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널드 드워킨은 이 글에서 사람들, 특히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를 표시하거나,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 표현에 대한 검열의 정당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와 관련된 모든 논지들이 제출되고 논의된 사안이 바로 포르노의 문제인데, 특히 드워킨이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포르노는 자유를 침해한다"는 주장입니다.
이 주장은 두 가지 형태로 제기되는데,
첫번째는 포르노가 '적극적 자유를 침해한다'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포르노가 '소극적 자유도 침해한다'는 주장입니다.특히 이 주장을 개진하는 사람들은 포르노는 (여성들 자신을 포함해서) 사람들이 여성에 대하여 생각하는 바를 부정적으로 바꾸어 놓기 때문에, 정치에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없게 되는 '침묵 효과'가 생긴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소극적 자유에 대한 침해이며, 따라서 포르노에 대한 검열은 자유에 대한 침해가 아니라 오히려 자유의 보호이며, 소극적 자유 내부의 갈등을 올바르게 처리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로널드 드워킨은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이사야 벌린을 인용함으로써 대답하는데, 이를 통해 위와 같은 검열 옹호론자들이 시도하고자 하는 정치적 가치와 개념의 변형이 정당화될 수 없는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안전, 전통 가치, 덕이라는 다른 가치(value)에 기해 자유를 공격하고자 하는 추세가 있었으나 요즘에는 자유 자체의 개념을 변형함으로써 자유를 공격하고자 하는 추세가 많아지고 있고, 실제로 유럽의 경우에는 그러한 추세를 받아들이고 있으므로 이 문제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하여 읽어볼만한 논의라고 생각됩니다.
부록으로서는, 이와 동일한 쟁점 선상에 있는 홀로코스트 부인론자들에 대한 독일 법의 문제(홀로코스트 부인론은 처벌받음)를 다루면서, 자유의 운명을 자유의 적들이 하는 짓에 좌우되게 하여서는 안된다고 당부합니다.
아래의 첨언은 드워킨의 <자유주의적 평등> 강의 등을 들으셨던 분만 읽으시기 바랍니다.
[첨언]
다만,The New York Review of Book에 실렸던 글로서, 드워킨은 대중을 상대로 섦여하는 취지 때문에 포괄적인 자기 철학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 결과 이 쟁점에 맞추어 벌린의 글을 크게 비판하지 않고 인용하는 셈이 되었으나, 드워킨이 이사야 벌린의 생각에 그대로 동조하는 점은 아니라는 점은 주의하여야 합니다. 드워킨 역시 자유와 평등은 분명히 동일한 가치가 아니고, 이러한 내용의 구분은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자유와 평등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그 점수를 달리 매길 수 있는 최선의 답과 최악의 답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관계를 얼마나 최선으로, 정합적으로 상술하느냐에 많은 복잡한 문제들의 판단이 달려 있습니다. 드워킨은 우리가 합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평등관인 "자원의 평등론"으로부터 "필수적인 기준선으로서의 자유"를 뽑아냄으로써 이 관계를 상술하려고 하며, 현실적인 문제들의 경우에는 "희생의 원칙"을 통해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요약번역자는 그 취지와 논증구조에 있어 드워킨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좀 더 사고과정을 명료하게 보여줄수 있도록, 해결에 동원되는 개념장치를 독자적으로 개발하여 설명한 바 있습니다.
통상 행정법학계에서 행정청의 "재량의 일탈남용론, 0으로의 수축론"이 운위됩니다. 행정청은 지역 주민의 건강과 안전을 위하여 여러 조치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재량이 있으나, 그 재량도 일탈, 남용할 수 있는 한계를 가지며, 또한 급박한 환경오염물질의 확산 같은 사태가 발생했을 때 행정청은 그 오염물질의 확산을 즉각 막을 수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하므로, 이 경우 재량은 0으로 수축되고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위법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약번역자는, 이러한 재량수축론의 구조만을 따와, 헌법적 문제에서 가져다 쓰는 해결법을 취한 바 있습니다.
이 해결법에 따르면 '자유'와 '자유의 가치'는 분명히 구별되는 정치적 개념이지만, '0이 되거나 객관적으로 수축된 자유의 가치' 수준에 비례하여 '자유' 역시 0이 되거나 자유의 가치 수준으로 객관적으로 수축되는 경우가 있고, 이러한 "객관적" 수축의 경우에는, 분명히 소극적 자유의 충돌과 유사한 충돌이 일어난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 충돌의 해결은 도덕적으로 자의적인 '권력'이 평등한 상태라면 행사했을 몫의 범위를 확정하여, 소극적 자유를 일견 제한하는 조치가 그 몫을 침해해서 부당한 희생을 시키느냐를 판정함으로써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너의 의무를 묻는다> 제3장에서는 기업이 '혼인을 하면 퇴직한다'와 같은 조항이 들어 있는 근로계약서에 합의하지 않으면 채용하지 않는 사례를 들었습니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기업의 "계약체결의 자유"와, 노동자의 "혼인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기업의 좋은 일자리가 그 지원자들보다 훨씬 적을 때, 그러한 내용의 계약을 금지하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그러한 격차만큼의 사회구성원들에게 혼인의 자유가 객관적으로 수축되게 됩니다. 여기에는 우연적 상황은 존재하지 않으며, 정신적 매개작용도 필요치 않습니다. 필수적인 삶의 영역을 구성하는 노동시장 분야에서, 일정한 수의 기업이 그러한 계약조건을 요구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그만큼 혼인의 자유가 객관적으로 수축되게 됩니다. 이러한 경우 기업의 경영자가 원래 혼인과 관련하여 행사할 수 있는 자유의 범위는 도덕적인 관점에서는 자의적인, 채용 권력이 없었다면, 자기 혼인과 관련해서일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혼인퇴직제와 관련된 계약체결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자유의 제한에 해당하기는 하지만, 부당한 희생을 지우는 것이 아니게 되고, 따라서 "채용권력이 매우 불평등하게 배분되어 있는 현실의 세계real real world"에서는, 강행법규로 그러한 계약체결조항을 무효화하고 금지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입니다.
자유가 0으로 수축되는 경우는 우화적 상황으로 예를 들자면, 깊은 구덩이에 빠져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상황입니다. 이 경우 우연히 이 사람을 발견한 누군가 (국가에 연락해서건 직접이건) 꺼내주지 않고 죽게 내버려두면 그 사람에게 부여된 모든 예술의 자유, 재산행사의 자유, 혼인의 자유 이런 것들이 전부 (실제로 법으로 침해되거나 한 바는 전혀 없는데도) 0의 수준으로 수축됩니다. 실제 상황에서는, 기아로 죽어가는 사회구성원을 방치하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경우 0으로 수축된 사람을 구출하여 그의 자율적 지위를 복원하는 것은 사회구성원들의 최우선임무가 될 것이고 그에 따라 (착한 사마리아인 법처럼, 또는 구출에 필요한 구호장비를 징발함으로써 영업을 일시적으로 못하게 하는 것처럼) 부분적으로 자유를 제한하는 조치가 정당화될 수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 경우에도 공정한 부담의 문제(즉, 칠레 광부들 같은 사람들 구출하는데 장비를 빌려준 사람들에게는 영업손실에 대한 보상이 있어야 함)는 핵심 기준이 될 것입니다.
결국
(1) 자유와 평등, 자유와 자유의 가치,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는 분명히 다른 개념이고, 개념의 게리멘더링을 통해 이를 혼동함으로써 겉보기에만 해피happy한 해결책을 도출할 수는 없으며, (이 글에서 드워킨이 다룬 부분)
(2) 불평등한 가치 수준으로의 객관적 수축 문제를 해결하는 지점에서는, 선택의 문제가 발생하고, 이 선택을 함에 있어 최선의 정합성을 갖는 연결고리를 추구해야 할 필요성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 드워킨이 강조하지 않았지만, 다른 저술에서는 충분히 강조했던 부분)
드워킨의 이글이 다룬 쟁점에 관하여 (2) 부분을 적용하여 보자면, 어떤 발언이나 표현이 정신의 매개작용을 거쳐서 누군가에게 종국적으로 불평등하거나 불리한 환경을 구성하는 것은 이러한 객관적 수축에 해당한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 소극적 자유를 제한하는 검열이나 금지를 정당화하려면 평등과의 연결고리를 구성하는 더 나은 방법을 제시하거나, 아니면 아예 다른 정치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이유를 제시해야 할 것이지, 만연히 이 문제를 적극적 자유를 우선시하거나, 소극적 자유의 개념 자체를 변형시킴으로써 해결할 수는 없다고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