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수십년 살다보면, "인생의 일은 '새옹지마'다"라는 말이 어떤 위력을 갖고 있는지 알게 된다.
이 고사성어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서 유래한다. 새옹은 변방의 늙은이라는 뜻이다. 이 늙은이에게 말이 있었는데, 말이 가출해버렸다. 사람들이 위로하자, 늙은이는 이 일이 어찌 될지 모른다 하였다. 몇달 후 말이 준마를 데리고 돌아왔다. 사람들이 축하하자, 늙은이는 다시 일이 어찌 풀린지 모른다 하였다. 그 준마를 타다 아들의 다리가 부러져 절름발이가 되었다. 사람들이 위로하자, 늙은이는 모른다 하였다. 전쟁이 나서 젊은 장정들이 징집되고 열에 아홉은 죽어나갔으나, 늙은이의 아들은 절름발이여서 징집되지 않고 무사했다.
어렸을 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야기의 교훈이 참으로 웃기는 수작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때는 인생 경험이 일천했으므로, 이야기가 참으로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좋은 일이 나쁜 일이 되었다가, 나쁜 일이 좋은 일이 되었다가, 허, 참,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디있는가. 그렇게 없는 일을 가지고 사람에게 위안을 주려고 하기 때문에 어떤 조작적인 의도가 포함된 것이 아닌가 의심한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세상에는 그런 일 천지다. 아니, 오히려 인생의 본질적 여건 중 하나가 새옹지마가 아닐까 한다.
그러나 고사성어의 이야기가 작위적이라는 느낌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말(horse)의 이야기에는 인간의 선택이 결합되는 부분이 삭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새옹지마의 이야기는 사태의 자동적인 롤러코스터 과정이 아니라, 사태와, 그 사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함께 염두에 두고 재해석해야 한다.
인생은 수많은 자연적인 사태와, 다른 인간의 행위와, 나의 행위가 결합되어 진행되어 나가는 불확실한 과정이다. 우리는 어림짐작으로 어떤 사태가 어떻게 진행되어 나갈 것이라는 예상은 하고 있지만, 그 예상되로 착착 인생이 진행된 경우는 오히려 거의 없다. 중간 중간 생각지도 못할 일이 끼어들고, 그때그때마다 우리가 고민하여 선택한 결과들과 그 이후에 또 벌어진 우발적인 일들의 합이 지금의 상태가 된 것이다.
필자는 몇년 전에 어이없는 실수로 넘어져서 무릎이 부러진 적이 있다. 그리하여 1달 간 병원에 입원해야 했고, 그 뒤에도 재활을 하느라고 많은 고생을 했다.
그런데 무릎이 부러진 일은 사실은 필자가 운동신경이 좋아서 늘 운동신경을 과신하며 다녔기 때문이다. 태권도 2단에, 탁구도 군대 있을 때 대대에서 가장 잘 쳤고, 몸도 날렵해서 항상 토끼처림 오도방정을 떨면서 다녔던 것이다. 바쁠 때에는 계단도 성큼성큼 두 칸씩 내려가고, 지하철 환승역에서는 요리조리 질주하면서 달리곤 했다. 그렇게 달리다가 환승역에 물이 뿌려져 있는 곳에서 커브를 돌며 달리다가 찍 하고 넘어져서 무릎을 쿵 부딪힌 것이다. 운동신경이 좋은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좋은 일에 대한 반응으로 필자는 과신을 하였다. 그리하여 나쁜 일이 생겼다.
실제로 무릎이 부러지고 붙는 간단한 의료 과정에서 무릎이 잘 붙을까, 나이가 들어서 다친 거라서 무릎이 빨리 붙지 않으면 어떨까, 네이버로 골절에 대해 검색을 하면서 송무도 하지 못하고 변론기일을 한 달 뒤로 모조리 미뤄둔 채, 허벅지끝까지 올라오는 깁스를 해서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여름에 1달 동안 목욕도 못한채 가려워서 힘들어하며, 깁스가 너무 압박되어서 상처도 생기고, 하루종일 침대에서 힘들어하는 시간을 거쳤다. 재활 때에는 무릎을 굽히는 게 아프고 열이 나고 해서 걱정이 많이 되었고, 또 목발 떼는 것이 늦어져서 고민도 많이 했다. 다 낫고 나서도 무릎은 아예 다치지 않은 것이랑 같지가 않고, 비가 오면 욱신거리고, 스쿼트 같은 운동도 무거운 무게로는 하지 못하게 되었다. 예전처럼 백미터를 11초에 주파하는 달음박질 같은 것도 이제는 먼 옛날의 얘기가 되었다.
이런 세월을 거치며서 '일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깊이 하게 되었고, 인생의 중요한 지점이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편히 앉아서 밥을 먹고, 변기에도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용변을 볼 수 있고 하는 데 있다는 점을 몸으로 체감하게 되었다. 이것은 인생에 대한 더 깊은 이해에 이르게 하였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그래도 젊은 시절 한 번 다쳤기 때문에 뼈도 그럭저럭 잘 붙었다. 걷는 데는 아무런 무리가 없다. 거기다가 발이 다시 땅에 닿는 감촉을 좋아하게 되어 산책을 예전보다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예전에는 늘 구두를 신고 다녔는데, 이제는 운동화를 신고 다니게 되어서 허리 건강이 더 좋아졌다. 그리고 이제는 늘 조심하기 때문에 앞으로는 인생에서 자기 부주의로 인한 넘어지는 사고는 일어날 확률이 훨씬 줄어들었다. 사고가 나기 전과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이제는 뛰는 데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것은 자동적으로 사태가 전개된 것은 아니다. 어떤 사태에 대한 반응으로서 인간적 숙고가 결합되어 진행된 것이다.
우리가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사태에 대한 이러한 반응력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태는 그것만 잘라서 보면 아주 나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예를 들어 A기업에 입사하려고 했는데 결국 면접에서 떨어져서 입사하지 못했다. 그러나 A기업에 입사해 본적이 없기 때문에 입사를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알지 못한다. 그 기업에서 맡은 일이 너무나 힘들어서 우울증이 왔을 수도 있다. 또는 그 기업에서 지나치게 출장일정을 독촉해서 교통사고가 났을 수도 있다. 또는 A기업보다 월급은 적게 주지만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B기업에 나중에 취업하게 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어려운 시험에 합격했다. 그 때에는 매우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험을 거쳐서 수행하게 되는 직업이 적성에 너무 안맞을 수 있다. 그래서 결국에는 자기 적성에 맞는 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면 그 시험에 합격한 것은 좋은 일도 아니고 나쁜 일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일어난 일 중 하나인 것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우리가 어느 정도의 평가를 부인할 수 없는 사태들, 이를테면 때이른 죽음과 같은 것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을 제외하고 일상의 일들을 살펴볼 때, 우리가 앞으로 전개될 하나하나의 일에 지나치게 노심초사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를테면 운전면허 시험을 앞두고 있는 사람은 시험에 합격하지 않을까봐 많이 긴장하게 된다. 또 시험에 떨어지면 우울해지고 기력이 없어진다. 그러나 운전면허에 쉬운 코스로 한 번에 합격하는 바람에 오히려 장롱 면허의 길을 가게 될 수도 있다. 차인표처럼 거듭된 탈락으로 인해 연습을 많이 하게 되어 궁극엔 운전을 더 잘하게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면, 많은 경우에는, 어떤 시점의 일들은 대체적으로 좋다, 나쁘다고 말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절대적으로 좋다, 절대적으로 큰일났다고 말할 수는 없게 된다. 왜냐하면 후속의 일들 역시 우리의 반성과 숙고, 반응과 결합해서 일어나고 있고, 그러한 반성과 숙고는 어떤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촉발되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새옹지마'의 교훈은 인생의 자동적인 불확실한 전개에 대한 경고만 주는 것이 아니다. 두 가지 추가적인 실천적 시사점이 있다. 하나는 우리가 지금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몰두하며 성실하게 경험하고 수행하되, 그 결과를 절대시하여 오히려 수행을 방해하는 두려움을 만들어내지 말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어떤 사태가 전개되었을 때, 그 사태 전개 이후의 사태 전개에는 또한 우리의 선택과 행위도 개입한다는 점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마지막 하나는, 우리가 어떤 선택을 내리건 그 결과가 실제로 어떻게 될 것인지는 우리에게 속한 일이 아니므로,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 것이 실현되지 아니하였다고 하여 분개로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