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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자료/외국문헌소개

[요약번역] 데이비드 베너타, "반출생주의에 대한 이러한 추가비판들이 실패하는 이유"

by 시민교육 2026. 10. 9.

데이비드베너타_반출생주의에대한이러한추가비판들이실패하는이유.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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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논문 내용에 대한 소개 및 요약: 
이 논문은 베너타(David Benatar)의 반출생주의와 삶의 의미에 관한 견해를 비판한 특집호의 일곱 논문에 대한 답변이다. 베너타는 모든 비판을 하나의 논증으로 처리하지 않고, 비대칭 논제, 삶의 질, 우주적 무의미, 출산의 의미, 개인적·비개인적 이유, 친죽음주의, 위험 논증이라는 서로 다른 쟁점을 각각 분리하여 대응한다. 논문 전체를 관통하는 베너타의 대응 전략은 비판자들이 자신의 실제 주장보다 강하거나 다른 명제를 자신에게 귀속시키거나, 반출생주의 그 자체의 함축과 다른 전제를 결합했을 때의 함축을 혼동하거나, 출산을 정당화하는 데 요구되는 해악과 위험의 기준을 (평행하는 다른 사례와 비교할 때 비합당할 정도로) 지나치게 낮게 설정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Oliver Hallich: 비대칭 논제와 박탈 개념
Oliver Hallich은 베너타의 가치론적 비대칭을 부분적으로 옹호하면서도 두 가지 비판을 제기한다. 첫째 비판은 “쾌락의 부재는 그 부재가 누군가에게 박탈이 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나쁘지 않다”는 베너타의 명제를 겨냥한다. Hallich은 ‘박탈하다(deprive)’를 이미 가진 것을 회수하는 의미의 Deprive₁과, 좋은 것을 회수하거나 애초에 주지 않는 것을 모두 포함하는 Deprive₂로 구별한다. 전자의 의미라면 잠재적 사람에게서 쾌락을 회수할 수 없다는 것은 참이지만, 쾌락을 주지 않음으로써도 해악을 가할 수 있으므로 베너타의 전제가 거짓이고, 후자의 의미라면 쾌락을 잠재적 사람에게 주지 않을 수 있으므로 잠재적 사람은 박탈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의미를 택하든 베너타의 논증에는 문제가 생긴다고 Hallich은 주장한다.
베너타의 답변은 이 구별 자체가 자신의 논증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의 진정한 전제는 “잠재적 사람에게서 쾌락을 회수할 수 없다”가 아니라,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회수든 주지 않음이든 그것에 의해 박탈되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쾌락의 부재가 ‘회수’에 의한 것이든 ‘주지 않음’에 의한 것이든, 그것을 박탈로 경험할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핵심에는 변화가 없다. Hallich의 비판은 베너타의 숨은 전제를 잘못 재구성한 데서 발생한다.
Hallich의 두 번째 비판은 베너타의 비대칭 논제가 다른 네 가지 통상적 비대칭을 가장 잘 설명한다는 사실로부터 지지를 얻는다는 주장에 향한다. Hallich은 그 네 비대칭 가운데 적어도 일부, 예컨대 고통받을 사람을 만들지 않을 의무는 있지만 행복한 사람을 만들 의무는 없다는 비대칭 자체가 논쟁적이라고 지적한다. 베너타는 우선 비대칭 논제의 설명력이 그 논제를 받아들이는 유일한 근거라는 해석은 자신의 입장이 아니라고 답한다. 자신에게 비대칭은 독립적으로 설득력이 있으며, 다른 비대칭을 설명하는 능력은 추가적인 지지를 제공할 뿐이다. 더구나 설명력에 의한 지지를 무너뜨리려면 단지 일부 철학자가 다른 비대칭들을 거부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네 비대칭을 일관되게 모두 거부하고 그 함축도 감수해야 한다. 예컨대 먼 곳에서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유감스럽게 여기지 않거나, 존재하지 않는 화성인들이 누리지 못하는 행복을 유감스럽게 여겨야 할 수 있다. 나아가 베너타의 비대칭은 인구윤리의 난제들을 통일적으로 해결하는 기능도 하므로, 이를 폐기하려면 그 문제들에 대해서도 대안적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고 베너타는 주장한다.

Michael Hauskeller: 삶의 질에 대한 비관론과 가치론적 비대칭
Michael Hauskeller의 첫 번째 비판은 베너타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질을 크게 과대평가한다고 볼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베너타가 인용하는 심리학 연구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실제보다 좋게 평가한다고 결론짓지 않으며, 객관적인 삶의 질과 주관적인 복지 사이에 괴리가 있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그러한 연구를 근거로 사람들이 삶의 질을 과대평가한다고 결론짓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베너타는 이것이 자신의 논증에서 심리학적 증거가 수행하는 역할을 혼동한 것이라고 답한다. 그의 논증은 대략 “사람들의 주관적 삶의 질 평가는 신뢰성이 낮다(P1)”, “인간의 실제 삶의 질은 나쁘다(P2)”, 따라서 “사람들이 자신의 삶이 시작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C)”는 구조를 갖는다. 심리학적 연구는 낙관주의 편향 등을 통해 P1을 뒷받침할 뿐이며 P2나 결론 자체를 입증하기 위해 인용된 것이 아니다. P2는 어떤 기준으로 복지를 평가해야 하는가라는 철학적 판단을 포함하므로 심리학 연구자가 그것을 주장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주관적 평가가 삶의 질을 전부 결정한다고 한다면 질병·장애·빈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비슷한 수준의 주관적 만족을 보고하는 한 그러한 상태가 삶의 질에 거의 차이를 만들지 않는다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론이 나온다고 베너타는 지적한다.
Hauskeller는 또한 베너타가 삶의 나쁜 것들을 과장하면서 좋은 것들은 사소하게 취급한다고 비판한다. 베너타의 답변은 자신이 단순히 나쁜 것들의 목록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좋은 것과 나쁜 것 사이의 경험적 비대칭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가장 심한 고통은 가장 강한 쾌락이 좋은 것보다 더 나쁘고, 만성적 고통은 존재하지만 그에 대응하는 만성적 쾌락은 없으며, 손상은 순간적으로 발생할 수 있지만 회복은 그렇지 않다는 식의 비대칭이다. Hauskeller는 이러한 경험적 논거 자체에는 답하지 않는다고 베너타는 지적한다.
Hauskeller의 또 다른 비판은 “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나에게 더 좋았을 것”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 나에게 좋거나 나쁜 것이 있을 수 없으므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베너타는 자신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문자 그대로 더 나은 상태에 있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고 답한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표현은 보다 복잡한 비교를 축약한 것이므로 Hauskeller는 자신이 실제로 주장하지 않는 명제를 공격한다. 또한 Hauskeller가 건강·자유·친구·사랑의 ‘부재’도 해악이므로 쾌락의 부재가 나쁘지 않다는 비대칭은 틀렸다고 주장하는 데 대해서도, 그러한 경우에는 이미 존재하는 사람이 그 좋은 것들을 박탈당하고 있기 때문에 나쁜 것이며, 이것은 “그 부재가 누군가에게 박탈이 되는 경우가 아니라면”이라는 자신의 원래 명제와 정확히 양립한다고 답한다.
마지막으로 Hauskeller는 베너타가 후속 저작에서 위험 논증과 염인적 논증을 별도로 제시한 것은 모든 삶이 시작할 가치가 없을 만큼 나쁘다는 자신의 원래 주장에 대한 암묵적 후퇴라고 해석한다. 베너타는 이를 논증 전략의 오해라고 답한다. 위험 논증은 자신의 삶의 질 논증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다른 경로를 통해 반출생주의적 실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음을 보이기 위한 독립적 논증이다. 염인적 논증 역시 출산이 언제나 잘못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 만들어지는 인간이 타인에게 가할 해악 때문에 출산에 반대하는 추정을 설정할 뿐이며 그 추정은 경우에 따라 번복될 수 있다.

Thaddeus Metz: 우주적 무의미와 반출생주의
Thaddeus Metz는 베너타가 삶의 우주적 무의미(cosmic meaninglessness)를 삶의 질과 별개의 부정적 가치로 보고, 그것 자체가 새로운 사람을 만들지 말아야 할 도덕적 이유를 제공한다고 해석한다. Metz는 우주적 의미가 어느 정도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 부재가 베너타가 생각하는 만큼 중대한 손실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 근거 가운데 하나가 SETI의 사례이다. 외계 지적 생명과의 접촉이 인간 삶에 우주적 의미를 더해줄 수 있다고 해도, 정부 예산 대부분을 SETI에 투입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주적 의미가 지상적 재화보다 훨씬 덜 중요함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베너타는 먼저 Metz가 자신의 논증에서 우주적 무의미를 삶의 열악한 질과 분리했다는 점을 문제 삼는다. 그의 논지는 단순히 “우주적 의미가 없으므로 출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역경이 가득한 삶을 정당화해줄 만한 궁극적 의미마저 없다는 것이다. SETI 사례 역시 우주적 의미의 가치가 작다는 것을 보여주지 못한다. SETI에 막대한 공공재원을 투입하지 않을 이유에는 외계 생명을 발견할 가능성이 낮고, 발견하더라도 긍정적 관계가 보장되지 않으며, 실제로 획득할 우주적 의미도 제한적이라는 점 등이 있다. 무엇보다 식량·보건·교육·안보 등에 대한 지출을 희생하면 인간 삶의 질 자체가 파국적으로 악화된다. 삶의 질이 우주적 의미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과 우주적 의미의 부재가 중대한 부정적 가치라는 것은 양립 가능하다.
Metz는 다시, 어떤 좋은 것을 얻을 가능성이 애초에 낮을수록 그것을 얻지 못한 데 대해 유감스러워할 이유도 작아진다는 ‘가능성 원칙’을 제시한다. 복권에 당첨될 가능성이 애초에 없었던 사람은 당첨표를 가지고 있다가 실수로 잃어버린 사람보다 당첨금의 부재를 덜 유감스러워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우주적 의미 역시 애초에 획득 가능성이 거의 없으므로 그 부재를 크게 유감스러워할 이유가 없다는 결론이다. 베너타는 첫째 실제로 사람들이 느끼는 유감과 합당하게 느껴야 할 유감을 구별해야 하고, 둘째 복권 사례에는 당첨 가능성뿐 아니라 자신의 과실 같은 교란변수가 있으며, 셋째 부재한 좋은 것의 크기도 고려해야 한다고 답한다. 무엇보다 우주적 의미의 부재가 중요한 까닭은 짧고 역경에 찬 삶에 궁극적 의미가 있었다면 인간의 곤경이 상당 부분 완화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주적 의미가 실현될 가능성이 낮았다는 사실만으로 그 부재가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Christine Overall: 출산의 의미, 주관적 평가의 권위, 불가피한 해악
Christine Overall의 비판에는 반출생주의가 우리의 일반적인 도덕적 직관 및 출산 경험과 지나치게 충돌한다는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출산은 창조적 프로젝트이며, 새로운 세대는 부모와 기존 세대의 삶에 의미를 제공하고, 예술·교육·의료·공학 등 인간의 여러 활동은 미래 세대를 전제로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출산을 전면적으로 잘못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거의 모든 가치 있는 활동과 프로젝트까지 부정하는 결과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베너타는 어떤 활동이 창조적이고 부모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사실이 그 활동으로 만들어지는 사람에게 해악을 부과할 권리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답한다. 미래 세대가 기존 세대의 삶에 의미를 더한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의미를 획득한다는 이유만으로 통상적인 해악금지 원칙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또한 미래 세대가 없다면 모든 인간 활동이 무의미해진다는 것도 과장이다. 현재 존재하는 사람들을 위해 책을 쓰고, 영화를 만들고, 건축물을 짓고, 음식을 생산하는 일은 여전히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더 근본적으로 출산을 계속하더라도 언젠가는 마지막 세대가 존재해야 하므로 미래 세대로부터 의미를 얻는 구조를 영원히 유지할 수 없다. 베너타는 이를 “출산적 폰지 사기(procreational Ponzi scheme)”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반출생주의자가 출산하지 않는다고 해서 실제로 앞으로 태어날 사람들을 위한 교육·의료·사회계획을 중단해야 한다는 결론도 나오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계속 출산하는 현실을 알고 있다면 미래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이 오히려 도덕적 의무이기 때문이다.
Overall의 두 번째 핵심 주장은 자신의 삶의 질과 의미에 관한 판단에서는 당사자 자신에게 특별한 인식적 권위가 있다는 것이다. 개인은 자신의 삶에 존재하는 좋고 나쁜 것뿐 아니라 그것들이 자기 삶 전체에서 갖는 중요성을 스스로 평가할 권위를 가지며,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살 만하고 의미 있다고 판단한다면 베너타가 외부에서 그것을 잘못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취지이다.
베너타는 여기서 오류불가능성과 자율성을 구별한다. 현재 자신이 고통을 느끼는지와 같은 즉각적 내적 경험에서는 당사자가 오류불가능할 수 있지만, 과거와 미래의 고통, 일정 기간 동안 경험한 쾌락과 고통의 총량, 욕구충족 정도, 나아가 삶 전체의 질에 관한 메타적 평가는 얼마든지 잘못될 수 있다. 그렇다고 국가나 타인이 그 판단을 강제로 교정할 권리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즉 “당사자의 판단은 틀릴 수 없다”는 명제는 거부하면서도 “유능한 성인의 판단은 틀릴 수 있더라도 존중해야 한다”는 명제는 받아들일 수 있다. 또한 삶의 질과 삶의 의미도 구별해야 한다. 열악한 삶에서도 의미를 발견할 수 있고 그 의미가 삶의 체감적 질을 어느 정도 개선할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고난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들을 애초에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 그들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Overall은 마지막으로 삶의 나쁜 것들 가운데 상당수는 개선할 수 있고, 다른 일부는 인간적 삶의 불가피한 구성요소라고 주장한다. 베너타는 개선 가능성을 인정하지만 개선이 언제나 지속되는 것도 아니며, 이른바 불가피한 나쁜 것들은 오직 존재하게 된 사람에게만 불가피하다고 답한다. 걱정·두려움·상실의 슬픔이 인간성을 구성한다고 하더라도, 친구가 병들지 않고 아이가 위험에 처하지 않으며 사랑하는 사람이 죽지 않는 세계라면 그러한 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손실이 아니다. 나쁜 것은 인간 삶을 구성한다는 이유로 나쁘지 않은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베너타는 출산이라는 행위를 잘못이라고 평가하는 것과 출산한 사람 전체를 나쁜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별개라고 덧붙인다. 도덕적으로 좋은 사람도 도덕적 맹점이나 결함을 가질 수 있으므로 반출생주의가 모든 부모를 악한 사람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Nicholas Smyth: ‘비개인적’ 윤리라는 비판
Nicholas Smyth의 핵심 비판은 베너타의 윤리학이 행위자의 실제 동기 집합과 연결되지 않는 지나치게 ‘비개인적’인 윤리라는 것이다. 실천윤리라면 행위자에게 제시하는 행위 이유가 실제 행위자의 동기와 어떤 관계를 갖는지를 설명해야 하는데, 베너타의 반출생주의는 사태를 비개인적으로 평가하여 세계의 순 가치를 비교하는 데 치우쳐 있으므로 실제 예비 부모에게 실천적 이유를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베너타의 첫 번째 반박은 Smyth가 ‘비개인적’이라는 말을 서로 다른 두 의미로 혼용한다는 것이다. 하나는 개별 사람보다 사태를 평가대상으로 삼는다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논증이 행위자의 동기 집합과 연결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 둘은 독립적이다. 사태에 관한 논증도 어떤 사람에게는 강력한 동기가 될 수 있고, 개인의 이익을 중심으로 한 논증도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런 동기를 주지 못할 수 있다. 따라서 논증의 내용이 개인적인지 여부와 그것이 특정 행위자를 실제로 동기부여하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Smyth는 특히 베너타의 비대칭 논증이 X가 존재하는 세계와 존재하지 않는 세계라는 두 사태를 비교하므로 본질적으로 비개인적이라고 주장한다. 베너타는 두 세계를 비교한다는 사실만으로 비교가 비개인적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답한다. “어느 세계가 전체적으로 더 많은 순 좋은 것을 포함하는가?”와 “어느 세계가 X에게 더 많은 순 좋은 것을 포함하는가?”는 전혀 다른 질문이다. 후자는 X가 존재하는 세계에서 X의 이익만을 기준으로 두 세계를 비교하는 개인적 비교이다. 따라서 자신의 비대칭 논증은 세계 전체의 순 가치를 극대화하려는 논증이 아니라 존재하게 될 사람의 이익을 기준으로 한 논증이다.
Smyth가 삶의 질에 관한 베너타의 객관적 평가 역시 행위자의 주관적 관점과 단절되어 있다고 비판하는 데 대해서도 베너타는 주관적 복지에 관한 오류불가능론을 거부하는 것과 실천적 이유를 무시하는 것은 다르다고 답한다. 사람들에게 체계적인 인지 편향이 있음을 알려주는 논증이 그들의 동기 집합과 연결되는지는 그 사람들이 자신의 편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에 달려 있다. 한편 염인적 논증은 실제로 첫 번째 의미에서 비개인적 요소를 갖는다. 그러나 베너타는 이것이 오히려 자신의 논증 전략을 보여준다고 본다. 그는 하나의 규범윤리 이론만을 전제로 하기보다 서로 다른 도덕관을 가진 사람들도 각기 다른 경로로 출산에 반대하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도록 복수의 논증을 제시한다.
Smyth는 삶의 의미에 관한 베너타의 견해도 지나치게 비개인적이라고 비판한다. 객관적으로 가치 있는 목적을 추구하면서 극도로 불행한 사람이 있다면 베너타의 견해에서는 그 삶을 이상적으로 의미 있는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식이다. 베너타는 이를 자신의 견해에 대한 희화화라고 반박한다. 그는 삶이 실제로 의미 있으면서 당사자에게도 의미 있다고 느껴지는 상태를 더 선호하며, 주관적 경험은 실제 삶의 질에 중대한, 비록 결정적이지는 않은 기여를 한다고 본다. 또한 연속극을 보는 일이 한 오후를 즐겁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과 평생을 연속극 시청에 바친 삶이 의미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주장이다. 전자의 가치는 의미가 아니라 휴식·기분전환·쾌락일 수도 있다. ‘우주적 관점’이라는 표현 역시 문자 그대로 우주가 하나의 인식 주체라는 뜻이 아니라, 지구의 삶이 우주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는 비유적 관점이다. 따라서 그러한 표현을 사용한다는 이유로 그의 객관주의가 다시 주관주의로 돌아간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Ema Sullivan-Bissett: 반출생주의는 친죽음주의를 함축하는가
Ema Sullivan-Bissett의 핵심 문제제기는 반출생주의가 친죽음주의, 즉 “존재하기를 그치는 것이 더 낫다”는 견해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특히 죽음이 죽는 사람을 박탈하지 않으므로 그 사람에게 해악이 아니라는 에피쿠로스주의적 죽음관을 고려한다면, 존재하게 되는 것이 해악이라는 베너타의 주장은 이미 존재하는 사람에게도 존재를 그치는 것이 더 낫다는 결론을 낳는다고 본다.
베너타의 핵심 반박은 반출생주의 자체의 함축과 반출생주의에 에피쿠로스주의를 결합한 견해의 함축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논리적 구조가 “X와 Y이면 Z”라면 거기에서 “X이면 Z”가 도출되지 않는다. 따라서 반출생주의와 에피쿠로스주의를 결합해야 친죽음주의가 나온다면 친죽음주의는 반출생주의 단독의 함축이 아니다. 더욱이 베너타는 에피쿠로스주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죽는 사람에게 해악이라는 별도의 논증을 제시해 왔다. 에피쿠로스주의가 참이라는 증명도 거짓이라는 증명도 없지만, 그는 여러 고려를 종합하면 이를 거부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더 근본적으로 베너타는 에피쿠로스주의와 자신의 반출생주의를 애초에 일관되게 결합할 수 있는지도 의문을 제기한다. 에피쿠로스주의의 영향력 있는 해석에 따르면 어떤 상태가 사람에게 더 좋거나 나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비교되는 양쪽 상태 모두에 존재해야 한다는 ‘존재 요건’이 필요하다. 그러나 베너타의 비대칭 논증은 사람이 존재하는 상태와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그 사람의 이익을 기준으로 비교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에피쿠로스주의를 지탱하는 존재 요건을 받아들이면 베너타의 반출생주의 논증 자체를 받아들이기 어렵고, 반대로 베너타가 존재 요건을 거부하는 바로 그 이유는 에피쿠로스주의적 죽음관을 거부할 이유도 된다.
Sullivan-Bissett는 또한 인간의 삶이 베너타가 주장하는 만큼 나쁘다면 왜 자살이 언제나 계속 사는 것보다 낫지 않느냐고 묻는다. 베너타는 여기에서도 존재하게 되는 것과 이미 존재하는 것을 계속하는 것의 비대칭을 강조한다. 죽음 자체가 죽는 사람에게 상당한 해악이라면, 계속 사는 것이 나쁘다는 사실만으로 자살이 더 나은 것은 아니다. 계속되는 삶의 나쁨과 죽음의 나쁨을 비교해야 하며, 죽음이 더 나쁠수록 자살이 타산의 관점에서 정당화되려면 삶이 그만큼 더 나빠야 한다. 또한 살아 있는 동안 추가적인 의미를 만들어낼 가능성도 죽음을 미룰 이유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존재하게 되지 않는 것이 더 낫다”와 “이미 존재한다면 지금 죽는 것이 더 낫다”는 동일한 명제가 아니다.

Erik Magnusson: 위험 논증과 파국적 해악
Erik Magnusson은 베너타의 위험 논증을 “동의 없이 타인에게 파국적 해악이 발생할 높은 위험을 부과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출산은 아이에게 그러한 위험을 부과한다. 따라서 출산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형태로 재구성하고, 특히 두 번째 전제를 비판한다. Magnusson은 ‘파국적 해악’을 그 해악을 겪으면서도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심각한 해악으로 이해한다. 그렇게 엄격하게 정의하면 대부분의 출산이 그러한 파국적 해악의 높은 위험을 부과한다고 볼 수 없으므로 베너타의 두 번째 전제가 거짓이라는 것이다.
베너타는 우선 논증을 정교화하여, 단순히 높은 위험을 부과하는 것뿐 아니라 그 위험 부과에 충분한 정당화가 없는 경우에 금지된다고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Magnusson의 ‘파국적 해악’ 기준은 지나치게 높다고 반박한다. 파국적 해악을 겪더라도 삶 전체가 여전히 어느 정도 가치 있을 수 있으며, 어떤 해악은 바로 생명을 위협하기 때문에 파국적이다. 생명을 위협하고 치료 자체가 엄청난 고통을 야기하는 암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일상적인 위험윤리에서도 동의하지 않은 사람에게 암과 같은 중대한 해악의 높은 위험을 부과하는 것은 강하게 금지된다. 암 하나의 위험만 해도 상당한데, 인간이 일생 동안 직면할 수 있는 모든 중대한 해악을 합산하면 파국적 해악의 누적 위험은 매우 높다고 베너타는 주장한다.
마지막 문제는 그러한 위험을 정당화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가이다. 베너타는 예외적인 공리주의적 상황에서는 다른 사람의 이익이 출산을 정당화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지만, 통상적인 출산에서 부모가 아이를 갖고 양육하고 싶다는 이익이 아이에게 파국적 해악의 높은 위험을 부과하는 것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지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본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그는 어떤 부부의 출산이 다른 부부에게 암에 걸릴 매우 높은 위험을 부과한다고 가정한다. 그런 경우 출산이 잘못이라는 판단이 자연스럽다면, 위험을 부담하는 사람이 다른 부부가 아니라 바로 출산으로 만들어지는 아이일 때 갑자기 그 위험 부과가 허용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해야 한다. 따라서 출산을 러시안룰렛에 비유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Magnusson의 비판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 베너타의 결론이다.<끝>

II. 요약번역자의 논평: 베너타가 불필요하게 일으킨 공방에 대한 소고
베너타의 반출생주의에서 삶의 종합적 질은 왜 중요하지 않은가

데이비드 베너타(David Benatar)는 반출생주의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삶의 질에 상당한 논의를 할애한다. 특히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질을 실제보다 높게 평가하는 체계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폴리아니즘(Pollyannaism), 적응, 비교 등의 심리적 기제를 제시한다. 이 논의가 성공한다면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좋다고 평가한다는 사실은 인간의 삶이 실제로 좋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뢰할 만한 증거가 되지 못한다. 더 나아가 베너타는 인간의 삶에 포함되어 있는 여러 종류의 나쁨을 검토하면서, 인간의 삶의 실제 질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낮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베너타의 반출생주의를 정당화하는 핵심적인 가치론적 논증을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논의가 그의 이론체계에서 정확히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베너타가 인간의 삶에 많은 나쁨이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인간의 삶에 어느 정도의 나쁨이 포함되어 있는가는 그의 반출생주의에서 중요한 문제이다. 문제는 그가 이를 삶의 종합적 질(overall quality)에 관한 문제로 다루면서,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포함된 좋음과 나쁨을 종합하여 자신의 삶을 실제보다 좋게 평가한다는 것을 상당한 정도로 논증하려 한다는 데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논증이 베너타 자신의 가치론적 전제를 고려할 때 잘못 겨냥된 논증이라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는 네 가지 명제를 순서대로 논증할 필요가 있다. 첫째, 베너타의 가치론적 비대칭성을 받아들이는 한 삶의 종합적 질은 존재하게 되는 것이 해악이라는 결론을 정당화하는 데 필요하지 않다. 둘째, 존재하게 됨으로써 입게 되는 해악의 크기를 평가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은 삶의 종합적 질이 아니라 그 삶에 포함된 나쁨의 절대적 크기이다. 셋째, 따라서 폴리아니즘에 관한 논의는 그것이 사람들이 삶에 포함된 나쁨 자체의 크기를 과소평가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한에서만 관련성을 가지며, 삶의 종합적 질을 과대평가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반출생주의의 논거가 될 수 없다. 넷째, 그럼에도 삶의 종합적 질과 그에 대한 인간의 오판을 강조하는 것은 베너타의 반출생주의가 실제로는 의존하지 않는 좋음과 나쁨의 종합적 수지에 의존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 문제는 단순히 불필요한 논의를 추가한다는 데 그치지 않고, 베너타의 핵심적인 가치론적 논증이 무엇인지를 오히려 불분명하게 만든다.

1. 가치론적 비대칭성이 성립한다면 삶의 종합적 질은 존재하게 되는 해악의 성립 여부와 무관하다

베너타의 가치론적 비대칭성을 받아들이는 한, 삶의 종합적 질은 어떤 사람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 해악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이 점을 논증하기 위해서는 우선 삶의 종합적 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삶의 종합적 질이란 한 삶에 포함되어 있는 좋은 것들과 나쁜 것들을 모두 고려하였을 때 그 삶 전체가 얼마나 좋은지를 평가한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삶에 좋은 것이 매우 많고 나쁜 것이 상대적으로 적다면 그 삶의 종합적 질은 높을 것이며, 반대로 나쁜 것이 많고 좋은 것이 적다면 그 삶의 종합적 질은 낮을 것이다. 물론 어떠한 것들을 좋음과 나쁨으로 보아야 하는지, 서로 다른 종류의 좋음과 나쁨을 어떠한 방식으로 비교하여야 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가치들을 하나의 종합적인 평가로 통합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가치론적 문제이다. 여기에서는 그러한 문제를 일단 유보하고, 삶에 포함된 좋음과 나쁨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종합하여 삶 전체의 질을 평가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에서의 삶의 종합적 질은 베너타가 제시하는 가치론적 비대칭성이 성립한다면, 어떤 사람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 해악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베너타의 비대칭성에서 중요한 것은 존재하는 사람의 삶 안에서 좋음과 나쁨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존재하게 하는 경우와 존재하게 하지 않는 경우를 비교할 때 좋음의 부재와 나쁨의 부재가 서로 다른 가치론적 지위를 갖는다는 것이다. 존재하게 된 사람에게 발생하는 나쁨은 그 사람을 존재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러한 나쁨의 부재는 좋다. 반면 그 사람이 존재함으로써 누리게 되는 좋음은 그를 존재하게 하지 않았을 경우 존재하지 않지만, 그 좋음을 박탈당하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한 그 부재는 나쁘지 않다.

이 비대칭성을 받아들인다면 중요한 귀결이 발생한다. 어떤 삶에 포함된 좋음이 나쁨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은 그 사람을 존재하게 함으로써 발생한 나쁨을 상쇄하지 못한다. 가령 한 사람의 삶에 나쁨이 10만큼 포함되어 있고 좋음이 1,000만큼 포함되어 있다고 하자. 삶 내부의 좋음과 나쁨을 비교하는 관점에서는 이 삶은 대단히 좋은 삶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을 존재하게 하지 않았다면 10만큼의 나쁨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며, 이것은 베너타의 비대칭성에 따르면 좋은 사태이다. 반면 1,000만큼의 좋음 역시 발생하지 않았겠지만, 그것을 누리지 못하여 손해를 입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 좋음의 부재는 나쁜 사태가 아니다. 따라서 1,000만큼의 좋음은 존재하게 함으로써 발생하는 10만큼의 나쁨을 정당화하는 반대편의 가치로 기능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삶의 종합적 질이 매우 높다는 사실은 존재하게 되는 것이 해악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변경하지 않는다. 나쁨이 10이고 좋음이 5인 삶과 나쁨이 10이고 좋음이 1,000인 삶은 삶의 종합적 질이라는 점에서는 현저하게 다르다. 그러나 베너타의 가치론적 비대칭성에 따라 존재하게 됨으로써 발생하는 해악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양자는 모두 존재하게 됨으로써 10만큼의 나쁨을 입게 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두 번째 삶이 첫 번째 삶보다 삶 내부의 관점에서 훨씬 좋은 삶이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바로 그 사실이 존재하게 되지 않았더라면 발생하지 않았을 나쁨을 상쇄하지는 않는다.

물론 여기에서 좋음과 나쁨에 수치를 부여한 것은 서로 다른 가치들을 실제로 하나의 기수적 척도 위에서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예가 보여주는 것은 보다 제한적이다. 즉 베너타의 가치론적 비대칭성을 받아들이는 한, 삶에 포함된 좋음의 양을 아무리 크게 변경하더라도 나쁨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 해악이라는 판단에서 갖는 지위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 해악이라는 명제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삶의 종합적 질을 낮게 평가할 필요가 없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모든 인간의 삶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실제로도 훨씬 좋다고 인정하더라도, 그것만으로 베너타의 핵심적인 가치론적 논증은 반박되지 않는다.

이 점은 중요하다. 베너타의 반출생주의가 삶의 종합적 질이 낮다는 사실에 의존한다면, 반출생주의를 둘러싼 논쟁은 상당 부분 인간의 삶에 좋은 것이 더 많은가 나쁜 것이 더 많은가에 관한 경험적이고 가치론적인 논쟁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의 비대칭성 논증의 특징은 바로 그러한 논쟁을 우회한다는 데 있다. 삶이 종합적으로 아무리 좋은 경우에도 그 삶을 시작하게 함으로써 그 사람에게 발생시킨 나쁨은, 그 사람을 존재하게 하지 않음으로써 피할 수 있었던 나쁨이다. 따라서 가치론적 비대칭성을 받아들이는 한 삶의 종합적 질이 낮다는 명제는 존재하게 되는 것이 해악이라는 결론의 필요조건이 아니다.

2. 존재하게 되는 해악의 크기는 삶의 종합적 질이 아니라 삶에 포함된 나쁨의 크기에 의하여 결정된다

존재하게 되는 것이 단순한 해악을 넘어 중대한 해악이라는 점을 논증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은 삶의 종합적 질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그 삶에 포함된 나쁨의 절대적 크기에 대한 평가이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가치론적 비대칭성만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 언제나 어느 정도의 해악이라는 결론이 성립한다고 하더라도, 베너타가 주장하려는 것은 단지 모든 출생이 미미한 해악을 발생시킨다는 것이 아니다. 그가 출산에 대한 강한 도덕적 결론을 도출하려면 인간이 존재하게 됨으로써 입게 되는 해악이 상당한 크기를 가진다는 점을 추가로 논증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인간 삶의 실제 질을 평가하는 논의는 가치론적 비대칭성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반론은 중요한 점을 지적한다. 존재하게 되는 것이 해악이라는 명제와 존재하게 되는 것이 중대한 해악이라는 명제는 동일하지 않다. 어떤 삶에 극히 사소한 불편만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베너타의 비대칭성에 따르면 그 사람을 존재하게 하지 않는 편이 그 사람에게는 더 좋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도의 해악이 출산을 도덕적으로 금지할 만큼 중대한 것인지는 별도의 문제이다. 따라서 베너타에게 인간 삶에 포함되어 있는 나쁨의 크기를 논증할 이유가 있다는 점은 인정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 반론은 삶의 종합적 질에 관한 논증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오히려 존재하게 되는 해악의 크기를 문제 삼는 순간 삶의 종합적 질과 삶에 포함된 나쁨의 크기를 더욱 엄격하게 구별하여야 한다. 베너타의 가치론적 비대칭성이 옳다면 존재하게 함으로써 가하는 해악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은 그 삶에 포함된 나쁨의 크기이지, 그 나쁨에서 좋음을 차감한 순가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분명하게 보기 위하여 두 삶을 비교해보자. A의 삶에는 100만큼의 나쁨과 120만큼의 좋음이 포함되어 있고, B의 삶에는 20만큼의 나쁨과 10만큼의 좋음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자. 좋음과 나쁨의 단순한 수지만을 기준으로 하면 A의 삶은 +20이고 B의 삶은 -10이다. 따라서 종합적 질이라는 관점에서는 A의 삶이 B의 삶보다 더 좋다. 그러나 베너타의 비대칭성을 전제로 하여 존재하게 함으로써 각 사람에게 가한 해악을 묻는다면 평가의 순서는 달라진다. A는 존재하게 됨으로써 100만큼의 나쁨을 겪게 되었고, B는 20만큼의 나쁨을 겪게 되었다. A가 누리는 120만큼의 좋음은 그를 존재하게 하지 않았을 경우 그 부재가 나쁜 것이 아니므로, 그를 존재하게 함으로써 발생시킨 100만큼의 나쁨을 상쇄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존재하게 함으로써 가한 해악이라는 관점에서는 오히려 A의 경우가 더 크다.

이 예는 삶의 종합적 질과 존재하게 됨으로써 입는 해악의 크기가 단지 서로 다른 표현으로 서술된 동일한 가치평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양자는 서로 다른 값을 가질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순서까지 역전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삶이 얼마나 나쁜가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에도 무엇을 묻고 있는지를 구별하여야 한다. 한 삶이 그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종합적으로 얼마나 좋은 삶인가를 묻는 것과, 그 사람을 존재하게 함으로써 그에게 얼마나 많은 나쁨을 발생시켰는가를 묻는 것은 베너타의 가치론적 전제 아래에서는 서로 다른 질문이다.

이 구별을 받아들이면 베너타가 실제로 입증하여야 하는 명제가 보다 정확하게 드러난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의 삶이 종합적으로 마이너스의 가치를 가진다거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그 순가치가 훨씬 낮다는 명제가 아니다. 필요한 것은 통상적인 인간의 삶에 존재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피할 수 있었을 상당한 크기의 나쁨이 포함되어 있다는 명제이다. 질병, 신체적 고통, 불안, 좌절, 상실, 노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자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것들이 얼마나 빈번하고 얼마나 중대한지를 밝히는 것은 이러한 명제를 정당화하는 데 직접적인 관련성을 가진다. 반면 이러한 나쁨과 함께 인간이 얼마나 많은 쾌락, 성취, 사랑, 우정 또는 만족을 누리는지를 계산하여 양자의 종합적 수지를 구하는 것은 베너타의 비대칭성을 받아들이는 한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필요한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좋음과 나쁨의 종합적 수지를 해악의 크기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사용한다면 베너타의 가치론적 비대칭성과 긴장관계가 발생한다. 비대칭성의 핵심은 존재하지 않는 경우 좋음의 부재가 나쁘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는 경우의 좋음이 존재하게 함으로써 발생시킨 나쁨을 정당화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해악의 크기를 측정하는 단계에서 다시 좋음과 나쁨을 상쇄하여 순가치를 계산한다면, 앞 단계에서 배제했던 상쇄관계를 뒤 단계에서 다시 도입하는 셈이 된다. 그러한 방식은 정합적이지 않다. 존재하게 됨으로써 입는 해악의 크기는 그 존재로 인하여 발생한 나쁨의 크기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

3. 폴리아니즘은 삶의 종합적 질이 아니라 삶에 포함된 나쁨의 과소평가를 설명하는 한에서만 관련성을 가진다

폴리아니즘에 관한 논의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포함된 나쁨 자체의 크기를 과소평가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한에서만 베너타의 반출생주의와 직접적인 관련성을 가진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실제보다 좋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는 명제는 적어도 두 가지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하나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포함된 나쁨 자체를 실제보다 작게 평가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포함된 좋음과 나쁨을 종합한 전체적인 삶의 질을 실제보다 높게 평가한다는 것이다. 두 명제는 서로 관련될 수 있지만 동일하지 않으며, 베너타의 반출생주의에 대하여 갖는 관련성도 서로 다르다.

첫 번째 의미의 폴리아니즘은 베너타의 논증과 직접적인 관련성을 가질 수 있다. 만일 인간에게 자신이 경험하는 고통, 좌절, 상실과 같은 나쁨을 시간이 지나면서 축소하여 기억하거나, 현재의 나쁜 상태에 적응함으로써 그 상태가 얼마나 나쁜지를 과소평가하거나, 더 나쁜 처지에 있는 사람과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자신이 실제로 입고 있는 해악을 과소평가하는 체계적인 경향이 있다면, 인간의 삶에 포함된 나쁨의 크기를 당사자의 자기평가만으로 측정하기는 어렵다. 이 경우 인간 삶의 나쁨에 관한 독립적인 평가가 필요하다는 베너타의 주장은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러나 두 번째 의미의 폴리아니즘은 사정이 다르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종합적 질을 실제보다 높게 평가한다는 사실만으로는 존재하게 됨으로써 입은 해악의 크기에 관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가령 어떤 사람의 삶에 30만큼의 나쁨과 100만큼의 좋음이 있는데, 그는 자신의 삶에 30만큼의 나쁨과 200만큼의 좋음이 있다고 잘못 평가한다고 하자. 이 사람은 자신의 삶의 종합적 질을 현저하게 과대평가한다. 그러나 그의 오류는 전적으로 좋음의 크기에 관한 오류이다. 그가 존재하게 됨으로써 입게 된 30만큼의 나쁨에 관한 평가는 정확하다. 따라서 이 경우 폴리아니즘이 아무리 강하게 존재하더라도 존재하게 함으로써 발생한 해악의 크기에 관한 베너타의 논증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삶에 포함된 나쁨을 상당히 과소평가하면서도 자신의 삶의 종합적 질은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다. 예컨대 그는 나쁨을 100에서 50으로 과소평가하는 동시에 좋음도 150에서 100으로 과소평가할 수 있다. 이 경우 좋음과 나쁨의 차이를 기준으로 한 종합적 평가는 정확하지만, 베너타가 실제로 관심을 가져야 할 나쁨의 절대적 크기에 관한 평가는 크게 왜곡되어 있다. 그렇다면 삶의 종합적 질에 대한 평가가 정확한지 여부와 나쁨의 크기에 대한 평가가 정확한지 여부는 논리적으로 독립적이다.

이 점에서 폴리아니즘에 관한 논의가 베너타의 반출생주의와 관련성을 갖기 위해서는 그 논의의 대상을 보다 엄격하게 제한하여야 한다. 입증하여야 하는 것은 인간에게 일반적인 낙관 편향이 있다거나 사람들이 자기 삶을 실제보다 좋게 평가한다는 포괄적인 명제가 아니다. 필요한 것은 인간이 자신의 삶에 포함된 나쁨의 존재, 빈도, 강도 또는 지속기간을 체계적으로 과소평가한다는 보다 특정적인 명제이다. 그러한 명제가 입증된다면 그것은 인간 삶에 포함된 해악의 크기에 관한 당사자의 자기평가를 불신할 이유가 된다. 그러나 삶의 종합적 만족도나 전체적인 삶의 질에 대한 긍정적인 자기평가가 편향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는 그러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따라서 폴리아니즘에 관한 베너타의 논의 전체가 반출생주의와 무관하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그 논의 중 일부는 분명히 필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역할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이 종합적으로 얼마나 좋은지를 잘못 평가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삶에 실제로 포함되어 있는 나쁨의 크기를 당사자들이 과소평가할 가능성을 해명하는 데 한정된다. 이 범위를 넘어서는 순간 폴리아니즘 논의는 베너타가 입증하여야 할 명제를 더 이상 겨냥하지 않는다.

4. 삶의 종합적 질에 대한 강조는 베너타의 반출생주의가 좋음과 나쁨의 종합적 수지에 의존한다는 잘못된 인상을 준다

삶의 종합적 질에 대한 베너타의 강조는 불필요한 논증을 추가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의 반출생주의가 실제로는 의존하지 않는 좋음과 나쁨의 종합적 수지에 의존한다는 잘못된 인상을 준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상당히 좋다고 평가한다는 사실은 반출생주의에 대한 가장 직관적인 반론 가운데 하나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태어난 것을 후회하지 않으며, 자신의 삶에 여러 고통과 불행이 있더라도 종합적으로는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을 존재하게 하지 않는 편이 더 좋았다는 주장은 이러한 사람들의 자기평가와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에 대하여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실제보다 좋게 평가하는 심리적 편향을 가지고 있다고 답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대응처럼 보인다.

그러나 베너타의 가치론적 비대칭성을 받아들이는 한 애초에 이러한 대응은 필요하지 않다. 반출생주의자는 자신의 삶을 좋다고 평가하는 사람에게 그 평가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그 사람이 자신의 삶을 정확하게 평가하고 있다고 인정할 수 있다. 그의 삶에는 실제로 좋은 것이 매우 많을 수 있으며, 나쁜 것보다 좋은 것이 훨씬 많을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의 삶을 계속 살아갈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을 인정하더라도, 그 사람을 처음부터 존재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가 경험한 나쁨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가 누린 좋음의 부재는 그 좋음을 누리지 못하여 손해를 입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 베너타의 비대칭성이다.

여기에서 삶을 계속할 만한가라는 질문과 삶을 시작하게 할 만한가라는 질문의 비대칭성도 중요해진다. 이미 존재하는 사람에게는 현재 가지고 있는 관계, 계획, 성취, 쾌락과 미래의 가능성을 잃는 것이 실제적인 박탈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종합적으로 좋다고 평가하고 계속 살아갈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아직 존재하지 않는 사람에게 동일한 좋음이 발생하지 않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박탈이 아니다. 그렇다면 현재 존재하는 사람이 “내 삶은 살 만하다”고 정확하게 판단한다는 사실에서 “따라서 나를 존재하게 한 것도 나에게 좋은 일이었다”라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두 판단은 서로 다른 비교대상과 서로 다른 가치론적 구조를 갖는다.

그럼에도 반출생주의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종합적 질을 과대평가한다는 논증을 길게 전개하면, 독자는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구조로 베너타의 논증을 이해하게 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폴리아니즘 등의 심리적 편향 때문이다. 실제로 인간의 삶에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나쁨이 있고 좋은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적다. 따라서 인간의 삶은 종합적으로 생각보다 나쁘며, 그러므로 사람을 존재하게 하지 않는 편이 낫다.

그러나 이러한 논증은 베너타의 가치론적 비대칭성에 기초한 논증과 다른 논증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삶의 좋음과 나쁨을 동일한 가치계산 안에 넣고 그 수지를 비교한 뒤, 그 수지가 충분히 낮기 때문에 존재하게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결론짓는 논증이다. 만일 이것이 반출생주의의 핵심적인 논증이라면 인간 삶의 종합적 질에 대한 경험적·가치론적 논쟁은 결정적으로 중요해진다. 삶에 좋은 것이 실제로 더 많다는 것이 밝혀지면 반출생주의의 근거가 약화되기 때문이다.

반면 베너타의 비대칭성 논증에서는 그러한 귀결이 발생하지 않는다. 삶에 좋은 것이 나쁜 것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여도 그 좋음은 존재하지 않는 경우의 좋음의 부재를 나쁨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비대칭성 논증이 성공하는 경우 인간 삶의 종합적 수지에 관한 논쟁은 반출생주의의 성립 여부를 결정하는 논쟁이 아니다. 그런데 삶의 질에 관한 논의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오히려 비대칭성 논증의 바로 이 특징이 흐려진다.

이 문제는 베너타에 대한 비판의 방향에도 영향을 미친다. 삶의 질 논증을 전면에 내세우면 반대자는 인간이 그렇게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거나,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거나, 인간 삶에 포함된 좋은 것들이 베너타가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의 반출생주의를 반박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이 성공하더라도 가치론적 비대칭성 자체가 그대로 남아 있다면 베너타의 핵심 논증은 반박되지 않는다. 반대로 인간 삶이 실제로 매우 나쁘고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현저하게 과대평가한다는 사실이 성공적으로 입증되더라도 가치론적 비대칭성이 틀렸다면 그것만으로 베너타의 강한 반출생주의가 성립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베너타의 이론에서 논증의 부담은 보다 정확하게 배분되어야 한다. 존재하게 되는 것이 해악이라는 명제는 좋음의 부재와 나쁨의 부재 사이의 가치론적 비대칭성에 의하여 정당화되어야 한다. 그 해악이 도덕적으로 중대한 크기를 가진다는 명제는 인간의 통상적인 삶에 포함되는 나쁨의 종류, 빈도, 강도 및 지속기간에 관한 논증에 의하여 정당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러한 나쁨을 과소평가한다는 주장을 하려면 그 나쁨 자체의 평가를 왜곡하는 심리적 기제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 세 가지 논증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동일하지 않다. 특히 세 번째 논증을 삶의 종합적 질에 대한 과대평가에 관한 논증으로 확대할 이유는 없다.

5. 삶의 종합적 질이 아니라 피할 수 있었던 나쁨의 크기가 반출생주의의 논증 대상을 이루어야 한다

결국 베너타의 반출생주의에서 인간 삶의 질에 관한 논의가 겨냥하여야 하는 것은 인간의 삶이 종합적으로 좋은가 나쁜가가 아니라, 인간을 존재하게 함으로써 그 사람에게 어느 정도의 피할 수 있었던 나쁨을 발생시키는가이다. 베너타의 반출생주의에서 인간 삶의 나쁨을 논증하는 작업 자체가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가치론적 비대칭성만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 어느 정도의 해악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고 하더라도, 그 해악이 얼마나 중대한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통상적인 인간 삶에 어떠한 나쁨이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는지를 별도로 규명하여야 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삶의 종합적 질과 삶에 포함된 나쁨의 크기를 엄격하게 구별하여야 한다.

베너타의 가치론적 비대칭성을 받아들이는 한 존재하게 되는 것이 해악이라는 명제는 삶의 종합적 질에 의존하지 않는다. 또한 존재하게 됨으로써 입는 해악의 크기도 삶에 포함된 좋음과 나쁨의 순수지가 아니라, 존재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피할 수 있었던 나쁨의 크기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 따라서 인간의 자기평가가 문제된다면 문제되어야 하는 것은 자신의 삶이 종합적으로 얼마나 좋은가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자신의 삶에 포함된 나쁨의 크기에 대한 평가이다. 폴리아니즘에 관한 논의 역시 이러한 특정한 인식적 왜곡을 보여주는 한에서만 반출생주의의 논증에 직접적으로 기여한다.

이러한 구별 없이 삶의 종합적 질에 대한 인간의 자기평가가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장황하게 논증하는 것은 논증의 대상을 잘못 설정한 것이다. 더구나 그것은 단순히 불필요한 우회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한 논의는 베너타의 반출생주의가 인간 삶의 좋음과 나쁨을 종합하여 그 순수지가 낮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그 결과 그의 반출생주의가 인간의 삶이 실제로 얼마나 좋은가라는 문제에 달려 있다는 오해를 초래한다.

그러나 베너타의 가치론적 비대칭성이 옳다면 상황은 정반대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삶을 매우 좋다고 평가하는 것이 완전히 정확하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은 그 사람을 존재하게 함으로써 그에게 발생시킨 나쁨을 상쇄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삶이 계속 살아갈 만한 삶이라는 것과 그 삶을 처음부터 시작하게 할 만한 것이었다는 것도 서로 다른 판단이다. 그렇다면 베너타가 입증하여야 할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실제보다 좋게 생각한다는 명제가 아니다. 그가 입증하여야 할 것은 인간을 존재하게 함으로써 그 사람에게 상당한 크기의 피할 수 있었던 나쁨을 발생시키게 된다는 명제이다.

이렇게 논증의 대상을 다시 특정하면 반출생주의를 둘러싼 논쟁의 위치도 달라진다. 핵심적인 논쟁은 “인간의 삶은 실제로 행복한가” 또는 “좋은 것이 나쁜 것보다 많은가”가 아니다. 첫 번째 쟁점은 좋음의 부재와 나쁨의 부재가 실제로 베너타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비대칭적 가치구조를 가지는가이다. 두 번째 쟁점은 그 비대칭성이 성립한다고 할 때 인간의 통상적인 삶에 존재하게 하지 않음으로써 피할 수 있었던 나쁨이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는가이다. 그리고 세 번째 쟁점은 그러한 크기의 나쁨을 다른 사람에게 발생시키는 행위인 출산이 어떠한 조건에서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가이다. 인간이 자신의 삶을 종합적으로 얼마나 좋게 평가하는가는 이 세 질문 가운데 어느 것에도 직접적인 답을 주지 않는다. 바로 이 점에서 삶의 종합적 질과 폴리아니즘에 대한 베너타의 광범위한 논의는 그의 반출생주의에서 핵심적인 논증이 아니라, 핵심적인 논증이 겨냥하여야 할 대상을 오히려 흐리게 만드는 논의라고 평가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