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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조립물] 외모에 관한 사회적 담론에 관하여 (1부)

by 시민교육 2019. 2. 17.

1부: 외모지상주의 개념이 함의하는 문제설정의 오도하는 성질

 

1. 개념의 정의와 문제의 제기

 

외모지상주의란 외모를 인생을 잘 살아가는데  사고방식 내지는 믿음체계를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의 외모지상주의자들이 가끔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런 외모지상주의는 실제로는 극히 드물다. 따라서 사소하다.

실제로 그 잘못 이름붙은 개념이 지칭하는 것은 사람들의 외모에 관한 속성과 그들이 받아야 할 응분을 연결짓는 믿음이다. 이것을 정확하게 파악해야만 부당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가려낼 수 있다. 

 

2. 문자 그대로의 외모지상주의가 틀린 믿음 체계인 이유

 

(1) 잘 살기의 지침으로서 자멸적

 

문자 그대로의 외모지상주의는 

이 외모지상주의는 틀린 믿음체계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형태의 '--지상주의'라면 어느 것이든 인생을 잘 사는 것을 인도하는 배타적인 지침을 제공해주지 못하면서도 그런다고 호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외모지상주의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우선 첫째로 그 불포화된 부분 '--'에 한 개인이 양적 또는 질적 척도로 보유할 수 있는 어떤 특정 속성 또는 특정 속성 집합이 들어가건 간에, 그 속성 또는 속성 집합만 갖춘다면 인생을 잘 살게 된다는 것은 참이 아니다. 돈지상주의, 학력지상주의, 지능지상주의, 지식지상주의, 근육지상주의, 탁구실력지상주의, 수학적문제해결능력지상주의 등 무엇을 넣어도 그런 지상주의 믿음체계는 거짓이다. 

 

게다가 인생을 잘 사는 것,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것은 주체가 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것을 적절하게 파악하고 행위하는 실천의 문제이지, 어떤 시점 단면에 잘라서 본 특정 속성의 보유도를 평가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와 같이 특정 속성의 보유도에 따라 사람들을 줄세우고, 이 위계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여하한 지침을 준다는 사고를 속물적 세계관이라고 한다. 그러나 속물적 세계관은 결국 자신의 발 밑에 인생을 계속 살아갈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 좀비처럼 무의미하게 계속 살아가야지만 자신의 삶이 계속 살 가치가 있다는 자멸적인 결과를 낳는다. 즉 가치 없는 삶을 살아가는 주체들에게 찬탄을 받아야만 자신의 삶이 가치가 있다는 수행적 모순을 낳는다. 만일 철저히 이 세계관에 따르자면, 자신보다 그 속성을 덜 보유하기 때문에 살 가치가 없는 사람은 피라미드의 가장 밑에서부터 차례로 살기를 중지하여야 할 것이며, 그렇게 될 경우 결국 자기 자신도 살기를 중지하여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따라서 속물적 세계관 일반은 잘 사는 지침으로서 완전히 틀렸다.

 

(2) 선의 다원성의 부인

 

게다가 로널드 드워킨의 의미에서 잘 살기(living well)의 문제를 넘어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의 좋은 삶(good life)의 조건의 차원에서 살펴보아도 특정속성 지상주의는 거짓이다.

특정속성 지상주의는, 선의 다원성을 부인하거나, 선의 다원성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다른 선의 최소치가 갖추어진 이후에는 그 특정 선의 절대적 우위를 인정한다. 그런데 선은 다원적이며, 최소치 이후에도 특정 선의 절대적 우위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 논거를 살펴보기 전에, 로널드 드워킨의 잘 살기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좋은 삶의 구분을 먼저 예비적으로 짚고 넘어가자. 전자는, 그것이 동명사 형태로 되어 있는 데서 징표되듯, 이미 특정 시점에서 이미 주어진 것의 전제 하에 장래를 향한 실천의 관점이 강하게 투영된 것이다. 반면에 후자는, 그것이 명사 형태로 되어 있는 데서 징표되듯, 어떤 존재자 또는 그 종류의 존재자의 삶이 담고 있는 선을 살피고는 어떻게 하면 더 좋았을 수도 더  못했을까라는 평가의 관점이 강하게 투여된 것이다. 우리는 이 둘의 구분을 인정할 수 밖에 없고, 또 이 둘의 구분은 그 어떠한 이치에 닿는(sensible) 정치철학에 필수적이기도 하다.

우선 이 둘의 구분을 인정할 수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만일 이 둘의 구분이 없다면, 사람들은 인격적, 신체적 동일성(personal identity)가 충분히 확보되지만 한 세계에서는 다른 세계보다 더 나은 삶인 그런 가능세계를 아예 그려볼 수조차 없을 것이다. 즉 다른 사정이 동일하다면 어떤 선을 더 많이 담은 삶이 더 좋은 삶이었다고 반사실적 사유(conterfactual thought)를 결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유야말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사유다. 예를 들어 "방금 전 발표가 난 로또 당첨번호가 바로 내가 산 로또 복표에 기재된 번호가 동일하다면 나의 삶은 더 좋았을 것이야"라고 당연히 생각한다. 바로 그 이유에서 복권 당첨이 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나면 다음 주에도 또 복권을 산다. 그것은 전혀 다른 존재가 아니라 바로 이런 육체와 정신을 가지고 있는 나의 삶에, 복권 당첨금이 있다면 더 좋은 삶이 되었을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평가를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드워킨의 의미에서 잘 살기는 두 경우 모두 스스로의 인격에서 나온 주도적인 활동이 차이가 없다면 동일하다. 물감의 색이 열 가지가 있는 화가나, 열 여섯 가지가 있는 화가나, 최선을 다해 창조적인 그림을 그린다는 인생의 지침은 변하지 않는다. 열 여섯 가지가 있었더라면 더 좋은 그림이 탄생할 수도 있지만 열 가지의 물감만 있는 사람은 그림 그리기라는 도전에 마찬가지 수준의 탁월성을 가지고서 응전ㅎ할 수 있다. 

잘 살기의 여건과 좋은 삶의 여건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이 둘은 구분된다. 잘 살기의 여건은 진정성 있는 삶의 살아가는 인격적 통합성이 다른 사람의 부당한 간섭으로 인해 침해받지 않을 때에 충족된다. 그런 간섭에는 이를테면 국교를 설립한다거나, 아이를 낳지 않으면 징벌적 과세를 하겠다거나 하는 것이 있다. 이를 경우 어떤 사람이 삶에서 선택을 하고 그 선택한 바를 실행하는 이유는, 자기의 이유가 아니라 남의 이유, 남이 대신 판단해주고 하도록 강제한 이유가 된다. 즉 그것은 자기가 파악한 도전도 아니요 자기가 수행하는 응전도 아니다. 그래서 그것은 일그러진 도전과 일그러진 응전이 된다. 좋은 삶은 도전이 일그러뜨려지지 않을 것이라는 요건을 필요조건으로 하지만 충분조건으로 하지는 않는다. 유전적인 결함으로 인해 이른 시기에 시력을 잃은 사람은 오디오북이나 점자책을 통해 여전히 최선을 다하여 연구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결함이 없었더라면 누렸을 삶보다는 좋지 않은 삶을 누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그런 유전적 결함을 수정시부터 교정할 수 있는 기술이 있고 부모가 그 기술을 적용하는 의료적 시술을 받을 수 있다면, 그 부모는 아이의 좋은 삶의 여건을 더 개선시킨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구체자로서의 한 개인 뿐만 아니라 하나의 범주로서 한 종류의 존재자, 이를테면 호모 사피엔스에게도 적용된다. 만일 호모 사피엔스가 지금처럼 인생 후반부에는 많은 손상이 발생하는 대신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대부분 건강하게 살다가 순간적으로 육체가 쇠락하면서 죽음을 맞이한다면 호모 사피엔스의 삶은 훨씬 더 나은 것이 될 것이다. 또한 어떤 약물을 처방하면 항구적으로 지능이 50% 증강된다면 호모 사피엔스의 삶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더 나은 것이 될 것이다. 물론 그런 좋은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현실의 호모 사피엔스에게는 여전히 그런 육체를 가지고서 어떻게 잘 살아야 하는가의 질문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것보다 더 건강한, 또는 더 지능이 뛰어난 그러니까 더 좋은 호모 사피엔스의 삶이라는 것은 상상불가능한 것이 전혀 아니다. 그것은 곧장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반사실적 사유는 바로 이 구분을 전제한다.

 

다음으로 이 구분이 이치에 닿는 정치철학에 필수적이라는 점을 살펴보자. 어떤 존재자의 삶이 담는 선 또는 향유하는 선은 그 존재자의 존재 조건에 의존한다. 즉 상응 관계가 성립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존재 조건의 훼손이나 개선은, 그 삶의 훼손이나 개선에 상응한다. 잘 살기만을 인정하는 정치철학은 이런 훼손이나 개선을 포착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다리가 둘 다 멀쩡한 삶에도 잘 살기의 지침이 있으며, 다리가 하나뿐인 삶에도 잘 살기의 지침은 여전히 있기 때문이다. 후자가 전자보다 잘 산다 잘 살지 못한다는 것은, 오로지 실천의 현명함 측면에서만 판단될 뿐이다. 즉 잘 살기는 이 둘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두 삶은 그 삶의 존재 조건에서 차이가 난다. 두 다리 모두 멀쩡한 삶은 한 다리로는 가능하지 않은 많은 자유들을 향유할 수 있고 그 자유를 통해서 실현되는 많은 선들을 실현할 수 있다. 그러므로 두 다리에서 한 다리가 되는 것은 손상이다. 만일 이것이 손상impairment이 아니라면, 국가는 국민이 그 신체에 손상을 입지 않도록 위험에서 보호할 아무런 의무를 이행하지 않더라도 국민의 행복추구권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결론이 되는데 이는 부당하다. 즉 그것은 국가가 국민의 신체 완전성 및 안전을 보호할 의무가 없다는 정치철학으로 귀결된다. 따라서 잘 살기와 좋은 삶의 구분은 이치에 닿는 정치철학에서 필수적이다.

 

이제 예비적 논의가 끝났으므로,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의 좋은 삶에서 선의 다원성을 외모지상주의든 무슨 지상주의든 모든 종류의 특정속성지상주의가 적절하게 음미하지(appreciate) 못한다는 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선들은 다원적이다. 선이 다원적이라는 논지의 증명은, 궁극적 선으로 환원되지 않는 적어도 둘 이상의 선이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완료된다. 그런데 그런 둘 이상의 선이 있다. 예로써 우리는 간편하게 진리와 쾌락을 들 수 있겠다. 진리는 쾌락으로 환원될 수 없고, 쾌락은 진리로 환원될 수 없다.

어떤 선이 환원되지 않음을 보이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그 선의 성립조건이 호환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다. 진리와 쾌락의 경우에는 진리조건과 쾌락조건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 사고실험을 통해 알 수 있다. 하나의 사고실험은 불쾌한 지식이다. 예를 들어 전장에서 아들이 사망했다는 슬픈 소식을 그 부모가 듣는데, 아들이 고통스럽게 죽었는지 묻는다. 그리고 아들은 실제로 어마어마한 부상을 입고 여러차례에 걸친 대수술 끝에 결국 엄청난 고통을 겪으며 죽었다. 이는 이미 과거에 발생한 사실에 관한 진리이다. 이것을 부모가 알게 된다면 아들을 잃은 슬픔에 더해, 앞으로도 수없이 아들이 겪었을 고통에 관하여 고뇌하면서 느끼게 될 추가적인 고통을 더하게 된다. 따라서 부모에게는, 그 아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갔다는 진리를 듣지 않는 것이 쾌락조건에 부합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부모에게 있어서는 그 아들이 고통스럽게 죽지 않고 부상을 입자마자 곧바로 사망하였다는 것이 참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부모에게 있어서도, 그 군인이 고통스럽게 죽었다는 것은 참이다. 즉 쾌락조건과 진리조건은 다르다.

다른 하나는 아무의 쾌락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수많은 진리들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S대학의 잔디밭의 잔디 풀입수가 백오십만이천오백이십넷이라는 것은 참이거나 거짓이다. 그러나 이 명제가 참이어도 거짓이어도 그 누구의 쾌락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나폴레옹의 머리카락 갯수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력에 관한 사실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사실뿐만 아니라 미래의 사실도 그런 것들이 많다. 따라서 이러한 명제들은 쾌락조건으로는 중립적이지만, 진리조건에 관하여서는 중립적이지 않다. 그 명제들은 참이나 거짓이다. 따라서 쾌락조건과 진리조건은 다르다.

마지막으로 지구를 향해 20년 뒤에 충돌하게 될, 그러나 피할 도리는 없는 다크매터(dark matter)가 다가오고 있는 경우를 살펴보자. 인류의 관측지식 수준이 더 높았다면, 다크매터로 이루어진 천문체를 일반 운석과 동일하게 관측할 수 있어서, 인류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20년 동안의 어마어마한 정신적 고뇌와 사회혼란과 범죄로 인해 생길 고통만 생길 것이다. 반면에 다크매터가 지구와 부딪히기 직전까지 전혀 모르는 관측지식 수준에서는, 예전과 비슷하게 살다가 순식간에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전장에서 사망한 아들의 사례는 그것이 특수한 개인의 문제이기 때문에 일반화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인류 전체의 경우에도, 진리조건과 인류의 쾌락조건은 다르다.

 

이와 같이 다원적의 선의 성립조건이 다른데도, 성립조건을 같다고 보는 경우에는 당연히 왜곡이 발생할 수밖에 없게 된다. 예를 들어 우정이라는 선의 성립조건과 쾌락이라는 선의 성립조건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정의 사안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가를 판단할 때, 쾌락계산을 통해 결정하게 된다면, 우정을 왜곡하게 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여러 명의 친구들이 함께 저항세력인 한 명의 친구를 독재자에게 밀고함으로써 공동 출세하는 것이 곧 우정을 따르는 길이라는 어이없는 결론에 이른다. 쾌락계산에서는 다수의 출세가 한 명이 사형 당하는 것보다 더 우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우정에 들어맞는 행동이었다는 것은 정말로 우정을 무언가 다른 것으로 왜곡시키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논지는 외모, 지능, 도덕성, 지식, 인간관계의 풍부함, 부, 그 어떤 속성을 지고의 속성으로 꼽고 다른 모든 가치를 그 속성으로 환원시키는 종류의 일원론에 대해서도 성립한다. 즉, 그것은 인간 선의 다원성(plurality of human goods)을 보지 못하며, 따라서 근거 없이 결핍된 인간 삶에 대한 상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 도덕적 성향을 척도로 한 도덕속물의 속물적 세계관과 선의 단일성에 관한 믿음 체계가 거짓인 결정적 이유와 동일하다. 

 

이 점에 관하여 자세한 논증은 <삶은 왜 의미 있는가>에서 자세히 전개된 바 있으므로, 여기서 재론하지 않겠다.

 

3. 오도하는 명칭 

 

그러나 사회에서 소위 '외모지상주의가 문제다'라고 할 때는 이 개념에 들어맞는 문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즉, 그 문제를 사람들이 거론할 때, 그들은 삶의 태도로서 속물적 세계관의 구조와 동일한 '--지상주의'를 믿는 이들만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위에서 논박한 의미의 외모지상주의를 진지하게 신봉하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외모가 여러 선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고 보며, 자기가 삶을 계속 살아가는 이유가 자기보다 외모가 못한 사람들 위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회에서 외모지상주의 개념을 사용하여, 그 담론이 겨냥하는 문제는, 실상은 개념을 잘못 써서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외모지상주의 문제가 아닌 것을 외모지상주의 문제라고 잘못 이름붙인 것(misnominer)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것을 외모지상주의라고 칭하는 것은 개념을 흐리멍텅하게 쓰고 그저 비난하기만 좋아할 뿐이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관하여 명료하게 사고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되는 것은 다른 어떤 것이다. 그 다른 어떤 것의 분명한 내용을 기술하고 그렇게 기술된 것의 특성에 맞는 개념을 찾는 일이 우선 필요하다.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