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로 이루어진 시리즈에서 이 글인 1부는 논제1을 논증한다. -
1. 자유 개념의 권력 개념에 대한 선재성(Priority of liberty concept to power concept)
규범학에서 권력 개념은 자유 개념을 필수적으로 참조하는 개념이다.(결론으로서 선재성 논제)(Priority Thesis as Conclusion: The concept of power necessarily refers to the concept of liberty)
그리고 규범학에서 권력 개념이 자유 개념을 필수적으로 참조해야 하는 이유는 규범학에서 유의미한 개념으로서 권력은 그 부당한 행사의 위험에 대응하는 사회 질서의 수립의 검토를 촉구하는 기능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기능 논제)(Function Thesis: The concept of power which has significance in normative study should perform the role to urge examination of establishment of social arrangements to safeguard against dangers of illegitimate exercise of power) 다시 말해 규범학에서 관심을 가질 만한 권력 개념은 그 개념에 포섭되는 대상에 대응하는 기본권보호의무의 이행(fulfillment of duty to protect basic rights)이나 적정절차의 수립(establishment of due process)을 촉구하는 기능을 수행해야만 한다.
그런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권력 개념은 다음 두 가지 두 가지 구분을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 첫째는 구성원들이 각자가 누구나 평등하게 갖는 양립가능한 통제력(equal and compatible control)과 구성원들 중 일부만이 다른 일부에게 대하여 특수하게 갖는 통제력(special control) 사이의 구분이다. 둘째는 이런 특수한 통제력이, 누구나 평등하게 갖는 양립가능한 통제력의 체계를 강화·유지·복구하도록 행사되는 방식과 그러한 통제력의 체계를 약화·퇴락·저지하도록 행사되는 방식 사이의 구분이다.(To perform the above role, the concept of power should involve two distinctions, first of which is between equal and compatible control and special control, and second of which is between the ways special control can be exercised) 이 구분이 없다면 구성원들은 다기한 방식으로 다기한 작용을 서로에게 미친다는 점을 관찰하고 패턴화할 수 있을 뿐이며, 이러한 한낱 패턴의 확인만으로는 아무런 규범적으로 의의 있는 결론을 끌어내지 못한다.
이러한 두 논제는 권력 개념에 대한 자유 개념의 선재성을 지지한다. 즉 권력 개념이 자유 개념을 참조하여 정의되어야지, 자유 개념이 권력 개념을 참조하여 정의될 수는 없다. 후자의 방식은 암암리에 제대로 논증되어 옹호되지 않는 자유 개념을 도입하게 된다. 그러한 은밀한 도입은 반권력(anti-power)에 관한 수사(즉 권력에 저항하고 반대하는 입지를 수사적으로 선취함으로써 자신들이 하는 일은 모두 자유를 위한 것이라는 결론을 논증 없이 얻으려고 하는 수사)를 통해 오히려 자유를 침식하고 부당한 권력 행사의 길을 열어주는 언어의 장을 활짝 열어젖히게 된다. 따라서 권력 개념에 대한 자유 개념의 선재성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것은, 정말로 권력의 위험에 대항하는 방비책을 두고자 하는 시도와 권력의 위험에 대항한다고 주장하면서 실은 제어되지 않은 권력을 도입하는 부당한 시도를 체계적으로 가려낼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실천적 함의를 갖는다.
2. 규범학에서 의의 있는 권력 개념
기능 논제를 귀류법으로 논증하여보자. 즉 규범적 주장에서 사용되는 권력 개념에 의거하여 어떤 것이 권력으로 포섭된다는 점이, 당과 부당의 질서에 관하여 어떠한 특별한 방향의 함의도 갖지 않을 수 있다고 가정하여 보자. 그럴 경우 규범학의 논의는 권력 개념을 경유하여 이루어질 필요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그 개념을 써봤자 당과 부당을 법의 질서로 번역하는 과정에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idle) 비활성(inert)의 관념이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권력은 규범적 추론에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Power does not matter at all in normative reasoning) 다시 말해 규범학의 목적에 기능 논제에서 언급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권력 개념은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게 된다.
여기서 규범학에 기여하는 바가 전혀 없다는 말은 도구적인 주의 기능조차도 수행하지 않으며, 그 개념을 기준으로 하여 어떻게 분류되든 간에 그 결론은 아무런 규범적 함의를 가지 않는다는 그야말로 전적으로 순수규범적 작용력이 제로라는 말이다. 여기서 순수규범적 작용력이란, 타당한 규범명제를 파악하는데 유관한 인식적 이유들만 오롯이 고려하고자 하는 사람이 주목하여야 하는 이유로서의 힘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권력이라는 명칭을 어디에 붙이는가라는 수사적 전략이 현실적 작용력을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규범 명제의 타당성과는 무관하며 그래서 순수규범적 작용력은 없다. 우리는 이를테면 수범자의 눈색깔에 따라 수범자를 분류할 수도 있다. 그리고 전적으로 자의적인 특성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자기가 속한 집단과 동일시를 한다는 여러 사회심리학 연구 결과들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수범자의 눈색깔은 규범학에서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는 범주이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 그렇게 눈색깔에 따라 수범자를 분류할 필요가 없고 설사 그런 분류를 논의한다 하더라도 종국적으로 규범적 결론에는 아무런 유의미한 차이가 도출되지 않는다.
만일 규범학에서 권력이 눈색깔과 같은 지위를 차지한다면 그런 의미에서의 권력에 따라 사태를 파악하여도 아무런 유의미한 결론에서의 차이도 낳지 못할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권력 개념을 경유하여 어떤 차이를 보이려는 논의는 마치 눈색깔에 의해 유의미한 차이를 도출하려는 논의와 마찬가지로 틀린 것이 될 것이다. 틀린 추론을 규범학에 도입하는 것은 잘못이다.
따라서 규범학에서 권력 개념이 아무런 특별한 방향의 함의도 갖지 않는다면, 오로지 두 가지 가능한 결과만 있을 뿐이다. 첫째는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는 무의미한 언급이요, 둘째는 틀린 추론이다. 무의미한 언급이나 틀린 추론을 규범학에 포함시키는 것은 부당하다. 틀린 추론을 포함시키는 것은 당연히 부당하겠지만 무의미한 언급을 포함시키는 것까지 부당한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순수규범적으로는 작용력이 없고 비활성의 언급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오도하는 효과(misleading effect)는 가질 수 있따. 특히 일상 용어에서 권력이라는 것은 부당하고 없애야 한다는 규범적인 뉘앙스가 들어 있기 때문에, 만일 순구규범적으로 비활성의 권력 개념을 함부로 포함시키게 되면 바로 그렇게 특정된 권력을 제거하거나 줄이는 것이 반권력적 작업으로서 정당하다는 자동적 함의가 도출된다고 사람들은 잘못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런 타당한 논증적 작용을 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오도하는 효과만을 갖는 권력 개념을 규범적 논증에서 언급하는 것은 잘못이다.
따라서 규범적 논증에 기여하지 않는 중립적인 권력 개념이 규범학에서 설 자리가 있다는 주장은, 어느 경우에나 인식적 이유만을 오롯이 고려해야 한다는 의무를 위반하게 만드는 권력 개념을 진지하게 언급하게끔 한다. 결론적으로 만일 규범학에서 어떤 의의가 있는 권력 개념이 있다면, 그것 일정방향으로의 규범 질서 수립 촉구 기능을 수행해야 적합하다.
3. 다른 지적 작업의 맥락에서 언급되는 권력 개념의 과소 포함과 과대 포함 문제
그렇다면 인류학, 사회학, 정치학과 같은 다른 학문 분과에서 여러 학자들이 제시한 권력 개념을 최종적 토대로 삼고 규범학의 작업을 정초하려고 하는 것은 시작부터 가망이 없는 시도(non-starter)다. 왜냐하면 그러한 학문에서는 규범적인 쟁점과 사실적인 쟁점이 혼재되어 있어, 규범적 함의를 엄밀하게 도출하는 작업을 망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런 다른 학문 분과에서 쓰이는 권력 개념은 철저히 실증적이고자 하는 의도로 설정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실증 연구자가 배경으로 깔고 있는 일련의 규범적 관심 때문에 설정되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리고 실제로 실증학문의 연구자들은 자신의 연구 결과가 어떤 규범적 함의를 갖기를 바란다. 그런데 그런 학문에서 쓰는 권력 개념이 철저히 규범학의 차원에서 엄밀하게 정립되고 난 이후에 쓰이지 않았다면, 규범학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하는 힘을 과소포함할 수도 있고 과대포함할 수도 있다.
한편으로, 만일 사용된 권력 개념이 과소포함하는 면이 있다면, 그 면에서 그 권력 개념은 규범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힘을 완전히 놓치게 된다. 사태를 과소포함하는 권력 개념의 예를 하나 들어보자. 어떤 권력 개념이 실정적으로 합법적으로 취급되는 힘은 권력이 아니고 법적 권위에 불과한 것이라고 분류한다고 해보자. 이러한 경우에 실정적으로 합법적으로 취급되는(다시 말해 그 사회에서 다수 구성원들이 또는 대부분의 공직자들이 심리적으로 승인하는 이차규칙 자체에 부합하거나 그런 이차규칙을 준수하여 제정된 일차규칙에 의해 인정되는) 권력만을 행사하는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권력의 보유 측면에서 일반 국민과 다를 바가 전혀 없게 된다. 그럴 경우 일부 구성원들의 법적 지위를 입법부가 이등 시민의 지위로 격하시키고, 헌법재판소가 이에 대하여 합헌 결정을 하더라도 여기에는 아무런 권력 행사가 없기 때문에 규범학은 적어도 권력 개념을 매개로는 아무런 이의를 제기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과소포함의 사례다. 분명히 여기에는 부당한 권력의 남용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만일 권력 개념이 과대포함하는 면이 있다면, 규범적으로 아무런 촉구 작업을 갖지 않은 중립적인 성질을 갖는 현상에서, 규범적으로 함의를 갖는 결론을 끌어내는 억지를 부리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인 인간적 매력의 보유로 인해 생기는 작용력 자체를 권력이라고 정의한다고 해보자. 그럴 경우에 그 매력의 보유자가, 자신의 매력에 끌린 다른 이와과 교유하지 않는 것은 권력 행사로 정의될 것이다. 그런데 이 정의가 규범학에서 아무런 비판 없이 토대적으로 수용된다고 해보자. 그럴 경우 권력 행사가 규범학에서 권력을 제어하는 작용력을 가져야 한다는 논제1의 고리를 거쳐 규범학의 차원으로 옮겨지게 될 것이다. 이는 매력 그 자체를 뜻하는 권력 행사에 대한 적정절차의 통제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함의를 낳게 된다. 다시 말해 이를테면 어떤 매력적인 사람이 자신의 연인을 선택하는 데, 또는 자신과 연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을 거절하는 데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간섭이 요구된다는 함의가 도출된다. 매력적인 사람은 자신과 연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을 공적 원칙에 부합하는 이유가 아닌 한 거절해서는 안 되며, 그것을 공적으로 인정받는 가치론의 언어로 정당화해야만 자신의 선택의 합법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또는 매력적인 사람은 자신의 매력을 가꾸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더 발본적인 규제를 도입할 수도 있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곧 국가가 매력적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어떤 형식으로 구분하고 전자에게는 후자보다 더 축소된 자유권만을 부여해야 한다거나,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주어지고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도 않는 자신의 매력을 가꾸는 활동을 처음부터 외적 제재로써 억제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러한 결과는 터무니없다. 부당한 질서를 제어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이루어진 권력 개념의 내부 이전(import)이 오히려 부당한 질서 수립을 촉구하는 결론을 낳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애초에 정의된 바의 권력 개념을 받아들이면 함의되는 바이다. 그 권력 개념을 받아들이면 그런 규제는 식별되는 특권을 잘라내어 매력의 우위가 작용하지 못하게 하는 정당한 조치가 되어버린다. 즉 성적인 매력이나 인격적인 매력이 규범적 함의를 갖는 권력 개념으로 제대로 정의된 한, 그 사람들의 교유의 자유나 매력의 신장을 축소시키는 입법적 조치는 부당하고 불평등한 자유의 박탈이 아니라, 오히려 특권층의 공공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 자의적 권력 남용을 막기 위한 적정한 조치가 된다. 이것이 바로 과대포함의 문제다. 실제로는 규범적으로 진지한 의미에서 권력 현상이 아니고 단지 인간의 세계에서 이러저러한 여러 양태의 우위(adavantage)에 불과한 것을 권력 개념으로 포섭함으로써 결국에는 부당한 자유 제한을 낳으면서도 이를 반권력의 정당한 개혁 작업으로 보게 한 것이다.
기술적 학문이 권력으로 정의한 것을, 규범학 독자적인 검토 없이, 간단히 규범적으로 대응해야 할 사태로 이전시킴에 따라 이와 같이 양면으로 터무니없는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규범학에서 권력 개념은 철저히 규범학적 사유 속에서 규범학의 근거를 갖고 먼저 확립되어야 한다. 그러한 순수규범학적 논증의 결과로 확립된 권력 개념을 바탕으로 해서만 규범학 자신의 주제 속에서, 자신이 스스로 정의한 권력 개념에 관한 경험적인 자료로서, 다른 사회과학의 연구 결과를 유용하게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2부에 계속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