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여회원의 글:
크리스티나 라폰트는 하버마스, 하이데거 등 대륙철학의 충실한 해설자이자 사려 깊은 비평가입니다. 기본적으로 미국의 철학 지형에서 중요한 대륙철학자들을 해설하면서, 영어권의 철학자들과 비교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라폰트의 작업은 대륙철학과 영어권 철학의 교차점과 차이점을 조망하고 각각의 철학적 작업에 관한 정확한 상을 얻는 데 도움을 줍니다.
이 논문의 공헌으로 세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 칸트적 구성주의, 그 중에서도 하버마스의 논증대화이론(Diskurstheorie)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아 ‘현실적 동의’(actual consent)와 ‘가설적 합의’(hypothetical agreement) 개념의 구조적 차이와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라폰트가 광의의 칸트적 구성주의로 명하고 있는 현대 실천철학의 경향은 바로 하버마스, 롤스, 스캔런, 조슈아 코헨 등이 취하는 접근을 말합니다. 이들은 오늘날 의무론 진영에서 도덕철학, 정치철학, 법철학을 논함에 있어 대표적인 논증대화적 해명과 중요한 개념적 자원들을 풍부하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라폰트는 대체로 계약주의와 논증대화이론 진영에 속하는 이 이론적 조류의 내부적 차이를 현실적 동의와 가설적 합의라는 두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봅니다. 라폰트가 보기에 롤스, 스캔런의 경우에는 가설적 합의의 위상이 현실적 동의보다 높게 설정됩니다. 즉 민주적 의사결정을 논할 때 시민들이 현실적으로 동의했는지 여부보다는 그 결정을 정당화하는 이유의 합당성과 건전성을 보다 중시한다는 것입니다. “가설적 합의 개념의 핵심 요소는 분명히 동의 행위(the act of consenting)가 아니라, 문제된 규범의 정당성에 관한 판단상 합의(agreement in judgment)로 모두를 이끌 수 있는 이유[근거]의 건전성이다. 이런 점에서 규범에 “합의할 수 있다”(could be agreed to)는 주장은 누구든지 합당한 인간이라면 지지하지 않을 요소가 없다는 뜻이다.”(p. 278)
그런데 라폰트는 적어도 민주적 의사결정에서는 가설적 합의만으로 정치적 결정이 정당하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정치적 결정이 (투표 같은) 민주적 절차를 통한 시민들의 현실적(actual) 동의를 전혀 요하지 않는(at no point) 정치제도는 민주적 정치체제로 간주할 수 없다는 점도 마찬가지로 명백하다.”(p. 279) 그가 보기에 가설적 합의와 함께 현실적 동의에 관한 통합적 해명이 없다면, 구성주의적 민주주의론의 설득력은 떨어질 것입니다.
둘째, 하버마스 논증대화이론이 합의와 동의의 문제에서 갖는 강점과 약점을 분석합니다. 라폰트는 칸트 법철학에 내재한 합의와 동의의 단초를 살펴본 후, 칸트적 구성주의가 이론적 기원으로 삼는 칸트의 경우 가설적 합의와 현실적 동의 개념이 모두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법규범의 두 가지 타당성 차원과 긴밀한 연관이 있습니다. 즉 법규범의 첫 번째 타당성 차원은 확실히 그 법규범을 정당화하는 이유가 합리적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그러나 칸트 법철학에서는 법규범의 두 번째 타당성 차원도 찾을 수 있습니다. 즉 법규범이 실질적으로 정당하든 그렇지 않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동의했다면 그와 독립적인 타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라폰트는 이 두 가지 타당성 차원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모범이 될 만한 이론으로 하버마스의 논증대화이론을 듭니다. 하버마스가 『사실성과 타당성』에서 제안한 유명한 세 가지 원리를 분석하면서, 라폰트는 도덕원리 U(보편화원리)를 가설적 합의 및 실질적 정당성의 규준으로, 민주주의 원리 L을 현실적 동의 및 민주적 정당성의 규준으로 일별합니다. 두 원리는 순수하게 절차적이며 더 일반화된 형태인 논증대화원리 D를 구체화한 것이므로, 적어도 체계상으로는 논증대화원리에서 가설적 합의와 현실적 동의, 그리고 실질적 정당성과 민주적 정당성의 두 차원을 모두 포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논증대화이론 역시 명료화되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논증대화적 합의, 즉 이상적 의사소통의 조건(참여자 간의 대칭성, 동등한 참여 기회, 강제와 기만의 부재, 비판에 대한 개방)하에서의 합의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두고 이견이 있습니다. 세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버마스가 『진리와 정당화』에서 선호하는 구성주의적 해석(constructivist interpretation)에 따르면, 논증대화적 합의 그 자체가 규범의 타당성의 충분조건이 됩니다. 즉 논증대화적 합의를 통해 정당한 규범이 창설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라폰트에 따르면 구성주의적 해석은 불합리한 점이 있습니다. 이처럼 논증대화원리의 한 축인 도덕원리를 구성주의적으로 해석할 때, 다른 축인 민주주의 원리는 현대 다원주의 사회의 불가피한 조건인, 합당한 불일치와 양립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논증대화적 합의 개념에 따르면, 민주주의 원리는 반드시 시민의 만장일치 합의를 요구하는데, 이는 합당한 불일치의 조건에서는 결코 실현 불가능한 요구이기 때문입니다. 이 해석하에서 민주주의 원리의 구출은, 민주주의 원리를 가설적 합의에 호소하는 것으로 좁혀서 해석하는 길밖에 없으며, 이는 민주주의 원리가 시민들의 현실적 동의를 살려내는 축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자멸적입니다.
라폰트는 이보다도 설득력 없어 보이는 반실재론적 해석(antirealist interpretation)을 거쳐 비환원주의적 해석(non-reductive interpretation)을 지지합니다. 이제 도덕원리에서 논증대화적 합의는 도덕적 정당성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증거가 될 뿐입니다. 라폰트는 규범의 실질적 정당성은 그 규범이 모든 당사자의 평등한 이해관계에 들어맞는지에 달려 있다고 하여, 논증대화적 합의의 달성과 실질적 정당성의 기준을 분리합니다. 이 틀로 보면 논증대화적 합의는 어떤 규범이 정당한지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인식적(epistemic) 의미가 있고, 논증대화적 심의 조건하에서 시민들이 도달한 현실적 동의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승낙한다는 점에서 의지적(volitive)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비환원주의적 해석을 취할 때 논증대화이론은 민주주의론, 특히 심의민주주의 이론에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종국적으로 심의민주주의에서 다수결 결정의 이론적, 제도적 역할을 명료하게 만들어줍니다. 즉 심의 후 다수결(postdeliberative majority decision)이 왜 요구되는지를 설명해줍니다. 논증대화적 조건하에서 심의를 거치더라도 다수와 소수가 발생하기 마련인데, 이때 다수결(국민투표든 선거든)은 심의의 ‘쉼표’를 찍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이 마침표가 아닌 쉼표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소수가 특정 시기 특정 결정을 지지하는 설득력 있는 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장래에 보다 설득력 있는 논거를 갖출 경우 다수의 선행 합의를 약화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주어진 한정된 시간에 발휘되는 보다 나은 논거의 힘(the force of better argument)을, 심의 후 다수결이 보다 잘 반영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소수 역시 그 결정에 자발적으로 승낙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식으로 ‘심의 경합성’(deliberative constetability)의 약정은 실질적 정당성과 민주적 정당성 중 어느 하나를 환원하거나 희생하지 않는 심의민주주의 이론 구성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저는 라폰트의 이러한 제안이 치밀하고 흥미롭다고 보지만, 그의 제안이 하버마스, 롤스, 스캔런 등의 논자들과 정치·법 실무에서 달라지는 지점을 더 명확히 짚어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예를 들어 가설적 합의를 중시하는 쪽과 현실적 동의를 중시하는 쪽, 양자를 균형 있게 고려하는 쪽이 특정 법을 입법부에서 제정할 때와 헌법재판소나 연방대법원에서 위헌 결정 내릴 때 각각 어떤 식으로 설명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한 방법입니다. 특히 하버마스는 『사실성과 타당성』에서 그 자신의 심의민주주의 이론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논증대화이론에 입각하여 헌법재판소의 논증 구조와 제도적 역할을 탐구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점을 간과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확실히 헌법재판소는 선출된 대표들인 입법부보다 논증대화를 통해 자신의 결정을 정당화해야 한다는 부담과 요구가 훨씬 더 강하게 작용하는 듯합니다(이민열(2017), 「가치와 규범의 구별과 기본권 문제의 해결」, 『법철학연구』 제20권, 제3호, 한국법철학회, p. 142). 이 점이 옳다면, 헌법재판소 결정의 정당화 원리와 구조는 시민들의 현실적 동의의 측면보다는 논증대화적 조건하에서의 가설적 합의의 측면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적합할 수도 있습니다.
더불어 라폰트가 제안하는 비환원주의적 해석에서 가정하듯이 규범이 정당성 조건이 모든 당사자의 평등한 이해관계에 들어맞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은 논의를 요합니다. 이 이해관계가 하버마스가 지적한 것처럼 특정 당사자가 1인칭 시점에서 특권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소여’와 같은 것이라면(Jürgen Habermas(1999, 2004), Wahrheit und Rechtfertigung. Philosophische Aufsätze, 윤형식 역(2008), 『진리와 정당화』, 파주: 나남출판, p. 417), 이것을 복수 주체들의 근본 지위와 관계를 설정하는 규범적 논증대화에 어떤 형태의 논거로 제시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기껏해야 규범-가치 구별에서 가치 논거로 제시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면, 이는 규범적 논증대화에서는 이유제공력을 갖기 어렵습니다. 반면 평등한 이해관계를 논증의 출발점이 아닌 도착점에서 형성되는 것으로 본다면, 아마도 그것은 자유롭고 평등한 의사소통 주체들이 규범적 논증대화를 거쳐 합당하게 거부할 수 없는 것으로 설정된 근본 지위와 관계와 크게 다를 바 없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