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번역한 매슈 헨리 크레이머의 <법은 객관적인가>(원저: Objectivity and the Rule of Law)가 출간되었습니다.
다음은 옮긴이 해제 중 일부입니다.
"‘법이 객관적이다’라는 명제를 거부하고 ‘법은 주관적이다’라는 명제를 채택하려는 유혹은 도처에 있다. 어떤 특정 차원에서 법이 완전히 객관적이지는 않다는 관찰로부터, 법은 전면적으로 주관적이라는 결론을 끌어내기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추론 과정을 통해 특정 차원 또는 전체 차원에서 법의 주관성을 믿는 사람은 입법과 해석에 있어서 특정한 태도를 취하는 경향성을 갖는다. 입법에 있어서는 목적과 수단이 법체계의 작동과 기능을 구조 그리고 정치도덕적 권위에 어떤 해를 끼치는지를 생각하지 않게 된다. 그런 사람 중 일부는 법관이 말하는 것이 곧 법이라는 냉소적인 법현실주의에 빠져 법해석에서는 논증대화의 전제가 성립될 수 없다고 포기하는 위험에 빠진다. 다른 일부는 그저 여론
을 동원하거나 언어를 수사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원하는 결과를 법관이 말하게 하는 데 집중하는 태도를 취하는 위험에 빠진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법의 지배, 즉 법치주의를 훼손하는 위협을 구성한다. 그러나 정말로 법이 주관적이라면, 법치주의를 말하거나 법의 지배의 훼손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전제 위의 헛소리가 될 것이다.
20세기 중후반 이후 ‘객관성의 붕괴’를 선언하거나 전제한 주장이 꽤나 영향력을 행사했거나 행사하고 있다. 비판법학은 법은 궁극적으로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는 입장에서 법의 객관성과 도덕적 정당성 모두를 해체하는 주장을 펼쳤다. 포스트모더니즘과 언어적 전회를 기반으로 한 규범 회의주의는 규범 명제의 진리치를 인식할 수 없다는 주장 또는 그러한 진리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실재론적 입장을 확산시켰다. 또한 어떤 철학자는 법에 관하여 다수의 사람들이 어떻게 의견이 수렴하는가만 중요하고 무엇이 법의 내용인가에 관한 객관적인 논증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입장은 법의 도덕적 권위의 기반을 무너뜨린다. 이는 단지 철학자들만의 관심거리가 아니다. 이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 없다면 결국 법의 제정, 집행, 해석은 객관성의 제약은 없이 그저 그때그때 각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목적과 이익에 종속적으로 이루어져도 무방하다는 허가가 나오는 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법은 객관적인가Objectivity and the Rule of Law》는 20세기 후반 이후 심화되어 온 두 가지 철학적 흐름— 객관성에 대한 회의주의의 확산과 법적 권위에 대한 규범적 해명의 요구— 에 대한 응답으로 기획된 저작이다. 이 책은 법실증주의 내부에서 규범실재론과 객관주의를 철학적으로 정초하고자 하는 체계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크레이머는 객관성이 존재론적·인식론적·의미론적 차원에서 해석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점을 철학적으로 방어한다. 이를 통해 규범의 객관적 존재 조건과 판단 가능성을 부인하거나 축소하여 법의 제정, 집행, 해석에 참여하는 이들의 자율성 더 나아가 자의에 의존하여 법의 지배를 훼손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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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임브리지 철학과 법학 입문서》 시리즈의 한 권으로 출판된 이 책은 〈객관성의 차원들〉, 〈법의 지배의 요소〉, 〈객관성과 법의 도덕적 권위〉라는 3개 장으로 구성되어, 객관성이라는 복합적 개념을 여섯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분석의 명쾌한 기반을 닦았습니다. 객관성의 차원과 법의 지배의 연관성, 자유민주주의 전통에 뿌리를 둔 도덕적ㆍ정치적 이상인 법의 지배와의 연관성을 다루고, 이를 통해 법규범의 존재와 작동이 객관적이며 실재한다는 변호와 함께 어떤 조건에서 그럴 수 있는가를 해명합니다. 한국어판에는 책에 등장하는 여러 개념과 논리적 이해가 수월할 수 있도록 돕고자 앞쪽에 상당한 분량의 〈옮긴이 해제〉가 실렸습니다.
저자 매슈 헨리 크레이머Matthew H. Kramer는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태어나 미들버러 고등학교, 코넬 대학교(철학)를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교(법학박사)와 케임브리지 대학교(철학박사 및 법학박사)에서 수학했습니다. 그는 현재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법률 및 정치철학 교수이자 케임브리지 처칠 칼리지의 펠로우입니다. 그는 메타윤리, 규범윤리, 법철학 및 정치철학 분야에 다작을 하면서도 수준 높은 글을 쓰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구겐하임 재단 펠로십(2001), 레버훌름 트러스트 주요 연구 펠로십(2005) 등 여러 주요 연구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크레이머는 이처럼 법학과 철학 분야에서 쌓은 대가로서의 솜씨를 십분 발휘하여, 법의 객관성이 가하는 제약을 구체화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틀을 대가만이 할 수 있는 매우 명쾌한 설명을 통해 제시합니다. 그 덕분에 이 책은 《하버드 로 리뷰Harvard Law Review》의 서평에서 “이 책의 주요 독자는 철학, 법학, 정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지만, 크레이머 교수의 명료한 산문은 법과 객관성의 관계를 더 온전히 이해하고자 하는 법률가와 학자들에게도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듯, 교육적 가치와 학술·실무적 가치를 동시에 가지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