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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인간학] 유념하기의 기예(art of being mindful)

by 시민교육 2019. 7. 8.

1. 유념하기의 기예

 

유념하기(being mindful)란, (1) 현재 하고 있는 일의 수행의 문법을 따르는데 주된 초점을 맞추어 감각, 상황, 정보의 줄기와 세부사항을 주의를 기울여 음미(appreciate)하면서 (2)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정보와 자극을 열린 마음으로 포착하여 (3) 새로운 시각에서 수행의 문법을 검토하여 새로이 정립할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고 때때로 실제로 구현하는 삶의 기예다.

 

2. 번역어에 관하여 

 

이 글에서 필자가 '유념'으로 번역한 원어는 'mindfulness'다. 그런데 이 단어는 보통 '마음챙김'이라고 번역된다. 그리고 그것의 반대어인 'mindlessness'는 '마음놓침'이라고 번역된다.

 

확실히 '마음챙김'과 '마음놓침'이 글자 수도 대칭이고 무엇인가 은유적인 맛이 한껏 들어간 멋스러운 번역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이 중요한 삶의 기예를 번역하는 단어에 멋을 지나치게 부리다 보니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실천적 장애를 유발하게 되었다.

 

 '챙기다'는 '무엇을 빠뜨리지 않았는지 살피고 빠뜨리지 않도록 잘 갖추어 놓는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단어를 씀으로써 부작용이 두 가지가 생긴다. 

첫째로, 두 단계의 인지 과정과 함께 패턴화된 틀을 불러와 점검을 유도한다. 한 단계가 아니라 두 단계의 인지 과정을 자연스럽게 연상시킨다. 하나는 무엇을 빠뜨렸을지도 모른다고 인식하는 단계이고 다른 하나는 그 빠뜨린 것을 다시 잘 갖추어 놓는 단계이다. 예를 들어 '여권 챙겼나?' '뭐? 큰일 날 뻔 했네! 여권 좀 잘 챙겨라!'와 같은 말이 그런 두 단계의 과정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두 단계의 과정은 오히려 mindful한 상태와는 반대 방향의 태도를 촉발시킨다. 왜냐하면 무엇인가를 챙겼는지 챙기지 않았는지를 검사하는 틀은 실수를 점검하는 틀이다. 무엇이 빠졌는지를 살펴보는 틀은 종래의 관습적인 틀이 되기 쉽다. 그래서 이것은 종래의 관습적인 틀에서 지금 나의 상태를 점검하고 그 틀에서 빠졌다고 지적하는 것을 갖추어놓으라는 식의 명령을 받고 있다는 연상작용을 일으킨다. 이것은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정보와 자극을 주의 깊게 포착하는 태도와는 반대 방향의 연상작용이다.

둘째, '챙김'이라는 활동은 '무엇을 챙기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부정적인 태도를 전제로 한다. 즉 '마음챙김' 자체가 '마음놓침' 상태에 대한 참조를 이미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어 그것을 보완하려는 태도는 mindful 상태의 성격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어떤 기준에 맞지 못할까봐 노심초사하게 만드는 성격을 갖는다.

 

그렇다면 'being mindful'은 '유념(念)하기'라고 번역하고, 'being mindless'는 '소홀하기'로 번역하는 것이 낫겠다. 대응하여 'mindfulness'는 '유념상태', 'mindlessness'는 '소홀상태'라고 번역하면 되겠다. 집중하기나 번망하기와 같은 번역어는 원래 개념의 일면만 번역하는 것이므로 다소 적합하지 않다. 반면에, 제안된 번역어는 그 전체를 포착하고 있고, 단어의 대구도 맞거니와, 그동안의 번역어와 달리 부작용도 없고 계룡산 도사의 분위기가 풍기지도 않는다.

 

게다가 과감하게 은유적인 맛을 버림으로써, 오히려 그 내용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마음챙김'이나 '마음놓침'이라는 번역어에서 사용된 은유는 마음을 스파게티나 청바지, 농구공 같은 일종의 사물로 다루는 정신적 사고작용을 유도한다. 농구공을 챙길 수도 있고 농구공을 놓칠 수도 있듯이 마음을 챙길 수도 있고 마음을 놓칠 수도 있듯이 말이다. 이러면 실제로는 being mindful이 세 요소로 이루어져 있는 복합적 기예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된다.

 

유념하기의 세 요소는 소홀하기가 갖고 있는 세 특성에 대응되는 것이다. 그리고 유념하기의 기예 세 요소가 항시 동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을 살펴보자.

 

3. 소홀하기의 특성

 

유념하기는 소홀하기와 반대되는 상태다. 그런데 소홀하기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상태다. 그것은 인간이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면서 환경에 어림짐작으로 최적 대응에 가까운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이전에 새겨진 패턴화된 반응을 하는 것이 유리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주변 환경 속의 단서가 촉발하는 바에 따라 움직인다. 이러한 단서의 촉발을 점화효과라고 한다. 점화효과priming effect에 관한 최근의 사회심리학 문헌들을 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주변 환경 속 단서에 따라 움직이는지 알 수 있다. 사람의 정서와 의도, 목표는 아주 작은 입력자극만으로도 사실상 아무런 인지적 처리 과정 없이 유발될 수 있다.” (Ellen J. Langer, Mindfulness, 이양원 옮김, 마음챙김, 길벗, 2017, 8면)

 

사실 이러한 점화효과는 습관으로 굳어진 행동덩이와 연결될 경우에 훨씬 더 강화된다. 예를 들어 일을 하다가 지루하거나 잘 되지 않을 때마다 초콜렛을 먹는 습관이 든 사람은, 일이 지루한 순간 아무 생각 없이 이미 초콜렛 먹기라는 활동으로 이전해 있다.

 

이런 식으로 의식적인 인지적인 처리 과정을 주도하지 않음에 따라 생기는 소홀하기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갖는다.

(1) 현재 하고 있는 일의 수행의 문법과 그 문법의 정당화 근거에 주된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리고 일의 수행 과정에서 감각, 상황, 정보의 줄기와 세부사항을 주의를 기울여 음미(appreciate)하지 않는다.  

(2) 정보와 자극을 이미 예상한 형태로만 포착하거나 아예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3) 문제와 해법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고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소홀상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실험을 보자.

 

"1978년에 나는 동료 심리학자인 벤지온 채노위츠Benzion Chenowitz, 아서 블랭크Arthur Blank와 함께 이런 종류의 마음놓침을 알아보기 위한 실험을 했다.(주석 4) 실험 장소는 뉴욕시립대학교의 대학원 건물이었다. 우리는 복사기를 쓰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상식적인 이유 또는 말이 안 되는 이유를 대며 그 복사기를 먼저 써도 될지 물어봤다. 피험자들이 상식적인 요청과 말이 안 되는 요청 양쪽에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면 그것은 그들이 자기가 들은 말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가 요청한 방식은 다음 세 가지 중 하나였다. “실례합니다. 그 복사기 좀 써도 될까요?” “실례합니다. 그 복사기 좀 써도 될까요? 복사를 하고 싶어서요.” “실례합니다. 그 복사기 좀 써도 될까요? 제가 지금 급해서요.”

첫 번째와 두 번째 요청은 내용상 같은 것이다. 복사기를 가지고 복사 말고 무슨 일을 하겠는가? 그러므로 만약 사람들이 자기가 실제로 들은 말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첫 번째와 두 번째 요청은 효과가 같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구조적으로는 두 요청이 다르다. 길게 늘인 요청(“실례합니다. 그 복사기 좀 써도 될까요? 복사를 하고 싶어서요.”)은 요청에 이유를 붙였다는 점에서 세 번째 요청(“실례합니다. 그 복사기 좀 써도 될까요? 제가 지금 급해서요.”)과 더 유사하다. 따라서 만약 사람들이 두 번째와 세 번째 요청에 응하는 비율이 같다면 그것은 곧 사람들이 말의 내용보다(49)는 말의 형식에 더 주의를 기울인다는 뜻이다. (...) 사람들은 내용을 주의해서 듣기보다 익숙한 형식에 기계적으로 반응했다.

물론 여기에도 한계는 있다. 상대방이 엄청나게 큰 부탁을 하거나 부탁의 이유가 지나치게 말이 안 되면(“코끼리가 쫓아와서요.”) 사람들은 자기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생각해 볼 가능성이 높다. 그 밖의 경우라 해도 사람들이 요청 내용을 제대로 듣지 않는 건 아니다. 단지 그 요청 내용에 대해 능동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위의 책, 48-49면)

 

한 마디로 소홀하기가, 이유를 묻고 그 답을 이해한다는 활동의 목적 자체도 잊어버리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것은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다른 방에 갔다가 도대체 왜 그 방에 갔는지 궁금해한다. 어떤 것을 검색하려고 인터넷 프로그램을 실행시켰다가 어느새 쓸데없는 흥밋거리들을 읽고 있다. 잠시 기분을 전환하려고 유투브를 봤다가 어느 새 거기에 빠져 잠을 못잠으로써 다음날 기분을 잡친다. 사람들을 왜 만나는지 알지 못한 채 모임 약속을 잡고 모임에 나간다. 애초에 어떤 기획을 추구할 가치가 있게끔 하는 사정들이 변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획의 진행에 계속 이끌려간다.  

 

반면에 소홀하기를 벗어난 상태는 동일한 일을 다른 방식으로 하게 하고, 이것이 실제로 정신과 육체에 효과를 가져다준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유념하기의 삼요소는 소홀하기의 삼요소의 반대(contrary)다.

 

4. 유념하기의 삼요소 중 제2, 제3요소.

 

이 글의 중심은 유념하기의 제1요소에 두고 있으므로, 제2요소와 제3요소의 실천 방법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제2요소는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정보와 자극을 열린 마음으로 포착'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중요한 문제들을 처리하고 해결하는 방법들은 개선될 수 있다'는 점을 전제로 삼고, 그러한 개선 방안에 대한 단초들이 자신에게 우연히 주어지는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만 있으면 된다. 예를 들어 자신에게 이미 익숙한 글쓰기의 방법이 있다고 하자. 이때까지는 별 생각 없이 그 글쓰기 방법을 고정된 것으로 두고, 늘 그 방법에 따라 글을 써왔다. 만일 소홀 상태에 있다면 어느 정도 글쓰기를 할 줄 알게 되면, 그것을 딱히 개선시키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글쓰는 방법이 개선될 수 있다'는 태도를 갖는다고 해보자. 그러면 그러한 개선 방안에 대한 정보들이 우연히 주어졌을 때, 그리고 아이디어가 우연히 떠올랐을 때 그것들을 놓치지 않고 흥미로운 것으로 포착할 수 있게 된다.

 

제3요소는 '새로운 시각에서 수행의 문법을 검토하여 새로이 정립할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고 때때로 실제로 구현'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법'을 새롭게 정립하고 정식화하는 것이다. 이것을 하는 방안은 의외로 간단하다. 첫째, 해당 수행의 문법의 지금 모습을 잘 관찰한 것을 공책에 써본다. 둘째, 그렇게 쓴 모습 중 개선되어야 할 절차와 그 대안을 생각해본다. 셋째, 대안이 생각나지 않으면 좀 더 생각해보기로 한다. 그러다가 제2요소의 자세로 인해 대안이 생각났을 때 정식화를 해본다. 넷째, 정식화한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면서 스스로의 상태를 잘 관찰해보고 효과가 괜찮은지 알아본다.

 

한마디로 제2요소는 수행을 하다가 뭔가 새로운 것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열린 자세로 포착하는 것이고 제3요소는 그런 자세를 추동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정리하고 점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2요소와 3요소는 유념하기 상태의 핵심적 특징을 구현한 것이다.

 

새로운 범주를 만든다.

·새로운 정보에 대해 개방적이다.

·상황을 한 가지 관점만이 아니라 다른 관점으로도 볼 수 있다."(위의 책, 113면)

 

이 요소들을 잘 익히는 것은 길게 보아도 발전이 없는 삶을 벗어나게 해주는 유용한 기예가 된다.

 

 

5. 유념하기의 삼요소 중 1요소.

 

1요소는 다음과 같다. 

 

현재 하고 있는 일의 수행의 문법을 따르는데 주된 초점을 맞추어 감각, 상황, 정보의 줄기와 세부사항을 주의를 기울여 음미(appreciate)한다.

 

음미(appreciate)라는 것은 어떤 대상이나 활동의 진가(true value)를 알고, 그 진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또는 그 이해를 더 깊이 있게 만들면서 그 대상이나 활동이 수반하는 모든 면들을 제대로 자세하고 속속들이 또는 새롭게 파악하고 느끼는 활동을 의미한다.

 

음악을 음미하는 것은 음악을 배경으로 깔아두는 것과 다르다. 음악을 음미하려면 적어도 주위의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고, 시각보다는 청각을 예리하게 돋워 소리에 집중하여 그 소리가 가진 특성을 속속들이 파악하는 활동에 몰입하여야 한다. 이런 상태에서 음악을 들으면 눈물도 흘릴 수 있고, 전율을 느낄 수도 있으며, 가사의 깊은 뜻이 새롭게 와 닿을 수도 있으며, 가락과 음조의 창조적인 면도 파악할 수 있다. 이런 음미는 한 번만에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첫 번째 들을 때는 곡의 전반적인 인상과 흐름에 감동을 받지만, 두 번째 들을 때는 곡의 변곡점이 혁신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보다 분명히 깨달을 수 있다. 세 번째 들을 때는 주요 선율을 받쳐주는 보조 선율의 풍부함에 감탄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음악 감상'이 취미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이런 시간을 의도적으로 가진다는 뜻이다. 음악 감상이 취미가 아닌 사람도 아침에 일어났을 때 몸단장 활동을 신나게 만드는 곡이 있을 수는 있다. 적막한 것보다 은은하게 퍼지는 클래식이 있는 데서 쇼핑이 더 편안하게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음악을 곁에 두는 것은, 음악을 음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대비가 다른 활동에도 다 적용될 수 있다.

 

이를테면 청소와 같은 육체노동조차도 음미가 가능하다.

 

심신일원론을 좀 더 최근에 검증한 실험이 객실 청소원 연구, 연구대상자는 하루 종일 힘든 육체노동을 하는 호텔 객실 청소원들이었다. 우리가 처음에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운동을 안 한다고 대답했다. 그다음에 우리는 절반의 피험자들에게 그들이 하는 일을 마치 헬스클럽에서 운동하는 것처럼 생각하라고 지시했다. 예컨대 침대보를 씌우고 침구를 정리하는 일이 헬스클럽에서 기구를 써서 근력운동을 하는 것과 같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 한 가지 외에 다른 것들은 변화시키지 않았다. 오로지 마인드세트mindset 하나를 바꾼 결과, 실험집단은 체중·허리-엉덩이 비율·체질량지수BMI·혈압이 줄었다. 이 모두가 자기 일을 운동으로 여기겠다는 마음의 변화가 작용한 결과였다. 반면 통제집단에서는 이런 신체적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위의 책, 11면)

 

청소를 할 때 어떤 근육들을 움직이고 어떤 자세로 어떤 패턴으로 움직이는가에 유의할 때, 우리는 청소라는 활동을 음미하게 된다. 그리고 일단 이런 음미가 이루어지면 그 활동이 선에 더 기여할 수 있도록 변경하는 행위를 무의식적으로 하게 된다. 청소가 몸 움직임 측면에서만 새롭게 음미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청소의 효율적인 순서, 효과적인 청소 도구의 사용방법 등등 각각의 면을 달리 하여 음미할 수 있다.

 

물론 깨어 있는 동안 하는 모든 활동을 모조리 집중해서 최고 수준으로 음미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일상습관들은 행동덩이로 덩어리화된 활동을 단서에 의해 개시하고 단서에 의해 끝내게 하는 자동항법장치에 맡기는 것도 무해하다. 그러나 이런 일상습관에 속하는 행위들의 경우에도, 자동항법장치가 우리를 바른 방향으로 인도하지 못할 경우, 또는 자동항법장치가 우리를 이끌고 가기에 힘이 부족한 경우, 또는 다른 습관을 뿌리내리고자 하는 경우, 혹은 좀 더 기존 습관을 개선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언제나 이 음미의 기예가 유용하다.

 

의식적으로 최고 수준으로 집중한 음미만 유용한 것도 아니다. 일상 생활에서는 낮은 수준의 음미도 충분히 유용하다. 

낮은 수준의 음미 전략 중 하나는 간단하다. 하나는 몸의 최적 경로를 염두에 두면서 다소 여유있고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다. 몸의 최적 경로란 몸이 시공간에서 차지하는 위치이다. 이를 군대에서 이등병과 상병의 군복 입는 속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등병은 빨리 군복을 입어야 한다는 생각을 아주 강하게 갖고 있다. 그리고 매우 빠르게 입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실제로 기상나팔이 불고 나서 곧바로 허겁지겁 시작된 이병의 군복 입는 속도가 상병의 군복 입는 속도보다 느리다. 이병은 재빨리 군복을 입는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개개의 동작을 하는 몸 움직임 각각이 훠훠 빨라야 한다는 관념을 갖는다. 그러나 옷을 입는 과정은 섬세한 것이어서 무조건 빠르게 개개의 사지를 움직인다고 해서 환복이라는 결과에 빨리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바지의 통 안에 다리를 무턱대고 빠르게 집어넣으면 바지 천에 미묘하게 걸려서 제대로 다리가 들어가지 않는다. 이런 경험은 특히 청바지를 선 채로 빨리 입으려고 해보면 누구나 하게 된다. 백 투더 퓨처에서 주인공은 캘빈 클라인을 빨리 입으려다가 넘어지기까지 했다. 단추를 잠그거나 고무링을 매거나 군화의 끈을 매듭짓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소한 것들을 하는 몸의 최적 경로를 알기 위해서는 개개의 동작 속도를 오히려 천천히 하면서 시행착오를 거치는 것이 좋다. 상병은 일이병 시절 낮은 수준의 음미 전략을 활용하여 알아낸 최적 경로가 몸에 익은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일상생활 중 아무 생각 없이 멀티태스킹하는 부분을 포착하고, 멀티태스킹을 없애거나 멀티태스킹 수위를 낮추는 것이다. 멀티태스킹은 우리 일상 곳곳에 숨겨져 있다. 혼자 밥을 먹으면서 생각을 많이 요하거나 감정적 소모를 일으키는 대상을 보는 것, 같이 먹는 사람과 골치아픈 대화를 나누는 것도 멀티태스킹의 예다. 높은 수준의 음미는 밥을 먹을 때에는 밥에만 집중하고 아무런 다른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는 것이겠지만, 정말 맛있는 진기한 음식을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늘 그렇게 높은 수준의 음미를 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고 그렇게 효과가 있는 것 같지도 않다. 혼자 밥을 먹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쓸데없는 잔걱정이 솟아오를 수도 있는데, 이렇게 되면 차라리 아무 생각 없이 재밌는 것을 보면서 먹는 것보다 못하다. 그러나 보는 것의 종류를 제한함으로써 멀티 태스킹 수위를 낮출 수는 있다. 뉴스를 보거나 스릴러 영화를 보는 것은 생각을 촉발하고 감정적 소모를 일으키기 때문에 밥을 낮은 수준으로도 음미하기 힘들게 만든다. 또 앞에 앉은 사람과 진지한 정치철학적 토론을 하거나 세태에 대해 불평하면서 밥을 먹어도 마찬가지다. 여러 번 보고 또 봤던 물리학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밥을 먹거나, 같이 음식에 대해 칭찬하는 대화를 나누면서 밥을 먹는 것은 오히려 잔걱정에 빠져서 심각한 표정으로 다른 것을 하지 않고 밥을 먹는 것보다 나올 수 있다.

 

(멀티태스킹과 어떤 활동을 집중해서 하다가 지루해졌기 때문에 다른 활동으로 전환하는 것은 전혀 다름을 주의하라. 적절한 과업 전환은, 그 시간 간격이 어느 정도 길다면, 오히려 음미를 위해 필요할 경우도 꽤 있다.)

 

많은 사람들이 평생 동안 반복하지만 낮은 수준의 음미도 하지 않기 때문에 거의 개선이 없는 활동은 일상생활의 여러 곳에 숨겨져 있을 수 있다. 이를테면 양치질이 있다. 다 큰 어른이 자신의 입 안에 폭풍을 밀어넣듯이 양치질을 하는 장면이 드라마에 나오기도 한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그렇게 양치질을 하다간 이의 겉부분이 손상되기 마련이다. 양치는 먼저 자기만의 순서를 정해야 한다. 이의 결에 따라 윗니는 위에서 아래로 아랫니는 아래에서 위로 조심스레 닦고 하고, 이 맨 구석구석까지 촘촘하게 닦으며, 윗니와 아랫니 맨 앞쪽의 안쪽은 칫솔을 세워서 닦아준다. 이렇게 자신이 정한 순서대로, 칫솔이 이에 닿는 감촉과 치약의 시원한 느낌을 십분 음미하면서 몸에 올바른 습관을 들이고 나면, 그 다음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이렇게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양치질을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마구 폭풍 양치질을 할 때보다는 몸의 움직임이 감각에 유의하는 움직임으로 적합하게 된다.

 

노면 상태에 따라 걷는 방법을 조절하는 것도 낮은 수준의 음미를 도입할 수 있는 부분이다. 많은 사람들이 스무살이 넘어서도 함부로 걷다가 발가락을 찧고, 걸려 넘어지고, 미끄러지곤 한다. 젊을 때는 소홀히 걷다가 넘어져도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나이가 들수록 엄청난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 엉덩방아를 찧어 생긴 고관절 골절의 노인이 그런 사고를 겪은 뒤 1년 내 사망할 확률은 10-30%에 이르며, 원래의 보행 상태를 회복하지 못할 확률도 30-50%가 된다. 이와 같은 한 번의 사고가 아니라도, 잘못된 걷기 습관은 관절에 무리를 줘서 이후 고질적인 관절 문제를 가져온다. 걸을 때는 뒷꿈치를 먼저 사뿐히 바닥에 대고 바닥을 순간적으로 확인한 후 무게중심을 앞으로 이동하면서 디딘 무릎이 자연스럽게 펴지게 하면서 그런 축의 이동력을 빌어 관성의 힘으로 앞으로 부드럽게 전진하는 것이 좋다. 터벅터벅 앞발을 내세우며 걷거나 급하게 총총 걷는 것이 아니다. 특히 노면이 고르지 못하거나 장애물이 있을 수 있거나 바닥이 미끄러울 수 있는 곳, 그리고 이제 새롭게 걷기 시작하는 시점에서는 바닥을 뒷꿈치로 천천히 먼저 확인하는 식의 몸 움직임이 익으면 턱에 걸려 넘어지거나, 문을 열었는데 문이 있는 곳의 바닥면보다 한 계단 아래에 바닥면이 있어 허공을 잘못 딛고 넘어지는 일이 없게 된다. 뒷꿈치가 부드럽게 닿자마자 부드럽게 몸이 움직이므로 관절에도 거의 무리가 가지 않는다. 실내에서 발가락을 찧을 일도 없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걸으면 걸을 때마다 걷는 감각이 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이처럼 일상적인 활동 중에 의식적으로 처음에는 높은 수준으로 음미하는 태도를 취하여 새로운 몸 움직임을 익숙하게 한 뒤 그 다음에는 낮은 수준의 음미하는 태도를 취하면 삶의 복리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음미하기의 태도를 취하기 위해서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의도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일이 필요하다. 결과에 초점을 맞출 때 오히려 그 활동의 진짜 목적, 진가, 적절한 수행 방식을 잃고 쉽게 포기하게 된다.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에 초점을 맞추게 함으로써 창의성을 촉진할 수 있다. (...) 마음놓침이 수많은 노력의 발목을 잡는 과정은 전형적으로 이렇게 진행된다. 첫째, 우리는 지나치게 경직된 목표를 세워놓고 노력을 시작한다. 둘째, 노력하는 도중 뭔가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그걸 지레 실패라고 여긴다. 그리고 셋째, 그 결과물을 쓸모없는 것이라고 단정해버린다."(위의 책, 20면) 

 

따라서 결과에 대해서는 중간중간 활동의 방향이나 지침을 점검할 때에만 생각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결과를 생각하는 시간을 따로 확보해두면, 나머지 시간의 본지는 모두 과정 자체의 형태를 세심하게 음미하는 데 있다는 자세를 더 잘 취할 수 있다. 이를테면 과업을 어느 정도나 상세하게 완성할 것인가는 일종의 지침 문제이다. 이것은 먼저 하나의 지침을 세워놓고 거기에 따라서 시험해보다가, 만일 주어진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이 든다면 과감하게 상세도를 낳추는 방식으로 지침을 변환하면 된다. 다만, 시험하기로 한 시간이 다 될 떄까지는 지침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왜 우리는 활동들의 과정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은연중에 우리가 하는 활동을 과정본위적인 활동(process-centered activity)과 결과본위적인 활동(result-centred activity) 범주 중 어느 하나에만 집어넣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도구적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은 결과본위적 활동으로 보기 쉽다. 왜냐하면 그 활동은 우리가 바라는 다른 어떤 것에 유익하고 유용하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 활동으로 인해 달성하게 될 다른 어떤 것에 마음이 크게 쓰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깊이 뜯어보면 하나의 철학적 혼동이다. 왜냐하면 도구적 가치의 보유는 내재적 가치 보유와 양립가능하기 대문이다. 오히려 인간의 삶에서 도구적 가치(instrumental value)를 갖고 있는 것들이 내재적 가치(intrinsic value)도 함께 갖고 있는 경우는 매우 흔하다. 학문활동의 일환으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활동이다. 진리는 결과이다. 그리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은 그 결과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활동 자체가 아무런 내재적 가치를 갖지 않는 것이 아니다. 새롭게 진리를 알게 되고 스스로 글로 논증을 해나가는 과정이 갖는 고유의 문법을 따른다는 활동에서 생기는 독특한 의식적 경험에 수반되는 지향적 가치(intentional value)를 부인할 수 없다.

운동은 건강을 위한 도구적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상당히 많은 운동하기 자체가 가지는 내재적 가치가 있다. 예를 들어 테니스를 새벽마다 부지런히 치는 사람 중 오로지 도구적 가치만을 위해 그러는 사람은 없다. 게다가 테니스 치기가 다른 수단으로도 양만 다를 뿐 얼마든지 똑같은 본체를 가진 '쾌락'(pleasure)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본체적 쾌락이라는 궁극적 목적에 도구적이기 때문에 테니스를 치는 사람도 없다. 그런 식의 이해는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이렇게 치면 예를 들어 성애 이외의 다른 목적이 없는 성행위도 성적 쾌락이라는 내재적 가치를 향유하는 활동이 아니라, 궁극적인 어떤 추상적 쾌락을 추구하는 도구적 활동이 된다. 그런 식의 언어사용은 애초에 내재적 가치와 도구적 가치의 구분을 붕괴시키기 때문에 타당한 것이 아니다. 이런 부당한 언어사용을 하지 않는다면, 테니스 치기는 어떤 추상적인 쾌락의 저량을 증가시키기 위한 순수 도구적인 활동이 아니라 그 자체가 내재적인 가치를 지닌 활동임을 확인할 수 있다. 즉, 탁구나 농구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테니스 치기에 고유하고 독특한 지향적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테니스 치기의 즐거움은 오로지 테니스 치기를 통해서만 향유할 수 있다.

 

사람들은 유념하기의 기예를 특별히 갈고 닦지 않는다 할지라도, 테니스 치기나 성교, 영화보기, 여행하기를 할 때 과정 자체를 음미할 줄 안다. 물론 음미의 기량에는 차이가 좀 있다. 러셀은 배를 타고 세계여행을 하면서도 사업상 서류만 검토하고 있는 사업가의 예를 든 적이 있다. 그러나 대체로 사람들은 이런 활동들을 내재적 가치를 지닌 활동의 범주로 넣는다.

 

반면에 사람들은 이동하러 걷기, 배우기와 일하기, 제작하기 등등, 보통 유흥이나 오락으로 분류되지 않는 나머지 거의 전부의 활동을 도구적 가치만을 지닌 활동의 범주로 은연중에 집어 넣는다.

 

그러나 인간 활동 대부분은 그것이 (i) 가치 있는 목적을 위한 것이고 (ii) 그 목적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제대로 틀이 잡혀 있다면, 그 과정 내에서도 내재적 가치도 갖는 지향적 경험을 할 수 있다.

 

(주석: 이러한 조건이 붙는 이유는 이러한 활동들은 그 활동들이 가치 있는 목적을 지향하고 있고 도구적이 되는 목적 자체를 제대로 달성할 수 없는 방향으로 틀이 잡혀 있다면, 지향적 가치도 제대로 생기기 힘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가구점의 점원이 최대한 고객을 어리숙한 정신 상태로 만들어서 기회가 왔을 때 최대한 많이 털어먹어야 한다는 지시를 받고 있다면, 적어도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의 해석학적 의미를 자각하고 있는 한에서는 자신의 가구 판매 활동에서 지향적 가치를 경험하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비도덕적인 사업장의 직원들은 도덕규범을 준수하는 사업장의 직원들보다 높은 급여를 받는 경향이 있다. 내재적 가치가 없는 만큼 보상을 더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R. Frank의 <What Price Moral High Ground>에 잘 나와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철학적 해명은 <삶은 왜 의미 있는가>를 참조할 수 있다.)

 

과정 자체가 내재적 가치를 갖는 경험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은 의도적 숙련을 통해 획득할 수 있는 고차적 기량을 발휘하는 것 자체에서 독특한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별다른 도구적 가치가 없는 고차적 기량을 발휘하는 놀이를 즐길 줄 아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도구적 가치가 분명한 것이라도 고차적 기량을 발휘하는 활동이라면 무엇이든 놀이와 비슷하게 변환하여 그 활동에 특유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맨 마지막 진술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우선 전단 부분[인간은 고차적 기량을 발휘하게 된다는 이유로 놀이를 즐길 줄 아는 존재]을 자세히 살펴보자. 인간은 더 큰 다른 뚜렷한 목적에 기여하지 않는 놀이라도 이전보다 고차적 기량을 발휘하는 데서 독특한 즐거움을 느낀다. 예를 들어 큐브의 6면의 색을 맞추는 놀이는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에게 그렇게 큐브를 갖고 노는 것 이외의 아무런 목적에도 기여하지 않는다. 즉 그것은 뚜렷한 도구적 가치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큐브를 빨리 정확하게 맞추는 여러 공식들을 외우거나 새로 개발하고 능숙해질 때까지 익히는 것을 좋아한다. 보통 사람들은 공식(일종의 알고리즘과 같은 색을 맞추는 절차)를 하나도 모르는 상태에서는 어지럽게 섞인 큐브를 맞추지 못한다.  만일 가장 간단한 공식을 알게 되면 시간이 좀 걸리지만 결국 큐브를 맞추게 된다. 이것을 몇 번 성공해서 숙달하고 나면 다른 공식을 시도해서 더 빨리 큐브를 맞추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 다른 공식들도 배우게 된다. 그러다 보면 공식을 적합하게 적용하는 기량이 늘어나면서 거기서 상당한 재미가 발생하게 된다. 이제 다음과 같은 사고실험을 해보자. 누구에게라도 큐브 맞추기를 수고스럽게 배우지 않고 당장 세계 100위급의 수준으로 능숙하게 되지만, 누구에게도 큐브 맞추기를 자랑할 수도 없고 대회에 나갈 수도 없다는 조건 하에서 이 능력을 주겠다고 제안한다고 해보자. 많은 수의 사람들은 설사 사람들에게 자신이 큐브를 여러 해법을 능숙하게 적용해 빨리 맞춘다는 점을 자랑할 수도 없고 대회에 나가서 상금도 타지 못한다 하더라도, 큐브달인이 되기를 바랄 것이다. 그런 기량을 익혀서 심심할 때 마다 발휘하는 놀이 자체가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상황은 좀 달라진다. 많은 사람들이 큐브 기량을 수고스럽게 배우지 않는 까닭 중 상당부분은, 자신의 기질에 더 잘 들어맞는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다른 놀이들도 많고, 또 도구적 가치가 있으면서도 고차적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일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큐브의 예가 와닿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지금 상황에서라도 즐거움을 위해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지금 즐겨 하는 그 어떤 게임이라도 여기에 대입하여 생각하는 것이 더 와닿을 것이다. 존 롤즈의 <정의론>에 나오는 놀이, 즉 풀잎 세기와 같은 일에서보다야, 자신이 지금 염두에 두고 있는 복잡한 게임이 훨씬 더 즐거우며 그런 것을 즐길 능력이 자신에게 있다는 점이 분명해질 것이다.

 

다음으로 후단 부분[도구적 가치 있는 활동을 놀이와 유사하게 변환하여 즐거움을 느낄 능력이 있다는 부분]을 살펴보자. 글쓰기를 예로 들어보자. 최대한 논의를 간단히 만들기 위하여, 어떤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알리기 위하여 글을 쓴다는 단순한 사안을 생각해보자. 이 사람이 이 글을 쓴다면, 그것은 자신의 생각을 정서하고 알린다는 목적에 기여한다. 그러므로 글쓰기는 진리를 발견하고 음미하며 공유하는 데 도구적 가치를 갖는다. 이 도구적 가치는 뚜렷하다. 지금 하고 있는 글쓰기가 어떤 더 큰 목적에 기여한다는 점은 고차적 기량을 발휘하는 경험을 더욱 의의 있는 것으로 만들어준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만 생각하면 글쓰기는 놀이와는 전혀 별개의 것처럼 생각되기 쉽다. 그러나 이 도구적 가치의 존재가 글쓰기 활동에서 하는 경험을 큐브 맞추기에서 하는 경험과 완전히 이질적인 것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도구적 가치는 글쓰기를 개시하는 이유, 그리고 글쓰기의 문법을 점검하는 지침이 되기는 하지만, 글을 쓰는 활동을 한참 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런 도구적 가치는 일단 의식하지 않고 일반적 근거와 자신의 시행착오에 의해 확립된 문법을 일단 중심점으로 삼고 게임을 해나간다고 생각하면 된다. 즉 이 사람이 글을 써오면서 저번에 썼을 때 부족한 점을 파악하고, 잘 쓰는 사람에게 피드백을 받고, 이번에는 더 잘 쓰려면 어떻게 쓸지 고민하고 어떤 지침들과 요령을 잠정적으로 고정했다고 해보자. 그리고 그런 지침과 요령을 조금 더 잘 구현하는 식으로 익혀 나가면서 글쓰기를 한다고 해보자. 이런 모든 특성들은 큐브, 길거리 농구, 컴퓨터 게임과 공통되는 것이다. 그리고 글쓰기의 주제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보통은 글쓰기는 큐브 풀이보다는 더 고차적 기량을 발휘하고 발전의 여지도 더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글쓰기는 단지 문자의 배치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고되고 있는 주제 자체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큐브 풀이가 큐브에 한정되는 활동임에 반해, 글쓰기는 사고될 수 있는 모든 문제와 그 해법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적 원칙에 의하면, 적어도 탐구자의 글쓰기는, 큐브 풀이보다 고차적 활동이라고 하게다. 그렇다면 게임을 풀어나가는 법이 아주 제한된 게임보다 여러가지로 다양하게 그리고 더 심층적으로 풀어나가는 게임이 음미에 덜 적합할 이유가 없다. 글쓰기를 게임과 비슷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게임의 성취를 측정하는 것처럼 글쓰기의 경우도 숙련도의 개선과 특정한 성취를 평가할 수 있는 자신의 기준을 세워 두면 된다. 그리고 게임에서도 일련의 절차를 익히고 개량하는 것처럼 글쓰기에서도 의식적으로 절차를 익히고 개량하면 된다. 이로써 글쓰기가 완전히 순수한 놀이처럼 변하지는 않더라도, 이와 유사한 구조로 된 활동으로 변환될 수 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문장을 리듬감 있게 만들어내고 그 문장들을 연결하여 하나의 의미 있는 서사나 논증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보다 읽기 좋게 다듬어서, 다른 사람들이 읽고 이해하는 피드백을 받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체계적으로 누릴 수 있음도 분명하다.

 

이렇게 활동을 놀이로 정의하고, 놀이의 적합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유념하기 상태를 유도하는 데 상당히 효과적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일은 확신을 가지고 마음놓침 상태에서 해도 완수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반면, 놀이는 거의 언제나 마음챙김 상태에서 하는 활동이다. 사람들은 놀이를 할 때 완전히 몰두하고 위험도 감수한다. 놀이가 틀에 박힌 방식으로 진행된다고 상상해 보라. 당연히 놀이의 재미가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놀이에서는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 아무 생각 없이 스키를 타거나 승마를 한다고 상상(210)해 보라. 극장에 가서 늘 보던 연극을 참신하다는 느낌 전혀 없이 또 본다고 상상해 보라. 이미 해봐서 답을 모두 알고 있는 십자말풀이를 한다고 상상해 보라. 우리가 놀이를 할 때 더 대담해지는 것은 그렇게 해도 안전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놀이를 할 때 우리는 자신을 평가하지 않는다. 놀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놀이 자체이지 우리 자신이 아니다. (...) 결국 일터에서 마음챙김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업무 분위기를 바꿔야 함을 알 수 있다. 마치 놀이에서처럼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시도해 볼 수 있고 질문이 권장되는 업무 분위기, ‘주사위 눈이 운 나쁘게 나와도해고되지 않는 업무 분위기로 말이다."(위의 책, 209면) 

 

다시 말해, 적절한 여건 형성이나 마인드 세트의 변화를 통해, 의도적 숙련을 통해 기량을 보다 고차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으면서도 인간 삶에서 진지한 도구적 가치를 갖고 있는 활동은 인간 실천에서 의의가 더 클 뿐만 아니라, 놀이의 특성을 보존하면서도 놀이 전개의 다양성과 심층성이 더 클 수 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유념하기의 제2, 제3의 요소를 염두에 둔 절차에 대한 좀 더 의식적이고 체계적인 생각이다. 그러므로 이런 것을 놀이처럼 대할 수 없을 내적 이유(intrinsic reasons)는 원칙적으로 없다.

 

물론 놀이처럼 대하는데 간섭하는 외적 이유들(extrinsic reasons)이 있을 수는 있다. 예를 들어 글을 써야 하는 의무가 외부에서 부과되고, 게다가 완전히 납득할 때까지 충분히 자료를 조사하고 무르익을 때 까지 사고할 생각도 가질 여유도 없이 마감이 된다고 해보자. 이러한 외적 이유들은 확실히 활동에 압박을 가하기는 한다. 또 어떤 외적 이유들은 활동의 성격을 변형시키기도 한다.

 

우선 주목해야 할 점은 물론 이런 외적 이유가 부적절한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점이다. 외적 이유가 명백히 부적절한 경우, 즉 외적 이유가 그 활동의 본지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경우 그 외적 이유는 제거해야 한다. 예를 들어 국책연구기관의 연구원에게, 적정한 탐구를 하기 전에도 특정한 결론을 대놓고 지지하라고 지시가 떨어진다면 이것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되지 않는 행위를 지시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부당한 지시이다. 이런 지시는 거부해야 하며, 그런 지시의 증거가 명확히 있다면 지시를 한 사람은 처벌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반면에 변호사가 의뢰인의 승소를 위해서 증거와 증거로 뒷받침되는 사실관계가 허락되는 한에서(즉 거짓을 지어내지 않는 한도에서) 의뢰인에게 유리한 결론을 지침으로 삼고 서면을 쓰는 것은 전혀 부적절하지 않다. 그것이 사법체계 내에서 조직된 분업 하에 할당된 변호사의 변론기능의 본질이다. 또한 변호사는 의뢰인과의 위임계약에 의해 그리고 법원의 재판 일정에 의해 외부에서 부과된 기한을 준수해야 하며, 그 기한은 보통 빠듯하기 마련이지만, 이러한 외적 제약 역시 변호사 업무의 본질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외적 이유가 활동 자체의 성격을 전혀 다른 것으로 변질시키지 않는 경우에는, 놀이로의 변환 가능성이 완전히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것들도 얼마든지 게임의 형태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놀이에도 놀이의 규칙이라는 제약이 있고, 해당 활동에 주어진 외적 제약도 놀이의 규칙과 같은 제약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스타크래프트에서도 (상대방의 위치와 활동을 훤히 본다거나 수거하는 자원량을 뻥튀기하는) 핵 프로그램을 쓰지 않아야 한다는 제약 내에서 상대방에 대하여 우위를 점하는 전략을 수립한 후 전술적으로 이 전략을 잘 실행하는 것이 게임의 구조다. 또한 많은 놀이들이 시간 제한 규칙을 갖는다. 스타크래프트와 같은 실시간 전략 게임은 한정된 자원과 시간 하에 최적의 전략을 짜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므로 무한한 시간과 정력이 주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하나의 게임 조건으로 생각하고 접근하는 것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변호사가 지나치게 만연히 처음부터 끝까지 세공품을 조각하듯이 장인정신을 발휘하여 변론준비서면을 구성하고자 하는 것은 이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에서는 게임에 임하는 부적합한 방법이다. 건조하기 짝이 없다고 하더라도, 정규적인 분쟁에 관해서는 잘 확립된 전투의 전장을 식별하고, 그 전장마다 일목요연하게 쟁점, 쟁점에 관한 법조문, 법리(판례와 도그마틱), 증거를 간단하게 적시하는 것이 효과적인 전략이다. 그리고 전투의 승패가 걸려 있는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설득의 노력을 집중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요즘 전략 게임을 즐기는 젊은이들은 유투브에서 실력자들이 잘 하는 법을 보여주면 그걸 공부해서 다시 자신이 게임할 때 써보곤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서면을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쓸까를 늘 고민하고 어떤 시험책이 나오면 그 새로운 방법을 시행해보는 것도 게임의 일부라고 하겠다.  

 

실제로 제약들을 게임의 일부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는 창의성을 촉진하기도 한다.

 

  "사실들을 조건부적인 방식으로 가르침으로써 창의성을 촉진할 수 있는가 하는 연구였다. (...) 나는 앨리슨 파이퍼Alison Pipler와 함께 이 질문을 답을 얻기 위해 몇 가지 실험을 했다.(주석 6) 우리는 피험자들에게 몇 가지 물건을 보여주면서 한 집단에게는 보통의 절대적인 방식으로, 다른 집단에게는 조건부적인 방식으로 각 물건을 소개했다. [첫번째 집단에게는 ‘OO입니다’, 두 번째 집단에게는 ‘OO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응답지 작성 요령을 알려주는 과정에서 고의적으로 몇 가지를 잘못 말했다. 그런 뒤 우리는 피험자들에게 응답지가 잘못 작성되었는데 여분의 응답지가 없어 연구를 끝내지 못하게 되었다고 알렸다. 바꿔 말하면, 우리의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지우개가 급히 필요한 상황을 만든 것이다.

피험자들에게 보여줬던 강아지가 물고 노는 장난감은 생소한 모양의 깨끗한 고무조각이었으므로 지우개 대용으로 제격이었다. 하지만 이 장난감을 조건부적으로 소개받은 피험자들만이 이 장난감을 이런 참신한 방식으로 사용할 생각을 했다."(위의 책 180-181면) 

 

이런 자세에 의하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도구적 가치가 있는 활동들 중 외적 제약이 있는 것이더라도, 어느 정도까지는 놀이로 변형될 수 있으며, 놀이로 변형된 것들은 놀이처럼 접근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단서가 필요하다. 외적 제약은 실제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며, 자신이 불필요하게 만들어내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스타크래프트 경기를 재밌게 하려면 양 손을 쓰지 않고 한 손만 쓴다는 제약을 일부러 만드는 것은 좋지 않다. 평소에 꾸준히 해야 좋은 질의 성취를 할 수 있는 활동은, 자신이 일부러 뒤로 미룬 다음 게임처럼 대하는 것은 현명치 못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일단 마감이 오게 되었고 그것을 하기로 하였다면, 일단 이미 발생한 제약들은 게임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제약을 게임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떤 사실을 재해석하는 태도를 확립하는 것인데, 이것이 효과가 있음은 여러 연구결과를 통해 밝혀져 있다.

 

"정신을 다른 데로 돌리면 통증은 사라지는 듯하다. 반대로 정신이 통증을 다시 의식하면 몸두 따라서 반응한다. 고통을 주는 자극을 재해석하면 그 자극이 더는 고통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전략은 단순히 주의를 딴 데로 돌리는 방법보다 결과가 더 오래 지속되기 쉽다. 일단 한 번 자극을 재해석하고 나면 (...) (253) 원래의 해석을 되살리는 일은 드물기 때문이다. 5장에서 우리는 환자들이 통증을 다른 맥락에서 바라볼 때(미식축구 경기 중에 타박상이 생겼다고, 또는 급하게 파티 음식을 준비하다가 칼에 베였다고 생각할 때) 통증을 더 잘 견딘다는 것을 봤다."(위의 책, 252-253면).  

 

그리고 화룡점정을 위해서는 여기에는 스토아적 자세가 필요하다. 외적인 제약이 부과된 활동이 놀이와 비슷한 활동이 되려면 그 활동에 걸려 있는 것이 많지 않아야 한다. 만화 <카이지>에서처럼 도박에 목숨이 걸려 있다면 그 도박은 놀이가 되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인생의 많은 활동들은 마치 거기에 아주 많은 것이 걸려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거기에 걸려 있는 외적인 것(부, 명예, 승진, 일자리 등등)은 결국에는 나의 실천에 속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실천이 외적인 것을 달성하는 데 한 요소가 되기는 하지만, 충분요소는 아니다. 그러한 가치들은 나의 실천에 방향을 제시해주기는 하지만 나의 실천의 의미를 전적으로 결정하지는 않는다. 만일 나의 책임으로 귀속시킬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을 진다고 잘못 생각할수록, 정신은 불안정해지고 따라서 수행 자체에 초점을 맞출 가능성은 더욱 낮아질 것이다. 반면에 그것들은 나에게 속하지 않음을 잘 인식하면 할수록 가치 있는 활동들을 놀이와 유사한 구조로 음미할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 그리고 스토아적 자세는 어떤 것들은 놀이로 변환해서 할 만한 가치도 없다는 것도 분별해준다. 사람들은 지나치게 많은 것들을 삶에 필수적인 것으로, 응당 나에게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이러한 생각에서 압박이 발생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카이지는 애초에 그렇게 목숨을 걸고 계속해서 도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카이지가 애초에 도박을 한 까닭은 인생역전을 통해 크게 흥청망청 살고자 하였기 때문인데, 그것은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것을 탐하는 것이었다. 둘째로 외적인 것이 현재의 수행의 질을 훼손하여 노심초사할 정도로 심대한 경우는 몇몇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드물기 때문이다. 인간 조건은 인간에게 그렇게까지 커다란 행복을 주도록 구성되어 있지 않으며 예외적인 입지에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보통의 사람들이 하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그토록 큰 영향을 주는 경우는 드물다. 이를테면 어떤 글을 쓰는 일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과연 그 글이 완벽할 정도로 잘 쓰이는 것에 심대하게 걸려 있는 것은 보통 없다. 무엇인가 노심초사할 정도로 심대한 것이 걸려 있다는 착각은 불필요한 완벽주의를 낳으며, 완벽주의는 오히려 무기력을 낳는다. 이러한 무기력으로 향하는 경로를 피하기 위해서는, 결과 그 자체의 척도로 보았을 때에는 극도로 좋은 결과도(이를테면 작문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극도로 좋은 글의 산출도), 그 자체로 삶의 질을 결정할 정도로 중요하지 않다는 점을 유념하는 것이 좋다.

삶의 질은 결국 일상의 수행시의 정신적, 육체적인 상태에 의해 대체로 결정되며, 그것이 인간이 대체로 적정하게 바랄 수 있는 것의 대부분을 구성한다. 물론 극도로 나쁜 결과는 삶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첫 번째의 이유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가 현재 수행의 질에 초점을 맞추어 현명하게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외적인 요인으로 인해 불운한 일이 생기더라도 나의 책임은 아니며 그리하여 책임 있는 행위자로서 현재 내가 걱정해도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또한 현재 수행의 질에 초점을 맞추며 인생에서 극도로 좋은 결과를 헛되게 탐하지 않는 사람은, 극도로 나쁜 결과를 자신의 행위가 원인이 되어서 맞이하는 일을 상당한 정도로 줄일 수 있다. 

 

이와 같은 스토아적 자세를 점오점수의 자세로 늘 실천하면, 놀이와 유사한 구조로 바꿀 수 있는 활동의 범위나 놀이와 같이 변환시키는 정도도 조금씩 늘어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변환된 활동은 일종의 구획화(compartmentalization) 내지는 칸막이화가 된다. 실제로 우리는 놀이에 흠뻑 빠져들 때 놀이를 맥락화하지 않고 다른 인생사와 구분하여 그 자체로 즐긴다. 이런 조건화를 많이 만들어낼수록 가치 있는 방향을 향해 걷되, 거창한 가치나 외적인 것으로 인해 생기는 압박감을 줄이고 현재의 활동 그 자체를 즐길 수 있게 된다.

 

"마음챙김 상태일 때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지금 여기에서 하는 활동에 빠져든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온전히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 일을 놀이로서 받아들일 때 우리는 마음챙김이 본질적으로 즐겁고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것임을 느낀다."(위의 책, 22면) 

 

6. 하루를 놀이처럼 짜기

 

이제 위와 같은 원리를 일상에서 실천해보려고 한다면, 그 접근의 한 방법으로 하루를 놀이처럼 짜서 살아보는 것을 추천할 만하다.

 

다시 말해 오늘은 어떤 놀이들을 할 것인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은 어떤 의무 부과에 의해 시달릴 것인지라는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과 방향이 크게 다르다. 이런 자세로 접근하게 되면, 놀이들을 적절한 시간과 순서대로 배치할 수 있고, 또 자기 관찰에도 친화적인 마음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놀이들을 적절한 시간과 순서대로 배치하는 것은 삶의 피로도를 줄일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정력은 절대적으로 고정된 량이 아니라 활동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그리고 활동의 적절한 전환에 따라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활동을 놀이로 바라보는가 아니면 의무로 바라보는가가 차이를 가져온다.

"피로를 불러오는 또 다른 마인드세트가 있다. 바로 우리가 과제를 어떻게 정의하는가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새로운 운동을 시작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여전히 운동으로 여긴다면 나중에 피로가 오리라는 생각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위의 책, 201면) 

 

다음으로 놀이로 변환된 활동을 어떻게 배치하는가도 차이를 가져온다.

"피로와 소모감을 경험하는 시점이 꼭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신체적 탈진은 많은 부분 선입견에 의해 결정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에너지가 언제 다 떨어질지는 우리 자신이 가진 확고한 기대에 따라 정해진다."(위의 책, 198면) 

"이미 1928년에 심리학자 아니타 카스텐Anita Karsten이 이 문제를 연구한 바 있다.(주석 2) 그녀는 처음에는 기분 좋지만 반복하다 보면 아무 느낌이 없거나 불편한 기분이 드는 상황을 만들고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녀는 피험자에게 해야 할 과제를 주되 피곤해지면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절반만 자유로운 상황을 만들었다. 피험자들은 지겹다고 느껴질 때까지 과제를 계속하도록 지시받았다. 과제는 두 종류였다. 한 가지는 그림 그리기처럼 끝이 정해져 있지 않은 일이었고 다른 한 가지는 짧은 시를 반복해서 읽기처럼 금방 끝나지만 반복되는 일이었다.

각 과제를 받은 피험자들은 지칠 때까지 과제를 계속했다. 그런 뒤, 연구자가 맥락을 바꿨다. 예를 들어, 피험자들이 그림을 그리다 지쳐서 그만두면 연구자는 그들에게 페이지를 넘겨서 좀전에 그린 마지막 그림을 얼마나 빨리 다시 그릴 수 있는지 보여달라고 했다. 그러자 이 완전히 탈진한피험자들은 새로운 맥락에서 아무 어려움 없이 그 그림을 재현했다. 또 다른 피험자는 ababab...를 질릴 때까지 쓰는 과제를 받았다. 그가 과제를 그만두었을 때는 정신적·신체적으로 탈진한 데다가 손이 얼얼해서 한 글자도 더 쓰지 못할 것 같은 상태였다. 하지만 바로 그때 연구자가 그에게 다른 일에 필요하니 이름과 주소를 적어달라고 말하자 그는 아주 쉽게 그것을 적었다. 그가 피곤한 척한 것은 아니었다. (200) 그보다는 맥락의 변화로 인해 새롭게 원기를 되찾은 것으로 보였다.

(...) 새로운 맥락에서 새로운 에너지가 생기는 현상은 대다수 사람들에게 세컨드 윈드second wind’ 현상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예는 일상생활에서 쉽게 볼 수 있다. (...) 마음챙김이 생활화된 사람은 그런 현상을 의도적으로 이용해 스스로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다. 종류가 다른 문서 업무들을 번갈아가며 한다든지 작업환경을 바꾼다든지 잠시 짬을 내어 조깅이나 전화를 하는 것이 모두 피로에 대한 마인드세트를 떨쳐냄으로써 숨어 있는 에너지를 깨우는 방법이다."(위의 책, 199-200면) 

 

그래서 놀이를 종류로 구분해서, 적절하게 전환하여 즐김으로써 새로운 활력을 얻도록 구성하는 전략을 짜는 것도 도움이 된다. 이것이 앞서 멀티태스킹과 구분하여야 한다고 지적하였던, 작업 전환의 전략이다. 

 

놀이의 적절한 배치를 위해서는, 공책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 좋다. 머릿속에 여러 과업들의 목록을 담으면 그 자체가 현재 하는 수행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리고 배치도와 같은 그림을 통해 생각해보는 것이 더 놀이의 기분이 난다. 

 

내일은 어떤 식의 놀이들을 어떤 순서로 배치할 것이며, 그 놀이에서 쓸 전략은 이번에는 어떻게 시도해볼 것인가라고 하루를 점검하는 것은, 유념하기의 기예를 실천하는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