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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자료/외국문헌소개

[필로소피바이츠] 스티븐 로가 '악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다.

by 시민교육 2017. 1. 25.

http://philosophybites.com/2007/06/stephen_law_on_.html

 

스티븐 로가 악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나이젤 워버튼: 오늘 우리가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는 악의 문제(Problem of Evil)입니다.

 

스티븐 로(Stephen Law): 이 문제는 두 가지입니다. 문제가 시작되는 출발점은 전능하고 지선하고 그리고 전지한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질문은 왜 악이 존재하는가 라는 문제입니다. 신의 존재는 고통이나 악과는 논리적으로 양립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논리적 문제입니다. 다른 문제는 증거적 문제(evidential problem)입니다. 그런 신이 있다면 세계에는 도대체 왜 그토록 많은 고통과 악이 존재하는 것일까 입니다. 확실히 전능하고 지선한 신은 훨씬 더 적은 고통만 있는 세계를 창조할 능력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지선하다면 바로 그러한 훨씬 더 적은 고통만 있는 세계를 확실히 원했을 것입니다.

 

워버튼: 고통을 악으로 다루는 군요.

 

: 확실히 그것은 악의 하나입니다. 악의 문제를 논의할 때 악의 문제를 고통의 문제라고 다루는 것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쓸데없는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걷어낼 수 있거든요.

 

워버튼: 논리적 문제와 증거적 문제 각각이 매우 흥미로운 문제입니다. 유신론자들에게는 증거적 문제가 정말로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논리적 문제는 다음과 같이 처리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왜 얼마간의 고통을 지선(all-good)한 신이 원했냐고 묻는다면, 그 고통을 능가하는 더 큰 선을 위해 치루어야 하는 대가로서 그런 고통을 만들어놓았다고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더 나은 세계를 위해서는 그 안에 고통이 얼마간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건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동정과 공감을 큰 미덕으로 본다면, 사람들이 이런 미덕을 보일 기회가 있어야 하는데, 어떤 사람들이 고통을 겪지 않는다면 그런 미덕을 행사할 수 없게 되는 겁니다.

 

워버튼: 그렇게 논리적 문제는 처리한다고 칩시다. 그렇지만 증거적 문제는요. 왜 그토록 많은 고통이 있는가?

 

: 맞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논하기 전에 우리는 믿음을 합리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에 관하여 생각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합리성과 진리에 관하여 흔히 혼동에 빠집니다. 저는 합리성이란 정도의 문제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군요. 믿음은 더 합리적일 수도 덜 합리적일 수도 있습니다. 일부 믿음들은 실제로 매우 합리적입니다. 어떤 믿음들은 덜 합리적입니다. 어떤 믿음들은 그리 합리적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비합리적인 것도 아닙니다. 어떤 믿음들은 매우 비합리적입니다. 그러니까 합리성의 척도(scale of reasonableness)가 있어서 그 위에 믿음을 위치지울 수가 있는 거죠. 일본이 존재한다는 저의 믿음을 예로 들어보죠. 저는 일본에 가본적도 없고 직접 제 눈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만, 저는 일본이 존재한다는 압도적인 증거를 가고 있기 때문에 그 믿음을 믿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초밥집에서도 먹어봤고 일본에서 왔다고 하는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이런 모든 것이 일본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게끔 음모를 꾸미는 광범위한 집단이 있어서 생겨났다고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일본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떠한 의문의 여지없이 결정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일본에서 왔다고 하는 사람들은 제가 그들을 만나기 전에 화장을 막 했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일본이 존재한다는 것은 제가 믿는 것이 매우 합리적인 믿음입니다. 다른 믿음들은 그보다 덜 합리적이긴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합리적인 수준에 있습니다. 우주 어느 곳엔가 다른 지능체가 존재하는가? 그것은 믿기에 비합리적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지능을 가진 생명체가 진화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구와 같은 셀 수 없는 수많은 행성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그러한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여하한 큰 증거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합리성의 척도를 따라서 내려오면 우리는 요정이 존재한다는 믿음 같은 것에 도달합니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아직 살아 있고 스윈든에서 잘 살고 있다는 믿음 같은 것, 고블린이 존재한다는 믿음 같은 것에 도달합니다. 이러한 믿음들은 거의 아무런 증거가 없고 그 믿음에 반하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증거들이 오히려 존재하는 그러한 믿음들입니다.

 

워버튼: 그래서 우리는 매우 그럴법한 믿음에서부터 아주 그럴법하지 않는 믿음들에 이르는 척도를 갖고 있군요. 이것이 신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의 문제와 관련해서 어떻게 우리에게 도움을 줍니까.

 

: , 중요한 쟁점은 결정적인 증명(conclusive proof-proof beyond all doubt), 즉 모든 의심을 다 넘어서는 증명이 있느냐 여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런 의심의 여지가 없도록 결정적으로,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도 없고 또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결정적으로 증명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설사 우리가 그것을 어느 쪽으로도 증명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 중 어느 한 믿음을 견지하는 것이 아주 합리적이거나 아주 비합리적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결정적 증명을 가지고 있느냐는 쟁점이 아닌거죠. 이건 합리성의 문제입니다. 어느 쪽으로든 증명하 수 없으니까, 무신론은 유신론과 마찬가지로 신앙적 입장일 뿐이다라고 하면서 신앙의 문제(faith issue)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 효과가 없는 것이죠. 그런 주장은 참이 아니에요. 설사 우리가 어느 쪽으로든 증명은 할 수 없다 할지라도, 요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좋은 근거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아주 좋은 근거들이 있을 수 있죠. 어쨌거나 저는 제 정원 바닥에 요정들이 전혀 살고 있지 않다는 점을 결정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워버튼: 이제 교수님은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합리적인 입장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 제가 지적하고 싶은 일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비철학자들이 꽤나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신의 존재에 대한 인기 있는 논증의 많은 것들을 살펴봅시다. 이를테면 설계에 관한 논증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의 우주와 같은 그러한 우주가 발생하여 안정적인 행성과 생명체가 진화할 확률이 얼마나 되는가? 천문학적으로 그런 상황이 우연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은 그럴법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주 배후에 어떤 지능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 합리적이다라고 받아들입니다. 아마도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논변의 한 문제는 그것이 어떤 더 큰 지능적 존재를 뒷받침하는 논변에 불과하다는 것입니. 어쩌면 그것이 좋은 논변일지도 모릅니. 그렇지 않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논의의 목적을 위해 그렇다고 양보해봅시다. 설사 그것이 좋은 논변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그런 지능을 가진 존재의 인격이나 도덕적 성품에 관하여 어떤 결론을 우리가 끌어낼 수 있습니까? 사실상 전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왜 유대-기독교 신이 바로 그 창조라고 결론을 지어야 합니까. , 왜 전능하고 지선하며 최고로 자애로운 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왜 그런 결론을 끌어냅니까? 우리는 그러한 결론을 도출할 어떠한 이유도 아직 제시받은 바가 없습니다. 우리가 들은 모든 것은, 사태들 배후에 어떤 종류의 지능적 존재가 있다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 이 대중적인 논변은 이 점에서 실패하게 됩니다.

또 다른, 조야한 제1원인 우주론적 논변을 살펴봅시다.왜 어떤 것들이 애초에 존재하는가? 그 모든 것을 존재케 한 한 창조자가 있었음에 틀림없다!’하는 식의 논변 말입니다. 좋습니다. 창조자가 있었다고 하죠. 그러나 왜 우리는 그 창조자가 유대-기독교 신이라고 생각할까요? 이 논변은 전능하고 지선한 신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좋은 논변이 아닙니다. 더 나쁜 것은, 그러한 성격을 가진 창조주가 존재한다는 것에 반대하는 매우 훌륭한 증거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악의 문제입니다.

 

워버튼: 그러나 유신론자들은 악의 문제에 대한 답을 보통 가지고 있습니다. 변신론(theodicy)라고 알려진 이론, 즉 왜 악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느냐에 대한 이론 말입니다.

 

: 그렇죠. 가장 인기 있는 변신론 중 하나는, 자유의지가 고통을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에는 여러 판본이 있는데 가장 간단한 판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신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 신은 우리를 신이 매번 지령해서 그것을 따르는 봉제인형과 같은 존재로 만들지 않았다. 신은 인형을 묶은 은 실을 끊었고 우리를 자유롭게 했기 때문에 인간은 우리 자신의 선택과 결정을 내리며 그러한 선택과 결정에 근거해서 행동한다. 그리고 불행히도 우리는 때때로 나쁜 일을 하는 것은 선택하며, 그래서 전쟁을 시작하고 훔치고 등등의 일을 한다. 고통이 결과한다. 그러나 그 고통은 자유의지가 가지는 선함에 의해 능가된다.'

 

워버튼: 꽤나 납득이 가는 논변으로 보이는데요, 뭐가 문젭니까.

 

: 한 가지 문제는 그것이 고통의 매우 거대한 부분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자연 재해에 의해 생성되는 고통이요. 얼마 전에 파키스탄에서 지진이 발생해서 수만명의 어린아이들이 건물에 깔려 죽었습니다. 그들은 방금 막 학교에 등교한 참이었는데 지진이 나서 그만 붕괴된 건물에 깔리고 말았고, 일부 경우에는 며칠이 걸려 그리고 심지어 몇주가 걸려 고통스럽게 죽어갔죠. 우리가 이러한 일을 전능하고 지선한 신의 존재와 일관된 방식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 또한 인간의 자유 의지와 무언가 관계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해결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진을 과실로라도 발생시킬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보태자면, 이런 방식으로 고통을 겪게끔 되는 것은 인간 존재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행성 지구Planet Earth>라는 BBC 프로그램을 본 사람은, 우리가 이 세계를 많은 유정적 존재들과 공유하고 있는데, 그들의 삶은 절대적으로 끔찍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의 삶이 지금만 그런 것은 아니고, 수억년 동안 계속해서 그래왔다는 것이죠. 25천만년 전에는 대량 멸종 사건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도 혜성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멸종 사건으로 지구의 표면에서 95퍼센트의 종이 쓸려나갔다는 것은 압니다. 그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을 낳았을 것임은 잘 알 수 없습니다. 악의 증거적 문제를 예리하게 제기하기 위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을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능하고 지선한 신이 세계에 얼마간의 고통을 놓아둘 수는 있다. 그러나 그는 세계에 쓸데없고(gratuitous) 불필요한(unnecessary) 고통이라면 한 온스(28.35그램)라도 넣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 상상할 수도 없는 끔찍함의 수억년의 시간을 바라다보면, 그러한 전능하고 지선한 존재가 있다고 분별 있게 계속 주장할 수 없는 것으로 저에게는 보입니다.

 

워버튼: 교수님께서 방금 말씀하신 것은 고통의 수억년의 세월은 선한 신의 존재와는 양립가능하지 않지만 별로 선하지 않은 신과는 양립가능하다는 것이 아닙니까.

 

: 우리는 가설로서 고려해볼 수 있겠죠. 전능하지만 철저히 악한 신이 있다는 가설을요. 주목하게 되는 첫 번째 점은, 선한 신 가설과 함께 가는 신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표준적인 논변 대부분이, 이 악한 신 가설과 함께 가는 신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논변도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설계자가 있다면, 선한 설계자가 아니라 악한 설계자이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 만일 제1원인이 있다면 선한 제1원인이 아니라 악한 제1원인이 아닐 이유가 뭐 있겠는가? 만일 내가 악한 신을 믿는다면, 저는 그 논변들을 기독교의 신의 존재를 믿을 때와 마찬가지로 효과적으로 나의 믿음을 지지하기 위하여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론, 어느 누구도 악한 신의 존재를 믿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죠? 글쎄, 창 밖으로 보세요. 바로 지금 저는 웃어대는 어린아이들이 햇살 아래에서 즐겁게 뛰놀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왜 악한 신이 저런 종류의 일을 허락할까요? 아마도 최고로 악한 존재는 우리 모두를 빨갛게 달궈진 포크로 고문하는 것에 관심이 있지, 무지개나 웃음이나 햇살이나 아이스크림을 생산하는 데는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최고로 권능 있고 최고로 악한 존재의 창조물이라고 보기에는 세계에는 좋은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선의 문제(problem of good)이라고 부를 수 있겠죠. 이건 악의 문제(problem of evil)를 거꾸로 뒤집은 것입니다. 당신이 전능하고 지선(至善)한 선이 존재를 믿는다면, 왜 세상에는 그렇게 나쁜 일들이 많은지를 설명해야 합니다. 만일 전능하고 지악한 신의 존재를 믿는다면 왜 그렇게 좋은 것들이 많은지 설명해야 합니다. 실제로, 제가 보기에는, 그 문제, 즉 왜 악한 신이 사랑스러운 저녁노을을 향유하게 내버려둘까 등을 다루는 몇몇 독창적인 논변을 또한 개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상생활의 무시무시하게 황량하고 추악함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더 예리하게 만들기 위해서! 왜 우리에게 그토록 몸매가 좋고 건강한 젊은 육신을 주었을까? , 그건 단지 십년이나 십오년 정도만이다.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천천히 그리고 불가피하게 사람들의 육신은 퇴락(decay)하고 노쇠(decrepitude)하게 되어 마침내는 추하게 소변을 흘리면서 죽는 것으로 끝이 나서, 짧고 궁극적으로는 무의미한 존재를 끝내게 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무언가 좋은 것을 짧은 시절에만 줘놓고는 천천히 그리고 빼도 박도 못하게 그것을 빼앗아가버리는 것 말고 고통을 극대화시키는 더 나은 방법이 있겠는가? 표준적인 변신론의 대부분은 뒤집어질 수가 있는 것이지요. 이런 식으로 뒤집게 되면, 그 변신론들은 농담(joke)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니,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됩니다: 왜 우리가 표준적인 변신론들을 그렇게 진지하게 취급해야 하는가? 합리성의 척도에서, 저는 악한 신의 존재에 관한 믿음에 아주 낮은 점수를 줍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확히도, 제가 합리성의 척도의 아주 낮은 지점에 선한 신에 대한 믿음을 가져다 놓는 이유입니다.

 

워버튼: 그렇다면 무엇을 믿는 것이 합리적인 걸까요?

 

: 합리성의 척도로 돌아오자면, 저에게는 악한 신 가설이나 선한 신 가설 모두가 그 척도에서 매우 낮은 지점에 있다고 보입니다. 그보다 아주 약간 덜 비합리적인 믿음은, 어떤 종류의 지능적 존재가 있고, 이 지능적 존재는 지선하지도 지악하지도 않다는 믿음입니다. 즉 기분 좋을 때도 기분 나쁠 때도 있는 그런 신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신을 살펴보면, 그 지능적 존재는 지고하게 자비롭지 않다는 것은 꽤나 분명합니다. 그 존재는 그렇기 보다는 대부분의 경우에는 화를 잘 내는 나이가 많은 재수 없는 존재이지만 때로는 기분이 좋을 때도 있는 존재로 보입니다. 세계를 바라본다면, 이러한 기술이 악한 신 가설이나 선한 신 가설보다는 약간 더 잘 들어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솔직하게, 우리는 아마도 어떠한 신에 대한 믿음 없이도 지낼 수 있을 것이고 아마도 그렇게 지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