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eedom and Resentment and Other Essays에 실린 P. F. Strawson 의 "Freedom and Resentment"의 번역입니다.
이 논문은 자유의지의 문제에 있어서나 도덕적 당위의 문제에 있어서나 중대한 전환을 가져온 논문입니다.
이 논문에서 스트로슨은 '결정론이 참이라고 한다면 처벌이나 도덕적 비난 같은 인간 실천 내지는 관행에 어떤 함의가 생기게 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질문에 대해 낙관적으로 답하는 이와 비관적으로 답하는 이가 있는데, 이를 각각 낙관주의자와 비관주의자라고 칭합니다.
낙관주의자는 결정론이 참이라고 한다 하여도 처벌이나 도덕적 비난 같은 관행은 그것이 바람직한 방식으로 인간의 행위를 규제하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계속 그렇게 할 수 있으며, 그래서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비관주의자는 결정론이 참이라면 어느 누구도 자신의 행위에 도덕적 책임이 없게 되어 처벌이나 도덕적 비난 같은 관행은 그 정당성을 잃게 되며 따라서 완전한 규범적 아노미 상태에 빠질 것이라고 봅니다. 만일 결정론이 참이라면 그런 아노미 상태가 함축되리라고 생각하는 이들을 자유의지론자라고 합니다.
스트로슨은 이 둘 다 틀렸다고 합니다.
스트로슨은 그 점을 보여주기 위하여 예비적 작업으로, 우리가 법이나 도덕에서 책임이 없다고 하는 사안이 두 가지가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첫 번째는 행위자 자체는 책임 있는 존재이지만 행위자가 문제가 되는 구체적인 행위를 그 행위자에게 온전한 책임을 귀속시키지 않게 하는 사정-이를테면 강요되었다거나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 있었다거나 하는 사정-이 있는 경우입니다. 두 번째는 정신착락이나 아주 어린 아동과 같이 행위자 자체가 온전한 책임을 질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존재라고 여길 사정이 있는 경우입니다.
스트로슨은 이런 경우 이외의 통상적인 경우에는 인간에게는 반응적 태도, 즉 분개나 의분 같은 반응적 태도가 서로 상호작용하는 인간의 세계에서는 불가결하고 본질적이라고 합니다. 이 중 분개와 같은 태도를 개인적 반응적 태도, 즉 자신이 어떤 잘못을 당했을 때 그 가해자에게 보여주는 태도와, 의분과 같은 태도를 피해를 입은 사람을 대신하여 또는 그 사람을 위하여 가해를 가한 사람에게 보여주는 태도인 비개인적 또는 대리적 반응적 태도라 합니다.
예비적 작업으로 살펴보았던 두 사안은 그와 같은 반응적 태도를 중지시키거나 아니면 완화시킬 사정들이 있는 사안임을 스트로슨은 지적합니다.
그러고 나서, 결정론이 참이 될 경우에 바로 그런 사정들이 있다는 뜻에서, 모든 행위자들이 책임을 질 수 없는 존재가 되는가라고 묻습니다. 그에 대한 답은 '아니요'입니다.
스트로슨은 비관주의자가 이 둘(결정론의 의미에서 '결정되어 있음'과 결부된 책임과 위와 같은 전형적인 중지나 감경의 사정)을 혼동했다는 점에서 틀렸다고 합니다. 또한 낙관주의자는 애초에 반응적 태도에 기초한 관행이 효과적인 이유가, 그 반응적 태도를 초연한 자세로 바라보지 않고 인간이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서 서로에게 요구를 하고 그 요구를 수용하는 관계 속에 살아가는 데 있음을 망각했다는 점에서 틀렸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스트로슨의 논의는 논의의 쟁점을 새롭게 발굴합니다.
첫째, 자유의지의 문제에 있어서, (1) 결정론(또는 그와 비슷한 근본적 무작위론)이 참일 경우에 우리의 규범적 관행이나 실천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긴다는 논제를 지지하기 위해서는, 결정론의 참이 우리의 반응적 태도를 중지시키거나 완화하는 바로 그와 같은 전형적인 두 사안과 등가라는 점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 (2) 복리의 최대화를 계산하는 초연한 입장에서 어떤 규범적 관행을 규범적으로 승인할 수는 없다는 것.
둘째, 도덕적 당위의 문제에 있어서, 도덕적 요구의 발령과 수령은, 반응적 태도를 가능케 하는 도덕적 권위에 관한 전제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도덕적 요구는 그저 어떤 공리를 최대화한다면서 사회공리함수에 대하여 정당화되면 족한 행위가 아니라, 바로 그 도덕적 요구를 받는 상대방이 그 요구가 타당함에도 불구하고 그 요구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분개나 의분이 될 대상이자 그런 태도를 받을 적합한 관계에 있다는 전제에 선다는 것입니다. 이 함의를 보다 발전시킨 학자가 스티븐 다월(Stehphen Darwall)이며, 인간의 도덕적 삶은 모든 인간의 동등한 도덕적 권위의 인정이라는 전제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이인칭 관점에 관한 논의를 통해 그는 밝힌 바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예주는 자신의 변덕스러운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노예에게 자신이 지금 가하는 고문을 잠자코 받으라는 요구를 도덕적인 뜻에서 결코 할 수 없으며, 그 요구는 기껏해야 자신이 고지한 대로 하지 않으면 더욱 가혹한 힘이 가해질 것이라는 사실적인 기대에 관한 사정을 알려주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노예주의 경우가 아니라 국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국가가 어떤 규범을 발령하면서 그것을 모든 구성원들의 동등한 도덕적 권위, 그리하여 어떤 국가행위의 작용을 받는 그 개인이 적합하게 반응적 태도를 보여줄 수 있는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그저 다수의 이익을 논거로 관철한다면, 그 국가는 조금도 진지한 의미의 규범을 발령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단지 사실적으로 관찰되는 어떤 힘의 패턴을 창출하고 부과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해당 논문을 그저 '인간은 반응적 태도를 보여주면서 살 수 밖에 없다'라는 식의 관찰에 관한 논문으로 폄하하고 잘못 읽는 경우가 흔합니다. 그런 이차 문헌들의 곡해를 피하기 위해서는 이 논문을 직접 꼼꼼히 읽어보는 수밖에 없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