아들이거나 수용하여 그것을 지지하는 견해를 취할 수 있다.(commit herself to it) 그 경우 그것은 그녀의 판단이 되었다. 그녀는 또한 그것을 부인하거나 논박할 수 있다. 그 경우 그녀는 그와 모순되는 쪽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또는, 그녀가 제8장에 있었던 회의주의자와 같이, 그녀는 그것과 함께 살면서 어느 쪽으로든 지지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비슷한 분석을 상기해보라. 해가 니키디온에게는 한 발자국 곁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그녀에게 보이는 바이며, 그것이 그것을 보는 바이다.) 그러나 만일 그녀가, 해가 거주지가 되고 있는 세계보다 더 크다는 자신이 지지하는 신념을 획득한다면, 그녀는 그 외관을 거부할 것이다. 그녀는 그것에 거리를 두고는,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물론, 그것은 그녀에게 계속 그런 식으로 보이겠지만 말이다. (375) 그녀는 자신에게 말한다. “그것이 나에게 보이는 방식이지만, 물론 그것은 사태가 진정으로 그러한 방식은 아니다.” 이 간단한 지각적 사안에서는, 외관이 그녀의 인지적 능력에 스스로를 드러낸다고 말하는 것과, 그것의 수용이나 거부가 바로 그 능력의 작용이다라고 말하는 것에는 어떠한 기이한 것도 없어보인다. 외관을 수용하거나 인정하는 것, 그것을 참으로 지지하는 것은, 인지의 차별화하는 힘을 요하는 과업으로 보인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에 따르자면 움직임 없는 지지하는 것 없이 계산을 수행하는 것이 되어버리는, 인지에 관한 흄적인 시대착오적인 그림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손을 뻗어 외관을 그 자체에 취하는 것이 이성의 능력 그 자체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기이한 데가 없다.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분하는 고전적인 방식은, 아리스토텔레스 때로부터, 사실상, 동물은 그저 외관이 그들에게 야기하는 방식대로 움직일 뿐이며 아무런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동물들은 사태가 그들에게 보이는 대로(hings strike them) 움직인다. 아무런 견해 지지 없이 말이다.(without commitment) 그들과 우리를 갈라놓는 선별, 인식, 그리고 헌신이라는 추가적인 요소(the extra element of selection, recognition, and commitment)는 이성이 무엇인가에 패러다임적인 것이다: 즉, 우리는 그 능력에 의하여 우리 자신을 사태가 그러한 방식에 대한 견해를 지지하게 된다는 것이다.(that faculty in virtue of which we commit ourselves to a view of the way things are.)
이제 다른 사안을 검토해보도록 하자. 니키돈이 매우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 그녀에게는, 얼마 전만 해도 거기 그녀의 삶에 있었던 어마어마하고 대체불가능한 가치를 가진 무언가가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거나 그 외관이 그렇게 드러난다.(It strikes her, it appears to her) 만일 우리가 그 외관을 그림으로 보여주기를 원한다면(if we want to display the appearance pictorially)-스토아주의의 텍스트가 때때로 시시하는 것과 같은 외관의 관념을-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그의 현존으로 채웠던 이제는 매우 공허한 공간을 그 안에 가진 일상의 삶의 연장을 생각할지 모른다. 사실, 이 평가적 명제의 재현은, 적절하게 이루어졌을 때, 일련의 그림 그리기 전체를 요구할 수도 있다. 그녀가 그녀가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그 사람의 부재를 알아챔에 따라 말이다. 다른 종류의 그림 그리기 역시 가능할 수도 있다: 그녀는 그 놀라운 사랑하던 얼굴을 보면서, 그 얼굴을 어마어마하게 사랑하는 얼굴이자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이 그녀와 단절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장해야만 하는 것은 그 외관이 명제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의 내용은 이러저러한 것이 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평가적이다. 그림으로 나타내지든 아니든, 그것은 고인을, 세상의 어느 것과도 누구와도 같지 않은 어마어마한 중요성을 가진 것으로 재현한다.
이때까지 우리는 여전히 외관의 단계에 있었다. 이제, 몇 가지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녀는 그 외관을 거부하거나 부인할 수도 있다. (376) 즉 그녀로부터 밀어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만일 그녀가 그것이 악몽이거나 병적인(morbid) 상상이라고 판단한다면 말이다. 그녀는, 만일 그녀가 여전히 회의주의자라면, 그것에 관하여 완전히 중립적인 태도를 가질 수도 있다. 그래서 그녀가 그것을 지지하는 견해도 갖지 아니하고 또한 그것을 거부하지도 아니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가 그것을 수용한다고,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동의한다고, 즉 사태가 바로 그런 방식이라는 견해를 지지한다고 해보자. 누군가 어마어마하게 사랑했던 사람이 영원히 상실되었다는 생각이 그녀에게는 정서적 평정과 양립가능한가? 크리시포스의 주장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 인식 행위를, 심대한 격동 없이는 수행할 수가 없다. 그녀가 인식하고 있는 것이 그 모든 평가적 요소를 가진 그 명제라면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녀가 꽤나 차분하게, “그래, 나는 내가 가장 사랑했던 그 사람이 사망했고 내가 그를 결코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아. 그렇지만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아. 그것은 나를 전혀 동요케 하지 않아.” (아들의 사망 소식을 알게 되고는 “나는 내가 이미 죽을 운명의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한, 아버지에 대한 키케로의 이야기를 상기하라.) 크르시포스는 말할 것이다. 이 사람은 부인의 상태에 있다고 말이다.(This person is in a state of denial) 그녀는 정말로 그 ㅁ여제에 동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그 말들을 말하고 있을 수는 있겠으나, 그것에 저항하는 무언가가 그녀 안에 있다. 또는 그녀는 무언가에게 동의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 동일한 명제가 아니다. 그녀는 죽을 운명인 인간이 사망했다는 명제에는 동의하는 것일 수는 있다. 심지어 (아마) (그가 사랑했던 남자인) X가 사망하였다는 명제에도 동의하는 것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녀가 사랑하고 다른 무엇보다도 아끼는 그 사람이 사망했다는 그 명제에는 동의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을 인식하는 것은 격렬한 마음의 동요를 불러일으킨다.
우리가 여기서 염두에 두고 있는 명제가 어느 것이냐에 관하여 명확하게 하는 것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다는 점을 주목하라. 크리스포스의 견해에 관한 문헌 중 일부는, 그 어떠한 평가적 요소도 갖지 않은 명제를 두드러지는 것으로 만든다. 이를테면 “소크라테스는 사망하였다.” 우리는 이미 스토아학파 이전의 전통에서 정서에 묶여 있는 신념이나 판단이, 가치에 관한 판단임을 살펴보았다: 외적으로 통제되지 않는 항목에 대한 소중히 여기기나 가치를 경시하기 등등 말이다. 우리는, 스토아적 행위자가 인정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외관이란, 마찬가지로, 뚜렷한 평가적 요소를 가진 외관이라는 점을 주장해야만 한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격정과 같은 것이기 위해서(in order to be equivalent to a passion) 그것들은 세 특성을 가져야 한다. 첫째, 그것들은, 행위자의 관점에서, 무엇이 가치 있고 괜찮은지 또는 그 반대인지에 관한 주장을 해야만 한다. (377) 문헌은 “좋음과 나쁨에 관한 의견” “좋음과 나쁨에 관한 생각”이라고 항상 이야기한다. 이런 말은 격정에 관한 일반이론을 제시함에 있어서나 구체적인 격정을 정의함에 있어서나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그 명제는, 그저 행위자의 욕구와 선호를 표현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위자의 가치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즉, 선택할 가치가 있다고 믿어진 목적의 구조, 그것에 의거하여 그녀가 살아가기를 선택하는 목적의 구조 말이다. 그리하여 몇몇 문헌들은, 행위자가 무언가 나쁜 일이 닥쳤다(is at hand)는 것만 믿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상하는 것이 올바른 그런 종류의 나쁜 일이 일어났다고도 믿는 것이라고 주장한다.(it is the sort of bad thing about which it would be right to be upset) 이 추가된 확언(affirmation)의 요소는, 우리에게, 우리가 그저 소망에 관한 기분이나 변덕(mere desiderative whim and caprice)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둘째, 그 명제는, 문제의 그 항목에, 그저 어떤 가치만을 귀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거나 매우 높은 가치 (또는 비가치)를 귀속시키는 것이다. 크리시포스는, 우리에게, 명시적으로, 격정이, 그 문제의 것이 좋다고 생각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의 것이 실제로 그런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서, 사실상,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서 온다고 이야기해준다. 마찬가지로, 격정의 구체적인 삽화 저변에 깔린 성향적 조건은, 그 격정들을, 무언가가 추구할 가치가 매우 있다고 생각하는 신념과 같은 것으로 만든다. 비록 그것이 실제로는, 약간 선택할 가치가 있거나, 전혀 선택할 가치가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다시금, 포시도니우스(Posidonius)는, 크리시포스의 견해를 전하면서, 어떤 것이 이득을 주는 것을 담고 있다는 확신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378) 돈이 좋은 것이라는 신념은, “주체가 돈이 가장 좋은 것이며, 돈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삶은 살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까지 생각할 때에만” 만성적인 질환(chronic infirmity)로 된다.
마지막으로 그 신념은 일정한 내용을 가져야 한다: 신념은 취약한 외적인 것들,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들, 불시에 도달할 수도 있는 것들, 우리의 통제 하에 온전히 있지 않은 것들에 관련되어 있어야만 한다. 이것은 크리시포스와 스토아학파 이전의 전통의 공통 근거이다. 스토아주의자들은 명시적으로 이것을 그들의 정의에 포함시킨다. 비록 그들은 되풀이해서, 격정과 외적 선들에 대한 관심 사이의 연관성을 강조하긴 하지만, 그리고 외적인 것들에 대하여 신경쓰기를 그친 사람은 격정에서 자유롭게 되리라는 점을 강조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것들이 비난을 받는다는 점을 명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현자는 그의 지혜에 최고의 가능한 가치를 귀속시키면서도 그것의 상실을 두려워하지도 두려움을 느끼지도 않고 그것의 존재를 갈구하지도 않는다 등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포시도니우스에 의해 비판을 받는다. 다시금, 때때로, 문헌은, 마치 판단의 유관한 집단이, 스토아주의의 도덕이론과 연관되어, 그 거짓에 의해 색별되는 것처럼 말한다. 이것 역시도 전략적인 실수로 보인다. 왜냐하면 스토아학파는, 다른 선관을 갖고 출발한 니키디온과 같은 학생을 설득시킬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격정-신념들은 모두, 더 구체적인 정의가 명확하게 해주듯이, 주제(subject matter)를 공유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그 주제를 언급하여 식별되고 정의될 수 있으며 그렇게 식별되고 정의되어야 한다. 이것은 포시도니우스의 우려에 답변을 해줄 것이며, 그 이론의 배후에 있는 동기부여와 격정 근절을 향한 요청을 더욱 명쾌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이때까지 우리는 우리 목록에서 논제 3까지만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판단이란 외관에 관한 명제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논했다. 그리고 일종의 평가적 명제에 대한 진정한 수용 또는 동의는, 정서적으로 마음이 움직이기 위한 충분조건이라고 논하였다. 그것은 정서를 수반한다. 만일 정서가 거기에 있지 않다면, 우리는 명제에 대한 진정한 인정이 거기에 (또는 아직) 있지 않다고 말할 자격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비록 이것이, 정서의 신념 부분은 감정 부분과 독립적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반하여 전개되지만-, 명백히, 제논의 것과 같은 인과적 그림에 의해 충족될 수가 있다. 이 그림에서는 필연성에 관한 신념이 격정을 산출한다. 그리고 여기서 격정은 여전히 독특한 항목으로 이해된다. 우리는, 그렇다면, 여전히, 무엇이 크리시포스로 하여금 정서 그 자체가 이성의 기능이라고 말하도록 이끌었는지, 그리고 정서를 판단이 되는 동의와 동일시하도록 이끌었는지 물을 필요가 있다.
379 첫째로, 왜 격동이 이성의 상태로 여겨져야만 하는가?(why should the upheaval be seen as a state of reason? 글쎄, 비통의 끔찍한 충격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니키디온은, 그녀가 사랑하는 그 사람에 관하여 생각하고-그녀는 그녀의 마음에서 그 특별한 사람이 결코 그녀와 다시는 함께 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수용하고는-그녀는 정신이 흔들린다. 어디에서, 그녀는 스스로에게 질문하는가? 그 비통은 그녀의 귀에 플럭이는가? 아니면 그녀의 위에서 떨고 있는가? 그것은 그녀가 토끼나 새와 공유하는 어떤 동물적인 욕구인가? 아니다. 이 답변들은 그른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비통 그 자체를, 이와 같이 사소하고 품위 없는 자리에 연관짓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하다. 우리는 비통에, 특별히 인간적인, 그리고 충분히 그런 것들과 분별되고, 충분히 복합적이어서, 그렇게 복합적이고 평가적인 차별화된 반응을 낳기에 적합한 자리를 주고싶어 한다. 나의 어느 부분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하여 비통해할 가치가 있는가, 하고 그녀는 묻는다. 아마도 우리는 그것이 자리할, 영혼의 특별한 정서적인 부분을 발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자리할 곳을 제공할 수 있기 위해서는(but in order to be capable of housing it) 이 부분은, 그 사랑하는 사람을 그 사람의 아름다움과 특별함으로 인식하는 것이 가능해야만 할 것이다. 즉, 그 비통이 기반하고 있는 평가적 명제를 이해하고 그 명제에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심지어 그 명제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만 한다. 그 부분은, 서로 사랑하는 것의 풍부함을 알고 적절히 평가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 사랑의 엄청난 중요성을, 그것을 하찮게 만드는 스토아적 논변에 직면해서도 고집할 수 있어야만 한다 등등. 그러나 그럴 경우, 그것은 이성과도 상당히 닮은 것이 될 필요가 있다. 즉 선별하고, 평가하고, 그리는 동일한 행위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행위들은 모두 이성의 작업으로 흔히 여겨지는 것이다. 그럴 경우 능력을 다시 더듬어 가는 것은 기이한 일로 보이기 시작한다. 만일 우리가 이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수중에 바로 갖고 있다면, 우리는 그 동일한 능력의 상태로 비통을 만드는 것이 확실히 최선일 것이다. 그 논점은, 일단 우리가, 정서를 인지적이고 선별적인 것으로 만들면, 크리시포스가 그가 서 있는 전통 위에 구축하여 그것들이 그래야만 한다고 논했듯이, 이성이야말로 그것들이 자리할 바로 그 장소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아직 명확하게 된 것은 아니라고 반론할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설사 정서의 자리(seat)가 많은 인지적인 작동을 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하더라도, (380) 우리가 영혼의 합리적인 부분에다가 거주시키기에는 난점을 갖는, 저서의 감정적인 측면(affective side)가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이 논점에 대하여, 스토아적 이성은 동적(dynamic)이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대응하기 시작하였다. 그 이성은, 움직이며, 수용하고, 거부한다. 그것은 빠르게 또는 느리게 움직일 수 있다. 그것은 즉각 또는 주저하면서 움직일 수 있다. 우리는, 이성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의 외관을 살펴보고는, 소위, 그것을 향해 성급히 달려가서는, 그것을 완전히 취하는 경우를 상상해보았다. 왜 이 동적이고, 변하기 쉬운 능력(this versatile)이, 또한, 그에 뒤이은 비통이라는 무질서한 움직임(the disorderly motions of the ensuing grief)의 자리를 제공할 수 없단 말인가? 소포클레스의 크레온은, 그의 독자의 죽음을 직면하고서 말한다. “나는 이 앎을 받아들이고, 나의 이성에서 흔들린다.”(안티고네 1095) 크리시포스가 우리로 하여금 보기를 원하는 것은,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성은 그런 능력이 있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왜 감정(affect)을 더 야수같고(brutish), 덜 차별화하며, 우리가 비통해하기에 관련되어 있다고 보아온 인지적이고 수용적인 과정과 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밀쳐 놓아야 한단 말인가? 아니다. 인식하기와 격동은, 그녀의 하나의 동일한 부분에 속하는 것이며, 그녀가 그걸 갖고서 세계를 이해하는 그 부분에 속하는 것이다.
나는 “뒤따르는ensuing” 격동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크리시포스의 논증의 마지막 단계는, 우리에게, 이 구분이 틀렸으며 오도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니키디온이 비통해할 때, 그녀는 우선 침착하게 “나의 훌륭한 연인이 사망하였다”라는 명제를 받아들이고는, 그 다음에 비통해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 그 끔찍한 사건에 대한 실제의, 온전한 인식은 격동(upheaval)이다. 그것은 못의 뾰족한 부분에 당신의 손을 곧바로 누르는 것과 같다. 그 사악한 외관이 거기 자리하고서는, 그녀에게, 그녀가 이제 그것에 관해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묻는다. 만일 그녀가 더 나아가 그것을 수용한다면, 그녀 안으로 그것을 들여온다면, 그녀의 마음을 그것에 열어 받아들인다면, 그 순간에 그녀는 세계의 칼을 그녀 자신의 안으로 놓는 것이다. 그것은 격동의 준비가 아니라 격동 그 자체이다. 그 동의라는 행위 그 자체가 그녀의 자족성과 그녀의 동요하지 않은 조건의, 비통한, 쥐어뜯는 위반이다.(wrenching, tearing violation of her self-sufficiency and her undistrubed condition) 그 격정은 우리를 데리고 가는 “매우 난폭한 움직임”이며, 행위로 “우리를 난폭하게 밀친다” (SVF III. 390)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은, 그것이 인식의 한 형태가 아니라는 점을 함의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크리시포스가 주장하듯이, “그 무질서한 운동의 요소the disorderly kinetic element)를 담고 있는 것은 믿음belief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안다는 것 그 자체가 난폭할 수가 있다.
세네카는 유용한 구분을 더한다. 때때로, 그는 말하길, 외관의 존재는, 외관 그 자체는 받아들여지거나 안으로 들여와지지 않을 때조차도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소위, 당신의 표면에만 맞부딪칠 뿐이다.(just strikes against your surface).
381 급작스럽게 창백해짐(sudden pallor),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성적 자극(sexual excitation), 이 모든 신체적인 움직임은, 동의나 판단 없이 외관만으로도 야기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격정이 아니다: 이것들은 신체적 움직임에 불과하다.(But these are not passions: these are mere bodily movements.) 그 외관이 내부로 들여오도록 내버려두었을 때에만, 우리는-인식이라는 그 행위를 통해- 격정이라는 마음의 동요를 얻게 된다.(that we get the tumylt of the mind that is the passion(Ir. 2.3)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여기서 실천적 알기 또는 판단하기에 대한 동적인 관념을 갖고 있다. 여기서 판단은 그저 침착한, 명제에 대한 비활성화된 지적 세트의 행위가 아니라, 나 자신의 존재의 핵심을 가지고서 하는, 이러저러한 것이 참이라고 하는 인정(acknowledgment)이다. 명제를 인정한다는 것은, 그것의 온전한 유의미(full significance)를 자신의 존재 안에 실현하는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여서 그것에 의해 자신이 바뀌는 것이다. 이 관념 위에서-나에게는 이것은 매우 강력한 것으로 보인다-, 격정과 판단이 분리되지 않는다고 주장할 충분한 이유(every reason)가 있다: 그렇기 보다는, 격정은 그 자체가 동의(assent)나 인정이다: 나의 통제 바깥에 있는 무언가에 대한 엄청나게 높은 중요성에 대한 인정, “과도하다고” 적합하게 불릴 수 있는 인정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외적인 것들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관하여 올바른 이성에 의해 규정되는 한계를 유월하였기 때문이다.(because it transgresses the limits prescribed by right reason for our relation to things external)
크리시포스는, 그의 해명에 대한 하나의 추가적인 중요한 요소를 덧붙인다. 판단은, 격정과 같은 것으로, prosphaton한 것임에 틀림없다: 아직 못쓰게 되거나 소화되지 아니한 “신선한fresh” 것이다. 이 단어는, 흔히 음식에 대해서 쓰는 것으로서, 또한 방금 죽은 시체를 언급할 때도 쓰인다. 이것은 어떠한 부패(decomposition; 분해)도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는, 문제의 그 항목은 완전 새 것 같은 성격(its pristine character)을 아직 갖고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이것의 논지는, 일정한 종류의 감정적 거리두기가, 특히 시간이 지나면서, 동일한 믿음 또는 판단의 보유와 양립가능한 상황을 허용하는 것이다. 니키디온이 비통해던 그 사람이 사망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을 때, 그녀는 더 이상, 비통과 동일한, 그의 죽음에 대하여 난폭한 인식을 갖지 않을 것이다. 어떤 보충하는 논변이 없으면, 그 경우 크리시포스는, 그녀가 더 이상 그가 죽었다고 판단하거나 믿지 않는다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또는, 동등하게 그럴법하지 않은 것으로서, (382) 침착하고 거리가 있는 인식이 그 자체가 비통과 동일하다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크리시포스는 이것 중 어느 것도 말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체불가능한 손실을 인정하는 많은 방식들이 있고, 시간이 흐르면 그러한 방식이 스스로 자연스럽게 변모한다. 음식과 같이, 그 손실이 동화되거나 소화되었을 때, 그녀는 동일한 판단과 동일한 인식을 가질 것이라면, 그녀가 여전히 격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그른 것으로 보인다. “참신함”의 손실은 통상 일시적인 문제로서 문헌에서 그려진다. 비록 우리가, 그 명제를 인식하거나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수반함이 없이, 그녀를 격정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만들 다른 요인들을 상상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여기서 크리시포스는, 그 게임에서 그저 져주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어쨌거나, 비통해 하는 것에는 믿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 “참신함”과 같은 무언가가, 비통해하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비합리적인 요소가 아닌가? 이건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그렇기도 하다(Yes)는 것은, 일정한 신념을 가지는 것은, 이제 우리가 알게 되었듯이, 비통해 하는 것의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no)는 점은, 그 차이 그 자체가 인지적 차이(cognitive difference)이기 Eonas이다. 그 명제가 자아 내에서 활동 중인 방식, 자아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방식에 있어서의 차이, 무엇보다도, 다른 명제들과 그것의 관계에 있어서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참신한” 받아들임은 쥐어뜯고 비통한 무언가이다. 그것이 그녀의 가장 심층적인 가치와 기획과 관련되기 때문에, 그것은 내 안에 있는 모든 것들, 그녀가 그 가치들 주위로 건축해 올린 모든 희망, 소중히 여기기, 기대들을 뒤집어놓는다. 그러나 그 명제가 거기에 오랜 시간 있게 되었을 때에는, 그 놀라움과 쥐어뜯는 요소가 사라지게 된 때이며, 그 모든 극단적인 예리함, 그 침입적인 절단면을 잃어버린 때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 시간 즈음에는, 그녀의 삶과, 그 삶과 부합하는 그녀의 나머지 신념들을 조정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신념들을 공격하지 않고, 그 다른 신념들 곁에 나란히 자리잡는다. 예를 들어 그녀는 더 이상, 그녀가 그녀의 연인과 공유할 것인 그런 행복한 시간들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가 그녀와 오늘 함께 있으리라는 신념을 갖지 않고, 또는 그녀가 문을 열었을 때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그러나, 인지적인 변화들이다. 비통에 그것의 악영향을 준 것은 죽음-명제와 그토록 많은 다른 명제들의 불일치였다. 그리고 시간은 이 불일치를 제거한다. 비통-명제가 변하기 때문이 아니고, 다른 관련된 명제들이 변하기 때문이다. 크리시포스는 바로 그 구절에서 말한다. “사태는 동일한 외관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383 크리시포스의 그림은, 윤리적 충돌의 분석에 흥미로운 함의를 갖는다. 영혼의 부분들 견해(on the parts-of-the-soul view)에서, 충돌은, 두 힘들 간의 투쟁으로 여겨진다. 즉, 그 성격에 있어서도 다르고 영혼 내의 활동에서도 다른 두 힘들 간의 충돌 말이다. 이성은 이 방향으로 이끌고, 욕구는 저 방향으로 민다.(Reason leads this way, desire pushes that way) 그 결과는 그저 강도의 문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하나가 이길 때까지 두 힘 모두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니키디온이 그녀가 사랑한 사람을 애도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또한 동시에, 그녀가 훌륭한 스토아주의자가 되려고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리하여 그 덕목이 행복을 위해 충분하다는 생각으로 비통에서 스스로 거리를 두려고 노력한다고 해보자. 부분들 견해(the parts view)는 그녀의 비합리적인 요소가 비통해하기를 하고 있는데 반해, 합리적인 부분은 철학적 사유를 생각하면서 비통을 하지 않게 스스로 자제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크리시포스는, 대신에, 우리로 하여금 인정과 부인 사이에 전체 영혼이 진동하고 있는 것으로 그 충돌을 여기도록 촉구할 것이다.(to regard the conflict as an oscillation of the whole soul between recognition and denial) 그는 영혼이 “전체로서 전환하고 이동하는 것”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이것은 “두 부분의 충돌 그리고 내전이 아니라, 단일한 이성이 상이한 두 방향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방향으로의 전환은 우리가 그 변화의 예리함과 재빠름을 (384) 눈치채지 못하게 한다.” 한 지점에서, 그녀는, 대체불가능한 훌륭한 사람이 그녀의 삶에서 떠났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다른 순간에, 그녀는 그 앎으로부터 스스로 거리를 두고, “아니야, 다른 누군가를 찾을 것이야”라고 말하거나 “그 사람은 그저 많은 다른 사람들 중 한 명이었어”라고 말한다. 또는, 세네카의 언어로는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묻었다. 나가서 사랑할 누군가를 찾으라. 그를 위해 우는 것보다 당신의 사랑을 대체하는 것이 낫다.”(Ep. 63.11). 그러고 나서, 그녀의 연인에 대한 생각에, 그의 특이한 눈매, 그리고 그가 움직이고 말하는 방식에 대한 생각이 그녀를 압도한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금, 그녀가 결코 대체할 수 없는 무언가가 그녀의 삶에서 사라졌다는 사고에 동의한다. 크리시포스는, 이 진동의 이야기와 이동하는 관점이, 전투와 투쟁의 이야기보다는, 애도의 내적 삶에 대한 더 정확한 해명이라고 주장한다. 그 진동은 물론, 극도로 빠를 수도 있다; 그의 논지는, 이 수용과 거부의 리듬 속에서, 이 시야의 불균등한 간헐적 단속 속에서, 우리는, 부분들 모델이 제공하는 것보다, 애도의 투쟁에 관한 더 정확한 분석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녀가 그녀의 연인의 특별함에 관한 평가적 명제를 거부할 때, 그 시점에 그녀는 진정으로 비통해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그 대체불가능성을 온전히 인정할 때, 그녀는 동시에 선에 대한 스토아적 견해에 헌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충돌의 복합적인 고뇌를, 만일 우리가 그것의 인지적 내용을 경시하고는, 경쟁하는 힘들에 의거해 생각한다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 충돌은, 우주에서 무엇이 가치 있고 괜찮은지에 관하여, 그야말로(nothing less than) 세계를 어떻게 상상할지에 관한 것으로 이성이 스스로 긴절하게 투쟁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비통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것은, 우주에 관한 상이한 견해를 향하여 분투하는 것이다. 즉 그 우주에서는 더 이상 그 얼굴이 빛나고 경이로운 형태로 모든 경로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그 우주는, 더 이상 그 연인의 구체적인 형태를 위한 거주지로서 여겨지지 않는다. 이러한 견해를 향해 분투함으로써, 그것의 고통스러운 예리함을 뭉툭하게 하고 그 예리함을 잃게 만드는 것이다.
진동에 관한 그 그림은, 부분들 모델이 알아채지 못하는, 애도의 경험의 추가적인 한 특성도 설명할 수 있다. 나의 사례에서, 상실을 향한 스토아적 태도의 사유와, 비통으로 다시 빠져들기는, 우연적으로 연관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기이한 방식으로 하나가 다른 하나를 야기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니키디온이 사랑할 누군가 다른 사람을 찾고 있다고 스스로 알아챈다는 사실이, 그녀를, 소위 말해서, 그녀의 비통의 품 안으로 다시 던져놓는 것이다. 그녀에게 난폭하게 대립하는 그림을 상기시켜준 것은, 그 하나의 그림의 인지적 내용이었다: (385) 다른 대체의 암시가 바로, 그 하나의 얼굴의 회귀를 촉발시켰던 것이다. 썰물이 가차없이(inexorably) 밀물에 의해 뒤따라지듯이 말이다. 부분들 모델은, 이 리듬을 설명할 수 없다. 그저, 때로는 한 힘이, 때로는 다른 힘이 우세(upper hand)를 차지한다고 말하는 것 말고는 말이다. 크리시포스의 견해는, 설명적 연관성을 더 밀접하게 묶어 놓고, 대립하는 그림의 인지적 내용 그 자체를 통해 작업한다.
여기서 우리가, 섬세하게, 애도하기의 두 관념을 기술했다는 것을 주목하라. 하나는 시간의 애도로, 인식과 인정의 보유와 양립가능하다. 다른 하나는 부인의 애도(the mourning of denial)로, 비통의 소화릐 자연스러운 과정을, 세계에 관한 상이한 견해로 방향으로 틀어서 단절시키는 것이다. 만일 니키디온이 첫 번째 방식으로 애도한다면, 즉 대부분의 사람들이 애도하는 방식으로 애도한다면, 그녀는 그녀의 비통이 점차 감소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녀의 판단이 그 “참신함”을 잃어버림에 따라서 말이다. 그녀는 결국에는 비통해하기를 전적으로 멈출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바로 그 동일한 판단을 보유할 것이다. 그녀는 그녀에게, 죽은 그 사람이 유일무이하게 사랑하던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그 사랑에 대한 그녀의 근본적인 헌신을 변경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시간이 지나면 다른 사랑을 찾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그 이유 때문에, 그녀가 그 첫 번째 사람을 유일무이하고 대체불가능한 이로 보는 그녀의 생각을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세네카의 뭉툭해진 견해로 넘어가지 않을 것이며, 계속해서 그것을 충격적인 견해로 생가할 것이다. 이는, 그녀가 그녀의 새로운 사랑 역시도, 유일무이하고 대체불가능한 개인, 다른 사람과 질적으로 독특한 개인, 진정으로 우주의 모든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별되는 개인으로 볼 가능성이 높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미래의 상실에 그녀를 취약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계속 사랑을 할 것이다. 그녀가 그녀의 판단을 변경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통이 가능하고 자연스러운 그런 종류의 사람으로 남게 된다. 만일 그녀가 두 번째 방식으로 애도한다면, 즉 내 사례에서 기술된 방식으로 애도한다면, 비통의 사라짐(the extinction of grief)는, 그녀의 인지적 헌신(cognitive commitments)의 더 근본적인 재구조화의 결과이다. 비통은 그 평가적 명제의 거부와 그와 모순되는 명제의 수용에 의해 사라진 것이다. 그 비통이 사라졌을 무렵, 그녀는, 그녀가 최고로 가치 있게 한 때 여겼던 무언가에 대한 가치를 부인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사랑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그 결과에 있어서 다르지 않을 수가 없다. (386) 그녀는 우주적인 방식으로, 미래의 비통의 가능성으로부터 제거될 것이다. 크리시포스가 말할 바와 같이, 그녀는, 진정으로 치유된 것에 훨씬 더 가까워질 것이다. 우리는 크리시포스가 어떻게 두 번째 방식을 찬성하여 논하는지를 간단히 살펴볼 것이다.
IV.
우리가 이제는 예상하듯이, 스토아적 격정은, 서로 매우 밀접하며, 그것들이 모두 그러듯이, 외적인 것에 대한 어떤 종류의 높은 평가에 기대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이에 따라, 학교에서 전범적인 것이 되는 형식적인 정의상의 해명에서 분류된다. 이 분류는 두 구분을 언급하여 이루어진다: 좋음과 나쁨 사이의 구분이 하나요, 현재와 미래 사이의 구분이 하나다. 이 대립쌍들은, 그 내용에 대하여 격정이 대응이 되는 명제에서 등장한다. 그리하여 네 기본적인 정서가 있따. (1) 현재 가까이 있는 것이 나쁘다는 판단: 기쁨이 대응한다. (2) 아직 미래에 있는 무언가가 좋거나 가치 있다는 판단: 열망(longing)이나 욕구(appetition)가 대응한다. (3) 현재 가까이 있는 것이 나쁘다는 판단: 괴로움(distress)이라고 대응한다. 그리고 (4) 아직 미래에 있는 것이 나쁘다는 판단: 두려움이 대응한다.
387 각 사안에서 수많은 하위종들이 있다. 명제의 내용의 구체적인 주제가 무엇인가에 따라 이 하위종들이 분류된다. 불쌍히 여김(Pity)는 다른 사람의 응분이 아닌 고통을 보는 괴로움이다. 선망은, 다른 사람의 좋은 운(good fortune)을 보는 괴로움인데, 다른 사람이 이 좋은 운을 가졌다는 것이 나에게는 나쁜 일로 여겨질 때 그러하다. 애도는 사랑하는 사람의 때이른 죽음에 괴로워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등등.
또한 일부 사안에서는, 우리는 인식이나 판단의 특수한 동적인 성격을 언급하는 정의를 발견한다. 우울은 “우리를 짖누르는” 괴로움이다. 격노(exasperation)는 “우리가 가두어졌으며 우리가 충분히 공간을 갖고 있지 않다는 괴로움”이다. 혼란(confusion)은 “우리를 문질러대는 비합리적인 주의돌리기이며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가까이에 있는 것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 훌륭한 현상학적 기술은, 우리에게 스토아주의자들이 격정이 느껴지는 방식을 소홀히 여긴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각 경우에 있어서, 이와 같이 느껴지는 것은, 동의나 인정의 행위라는 것이다.(the thing that feels like this is an act of assent or acknowledgment) 어떤 인식은 못을 수용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다른 인식은, 스스로를 거친, 귀에 거슬리는(grating) 표면을 문지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다른 명제들은 이와 다르게 “자른다.” 그래서 다른 받아들임들은 상이한 현상학적 내용을 갖는다.
이 정서들은, 격정의 구체적인 삽화들로서, 자신의 상황에 대한 매우 구체적인 평가적 신념과 동일시되어야 한다고 우리는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스토아주의자들은, 격정을 낳는 더 일반적인 신념들의 중요성도 인식하였다고도 말하였다“ 일정한 종류의 외적인 것의 가치에 관하여 단단히 안착된 신념들, 즉 사람들의 계속되는 가치에 대한 관념에서 내부화된 것들은, 격정의 구체적인 폭발(concrete outbursts)의 안정적인 기반이 된다. (388) 이 신념 수준은, 또한, 그들의 형식적 이론에서 등장한다. 여기서 그 형식적 이론은 의료적 유비에 명시적으로 의존한다. 보통 사람의 영혼은, 크리시포스가 말하길, 여러 질병, 어떤 것은 크고, 어떤 것은 작으며, 운에서 비롯되는 것에 의해 야기되는 질병들에 걸리기 쉬운 신체라고 한다. 이러한 질병들은 병에 걸린 신념 조건들이다.(These diseases are dieseased conditions of belief) 영혼의 만성질환(chronic illness; nosēma)은, 그 보유자를 격정에 예민하게(susceptible to passions) 내버려두는 가치 판단을 받아들이는 것에 있는, 안정적인 인격 조건이다. 그것은 “성향으로 강화되는, 무언가의 바람직함에 대한 믿음으로써, 선택할 가치가 있지 않은 것을 강하게 선택할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에 따라 단단해지는 것이다.” 돈이 극도로 중요하다는 신념, 열정적인 사랑이 극도로 중요하다는 신념과 같은 신념들이 바로 만성질환이다. 그러므로 또한, 아마도, X가 극도로 중요하다는 더 구체적인 신념 역시도, 즉 사랑, 두려움, 비통의 구체적인 삽화의 기반이 될 수 있는 단단히 안착된 신념도, 그러할 것이다. 크리시포스는, 그러한 질병이 충분히 깊숙하게 단단히 안착되고 심리적인 병약을 낳게 될 때, 우리는 만성질환 에 더하여 병약(arhostēma; infirmity)라고 그 조건을 불러야 한다고 덧붙인다. 이 개요(shcema)가 함의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만일 우리가 커다란 일반종 범주 및 몇몇 특별히 현저한 하위종들에 한정한다면), 니키디온이, 하나의 정서를, 다른 많은 정서들을 짊어지지 않고서는(without letting herself in for many others) 느낄 수 없다는 것을 함의한다: 아마도 심지어, 때가 무르익는 경우가 모두 오면(given the fullness of time), 다른 모든 정서들을 느끼지 않고서는 말이다. 일단 그녀가 운의 인질이 되면(once she ahs hostages to fortune), 삶의 경로 자체가 그녀를 지금은 비통, 다른 때는 두려움, 또 다른 때는 강렬한 기쁨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 존재로 인하여 우리가 괴로움을 느끼게 되는 바로 그 동일한 것이, 임박하여 접근할 때에는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만일 현인이 괴로움에 열려 있다면, 그는 화에도, 그리고 (...) 동정과 선망에도 열려 있을 것이다.” “당신이 가장 큰 기쁨을 느끼는 곳에서 당신은 또한 최대의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389) 자족적인 좋음에 대한 타당한 이해인덕목들 사이에도 통일성이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격정에도 통일성이 있다. 그리고 또한 그 격정들에 깔려 있는 성향적 상태에도 통일성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격정의 치유에도 통일성이 있음을 의미한다.(But this means, too, that theres is a unity to the cure of the passions) “당신이 희망하기를 그친다면, 두려워하기를 그칠 것이다. (...) 둘 다, 미정으로 남아 있는 영혼, 미래에 대한 우려에 의해 불안하게 되는 영혼에 속하는 것이다.(Both belong to a soul that is hangin in suspense, to a soul that is made anxious by concern wiht the future.” 세계의 취약한 선물을 소중하게 여기면, 열정적인 삶을 야기한다. 경멸되하면, 평정의 삶이 야기된다. “운이 주지 않은 것을, 운이 빼앗아 가지는 않는다.”(What fortune does not give, she does not take away)
V.
스토아는 니키디온에게, 격정은 누그러뜨려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that the passions should be not moderated but extirpated). 정말로, 그들은 이것을, 그들의 치료적 가르침과 아리스토텔레스/소요 학파 경쟁자들의 가르침과의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로 여긴다. 세네카는 말한다. “완화된 격정을 갖는 것이 나은지 아니면 격정을 아예 갖지 않은 것이 나은지 자주 사람들은 묻는다. 우리 스토아주의자들은 격정을 전적으로 몰아내지만, 소요학파는 그것들을 누그러뜨릴 따름이다.” 격정들은 그 뿌리와 가지가 뽑혀 나가야만 한다. 즉, 우리는 그 외적인 표명만을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영혼 깊숙한 곳으로 뻗어나간 격정의 뿌리를 잡아뜯어야 한다. 그것들이 신념들이지, 우리의 내적 구성의 유기적인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격정들은 근절될 수 있다. 정말로, 자연 자체가 격정들의 제거를 요구한다.
390 그러므로 스토아주의자들은, 현자가 격정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롭다고 기술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즉, 공포, 괴로움, 동정, 희망, 화, 질투, 열정적 사랑, 강렬한 기쁨을 비롯하여 많은 이와 관련된 것들 및 이의 하위종들로부터 자유롭다고 말이다. 세네카가 그 어원을 정의하듯이, 세계를 대한 취약성과 세계를 향한 수동성 모두로부터 자유롭다고 말이다. 그 현자는 전적으로 자족적이다. “괴로움은 그녀에게 결코 닥치지 않는다. 그녀의 영혼은 고요(serene)하며, 발생할 수 있는 어떠한 것도 그것에 구름을 드리울 수 없다.” 외적인 사건 발생들은, 그녀의 마음의 표면에 찰과성을 입힐 뿐이다.(External happenings merely graze the surface of her mind) 정말로, 그녀의 정신은 “달의 반대편에 있는 나라와도 같다. 거기서는 항상 평온(calm)하다.” 우리의 과업은, 이제, 치료의 목표에 대한 이 극단적인 견해를 찬성하는 이유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니키디온으로 하여금 격정에 대한 이 전투적이고 강박적인 반대를 취하도록 설득할 수가 있을까? 여기서 니키디온을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라고 상상함으로써 이 질문을 좇아보도록 하자. 왜냐하면, 스토아주의자들의 주된 과녁이 여기서 되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적 견해이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보통의 신념의 대리물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견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선 니키디온에게 말해야 하는 것은, 스토아적 용어로, 격정이 동일한 그 판단이 거짓이라는 점이다. 외적인 것은 그렇게 커다란 가치를 갖지 않는다. 정말로, 외적인 것은 아무런 내재적인 윤리적 가치를 전혀 갖지 않는다. 만일 주체가 유일한 참된 평가적 판단만을 갖는다면, 일반적인 것이건 구체적인 것이건, 그 주체는 그러한 판단들 중 어느 것도 결코 갖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스토아적 가치 이론을 감안할 때 갖게 되는 해명에서 자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의미에서는, 우리를 그리 멀리까지 데려다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스토아적 가치 이론에 따라 거짓인 바로 그 판단이, 아리스토텔레적 이론 내에서는 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직관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여기까지는, 우리는 스토아적 이론의 진리성에 대하여 독립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은 사람이 격정을 제거하기를 원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아무것도 갖지 않은 것이다. (391) 그리고 또한, 비록 스토아주의자들이 그들의 가치 해명을, 격정에 대한 그들의 분석과는 독립적인 많은 방식으로 옹호하기는 하지만, 그들은 격정의 해명을, 좋음의 이론에 대한 진지한 뒷받침을 제공해주는 것으로 여긴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이론에서 스토아적 이론으로 넘어가는 것을 찬성하여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주요 이유들 중 하나는, 그것이 위를 우리의 격정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게 해줄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크리시포스가, 상당한 고고를 기울여, 그의 논증이, 선에 대한 거짓 관념에 계속 매달리는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계속 주장한 것을 기억한다. 치료에 대한 키케로의 진술도 동일한 이야기를 해준다. 실제로, 에픽테토스는, 만일 외적인 것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신념이 거짓임을 발견한다 해도, 그리고 그 신념을 뒷받침하는 논증이 속임수라는 것을 알아낸다 해도, 그는 여전히 그 속임수를 고수할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왜냐하면 그 신념으로부터 그는 잔잔하고 동요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토아주의자들이, 그들이 갖고 있다고 주장한 것을 진정으로 갖고 있는지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 즉, 격정의 근절을 찬성하는 독립적인 논증, 즉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인 니키디온에게조차도 강력할 그러한 논증 말이다.
두 번째 스토아적 주장은 우리를 조금 더 멀리 데리고 간다. 이 주장은, 격정이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덕스러운 행위를 동기부여하는 데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화가, 그것 없이는 애국적인 행위를 비롯해 다른 옹호되는 행위가 존재하지 않거나 허약해질 것이라는 근거에서 옹호되는 한, 스토아주의자들은, 건강한 정신은 덕과 의무에 대한 사유만으로도 올바른 행위를 하도록 동기부여될 수 있다고 답변할 수 있다. 정말로, 이것들은, 격정에서 오는 동기부여보다 훨씬 더 확고하고 신뢰할 만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화가 없는 사람은, 노예적인 방식으로 스스로 짓밟히게 되는 것을 허용하리라고 기술한다. 그리하여 그의 조국이나 그가 사랑하는 이들을 방어하기 위해 나서 싸우지 않을 것이라 한다. 세네카의 <화에 대하여>(De Ira)는 생생하게, 이 주장을 논박한다.
(인용시작)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가?” “선인은, 설사 그의 부가 살해당하고 그의 모가 강간당하는 것을 보더라도 화하지 않을 것인가?” 그렇다. 화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위해 복수할 것이고, 그들을 보호할 것이다. 더군다나, 친족에 대한 경애(pietas)가 화 없이는 지나치게 가벼운 동기부여라고 왜 우려하는가? (...) 선인은 그의 의무를 동요되지 않은 채로 그리고 두려움 없이 이행할 것이다. 그는 선인에게 가치 있는 것을, 사람에게 가치없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식으로, 할 것이다. (392) (...) 나의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있다: 나는 그를 방어할 것이다. 나의 아버지가 살해당했다: 나는 그 살인자를 쫓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는 것은 내가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적합하기 때문이다.(because it is appropriate, not because I am in pain.)(Ir. 1.12.1-2)(인용 끝)
세네카는 나중에 말하길, 선인의 행위는 법의 작동과 같다고 한다. 확고하고, 항상적이며, 신뢰할 만하고, 고통이 없는 것. 그리고 이것이 신뢰할 만한 이유가 바로 고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합리적인 자기결정을 최대로 가능케 한다.(1.16.6.)
이 논증은, 니키디온에게 무언가 말할 것을 갖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그녀가 그녀의 격정을 찬성하는 논거를 올바른 행위에 동기부여하는 힘으로서 중요성을 가진다는 점에 두는 한도에서 말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는, 이 지점에서 주된 논지가 놓쳐졌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니키디온은, 정서적 동기가 불안정하고 신뢰할 수 없다는 스토아적 주장을 반박할 것이며, 여기서 그녀가 추가의 더 나은 논증을 요구하는 것은 타당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으로, 그녀는 행위의 도덕적 가치는, 부분적으로는, 그것의 동기 및 그것에 수반하는 다른 반응적 느낌에 의존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리고 격정의 동기는 많은 사안들에서, 의무의 동기보다 더 도덕적으로 가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왜냐하면 격정의 동기는, 그 자체로 윤리적으로 가치 있는 배려와 헌신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즉, 일정한 외적인 것들이 적절하고 높은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보이는 것으로 말이다. 그녀는, 어떤 행위가 진정으로 덕스럽기 위해서는, 덕스러운 사람의 행위와 동일한 내용을 가지는 것뿐만 아니라, 실천적 지혜를 갖춘 사람이 그것을 할 방식으로 행해져야만 한다고, 즉 그러한 사람이 갖는 바로 그 동기를 갖고서 그리고 바로 그 반응적 느낌을 갖고서 행해져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세네카가 묘사하는 사람은, 모의 강간과 부의 살해에 화하여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보다 덜 칭찬할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은 실제로 덕스러운 행위를 수행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화가 여기서 올바른 동기이다. 비통과 동정이, 수반되는 올바른 반응일 것이다. 그것이 올바른 것은, 이 격정들이 좋은 인간 삶에 대한 타당한 견해에서 가족의 사랑의 중요성에 대한 인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스토아적 논증이, 첫 번째 논증과 마찬가지로, 가치에 대한 스토아적 견해를 먼저 받아들인 것에 기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 자체로는 거의 독립적인 작업을 해내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 논증을 제11장에서 더 논의하도록 하겠다.
세 번째 논증은, 부분적으로만 순환적이다. 그것은 격정의 경험의 격렬하게 고통스러움 느낌과 관련된다. 격정을 인격의 병든 조건으로 이해하는 논거를 제시함에 있어, 그들의 전반적인 성향적 기반을 만성질환의 형태들로 보는 논거를 제시함에 있어, 스토아주의자는, 결국, 격정은, 난폭한 고통이나 유기체의 격동으로서, 느껴지는 경우가 더 흔하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더군다나, 이러한 것들에 종속되는 이들은, 허약함과 무기력의 만성적 조건에 처해 있다고 느끼게 된다. 스토아학파의 저술은 계속 우리를 불안의 불편감 앞으로, 화의 맹렬한 난동, 두려움의 극도의 괴로움, 사랑의 고통 앞으로 데려다놓는다. 궃제거인 격정들에 대한 논문들은 특징적으로, 문제의 격정의 고통스러운 현상학에 대한 기술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기술은, 격정이 적합한 반응이라 할지라도 고통과 격동에서 오는 그 비용이 부담하기에는 너무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도 납득하게끔 되어 있다.
이 저술들은, 소위 긍정적인 정서라고 하는 것들도, 격동과 동요의 현상학을 가지고 있따고 강조한다. 강렬한 종류의 기쁨은, 아찔한 득의만만으로 경험된다. 이것은, 우리가 땅바닥으로 어느 순간에라도 내동댕이쳐질 수 있다는 아찔한 감각 없이는 결코 오지 않는 위험한 고양이다. 그것은, 엷고, 토대가 없으며, 끔찍하게 노출되어 있고 깨지기 쉬운 것으로 느껴진다. 강렬하게 열정적인 종류의 사랑은 불확실하고, 무섭고, 예측불가능한 것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크리시포스는 지각력 있게, 연인들은 놀라움과 예측불가능성의 이 요소를 요구하면서 더 단단한 관계를 거부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즉발성(spontaneity)는 그것과 함께 틀어짐의 가능성을 가져오며, 그래서 기력을 떨어뜨리는 계속되는 불안(a continued enervating anxiety)을 가져온다. 일반적으로, 강렬한 격정을 느끼기 쉬운 어떤 사람의 성향적 상태는, 병약하고, 심신이 약화되어 있고 단단함이 결여된 것이다. 에픽테토스는, 이 심리적 허약함의 느낌은, 외적인 것에 대한 그들의 신념이 거짓이라는 점을 철학으로부터 아직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서도 질병으로 느껴진다고 말한다. 그들은, 애초에 그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과 관련된 “허약함과 무능력에 대한 자각”에 의해 우리의 철학을 찾도록 이끌어진다.
여기서, 내가 생각하기에, 스토아주의자들은 니키디온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반대하는 논거를 갖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는, 그것은 이미 익숙한 순환적 논증이다. 왜냐하면 니키디온이, 동요와 불안으로부터의 자유의 윤리적 가치를 이미 납득하고 있지 않다면, 그는, 격정이 동요시키는 것이라는 명백한 사실에 의해 압도당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격정의 현상학에 대한 스토아주의자들의 상세하고 주의깊은 작업은, 정말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에게, 인격에 대한 이러한 동요들의 규모와 끔찍함을 강력하게 상기시켜준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반성을 깨뜨리는 능력을 갖고 있는 이 힘들을 곁에 두는 것이, 그리하여 삶의 다른 영역들에 침범하고 깨뜨리게 하는 것이, 그것들이 제공해주는 윤리적 만족의 대가로 치르기에는 지나치게 큰 것이 아닌가 하고 묻는다. 통제되지 않는 외적인 것들이 진지한 윤리적 가치를 가진다는 주장은, 결정적인 논증은커녕 여하한 매우 상세하거나 체계쩍인 논증으로도 옹호된 것이 아니고,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이 공유하는 듯이 보이는 가치에 관한 직관을 직접 가리킴에 의해서 옹호되었을 뿐이다. 그러한 직관들은, 만일 우리가 격정의 고뇌와 그것이 그 뒤에 남겨두는 동요를 가진 니키디온의 모습을 충분히 생생하게 대면하게 된다면 약화되기 시작된다. 특히 화의 경우에는-그리고 특히 스토아학파 저술가들이 공공 영역에서 화의 사악한 영향(baneful influence)을 그릴 때-, 이 노선을 통해 제시된 그 근절을 찬성하는 논거는 꽤나 강력하게 보인다. 니키디온은, 화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인격의 동요인지를 참되게 이해할 때, 네로가 “적합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화를 느끼기를 바라는가? 그녀가 이 고뇌를 타당한 반응으로 지지하는 좋음에 대한 견해를 설사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영혼이 항상 칼에 의해 잘려나가는 지도자들과 현자들을 원하는가?
스토아주의자들은, 이 논증에다가, 한층 더 인상적인 두 논증을 덧붙인다. 첫째로, 통합성에 근거한 논증(an argument from integrity)은, 순환성의 한 요소를 담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아리스토텔레스적 입장에 반대하여 내적으로 강력하다. 둘째의, 지나침에 근거한 논증(the argument from excess), 이 제한된 의미의 순환성에서조차도 자유로운 것으로 보인다. 이 논증들에 대한 더 심층적인 탐사는 11장과 12장의 과업이 될 것이므로, 여기서는 오직 간략하게만 그것들을 기술해보겠다.
통합성에 근거한 논증은, 니키디온에게,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로서 그녀 자신은, 각 행위자에게, 좋은 삶이란 “각자의 것이며 빼앗기가 힘든” 것이라는 견해를 지지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녀는 그녀의 자신됨(selfhood), 그녀의 정체성을, 그러한 삶을 계획하고 질서지우는데 의거하여 규정한다. 행위하고 사는 여러가지 내재적으로 좋은 방식과, 그리고 이러한 것들의 정연한 실행을 위해 계획을 짜는 실천이성(practical reason)과 동일시하여, 그녀는 이러한 행위나 이러한 추론에 대한 지장을, 그녀의 자기됨 및 인격의 영역에 대한 축소 또는 심지어 침해로 여긴다. 그녀는, 그렇다면, 노예의 조건에 대한 깊은 혐오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 조건은, 그녀 자신의 행위와 관계가 그녀 자신의 통제 하에 있지 아니하고, 아무런 통제력을 갖지 않는 외적인 것이 시키는 대로인 조건이다. (395) 바로 그러한 근거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자신도, 부나 명성 같은 외적인 항목에 최고의 가치를 귀속시키는 데 반대하여 논했으며, 덕스러운 행위에 최고의 가치를 귀속시키는 것에 찬성하여 논했던 것이다. 그 역시도, 그렇다면, “그 자신에게 좌우되기를 바라지, 누군가 다른 사람의 처분 하에 놓이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at his own disposal, not someone else’s) 그러나 그렇다면, 니키디온은, 그녀를 사랑을 비롯한 격정의 다른 토대들에 그녀를 열어둠으로써, 격정적인 삶을 살게 되는 그러한 방식으로 그것들을 가치 있게 여김으로써, 그녀의 인격을, 그녀의 자아의 핵심을, 세계에 의해 침해되고 통제될 가능성에 열어제끼게 되는 것이라고, 그리하여 인격적 존엄과 통합성을 상실할 가능성에 열어제끼는 것이라고 인정해야만 하지 않겠는가? 아리스토텔레스적 행위자의 자아는 변화하는 세계의 부분으로서 확장되어 걸쳐 있다. 그 세계에서의 사건들의 발생은, 그것을 날카롭게 찢어놓고, 아예 사지를 다 절단내버릴 수도 있다. 그것은 노예화되고, 강간되고, 다른 이들에게 심지어 집어삼켜질 수도 있다. 그러한 애착을 계발하는 것,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묶여 가는 자아관을 계발하는 것은, 가장 밀접하게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하는 것을 손상하기 때문에 저자세로 만들고 모욕을 하는 강간과 예속과 폭력을 초청하는 일에 착수하는 것이다. 폭력의 광경은, 스토아주의자에게 그런 것만큼이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에게도 역겨운(repellant)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가능성을 차단하지는 않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스토아적 자아는, 외적 사건들의 일어남을, 그의 피부의 표면에 그저 찰과상만 입히는 것으로 느낀다. 그것들은 결코 핵까지 투과할 수가 없다. 그와 그의 선은 함께 안전하게 편안하게 있다. “그는 그 자신으로 후퇴하여 그 자신과 산다.” 세네카가 표현하듯이, 그의 최고의 선은 “외부에서 어떠한 장비도 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본래의 장소에서 계발되며, 그 안에서 전적으로 발달된다. 그가 문 바깥을 나가서 무언가를 찾는 순간, 그는 운의 종복이 된다.” 다시금 “그의 모든 선은 그 안에서 시작하고 끝난다. 그리고 그는 말할 수 있다. ‘모든 선이 나와 함께 있다.” 철학은 난공불락의 벽(impregnable)을 자아 주위에 건축하고는, 자아를 모든 가능한 운의 공격으로부터 요새화한다.
어느 정도는, 다시금, 이 논증은 순환적이다. 즉, 니키디온이 스토아주의자들이 자족성과 합리적 통제에 부여하는 엄청난 가치를 거기에 부여하지 않는다면, 운에 의한 폭력에 그녀를 열어두는 격정적인 삶에 대한 치명적인 반론으로 그것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다시금, 그녀가 덕이 최고의 선이라고 믿지 않는다면, 그녀는 스토아주의자들이 그녀와 모든 선한 것들을 본래 있을 장소에 갖고 있다고 인정하려는 성향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논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에 반대하는 힘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설사 그녀가 자족성, 외적 통제로부터의 자유에 최고의 가치를 귀속시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니키디온은, 정말로 그것에 상당한 가치를 부여하기는 하기 때문이다. 격정적인 삶에 대한 그녀의 지지와는 양립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이 부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397) 그녀 자신의 통합성에 대한 관념에 의거하여 그녀의 가치 도식의 비용을 충분히 진지하게 고려해보지 않았다. 즉, 일단 그녀가 이를 살펴보게 되면, 그녀는 그녀가 가장 진지하게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이 오직 스토아적 삶에서만 발견될 수 있을 것임을 깨달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스토아주의자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를, 격정이 누그러뜨려지고 통제될 수 있는 정도에 대하여 순진한 낙관주의를 가지고 있다고 고발한다. 니키디온은, 좋은 양육과 좋은 습관이 사랑과 화를 완화되고, 분별 있고, 좋은 성품의 자기규율적인 요소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 같다. 그리하여 이성이 또한 승인하는 경우와 정도의 표현만을 선택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스토아주의자들은, 우리가 정말로 정으이 내적 삶으로 진입하게 되면, 우리는 이것이 참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도리 것이라고 응수한다. 격정은, 규율될 수 없는 과잉에 대한 성향을 그 본성 내에 갖고 있다.(Passions have in their very nature a propensity to ungovernable excess) 갈렌에 의해 인용된 <격정에 대하여>의 긴 구절에서, 크리시포스는 생생한 은유를 만들어낸다. 어떤 사람이 걷고 있을 때, 사지의 충동은 그가 바라는데로 견제되고 변경된다. 그러나 그가 달리고 있을 때에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그 운동이 그 자신을, 그 자체의 충동에 의해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래서 설사 그녀가 경로를 중단하거나 바꾸기를 소망한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녀의 움직임의 충동은 그녀를, 멈추기를 소망하는 지점을 넘어서까지 데려다놓을 것이다. 이것이 격정이 그러한 바이다. 스토아적 이성의 진정한 판단은, 걷기 처럼, 우리의 의지에 의해 규율이 가능하다. 화, 두려움, 사랑은, 그것들이 멈추어졌을때조차, 덕이 멈추기를 바라는 장소에서 믿음직하게 멈추어질 수 없다. 그것들은 우리의 소망보다 훨씬 더 멀리 우리를 데려다놓는다.
이 세트의 논증에 의해 짚어진 두 미묘하게 상이한 논점이 있다. 하나는 각 격정이 단독으로 보아졌을 때 그 격정의 내적 구조다. 사랑은 과한 사랑으로 이르고, 화는 과한 화로 이른다. 니키디온은 “나는 내 삶에서 화를 가질 것이지만, 화가 항상 올바른 방식으로만 적시에 적합한 사람에 대하여 적합한 정도로만 스스로를 표현하도록 나를 교육시켜야지”라고 말할 수 없다. 안 된다고,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스토아주의자들은 말한다. 왜냐하면 격정은 격동적(tumultuous) 것이며, 그래서 당신의 계획을 앞질러버리기 때문이다.(and gets ahead of your plan)
그리고 크리시포스는, 그 안에 있는 사람은 계획과 통제를 거부하게(disdain) 되는 것이, 격정의 본성 자체라고 주장하였다. 통제의 부재는, 정말로, 사람들이 격저으이 경험에서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의 부분이다. 니키디온은, 항상 합리적 원리에 복종하는 연인을 원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들이, 분멸 없이 무모하게(to fling caution to the winds), 건전한 조언을 무시하기를 “계산되지 않은” 즉발적인 방식으로 그들의 사랑을 따르는 것을 좋아한다. 간단히 말해서, 사랑에 휩쓸리기를 바란다.(to be carried away by love-사랑에 의해 넋을 잃다) 그러한 연인은, 크리시포스가 말하길, 그들의 모토로서 메난드로스(Menander)의 대사를 삼아야 할 것이다. “나는 나의 양식을 떼어 단지 안에다 쑤셔박았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그러한 가치들을 가지고 그 선에 관한 신념들을 갖는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한계와 척도에 대한 이 거부는, 화의 경우에 가장 불운하다: 왜냐하면 화라는 격정의 과잉은 그저 어리석고 낭비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해롭기 때문이다.
세네카 역시, 화는 잔인함과 사람을 죽이려 드는 마음에 못 미치게 신뢰할 수 있게 멈추어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의 시대의 정치는, 이 주장에 뒷받침을 준다. 네로의 경력은, 가장 확고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에게조차도, 그리 안심이 되는 광경은 아니다.
이 논증은, 우리가 이미 언급한 견해에 의해 복합적으로 되고 강화된다. 그 견해란, 격정들 사이의 밀접한 상호연관성(interrelationships)에 관한 견해이다. 니키디온이 스토아적 논증의 일부에 동의함으로써 대응하려고 한다고 가정해보자. ’좋아‘라고 그녀는 말한다. ’나는 화, 질투, 그리고 그 과한 형태가 특별히 잔인하고 위험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 다른 격정들을 근절하겠어.‘ 그렇지만 분명히도, 나는 사랑, 또는 동정, 그리고 아마도 두려움조차도 근절시킬 필요는 없어. 왜냐하면 사랑과 동정은 아무런 해로운 과잉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야. 그리고 두려움의 과잉은 확실히 나한테만 해롭기 때문이야.’ 스토아주의자들은 이러한 태도는 그럴법하지도 않거니와 니키디온 자신의 입장과 일관되지도 않다고 한다. 한 격정 집단을 근거지었던 그 동일한 평가가, 여건의 변화나 상이한 시간적 관점을 감안할 때, 다른 격정들도 마찬가지로 근거짓기 때문이다. 그녀는 증오와 화를 느끼게 되지 않고서는 사랑을 할 수가 없다. 그녀가 비상하게 운이 좋지 않다면 그녀는 실제의 증오나 화 없이 사랑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녀의 사랑은 장애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녀가 사랑하는 이를 그녀에게서 앗아갈지 모른다. 그렇다면 사랑 그 자체는 가장 격렬한(exquisite) 연료를 화에다가 들이붇게 된다. 그녀는 두려움에 의해 빈번하게 동요되고 괴로워하지 않고서 강렬한 기쁨을 느끼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 될 수도 없다. 비통의 모든 고뇌를 때때로 겪지 않고서는 말이다. 세네카는 네로에게 동정이라는 정서를 꾸짖는 편지를 쓴다. 만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가 이것을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오류라고 생각한다면, 그녀는, 정서와 살의를 가진 격노 사이의 연관성을 더 성찰하는 것이 낫다. 그녀가 찾아본다면 그것들을 발견할 것이다.
이것들은 나에게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에게 반대하는 스토아적 논증들 중 가장 강력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 논증들은,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형태의 평가와 행동을, 그들 스스로도 혐오하는 것들에 헌신하지 않고서는, 가질 수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의 격정을 소중히 여기는 우리 중 누군가를 그러한 헌신을 고하도록 설득하는 어떤 논증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안정적인 온화함(gentleness)와 자비(beneficence), 그리고 끔찍한 행위를 피하는 것을 가질 수 있는 자기충족(self-containment)의 스토아적 삶에 있을 뿐이라는 논증일 것이다. (“현자는 무해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기자신에게도 해를 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므로 11장과 12장에서 이 주장을 추가로 탐사할 것이다.
VI.
니키디온이, 스토아적 치료를 완료하면 그녀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격정과 관련된 한, 제논이 표현하듯이, 그녀는 그녀의 이전 조건의 상흔을 가질 것이다. 비록 그 상처 자체는 아물었지만 말이다. 세네카는 이것을, 그녀가 “격정의 일정한 암시와 그림자는 느낄 것이지만, 격정 그 자체로부터는 그녀는 전적으로 자유로워질 것”임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그녀는, 다른 한편으로, 세 가지의 소위 감정적 대응을 갖는 것이 허용된다. 이것은, equpathiai라고 불리는 항목들로서 격정이 아니며 외적인 것에 대한 그 어떠한 높은 가치평가와도 동일시되지 아니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니키디온이 그녀를 중요하지 않은 것들 사이에서 조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동기부여이다. 거이에는 괴로움에 상응하는 어떤 상당한 감정적 형태도 없다. 다시 말해서, 쁜 사태의 존재를 부정적으로 기록하는 어떤 상당한 방법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타산적 주의의 대응(eulabeia)는, 그러나, 미래의 부정적 가능성을 향해 승인된다. 다른 말로 해서, 외적인 것에 그 어떠한 내재적 가치도 전혀 귀속시키지 않으면서도, 그것들의 가치에 대한 이성의 판단에 정확하게 따라 계속 대응하여, 죽음을 피하고 다른 선호되지 않는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피하도록 적합하게 동기가 여전히 부여된다. 만일 그것들이 온다면,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분별 있게 피할 수는 있다. 이러한 미래의 상대역들을 향하여, 주체는 합리적 소망의 지도 하에서 움직일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일 좋은 외적인 것들이 소망하는대로 도달한다면, 니키디온은 일정한 종류의 기쁨을 갖는 것이 허용된다.(chara) 소위, “합리적인 고양감(rational uplift)”(eulogos eparsis)로 정의되는 종류의 것들 말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정서적인 삶에서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것들을 실제로 없애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과 스토아주의자가 벌여야 하는 전투의 추가적인 논점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기쁨(joy)이 있다. 무기력하게 하는 불확실성 없는 기쁨(joy without enervating unvertainty), 두려움과 비통이 없는 기쁨, 정말로 마음을 움직이고 고양하는 기쁨 말이다.
400 해석가들은 때때로 세네카의 문구를 들어, 스토아적 근절은, 우리의 정서적 삶에 반대하는 래디칼한 움직임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동요가 일단 사라지면, 많은 행복한 감정이 여전히 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근절이 니키디온이 그저 많은 난점과 긴장만을 제거한 채 원래 그곳에서 행복을 발견하였던 것이 익숙하였던 곳에서 여전히 행복의 많은 부분을 발견하도록 남겨둘 것이라고, 이런 종류의 스토아적 레토릭에 현혹되지 않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세네카가 기술하는 상태는 정말로 기쁨이라고 불리기는 한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어ᄄᅠᇂ게 묘사하는지를 살펴보라. 그것은, 자궁 안에서 태어나서 결코 자궁을 떠나 바깥 세상으로 나가지 않는 아이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웃음 터뜨리기와 크게 기뻐하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현자들은, 우리가 알기에는 가혹할 정도로 수축적이며, 그들 자신에게서나 다른 사람들에게서나 나태한 즐거움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코 허를 찔리지 않는다면(if one is never cuaght off guard) 웃기란 힘들다.
실제로 세네카도 이것은 달콤하고 유쾌한 기쁨(sweetly agreeable joy)가 아니고, 자기 자신 안에서 최선의 것에서 나오는 기쁨이라고 하고 있다.
다음 장에서는 우리가 이 기쁨으로 이동하는 것을 찬성하는 동기부여를 추가로 검토하겠다. 그러나 (401) 우리는 이미 니키디온 자신의 것에서 스토아적 기쁨으로의 변화가 광대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긴장과 큰 기쁨으로부터 단단한 자기몰두(solid self-absorption)으로의 변화이다. 놀람과 즉발성으로부터 잘 조율된 자각성(measured watchfulness)으로의 변화다. 별개의 외적인 것에 대한 감탄으로부터 자신과 자기 것에 대한 안전으로의 변화다. 세네카의 성적인 은유를 따르자면, 그것은 격정적인 성교, 출산, 그리고 양육으로부터, 처녀생식에 이어 그렇게 임신된 아이를 자궁 안에 영원히 보유하는 것으로의 변화이다. 그것은 삶의 어떠한 부분도 건드려지지 않은 채 남겨두지 않는다. 그녀는 큰 선을 약속받는다. 그러나 이 선을 위해서 그녀는 지금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을 포기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녀의 일상의 바로 그 기반을 말이다. 에픽테토스는 메데아, 12장의 불행한 여주인공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상상한다. 그는 그녀에게 행복을 위한 하나의 간단한 공식을 준다. “당신의 남편을 원하는 것을 멈추라. 그러면 당신이 원하는 것 중 일어나지 않는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니키디온은 이것을 임시적인 수정으로 보지 않는다. 실제로 그것은 수정이 아니다. 그것은 스토아주의자들이 그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것은 근절(extirpation)이다. <10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