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어는 20세기 중반 영국 철학계를 풍미했던 논리 실증주의의 거두입니다. 비록 에이어는 말년에 자신의 주저에서 틀린 점이 무엇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거의 전부'라고 답하긴 했지만, 에이어가 논리실증주의의 신조를 정확하게 표현함으로써 이후 철학의 발전에 체계적인 거름이 되었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듭니다.
에이어의 이 논문은, 에이어가 논리실증주의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범했던 오류와 무관한 독립적인 주제에 관한 것으로, 자유의지와 관련하여 읽어보아야 할 기본 문헌 중 하나입니다.
에이어는 이 논문에서 결정론의 논리적 함의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인간은 운명의 포로이며 결코 거기서 벗어날 수 없어어 운명의 힘에 장악되어 있다는 것)이 실제로는 활물론적 사고의 오류에서 비롯된 은유적 연상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즉 결정론에서 말하는 '자유가 없다'는 것은, 초기 사정과 자연법칙이 결합하여 일어날 일은 일어날 것이라는 동어반복에 불과하며, 이러한 동어반복에서는 인간 사회에서 실천적으로 관심 있어 하는 자유의지 문제에 대하여 무엇인가 실질적인 것은 아무것도 끌어낼 수 없다고 합니다.
에이어는 자유롭다는 것은 제약 하에서 행동하고 있지 않다는 것에 불과하며, 설사 과거의 상태와 자연법칙의 결합에 의해 미래의 상태가 결정되어 있다 하더라도, 인간 사회에서 말하는 자유롭다는 의미의 명제는 훼손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실 이 글에서 에이어는 분석적 작업을 통해서 사람들이 흔히 혼융해서 하는 사고를 분리시키는 치료적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 사회에서 책임과 밀접하게 연관된 자유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되묻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에이어의 이 글이 자유의지의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어떤 명제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에이어는 한 가지 가능성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그 가능성이란, 결정론에서 없다고 함축되는 그런 의미에서의 자유의지는, 인간 사회에서 문제되는 책임과 밀접한 연관 있는 자유의지가 아닐 가능성 말입니다. 다만 그 가능성이 단지 논리적 가능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규범적인 타다성이 있는 가능성이 되려면 별도의 적극적 작업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동의 동자와 같이, 스스로는 다른 것의 원인이 되면서도 다른 아무것에 의해서는 필요충분적으로 야기되지 아니하는 자유의지와 같은 모종의 실체가 있어야만, 인간 사회에서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있다는 사고에 메워지지 않은 논리적인 간극이 있음은 훌륭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자기기원적인 책임창출 원천으로서 부동의 동자가 있어야만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있다는 명제는 분명히, 아주 강한 명제이며 그것 자체가 한낱 논리적 분석에 의해 타당성이 보증되는 형이상학적 주장이 아니라 분명히 규범적인 논의 차원에서 논증되어야 하는 규범적 논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만일 사람이 도덕적 의무가 있으려면, 도덕적 의무를 새겨놓은 도덕입자가 물리적 실체로서 우주에 발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이 그저 한낱 의미론적이거나 논리적이거나 존재의 근원적 형식에 관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인간의 도덕적 의무와, 서로 간의 타당한 관계가 우연히 물리적 우주에 그것을 새겨 놓은 도덕 입자가 있는지 없는지에 완전히 좌우된다는 적극적인 규범적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적극적인 규범적 주장은 그저 단언될 수 없고 그만한 주장내용에 어울리는 논거로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딘가에 무고한 아기를 고문해서는 안 된다고 새겨진 물리적 입자가 없다는 것이 무고한 아기를 고문하는 것과 고문을 하지 않는 것 아이에 아무런 도덕적 차이가 없다는 결론을 함축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독단입니다.
마찬가지로 에이어의 논문은, 세상에서 인간의 정신의 적어도 중요한 일부만큼은 물리적 인과법칙에 적용되지 않아야 도덕적 책임을 지울 수 있다는 명제가, 위의 도덕입자론만큼이나 스스로 타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까지 넘어서 주장하려는 큰 내용을 담고 있는 명제임을 보여줍니다.
만일 그 규범적 명제가 규범적 근거를 갖고 타당하게 논증되지 않는다면, 결정론이 도덕적 책임의 기초 부인으로 곧장 이어지지 않는다는 에이어의 기본 논지는 타당합니다. 사람들은 에이어의 논지가 단지 결정론과 상관없이 성립하는 또 다른 평면의 '자유'의 의미를 확인한 것에 불과하다고 답답해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답답해 하는 사람은, 도덕입자가 있어야 아기 고문이 그르다는 주장을 하는 것만큼이나, 보증되지 않은 전제를 암묵적으로 깔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